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냥한 폭력들 - 미투 이후의 한국, 끝나지 않은 피해와 가해의 투쟁기
이은의 지음 / 동아시아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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펼치기 전의 두려움보다 읽기가 어렵지 않았다. 용기를 낸 사람들, 생존한 이들, 도움을 준 이들, 손을 잡은 이들, 무엇보다 이들의 바로 옆에서 변론한 저자가 있는 풍경이기 때문이다. 저자 이은의 변호사는 성폭력 사건 385개를 맡아 8년 간 변호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 사회의 성폭력의 최전선, 현실의 면면을 기록했다.

 

지옥처럼 어둡고 절망적이고 무겁고 괴롭지 않았다. 단지 대략 안다고 생각한 모르는 내용들이 많아 정신 차리고 공부했다. 오늘의 읽기는 현실 도피가 아니라 현실 이해를 위한 시간이라 다행이다.

 

“왜 가해자와 단둘이 술을 마셨나요?”

“왜 문을 열고 도망치지 못했나요?”

“왜 좀 더 저항하지 못했나요?”

“왜 동맥대신 정맥을 그었나요?”

 

“1심 재판부는 피해자의 진술이 “가해자의 강제성을 입증하기에는 부족하다”라며 가해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대체 언제까지 피해자가 1) 성범죄를 당하지 않을 주의 의무를 다했음을 2) 공포 속에서도 최선의 저항을 하였음을 3) 피해를 당한 후에는 피해자답게 행동했음을 소명해야 하는 걸까.”(번호는 임의로 첨가)

 

‘주변인’으로서 우리는 상식에 반하는 법 적용 - 판결 -을 만난다. 종종 법은 더 나아가 가해자의 편에 설 때도 있다. 그 과정에서 피해자를 향한 낙인은 가해자가 받을 처벌보다 무거울 때도 있다. 그리고 가해자들 혹은 조직범죄자들은 매일 진화하고 있다.

 

내용 구성은 2016년부터 2021년까지 여러 매체에 기고한 칼럼을 다시 정리한 것이다. 우리가 떠올릴 수 있는 대표적 성범죄 이외의 가정 폭력, 친족간 성폭력, 데이트 폭력, 사내 성폭력, 낙태죄, 공공기관 내 성추행, 성매매 등 여러 사건 사례와 피해자들을 향한 조언들을 담았다.

 

우선 ‘법’이란 아주 오랜 시간 기득권의 입장에서 운용되어 왔다는 것, 한국 사회의 법과 제도는 성폭력 피해자의 입장에 서서 시행된 경험이 없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래야 성폭력 피해 신고를 한 이들이, 무고, 명예훼손, 위증으로 고소당해 변호사를 찾아오는 현실을 숨 쉬며 이해할 수 있다. 미투 이후 세상이 많이 바뀌었을까? 놀랍게도 사회나 제도는 바뀐 것이 없고 성범죄 가해자를 위한 대책 수단들은 정교해졌다.

 

그러니 범죄 성립이 되지 못한 범죄를 신고하지 않았다고, 손쉽게 비난의 화살을 쏘면 안 된다. 신고하면 가해자에게 고소당하고, 제도와 법은 당신에게 죽고 싶을 만큼 확인을 요구한다. 본인 잘못은 없었냐고. 혹은 피해가 발생한 것이 맞냐고.

 

한국 사회는 ‘가해자’의 처지를 함께 고민하는 사회이다. 가해자의 심신 건강을 우려한 예산도 집행되었다는 기록을 다른 책에서 근래에 읽었다. 고객이 간절한 개업변호사들은 최선을 다해 가해자들을 모셔, 법망을 최대한 피하게 해주겠다고 무수히 손을 뻗는다. 많은 판사는 성인지감수성이 없다.

 

좀 다른 의미로 충격적인 내용은 수많은 이들이 함께 경악한 n번방 사건에 대해 저자는 충격을 받지 않았다는 내용이다. 그 사건이 중대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동안 수많은 n번방 사건이 꾸준히 있었기 때문이다.

 

n번방 사건이 수없이 계속된 이유가 ‘긴급 대책’이 부족해서는 아닐 것이다. 오히려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고민과 제대로 된 개선과 대책이 없어서일 것이다. 사회가 가장 자극적으로 소비하는 범죄 형태를 담당하는 저자가 가장 힘주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이것이 아닐까 한다.

