연애담 : 한정판 (2disc)
이현주 감독, 이상희 외 출연 / 플레인아카이브(Plain Archive) / 2017년 8월
평점 :
품절


 

 

작년에 인디스페이스에서 본 직후 작성한 메모. 올해 초 영상자료원에서 감독, 주연배우 두 분과 함께 GV 행사가 있음을 확인했으나 결국 가지 못했다. 윤가은 감독의 <우리들>과 더불에 작년에 봤던 '독립'영화 중 최고의 수작으로 꼽은 영화. 웬만하면 예전에 쓴 글을 건드리지 않는 편인데 인스타그램에 직접 한 자 한 자 적느라 비문이나 눈 뜨고 봐주기 힘든 부분이 있어 손을 좀 봤다.

1 재작년 여름 어느 시인의 특강을 들었다. 시인이 출강을 나가는 예대에서 수업하는 방식과 같은지 다른지 확인하지 못했지만 예상을 뛰어넘는 특별한 뭔가가 있지는 않았다. 그래도 적어도 문장을 어떤 식으로 쓰라 일차원적으로 가르쳐주는 게 아니라 마음을 어떻게 들여다봐야 하는지, 감각의 사용법과 시의 구성원리가 어떤 식으로 맞물리는지 생각해볼 수 있는 귀한 기회였다. 시인은 얘기들(학생들을 이렇게 부르신다)에게 연애를 권한다고 했다. 연애를 잘하는 사람이 있다는 얘기도 했는데 그 내용이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애인이 자주 바뀌는 사람을 지칭했는지, 서로가 서로를 힘들게 만드는 소모적 관계양상이 아니라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관계를 잘 맺는 사람을 지칭했는지 제3의 다른 무엇인지... 그때는 연애 잘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감조차 안 잡혔는데 이제 좀 알 것 같다. 자기 욕망을 잘 알고 거기에 충실한 사람, 자기랑 잘 맞는 사람을 잘 알아보는 사람, 잘 반하고 잘 거기서 빠져나오는 사람, 뭐 다 틀린 소리일지도 모르겠으나 내 생각은 그렇다. 연애를 잘한다는 것은 무튼 한 사람과 오래오래 잘 사귀는 것보단 다양한 사람과 사귀면서 자기를 알아가고 자기 욕망과 윤리적인 ㅡ 진실된 관계를 맺는 사람일 것 같다.

 

2 연애담에 '공감'을 표하는 댓글이 눈에 띠었다. 연애 유경험자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연애'담'이라는 평가는 그만큼 영화가 연애의 보편적인 특질을 담아내는 데 성공했다는 반증이 아닐 수 없다. 마치 이동진 평론가가 <캐롤>에 있어 루니 마라가 케이트 블란쳇에 끌리는 과정이 물리학적 법칙에 따른 역학적 운동인 것 같다는 인상을 표한 바 있듯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연애에는 뭔가 인간의 주관을 초과하는 구조가 존재하고, 작동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가장 따뜻한 색, 블루> <캐롤> <연애담> 영화들을 한 줄에 놓고 보니 공통점이 드러났다. 개방적이고 능동적이고 화려한 이가 자기 삶에 손써볼 방법 없이 끼어드는 바람에 폭풍 같이 사랑에 빠져 열병을 앓다 이별을 경험하지만 이로 인해 자기 욕망의 주인이 되는 주체화를 통해 <캐롤>, <연애담>에서처럼 자신을 버린 연인과 재회했을 때 이전과는 다른 사랑을 예감하게 만들고, 사랑이 회복되지 않더라도 우주적 충돌collision에 버금가는 만남의 파장으로 인해 인생의 방향 축이 크게 이동하는 결과를 낳는 식이다. 세 영화를 바탕으로 사랑에 빠지는 공식을 추출해볼 수 있지 않을까? 두 사람의 상대적인 차이의 관계에 따라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양상을 공식화한다면, 즉 성격 등 범주를 구분해 혈액형보다 좀 더 과학적인 연애학을 기술할 수 있지 않을까? 소설이 인간학이라면, 무엇보다 과학적인 언어로 완벽하게 설명되기를 거부하는 잉여가 남는 사랑을 다루는 게 예술의 소명이라면 양운덕의 <사랑의 인문학>처럼 문학적 감수성과 미학적 통찰력을 갖춘 글이 뇌과학이나 심리학과 같은 다른 분야보다 더 뛰어난 통찰을 제시할 수 있지 않을까? 사랑이 언제나 패턴을 탈구축하는 사건적인 성격을 띠더라도 사랑을 더 잘하기 위해, 사랑 이후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우리는 모두 시인이 되어야 하고, 철학자가 되어야 한다. - 이럴 때 <사랑의 단상>의 구절을 인용해주면 딱 좋겠지만 '나는 그 사람이 아프다' 말고 아는 게 없으니... ㅠㅠ - (한 가지 재밌는 점은 세 영화 모두 레즈비언 퀴어 ... )     

