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김훈, 『칼의 노래』, 생각의나무, 2001.

오늘, 이 섬에서 기적이 일어났다.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 송병선 옮김, 『모렐의 발명』, 민음사, 2008.

진짜 기적은 우리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들은 벌로 내게 글짓기를 시켰다.
지그프리트 렌츠, 정서웅 옮김, 『독일어 시간』, 민음사, 2000.

글을 지어 쓰라는 요구는 바로 그 몽상에 질서를 부여하라는 요구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몽상을 죽여 없애라는 요구. 아니면 적어도 몽상이 비누 거품 같은 것임을 인정하라는 요구.

"완벽한 문장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아. 완벽한 절망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무라카미 하루키, 윤성원 옮김,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문학사상사, 2003.

형용사 ‘완벽하다’와 ‘순수하다’가 수식하는 것들은 모두 실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완벽한 문장이나 완벽한 절망은 물론 완벽한 삶이며 완벽한 죽음, 완벽한 행복, 완벽한 불행, 완벽한 거짓말, 완벽한 사랑, 완벽한 논리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같은 의미에서 순수한 사랑이며 순수한 마음, 순수한 몸, 순수한 의도 따위도 허상에 불과하다. 순수조차 순수하지 않은데 다른 걸 말해서 뭐하랴.

가끔은 ‘완벽하다’나 ‘순수하다’ 같은 형용사가 언어의 마개 역할을 하는 건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언어라는 수조 밖으로 의미들이 새 나가지 않도록 언어 스스로 만든 마개

그러니까 금요일 밤 시간대의 전철이란 으레 그렇다.
구병모, 『파과』, 자음과모음, 2013.

나는 오랫동안 병을 앓았다.
폴 오스터, 황보석 옮김, 『신탁의 밤』, 열린책들, 2004.

나는 병든 인간이다…….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또예프스끼, 계동준 옮김, 『지하로부터의 수기』, 열린책들, 2010.

눈이 내리던 날이었다.
요 네스뵈, 노진선 옮김, 『스노우맨』, 비채, 2012.

눈을 맞으며 그녀는 서 있었다.
박민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예담, 2009.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 유숙자 옮김, 『설국』, 민음사, 2002.

폭설이 내리는 날이었다.
서하진, 『나나』, 현대문학, 2011.

그 여자 이야기를 쓰려 한다.
신경숙, 『깊은 슬픔』, 문학동네, 1994.

쯧, 나는 그 여자를 알고 있다.
토니 모리슨, 김선형 옮김, 『재즈』, 들녘, 2001.

죽은 다음 모든 게 고요해지면 내 삶과 말, 행동, 그리고 내가 취했던 태도와 그 시답잖던 사랑의 의미까지 처음부터 생각해 볼 것이다.
옌롄커, 문현선 옮김, 『물처럼 단단하게』, 자음과모음, 2013.

숲에서 그림자를 보았다.
황정은, 『백의 그림자』, 민음사, 2010.

남자는 깜깜한 숲에서 잠을 깼다.
코맥 매카시, 정영목 옮김, 『로드』, 문학동네, 2008.

뻔뻔스러운 여자의 쌓이고 쌓인 한이 이 울창한 숲에 그득하다.
마루야마 겐지, 김난주 옮김, 『천년 동안에』, 문학동네, 1999.

전략.
미야모토 테루, 송태욱 옮김, 『금수』錦繡, 바다출판사, 2016.

복잡한 절차는 생략하고 바로 핵심으로 들어가겠다.
로맹 가리, 이주희 옮김, 『그로칼랭』, 문학동네, 2010.

바다는, 크레파스보다 진한,
푸르고 육중한 비늘을 무겁게 뒤채면서, 숨을 쉰다.
최인훈, 『광장』, 문학과지성사, 1994(3판).

그때였다.
이석원, 『실내인간』, 달, 2013.

그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는 것을 몰랐다.
오르한 파묵, 이난아 옮김, 『순수박물관』, 민음사, 2010.

서른일곱 살이던 그때,
나는 보잉 747기 좌석에
앉아 있었다.
무라카미 하루키, 유유정 옮김, 『상실의 시대』, 문학사상사, 1994(개정판).

굳이 구체적으로 묘사할 필요가 없는 부분에 극단적인 구체성을 부여함으로써 풍경까지도 캐릭터를 갖는 인물처럼 만드는 문장 말이다.

나는 살아 있다.
최지월, 『상실의 시간들』, 한겨레출판, 2014.