 

- 한국에서는 스텔싱stealthing - 성관계 도중 동의 없이 피임기구 제거 - 을 처벌한 법적 제도가 없다. 관계의 성격이 무엇이건, 상대가 원하지 않는 짓을 일방적 욕구로 자행하는 것은 폭력이다. 현실적이고 법적인 책임 부여에 동의한다.

 

- 형법에서 채택한 ‘최협의설’은 피해가자 사력을 다해 저항해야 하고, 이를 완전히 억압하는 수준의 폭행이 이루어져야 강간죄로 인정한다는 뜻이다. 누구의 기준인가, 사력을 다하다 죽거나 죽기 직전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인가. 이것이 마녀라면 물에 빠져도 안 죽으니 죽이고, 물에 빠져 죽으면 마녀가 아니니 무죄라는 것과 얼마다 다른 이야기인가.

 

- 남성의 성적 매력과 능력을 여성어로 바꾸면 ‘문란’이라는 낙인이다. 실제 범죄의 정체는 ‘힘’과 ‘권력’을 야만적으로 확인하는 방식이라, 대체로 가해자의 경제사회적 위치가 더 높다. 불평등이 상식인 한국에서 피해자가 공정한 대우를 받기란 고단하고 분노가 치미는 모욕의 시간을 견디는 일이다.

 

​어떤 세상은 숨 가쁘게 변화하고 있고 어떤 세상은 숨 막히게 변하지 않는다. 그럴 이유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변해야 할 이유가 있을 때는, 현상태로 존재할 이유를 더 찾지 못하는 것들은 괴리를 메우고 인식을 따라잡으며 변해야, 바꾸어야 한다.

 

그리고 그 힘은 시민의 공감, 공분, 공론에서 나온다. 그런 반응이 없는 사회는 아무 기대와 희망도 없는 공간일 뿐이다. 모르는 면면들은 끝없이 등장하고 다 소개하고 싶지만 부탁을 남기며 글을 마무리한다.

 

누군가 대신 생각해주고 대신 정리해주고 대신 말해주는 것이 탐탁지 않다면 무엇이 되었든 다양한 방법들로 당사자와 사건 자체에 다가가셔야 한다. 실질적으로 유의미한 결과를 끌어내지 못해 힘들지라도 속지 않는 것, 호도되지 않는 것, 배워서 알고 있는 힘은 약하지 않다. 꼭 필요한 순간 하나로 모여 세상과 역사와 누군가의 삶을 바꿀 것이다.

 

“너무 늦은 때도 없고 이미 끝난 삶도 없다. 지레 포기할 때 삶도 끝난다. 이렇게는 안 되겠다고, 다시 행복해지겠다고 결심한 순간부터 삶이 다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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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이 기도할 때
고바야시 유카 지음, 민경욱 옮김 / ㈜소미미디어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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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살면서 ‘완벽’이나 ‘무결’을 경험한 적이 없다.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런 개념을 가지고 있고 상상할 수 있다는 것이 인간만의 정신적 특성이자 지적 능력이기도 하다.

 

우리가 특히 분노하고 아쉬워하는 결함이 있는 인류 문명의 제도에는 ‘법’이 존재한다. 법적 정의가 잘 구현된다고 실감하지 못하기 때문인데, 분석해보면 이런 경우 원인은 크게 두 가지이다. ‘법’ 자체가 합당한 처벌을 하기에 불충분한 경우, 혹은 ‘법’을 왜곡하고 피해갈 방법을 마련하는 이들이 존재하는, ‘법’ 외적인 요인이 작용하는 경우이다.

 

외신에서는 학살자Butcher로 표기되는 인물이 극악한 범죄에 합당한 처벌을 받지 않고 반성과 사과도 없이 하고 싶은 일 즐기며 세상에서 제일 당당한 존재로 살다 편안하게 제 집에서 고령으로 삶을 마쳤다.

 

그날 피해 생존자들 중 한 분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마지막까지 간첩이네, 거짓말쟁이네 등등으로 모욕당하던 다른 피해자들은 형언할 수 없는 분노를 느꼈고, 아직도 실종된 자식의 뼛조각도 찾지 못한 부모는 남은 방법이 없어 참담하기만 하다.