디테일한 부분에서 차이는 있으나 전반적으로 세 영화의 관계적 양상-역학과 내가 경험했던 연애가 닮았다는 인상을 받았다. 나는 아델-테레즈(루니 마라)-윤주(이상희). 그중에서도 학교 열심히 다니고, 친구들과의 인간관계도 겉으로 보기에 원만해 보이지만 어딘가 결정적인 하나가 빠져 무료하고 무미건조한 일상을 보내던 윤주. 나 또한 윤주처럼 관계에서 노력하는 타입이었다. 노력하면 될 거라는 순박한 믿음을 가진 미숙한 노동자. 하지만 연애에서 진심을 더 많이 보여준 사람이 더 다친다는 말이 있듯 연애에 있어 성실한 노동은 사랑의 수확으로 이어지지 않는 편이다. 사랑의 신이기도 한 아폴론의 열렬한 구애에 결국 월계수 나무가 되어버리는 선택을 한 다프네의 비극적인 일화처럼 노동과 교환의 원리를 초과하는 소비와 탕진이 지배하는 에로티즘의 세계에서 힘을 써야 할 때 쓸 줄 알고, 빼야 할 때 뺄 줄 아는 기술자나 다른 방식으로 힘을 다루는 예술가들이 우세종인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물론 성실한 노동자들끼리 만나거나 자신에게 충실하고 확고하게 감정을 주는 이에게 끌리는 사람이 있겠지만 연애에 있어 권력 차이는 사랑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면서 사랑의 유지를 위협하는 요소인 것처럼 보인다.

아마 <나는 매번 시 쓰기가 재미 있다>일 것으로 기억되는데 박준 시인은 마음들 사이 편차-권력 차이의 양상에 따라 달라지는 관계를 소묘한 바 있는데 범박하게 말하면 처음에 감정의 편차가 존재하더라도 '썸'타는 과정에서 혹은 연애 초기에 균형이 어느 정도 맞아들어가야 행복하고 건강한 연애로 진입할 수 있는데 더 좋아하는 쪽과 덜 좋아하는 쪽의 불균형적 구도가 역전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지속되면 서로 힘들어지는 소모적인 관계로 빠지지 않을 수 없다는 얘기였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 기적은 잘 일어나지 않는다.

특히 노력을 하면 될 거라 믿고 열심히 사랑을 퍼붓는 쪽을 바라보는 이의 눈에 맺히는 건 대중문화에서 재현되는 순애보적 사랑의 투사라기보다 사랑을 구걸하는, 그래서 너무나도 나약한 존재로 비치는 걸인에 가까울지 모른다. 조금이라도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면 상대에게 이별을 먼저 고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거짓되고 위선적인 태도로 상대방의 감정을 착취하게 되겠지...   