나는 지금 우물 바닥에
시체로 누워 있다.
오르한 파묵, 『내 이름은 빨강』, 이난아 옮김, 민음사, 2004.

자기가 지금 시체로 누워 있다고 쓸 수 있는 서술자는 누구일까. 살아 있는 사람은 아니겠지. 그렇다면 거꾸로 "나는 살아 있다"고 쓸 만한 서술자는 누구일까. 최소한 죽은 사람은 아니리라.

우리가 하고자 하는 한스 카스토르프의 이야기는 그를 위한 것이 아니라(그가 눈길을 끄는 젊은이이기는 하지만 평범한 젊은이란 사실을 독자들이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대단히 들려줄 만한 가치가 있어 보이는 이야기 그 자체를 위한 것이다(그렇지만 이 이야기가 그의 이야기이며, 누구에게나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를 위해 마음에 새겨 두는 것이 필요하다).
토마스 만, 홍성광 옮김, 『마의 산』, 을유문화사, 2008.

토마스 만의 소설을 읽다 보면 지적 과시처럼 보이는 긴 논쟁이나 설명과 마주할 때가 많은데, 저 첫 문장처럼 그 길고 긴 ‘부연 설명’을 걷어 내면, 대개는 탁월한 재능을 가진 이야기꾼이 들려줄 법한 특출한 이야기와 맞닥뜨리게 된다.

게다가 그 특출한 이야기는 아주 놀라운 방식으로 짜여 있어, 가령 문체를 느끼면서 읽어야 한다는 플로베르의 소설을 번역문으로 읽을 때의 지루함 같은 것은 끼어들 여지가 없는, 아주 흥미진진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새뮤얼 스페이드의 턱은 길고 앙상한 V 모양의 주걱턱이다.
대실 해밋, 김우열 옮김, 『몰타의 매』, 황금가지, 2012.

지금보다 어리고 민감하던 시절 아버지가 충고를 한마디 했는데 아직도 그 말이 기억난다.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 김영하 옮김, 『위대한 개츠비』, 문학동네, 2009.

정말 이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아마도 가장 먼저 내가 어디에서 태어났는지, 끔찍했던 어린 시절이 어땠는지, 우리 부모님이 무슨 직업을 가지고 있는지, 내가 태어나기 전에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와 같은 데이비드 코퍼필드 식의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이야기들에 대해서 알고 싶을 것이다.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공경희 옮김, 『호밀밭의 파수꾼』, 민음사, 2001.

별이 쓸리는 밤이었다.
황순원, 『카인의 후예』, 문학과지성사, 2006.

나는 쥐를 보고 있다.
은희경, 『새의 선물』, 문학동네, 1996.

고래였다.
성석제, 『단 한 번의 연애』, 휴먼앤북스, 2012.

내가 잉태되던 순간에, 아버지든 어머니든, 아니 사실상 이 일에는 두 분이 똑같이 책임이 있으니, 두 분 모두 그때 하시던 일에 제대로 마음을 쓰셨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다.
로렌스 스턴, 김정희 옮김, 『신사 트리스트럼 섄디의 인생과 생각 이야기』, 을유문화사, 2012.

몇 년이 지나 총살을 당하게 된 순간,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은 오래전 어느 오후에 아버지를 따라 얼음을 찾아 나섰던 일이 생각났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안정효 옮김, 『백년 동안의 고독』, 문학사상사, 2010.

지구가 정지하고 영원함이 호흡을 멈추는 한순간.
빌 S. 밸린저, 이다혜 옮김, 『기나긴 순간』, 북스피어, 2008.

그러니 따지고 보면 매번 무수히 반복되는 순간이 늘 "지구가 정지하고 영원함이 호흡을 멈추는 한순간"이 되는 셈이다. 이런 걸 흔하고 진부한 것이 갖는 힘이라고 해야 하려나.

우리는 대도시에서 왔다.
아고타 크리스토프, 용경식 옮김,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까치, 2014.

악惡은 디테일에 있다지만, 공포는 오히려 구체성이 지워질 때 극에 달한다

머릿속에 구체적으로 그릴 것도 없고 딱히 기억할 것도 없는 공포야말로 최악의 공포이리라. 세상 곳곳에 미만하고 편재하여 도무지 도망가 피할 곳이 없는 공포일 테니까.

나에게도 비밀이 생겼다.
조경란, 『우리는 만난 적이 있다』, 문학과지성사, 2001.

여자 형제들은 서로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든지 혹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든지 둘 중 하나다.
루이제 린저, 박찬일 옮김, 『삶의 한가운데』, 민음사,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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