 

삶은 말할 것도 없이 죽음마저 사회적 해악이 된 인물이다. 욕심이 나는 거라면국가든 남의 재산이든 생명이든 폭력으로 뺏고 죽이고 훔쳐도 잘 버티기만 하면 평생 잘 살다 편히 죽을 수 있고 자자손손 재산을 불리며 살 수도 있다는 최악의 선례를 남겼다.

 

이 책의 저자 고바야시 유카는 전작에서 피해자나 유족이 직접 가해자를 처벌할 수 있는 복수법이 제정된 가상 사회를 설정했다. 무겁고 어두운 심정으로 어디로 분출해야할지 모를 분노를 어찌하지 못한 채 내처 읽을 수밖에 없는 범죄들이 이야기 속에도 현실에도 가득하다.

 

현실의 피해자들처럼 이야기 속 피해자 역시 말 못할 고통에 시달리다 자기 목숨을 끊거나, 복수를 위해 상대처럼 범죄를 저지르는 길 밖에 보이지 않는다. 가해자가 즐겁게 멀쩡하게 잘 살고 피해자는 숨고 참고 망가져도 도움이 없는 사회라면 그런 선택을 강요받은 것이다.


 

이 책의 화자는 두 명이다. 한 명은 불량배들에게 폭행과 갈취에 시달리던 고1 학생 도키타이다. 폭력의 수위는 잔혹하다. 개별 학생들은 자신이 피해 대상이 아니면 무관심하게 사는 것이 대체로 더 안전하다고 느끼고 외면하거나 소극적으로 동조한다.

 

경찰은 조사와 처벌을 달가워하지 않고 가능한 책임을 떠넘기려 한다. 학교의 입장과 태도 역시 나을 바가 없다. 학교폭력이라는 명백한 소규모 공간에서 분명히 일어난 폭력 범죄조차 정확히 밝히고 처벌이 불가능하다. 이제 피해자가 생각할 수 있는 선택은 무엇인가.



“나를 심판할 수 있는 사람은 검사도 판사도 아닙니다. 만약 나를 심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학교폭력으로 아이를 잃은 유족뿐입니다.”

 

다른 한 명은 학교폭력에 시달리던 아들이 자살 하고 충격을 아내도 자살하여 혼자 남은 아버지이자 남편인 가자미 가이스케이다. 3년 전 닥친 불행을 경찰과 학교는 외면했다. 그는 아들을 죽음으로 몰아간 범인들을 알아내고 복수를 결심한다. 남은 삶의 계획은 복수 이후의 자살뿐이다.



 

“확증도 없이 말하는 게 얼마나 무책임한 일인지 알아. 그래도 네 미래에는 수많은 행복이 있으리라 믿어.”

 

분명한 미스터리 소설인데 현실들을 자꾸 불러들이게 되는 읽기였다. 그렇다고 소설적 장치가 부족한 것은 전혀 아니다. 도키타에게 대신 복수해주겠다고 나타난 ‘페니’의 존재를 궁금해하는 내내 긴장되고 재밌었다. 무거운 분위기에 대한 보상처럼 배치한 거듭되는 반전들이 장르 소설의 재미를 고조했다


 

시민으로서 사적복수가 가능한 사회는 유지와 지속이 불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에 전혀 지지할 수는 없지만, 그런 차분한 태도는 이 불행이 남의 일일 때만 가능한 것은 아닌지 무거운 혼란이 혼재한다. 유일한 방법은 이런 범죄가 예방되고 근절되는 것뿐이다. 우리는 흔히 처벌과 보상을 이야기하지만, 일단 발생한 피해를 보상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설사 분노를 거둘 수는 없다고 해도, 이런 목표를 위해서는 더 이상의 가해자들이 만들어지지 않는 일 역시 중요하다. 가해자를 이해하고 동정하자는 말이 아니라, 이런 가해자를 양산하는 구조와 배경과 환경을 살펴서 개선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야기 속 가해자들은 현실과 다르게 죄를 뉘우쳤을까...

피해자와 유족은 결국 어떤 선택을 했을까...

무책임하고 부정의한 사회는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사적 복수보다 더 속 시원한 처벌은 없을까...