윤주는 자기 마음 전부를 지수에게 쏟으려 하지만 지수는 자기 중심을 잃지 않고 연애감정에 적절하게 반응한다. 지수가 감정을 장악하고 컨트롤하며 감정의 격류 위에서 서핑을 하는 격이라면 윤주는 주체할 수 없는 감정에 휩쓸려 아이처럼 지수의 사랑을 갈구한다. 지수에게 윤주는 일상의 중요한 일부분일 뿐이지만 윤주에게 지수는 전부다. 비대칭적 관계는 더 사랑하는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고, 덜 사랑하는 사람을 피곤하게 만든다. 지수는 윤주가 채워줘야 할 마음의 몫까지 자기 것을 쏟아 부으며 힘들어하고, 윤주는 내려가지 않는 시소 위에서 권태를 느낀다. 연애 초기의 좋기만 한 순간이 지나가자 서로의 차이가 수면으로 부상하고 더 사랑하는 이는 고통이 자기의 몫임을 확인하게 된다. 차이의 가시화 자체는 관계의 필수적인 과정이다. 문제는 관계의 비대칭성이 적당한 수준일 때 이해와 타협을 통한 차이의 평화적 조정이 가능하지, 비대칭성이 심하면 차이는 갈등의 근본 원인이 되고, 다툼이나 한쪽의 희생이 강요된다. 이 비정한 파워 게임에서 역전의 순간, 밀당의 변증법적 운동, 상호배려가 수반되지 않으면 사랑은 점점 파괴적으로 바뀐다. 타인을 집착하고 소유하려 들거나 자기 자신을 파괴시키거나. 지수가 만취해 집에 들어온 다음날 윤주는 지수가 전날의 일을 진솔하게 말하고 있지 않음을 직감하지만 추궁하지 않는다. 그렇게 믿고 사랑에 자신의 전부를 내던졌지만 그럴수록 식어가는 지수의 마음에 상처받으며 만신창이가 된다.

 난 그런 생각을 했다. 이렇게 태어나서 이렇게 살아온 윤주가 저렇게 태어나서 저렇게 살아온 지수와 사랑하면 다르게 사랑할순 없었을 거라고. 첫사랑이 비슷한 궤적을 그리며 흑역사로 생명을 마감하듯 지수의 마음은 별다른 사건 없이 식고, 윤주는 다시 아이였던 때로 돌아간듯 엉엉 울고. 지수에게 윤주는 연애상대 중 하나, 자신의 '잃어버린 반쪽'인지 아닌지 확인해볼 대상 혹은 외로움을 달래고 즐거움을 주는 상대였지만 윤주에게 지수는 대문자 애인, 자신의 사랑을 총동원해 전면전을 치뤄야 하는 대상이었다. 정신분석학에서 남자는 사랑하는 자신을 사랑하고 여자는 사랑받는 것을 사랑한다는 말이 있는데 윤주와 지수의 경우에도 어느 정도 들어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윤주와 지수가 레즈비언 커플이란 점도 굉장히 중요하지만 내가 마음이 끌리는 부분은 '연알못'과 '연잘알'의 연애, 그리고 그 연애의 수많은 내용을 특정한 의도에 따라 취사선택하고 배열해 '연애담'으로 서사화하는 방식이었다. 윤주는 자기의 일상으로 돌아오고 처음 만났을 때처럼 불쑥 등장한 윤주를 앞에 두고 고뇌한다. 배우 이상희는 표정으로 언어화될 수 없는 복잡하고 격정적인 내면을 그려낸다. 느리지만 진득하고 우직하게 오래 머무르는 내향적 인간... 미련하지만 차분하고 깊은 사람. 영화 마지막 옥상에서 담배를 피우며 자기만의 생각을 차분히 정리하는 윤주를 보며 그녀가 앞으로 더 좋은 사랑을 하고 더 좋은 연인이 될 거라 믿음을 가질 수 있었다. 지수처럼 감정을 잘 표현하고 많은 사람을 유혹하는 팜므파탈은 아니지만 자기만의 방식으로 사랑을 적확하게 써내려갈 것 같았다

