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바스에 대해 화가 나는 것은 그가 신앙의 가장 강력한 사실들을 가지고 십자수를 놓아 벽에 걸어둘 만한 구호로 만들어버렸다는 것이다.

엘리바스에게 기도의 능력은 협상 카드였고, 하나님과의 화목은 협상 장치였다. 그에게는 신앙 대신 종교적 기계만이 있었다.

"우리의 경험이 우리의 신학적 우주를 붕괴시킬 때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엘리바스의 대답은 우리의 경험을 부인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의 경건의 체계는 신적 섭리의 조건을 조작하도록 허용했고, 경건의 공식에 도전하는 경험은 무엇이든 위협 요소로 신속하게 걸러내야 했다.

엘리바스는 과거의 길을 따라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표지판을 그리느라 분주한 나머지, 새로운 고속도로가 뚫렸으며 이전 도로는 사용이 금지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과거에 욥은 정통성의 모델이라 할 수 있었다. 그는 누구 못지않게 잠언을 쏟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무고한 고통이라는 욥의 경험은 그의 정통성이 예측할 수 없었던 상황, 그의 세계관이 포용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욥은 한때 "잠언" 게임에서 연승을 거두던 자였다. 그러나 부당한 고통은 정통성의 카드 가운데 전혀 예상치 못한 조커였다.

욥은 이 카드를 뽑았고 더 이상 자신의 카드를 공개할 수 없었다. 규칙은 변했고 게임도 변했다.

이 드라마를 통해 점점 깨닫게 되는 바는, 욥과 친구들 간의 차이가 욥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데 있다는 사실이다.

욥의 친구들은 종교적 체계를 사랑하지만 욥은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나님의 연설은 합리적인 담론이 아니다. 그분의 말은 시적이고 이상주의적인 연설로서, 모든 요약과 설명으로는 파악되지 않는 경험적 만남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고통 받는 욥의 입장에서 볼 때 하나님은 불공정했다. 이제 폭풍 속에서 음성이 들리는데, 이 음성은 욥이 가진 질서와 규칙의 체계가 애당초 하나님의 것이 아니었다고 이야기한다.

욥의 것은 질서에 대한 인간의 계획으로 땅에서 하늘로 투영된 질서일 뿐이다.

부당하다고 울부짖는 욥의 울음은 본질적으로 도덕적 질서라는 인간의 개념을 하나님에게 강제하려는 시도였다.

신약성경은 고통을 착각이라고, 죽음을 친구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예수님의 삶 자체가 심한 통곡과 눈물로 점철된 고통이었으며, 죽음이란 놈은 매우 실제적이고 강력한 마지막 원수였다.

신약성경은 인간의 삶 속에 역사하는 고통스러운 부정(no)의 존재를 부인하지 않는다.

또한 이 부정을 그것과 길항하는 긍정(yes)으로 상쇄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고려했을 때 실제로는 인간의 고통이 그다지 끔찍하지 않다는 이야기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대신 신약성경은 욥기와 마찬가지로 이런 부정의 불가피한 실재를 강조한 후,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제공한다.

이 죽음과 부활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경험 속에 있는 부정과 긍정 사이의 애매모호한 상호 작용이, 만물 안에서 모든 것 되시는 그리스도의 긍정으로 흡수되었다는 약속이 된다.

욥기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떠나서는 어떤 방법으로든 신정론적 질문에 대해 타당한 해결을 찾지 못하리라고 경고하고 있다.

우리는 스스로 마지노선을 정해놓고 "하나님, 이 고통의 문제를 제 머릿속에서 이해하게 되면, 이 선을 넘어 당신에게로 가겠습니다"라거나 "당신께서 저의 정의관을 존중해주신다면 저도 당신을 신뢰하겠습니다"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다. 우리는 이 선을 넘어 기도와 믿음으로 무릎 꿇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는 한에서만 우리는 무엇인가를 볼 수 있다.

욥기의 약속에 따르면 이 빛 안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정말 많다. 또한 하나님의 임재 안에 존재하는 이 경외감이야말로 진실로 지혜의 근본이다.

안셀무스의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이란, 신자가 문제와 질문을 탐험한다는 것이 야간 망원경을 통해 보는 것과 비슷해서, 신앙이 우리를 도와서 진실로 존재하지만 신앙 없이는 놓치고 마는 무엇을 좀더 잘 보도록 한다는 의미다.

그리스도인은 신정론의 질문 같은 인생의 심오한 문제에 대해 논리와 정직성, 냉철한 사고로 접근하는 동시에, 기도와 찬송과 예배와 섬김에 참여함을 통해서도 그 신비를 탐구한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나는 고통과 악에 대해 항의의 목소리를 내는 행위는 단순히 분노를 터뜨리는 것 이상이다. 이 행위는 아주 오래되고 심오한 기도의 형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항소에 참여하는 것이다. - P200

기독교 신정론의 첫 번째 반응이 항의라면, 좋은 소식의 첫 번째 말씀은 하나님이 이 악을 의도하지 않으셨고 이 악의 원인도 아니시며 이 악이 하나님으로부터, 심지어 그의 왼손으로부터도 오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 P204

하나님은 악을 뿌리 뽑으실 수 없는데 이것은 그분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하나님이 악을 뿌리 뽑지 못하시는 것은, 이런 방식으로 세상과 교전을 벌이는 일이 다른 종류의 하나님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 P220

이런 방식, 곧 우리가 하나님이 그렇게 하셔야 된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능력을 사용하는 신은, 하나님 자신의 인격에 신실하지도 않으며 또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는 하나님도 아니다. - P220

하나님은 진정으로 전능하신 분이지만 하나님의 이 능력은 다듬어지지 않은 인간의 능력과 같지 않고, 오히려 연약함의 형태를 취하는 사랑인 동시에 십자가 위에서 가장 극적으로 표현된 능력이다. - P222

우리는 하나님이 큰 칼을 휘드르며 창조 세계에 뛰어들어 악을 쳐내시기를 원한다고 믿는다. 이런 일은 하나님의 능력의 범위를 벗어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 능력을 사용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인격의 범위를 벗어난다. - P222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은 영원에서 시간 속으로, 미래에서 현재와 과거로 들어오셔서 외견상 악이 지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것, 심지어 우리 기억과도 전쟁을 벌이신다. - P235

악에 속한 모든 것, 마지막 승리에 대한 헛되고 거짓된 주장, 현재에서 야기된 아픔, 우리 기억과 역사를 장악한 악은 모두 불살라질 것이다. 악은 승리할 수 없다. 이 악의 진짜 정체가 드러날 것인데, 바로 그것은 "무"(nothingness)다. - P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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