 

가장 깊은 상처를 입은 이들을 묵직하게 위로하는 작품이다. 300페이지의 길지 않은 작품인데, 아주 오래 긴 이야기를 들은 기분이다. 드라마가 되어서 더 많은 분들이 함께 고민하고 이야기를 해보면 더 좋지 않을까 그런 바람이 든다. 아무도 모르는 사이, 상처 받고 외롭게 고통을 감내하는 이들이 발견되길, 치유받길, 줄어들기를, 더 이상 없어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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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주 오영선
최양선 지음 / 사계절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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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에 부동산, 자산, 집 관련 책들을 여러 권 읽었다. 깜짝 놀랄 만큼 많은 내용을 담고 있던 책도 있었고 현실을 어둡고 날카롭게 찢어내던 작품도 있었다.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가면, ‘집’과 ‘공간’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느끼며 읽은 책들이 더 많아진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할 말은 다 한 기분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지금도 변화하는 현실 속 주거공간과 나의 생존 필수 조건으로서의 인간의 공간은 점점 더 깊은 괴리를 형성하는 중이다. ‘살아가는 곳’ 얘기만 하고 싶지만, 한국에서는 그런 사치가 불가능하다.

 

생존의 기초적인 조건을 매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 꿈을 위해, 이상을 좇아 삶을 살지 못하고, 의식주 마련에 존재도 불분명한 영혼까지 끌어당겨야 한다. 살고자 집을 구하다 삶을 포기하기도 한다. 이곳은 주거지옥공화국이다.

 

어린 시절 내가 가진 기억의 공간들은 이제 없다. 나는 이 현실을 받아들이는데 미련할 만큼 오래 걸렸고, 지금 역시 한 집을 떠나보내는 중이다. 친구 집이 몇 평인지, 얼마인지, 인테리어는 어떤지, 그런 정보 따위 중요하지도 궁금하지도 않던 아늑한 시절은 벌써 없어졌다.

 

지금 우리가 집을 대하는 방식은 회자되는 언어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공급 대책, 수요 물량, 집값 폭등, 실거래가, 공시지가, 분양 대출, 전세 사기, 투기 과열, 주택 담보, 주택연금…….

 

잠시 현실 얘기를 하자면 무슨 일을 하든 노둥 소득으로는 집을 못 산다. 대출도 믿을 만한 방식은 아니다. 분양은 로또와 마찬가지이고 어떤 사전비리들이 개입하는지 알 수도 없다. 이 책의 주인공 영선처럼 물려받을 수 있다면 ‘세대주’가 될 수는 있다. 행운이라고 봐야할까.

 

“영선은 수도권에 있는 4년제 대학의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 문학은 투자한 시간 대비 대가가 돌아오는 일은 아니었다.”

 

삶에서 ‘비례 관계’인 것은 무엇이 있을까? 어쩌면 재료 계량에 따른 결과물이 가장 만족스러운 것은 요리뿐일 지도 모르겠다. 레시피북을 읽고 따라한 요리는 성공적일 수 있지만 인문학을 공부하는 것, 아니.. 구체적인 가이드라는 자기계발서를 읽고 따라 해본 삶조차 크게 만족스러운 성과를 보기 어렵다.

 

영선은 29살이다. 당연히 상당한 재산을 모아 두었을 리가 없다. 어머니와 동생 영우와 살던 집은 전세였지만, 계약을 연장할 수 없는 처지이다. 가진 것은 전세 보증금 1억 2천이다. 그리고 엄마의 청약통장을 발견한다.


 

“돈이 아닌 통장을 상속받으라고요? 뭐가 다른 거죠?”


 

집구하기의 어려움과 서러움을 모르고 살 수 있었던 영선은 비교적(?) 운이 좋아 순진무지한 상태로도 지낼 수 있었다. 이제 세대주가 되어 하나부터 다 배워야 하는 처지이긴 하지만. 그렇게 부동산의 세계에 들어가 보니 주변에는 부동산으로 인해 시난고난을 겪는 사람들이 가득하다. 빚이 괴물보다 무서운 영선에게 대출이란 어떤 의미일까.


 

“대출은 빚 맞아요. 하지만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대출은 거인의 어깨에 올라타는 것과 같죠. (...) 물론 거인의 크기는 개개인에 따라 다를 수 있겠지만요.”