3

헤어지자는 통보를 받고 쓰기 시작했다. 그것 말고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윤주가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를 만나 술을 마셨듯 나 또한 친구들과 통화를 하며 마음을 달래고자 했다. 상황을 납득하고자 했다. 우리가 주고 받았던 모든 말과 행동, 기호들에 대한 해석을 끝마치고 나면 헤어지자라는 결론이 필연적으로 도출될 수밖에 없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자꾸 올라왔다. 단념하는 게 맞는 건지 의심하는 목소리가. 어떻게든 매달려서 붙잡아야 하는 게 아닌지. 단념할 때 하더라도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해봐야 하는 게 맞는 게 아닌지, 이별통보의 인풋에 단념이란 아웃풋이 별다른 중간과정 없이 바로 산출되는 게 맞는 건지... 내가 보기에 애매모호한 말들을 상대방에게 해석해달라고 부탁하고, 네 생각은 네 한정적인 경험세계에 근거한 주관적이고 견해에 불과하다고 윽박 지르며 비난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친구가 풀어준 문제의 풀이과정을 되뇌이며 ... 친구의 시각에 입각해 카톡 대화 내보내기를 통해 얻은 텍스트들을 다시 읽고, 기억을 소환해서 재판에 세우고, 어찌 되었든 그녀가 날 사랑하긴 했었는지는 여부는 차치하고, 현재 날 사랑하지 않는다는 정보를 사실로 구성하고, 지금까지 숱하게 해왔던 것처럼 이 또한 하나의 사실로서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하고. 그런 노력들을 수행하면서 이런 식으로 이별에 대처하는 게 맞는지 의심하고, 슬픈 영화를 보면서 펑펑 울어야 하는지, 끝없이 찌질해지는 속마음을 토하듯 후련하게 까뒤집어야 하는지, 새로운 사람을 만나 사람으로 사람을 잊어야 하는지, 자해나 자살 같은 생각이 병리적인 낭만성의 소산이라는 판단을 거부하고 그대로 실천에 옮겨야 하는지, 나만큼 아프게끔 상처를 줘야 하는지... 썼다. 적었다. 그러면 쓰는 데만 집중할 수 있었으니까. 쓰는 것 말고 다른 것을 하지 않을 수 있었으니까. 씀으로써 내가 노트북 화면에 글자들이 적히는 것 이외에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으니까. 누구도 더 이상 다치지 않고, 누구에게도 더 이상 마음을 내비치지 않아도 되니까. 그냥 동굴에서 상처를 핥는 짐승처럼 근신하면 되니까. 내가 소설이나 시를 쓰지 않았던 건 산문으로도 커버가 되었기 때문일까. 결국은 납득을 했기 때문일까, 납득이 되었기 때문일까.

그때 쓴 글을 다시 읽지 않았다. 읽기 위해 쓴 글이 아니니까. 단지 조금이나마 고통을 덜기 위해, 고통을 멈추고 지연시키기 위해 쓴 글이었으니까 제 역할을 다해 명이 끊어진 셈이었다.

헤어지자는 통보를 받은 이후 한 달이 지나 만남을 가졌고, 대화를 나눴고, 헤어졌다. 이별이 모양새를 갖추고 완성된 기분이었다. 만나줘서 고마웠다. 나 또한 이별에 참여할 수 있게 해줘서.   ​

​권희철의 낭독으로 <다시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을 몇 번 들었다.

<이별의 능력>을 몇 번 읽는 동안 누가 낭독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몇 번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연애담>을 보며 이별의 거푸집을 만들었던 것 같다. 사실 거기서 논리적인 완성은 끝났지만 '실감'이 필요했기에 '마지막'이란 기치를 내걸고 만남을 가졌다.