 

바로 몇 해 전에도 대출이자를 엄청 내릴 테니 ‘돈 빌려 집사라’는 것이 무슨 대단한 경제정책인 양 이름까지 붙여 - 초이노믹스 - 언론을 도배했다. 물론 그때 대출 받아 집 산 이들의 집값이 올랐다면 당사자들에게는 완벽하게 유리하고 현명한 최고의 정책이라 여겨질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돈의 가치는 하락한다. 시간은 공짜가 아니다. 시간은 돈이다.”

 

부디 대출이자가 워낙 싸서 그때 왕창 빌린 이들이 여전히 그 빚을 잘 감당하며 지내시길 바란다. 내 주위에도 있지만 차마 물어볼 생각은 하지 못한다. 어쨌거나 뭘 하든 세계 순위권에 들고야 하는 ‘한국’답게 부동산 투기로 인한 사회문제 역시 반드시 폭발할 뇌관 연결에 성공했다는 불길한 생각이 자꾸 든다.

 

“영선이 바란 것은 결코 특별한 삶이 아니었다. 노력하면 가질 수 있는 미래를 바랐을 뿐이다. 하지만 아무리 달려도 가난한 현실은 끝이 보이지 않고 자신감은 상실되어 갔다.”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이 배우고 가장 오래 일하지만 가장 가난한 세대, 영선의 사치는 멜론정액제와 가끔 카페에 가는 것이다. 소속된 곳이 없다는 불안감과 아무 것도 못 되고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거라는 절망감이 있다. 현실의 기회가 매일 사라지고 있다는 쓸쓸한 예감은 영선으로 대표되는 누구라도 우울하게 만들 것이다.

 

“자본의 방향과 흐름으로 세상이 움직이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삶에는 큰 흐름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여지와 대안이 있다고 하니 마음이 편안해지는 문장이나 이 삶이 가능한 사람은 두 부류쯤 된다. 자본이 많아서 자본의 흐름에 큰 영향을 받지 않는 이들, 그리고 정말로 용감하게 주도로에서 내려서 옆길로 걸어 나간 이들이다. 오해일지 모르나 후자의 경우 애써야할 일들이 태산처럼 많을 것이다. 별 도움은 안 되겠지만 힘껏 응원하고 싶다.

 

이렇게까지 현실 밀착인데도 확실한 소설이다. 해야 할 질문도 들어야할 답변도 많아지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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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선 열차와 사라진 아이들
디파 아나파라 지음, 한정아 옮김 / 북로드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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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교육 수준와 빈부 격차가 극단적으로 심하고, 종교적으로 혼란스러우며 인종 분리와 계급마저 공고한 인도는 어떤 사회일까. 넓은 국토와 많은 인구로 인도인들조차 전체적인 모습을 파악하지 못하고 살 듯하다. 해외에서 듣는 자국의 보도들이 지극히 자극적이란 경험을 했기 때문에, 내가 접한 인도 관련 뉴스에도 침착하려 하지만, 범죄의 잔인성과 성폭력성은 경악할 수준이다.



이 책이 인도의 극빈층 아이들 실종사건이라고 해서 겁을 많이 먹었다. 안타깝고 아프고 폭력적일까 두려웠다. 읽다보면 좀 다른 느낌의 초조함이 생기는데, 그건 이야기 속 아이가 너무 어리고 순진하기 때문이다. 9살의 형사물을 좋아하는 자이가 주인공이다. 드라마가 아닌 어떤 현실을 마주하면 도망도 못 가고 망가질 듯해서 어찌나 불안하던지.

 

나쁜 어른과 착한 어른의 대립과 구원이라는 설정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이 스스로 수사를 해서 - 엄청 엉뚱한 면들이 있지만 - 사건을 해결하고자 하는 전개라 다른 생각 없이 엄청 응원하며 읽었다. 인도가 아니라도 현실은 갈등이 첨예화되면 아이들을 포함한 약자들에겐 배려와 관용의 여지가 없다.



짐작한 대로 잔인한 면면이 널린 사회, 옴짝달싹하기 어려운 극빈층의 삶, 가난한 어른들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기에 바쁘고, 아이가 사라져도 가출이라 여기고, 남은 시간은 술에 취해 행패나 폭행을 저지른다.

 

그래도 아이들은 높은 하늘의 별들처럼 총명하다. 특히 형사물을 좋아한다는 계기로 아이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실종이아 믿는 자이는 친구들과 탐정단을 만든다. 조사는 역부족이고, 그 사이 더 많은 수의 아이들이 사라진다. 이제야 사람들은 불안에 떨지만 보호를 위한 공권력은 미치지 않는 곳이다.

 

사라진 아이의 부모를 비난하거나, 근거 없는 소문으로 2차 가해를 저지르고, 뇌물이 없는 일은 조사하지 않는 경찰들만 있고, 이유를 모르니 종교가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대립하고, 불안이 커지는 공동체에 사기 쳐서 돈을 벌려는 사이비 종교 사기꾼들도 등장하고... 참...



불안이 얼마나 거세든, 가난한 부모들은 여전히 아이들만 남겨 두고 돈을 벌기위해 나가야 한다. 이 모든 것을 9살 자이의 눈을 따라가며 읽다보면 장면들이 더 참혹하게 느껴진다. 한 가지 문제가 생기면 그 한 가지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문제에 몰려들어 난장을 만드는 환경 탓에 삶은 더욱 암담해진다. 그런 현실을 대표하듯 스모그는 이들의 눈앞을 가리고 있다.

 

읽기 전 두려움보다는 덜한 결말이라 할 수 있고 답답한 궁금증도 얼마간 해소되었다. 그런데... 범인은 잡혔지만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다 읽은 책을 덮고 홀가분하게 일어나지 못하게 묵직한 현실이 남았다. 이야기의 잔상들이 이야기로 사라지지 않는다. 해결할 방법이 없어 꿈만 꿔야 하는 건 아닌지.

 

“우리 집은 나쁜 꿈으로 가득 차 있다.

엄마는 나쁜 꿈을 꾸고 있고,

나도 나쁜 꿈을 꾸고 있다.

내 꿈에서 루누 누나는,

골든게이트 아파트의 발코니에서 커다란 날개를 활짝 펴고 날아오른다.

누나는 고대 신화에 나오는 거대한 새 자타유의 모습이지만,

상처 입고 피를 흘리고 있다.

엄마는 어떤 꿈을 꾸는지 내게 말해주지 않는다.

그러나 비명을 지르며 깨어나는 걸 보면 무서운 꿈인 것만은 확실하다.

차갑고 외로운 그림자가 내 머리 위를 지나가는 걸 느낀다.

새일까봐,

누나일까 봐 걱정하면서 고개를 든다.

그러나 하늘은 비어 있다.”

 

생각 없이 주어진 일을 해치우는 날들, 현실을 자각하는 시간이 불편해서 여지를 주지 않고 도망갈 장소로 택한 책 속에서 누군가의 현실과 아주 가까울 장면들을 만난다. 인도에서 나고 자란 저널리스트 출신인 영국 작가여서 쓸 수 있는 작품이다. 이방인이 아니면서도 심정적인 거리를 유지할 수 있는 힘.

 

1997년부터 2008년까지 인도에서 기자로 일하면서 아이들을 인터뷰한 저자는, 그들이 유쾌했고 당당했고, 종교적 폭력과, 넝마주이나 구걸을 하게 몰린 가난으로부터도 충분히 회복한 존재들이었다고 기록했다. 덕분에 어른들의 현실과는 다른 아이들이 느끼는 세상의 여전한 밝음과 온화함과 생기가 모두 제거되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나는 불행에 집중해서 생기와 미스터리 둘 다를 대부분 놓친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아쉬운 생각이 든다. 하지만 작품을 즐기기엔 현실이 무겁다. 잠시 검색해본 인도의 어린이 연쇄 살인사건, 실종자들의 숫자가 먼 나라 일이 아닌 듯 다가온다. 보도된 이 숫자가 대표하는 사실은 얼마쯤일지 생각해보는 일이 힘겹다.

 

표지의 여자아이가 누군지 모르고 읽었고... 마지막 페이지에서 마음이 터지듯 아파왔다.