돈 키호테의 식탁 방문기. 단체손님을 제외하고 첫 손님이라 해서 엄청난 서비스를 받았다. 소주를 마시면 홍상수 영화 속 찌질남을 재현할 것 같아 두려웠는데 식당의 품격이 찌질함을 봉인시킨 것만 같다. 다행이고 다행이다.(2016/12/16)  

릿터 3호를 받아서 읽기 시작했다. 랜선 ㅡ 자아. 블로그를 열심히 하던 시절 친구와 나누던 얘기에서 이미 나온 개념이었다. 망각될 권리, 당신의 그림자는 월요일이 제기 ㅡ 환기한 데이터화된 기억의 무한복제 가능성... 리벤지 포르노가 끊임없이 웹하드에 올라오고, 피해 당사자가 업체에 문의해 삭제를 요청해야 하는 상황의 반복, 악무한. 술 먹고 트위터에 쓴 글이 계속 올라오고 '실수' 라는 개념 자체가 불가능해지는 상황, 실수가 미디어 인민재판을 통해 세속적 차원에서 죄로 격상되는 상황. 글자 하나 허투루 쓰면 안 된다는 자의식이 강해서 그동안 sns에 긴 글 쓰기를 주저했다. 줄창 일기와 편지만 쓰다가 지치고 심심할 무렵 여기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아마 최종적으로 블로그에 정착하겠지만)

예전에 좋아했던 친구와 1년 4개월 만에 만났을 때 내가 지금 만나고 있는 친구에게 니 얘기를 많이 했다고 말했다. 그녀는 그 친구에게 내 얘기를 왜 많이 하느냐고 핀잔을 줬다. 나는 '선'을 지켜가며 얘기했고, 공동의 기억이다 보니 내 얘기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네가 포함되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고 해명했다. 그녀는 수긍하는 눈치였다. 선을 잘 지키는 게 중요하다. 여기에 실패해 테러에 가까운 폭로나 범죄행위로 이어지는 사례가 왕왕 벌어지고 있다. 미디어가 메시지라는 매클루언의 고전적 테제를 바탕으로 생각을 펼쳐나가고 싶다. 커뮤니케이션만이 커뮤니케이션한다 는 루만의 체계이론도 흥미로운 아이디어 박스이다. 오늘날 미디어 플랫폼, 거기에 따른 글쓰기 및 정보의 유통방식, 시공간의 재구성, 이미지와 영상언어의 패권적 지위... 연애담을 보고 든 생각은 연애를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였으나 역시 그건 힘들 것 같아 연애를 하게 된다면 잘하자 로 바뀌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뭐가 있을까? 좀 더 자신감 있는 태도를 갖는 것? 낯선 만남을 두려워하지 말고 좀 더 적극적으로 짝을 찾아 나설 것? 내 욕망 ㅡ 무의식에 대해 더 이해하기 위해 정신분석학을 공부하는 것? 미용과 운동에 신경 쓰는 것? 그런 생각이 많이 들었다. 시뮬레이션을 통해 연습할 수 있었다면 좀 더 잘할 수 있었을 텐데 이렇게 기회가 희소하게 찾아오고 실패했을 때 리스크가 어마어마한 비경제적인 게 연애 ㅡ 사랑 말고 또 있을까. 직장인의 연애와 대학생의 연애는 연륜이나 경험을 배제하고 시스템상 다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이라는 사치, 사치롭기에 자신의 밑바닥이 드러나고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혁명적인 에너지를 품고 있는 청춘의 사랑. 연애하는 동안 '그녀her'를 두 번째로 봤었는데 역시 좋은 영화였다. 포스트휴먼 시대의 사랑, '에로스의 종말', 부정과 타자성이 빈사상태에 이른 안전한 만족과 쾌락의 교환이 사랑으로 인식되는 시대의 사랑. 개인적으로 영화 그녀가 퀴어 버전으로 나왔다면 또 어땠을까 싶다. 암튼 개인적으로 연애담이 가장 따뜻한 색, 블루 보다 좋았다. 좀 더 담담하게 감정을 꼭꼭 담아놓은 영화. 근래 본 베드신 중에 거의 최고 수준의 에로티시즘이 넘실대는 영화. 감독의 차기작과 윤주 역의 이상희 씨의 다음 작품을 찾아볼 것이다... (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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