 

“우린 오늘도, 내일도, 또 내일모레도 여기서 살아야 해. 당신들은 무슨 재미있는 이야기처럼 말들을 하는데, 이건 우리한테 삶이 걸린 문제야. 무슨 뜻인지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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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 변화 쫌 아는 10대 - 기후 정의의 메아리로 기후 위기에 답하라 ㅣ 과학 쫌 아는 십대 9
이지유 지음 / 풀빛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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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속에서 지구는 우주에서 가장 인기 있는 관광지가 되었다. 10대들은 지구로 수학여행을 온다. 10대 대상인 책이지만, 기상과 기후에 대해 차근차근 충실하게 전문적인 과학을 알려 준다. 그런데 10대 초반 아이들도 읽고 배울 수 있다. 자세하고 친절한 과학서이다.

 

기상과 기후의 정의, 지구의 기후대, 기후 조절 인자, 기후와 생태계의 관계, 기후 위기 타개법, 인류세, 기후 정의와 기후 행동, 그러니까 기후 변화에 관한 모든 것을 담은 책이다. 이 책만의 유일하고 새로운 내용은 기후학자들이 제시하는 기후 위기 해법에 ‘성평등’이 있다는 것이다.

 

어떤 형태의 위기라도 블평등은 그 안에서 늘 심화된다. 코로나도 기후 변화도 마찬가지이다. 재난은 차별적이고 적어도 개인은 자신의 욕망과 소비 패턴을 살펴봐야 한다. 소비 혹은 구매로 얻은 것들은 내가 사는 공간을 차지하고 사고의 여지를 줄인다.

 

코로나 판데믹이 시작되고 그 원인이 기후변화하는 사실이 공유되고 변화를 위한 동의의 시간도 없이 전 세계적으로 이상 기후가 목격되었다. 산불, 폭염, 폭우, 지진, 화산, 식생의 급격한 변화. 이제 식량 위기에 이르렀다.

 

내가 아무리 불안하다해도 기후 위기의 시절을 사는 당사자들은 지금의 10대들이다. 그들의 미래가 흐려져서 잘 보이지 않는다. 30년 안에 처음 겪는 상황을 목도하게 될 거란 이야기는 과학자들의 농담이 아니다. 30년 전을 생각해보면 조금은 이해가 되려나.

 

그래도 기어이 ‘지금은’ 아니라니, 언제가 나중일지 모르지만, 절망하지 않을 유일한 방법으로 읽고 배운다.

 

“현재 기후 변화 속도는 너무 빨라서 어떤 생물종도 대응할 수 없어. 기후 변화 속도를 줄이는 방법은 오직 하나, 우리가 배출하는 이산화탄소의 양을 줄이는 것이야. 우리가 확실히 아는 유일한 방법이지.”

 

“가축들은 어마어마한 양의 사료를 먹어 치워. 열대우림을 밀어 버리고 그곳에 지은 옥수수와 풍의 양 또한 엄청나. (...) 이 많은 동물이 순전히 인간의 식재료가 되기 위해 사육되고 있다는 생각을 해 봐. 이건 동물권의 관점에서 보아도 비윤리적이야. (...) 육지에서만 가축을 키우는 것이 아니야. (...) 새우농장도 생겨났어. (...) 이젠 후회해도 소용없어. 예전처럼 무성한 맹그로브 숲이 연안에 되돌아오려면 (...) 수백 년이 걸릴지도 모르거든. (...)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이제는 아무리 물고기를 많이 잡아도 소용없어. 모두 갈아서 새우를 주고, 그것도 모자라 다른 곳에서 생선을 사 와야 해. (...) 새우를 팔면 팔수록 손해보는 거라고.”

 

“인간이 기후에 확실히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 요소는 두 가지야. 첫째는 과다한 이산화탄소를 대기 중에 추가한 것이고, 둘째는 인간의 활동으로 다양한 에어로졸이 대기 중에 추가되었다는 점이야.”

 

“기후 변화는 이미 위기 상황인 것이 확실해. (...) 기후 위기는 이미 드러난 사실인데, 언론이 이렇게 공정을 내세워 확실한 입장을 보이지 않으면, 사람들이 기후 변화는 여전히 논쟁 중이니 위기인지 아닌지 모르겠다며 판단을 뒤로 미루는 현상이 나타나기 때문이야. 이건 마치 불이 난 것이 확실한데, 저 연기는 불이 아닐 수도 있다는 주장 때문에 모두 불구덩이에서 살아나지 못하는 것과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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