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세대주 오영선
최양선 지음 / 사계절 / 2021년 11월
평점 :
근래에 부동산, 자산, 집 관련 책들을 여러 권 읽었다. 깜짝 놀랄 만큼 많은 내용을 담고 있던 책도 있었고 현실을 어둡고 날카롭게 찢어내던 작품도 있었다.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가면, ‘집’과 ‘공간’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느끼며 읽은 책들이 더 많아진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할 말은 다 한 기분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지금도 변화하는 현실 속 주거공간과 나의 생존 필수 조건으로서의 인간의 공간은 점점 더 깊은 괴리를 형성하는 중이다. ‘살아가는 곳’ 얘기만 하고 싶지만, 한국에서는 그런 사치가 불가능하다.
생존의 기초적인 조건을 매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 꿈을 위해, 이상을 좇아 삶을 살지 못하고, 의식주 마련에 존재도 불분명한 영혼까지 끌어당겨야 한다. 살고자 집을 구하다 삶을 포기하기도 한다. 이곳은 주거지옥공화국이다.
어린 시절 내가 가진 기억의 공간들은 이제 없다. 나는 이 현실을 받아들이는데 미련할 만큼 오래 걸렸고, 지금 역시 한 집을 떠나보내는 중이다. 친구 집이 몇 평인지, 얼마인지, 인테리어는 어떤지, 그런 정보 따위 중요하지도 궁금하지도 않던 아늑한 시절은 벌써 없어졌다.
지금 우리가 집을 대하는 방식은 회자되는 언어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공급 대책, 수요 물량, 집값 폭등, 실거래가, 공시지가, 분양 대출, 전세 사기, 투기 과열, 주택 담보, 주택연금…….
잠시 현실 얘기를 하자면 무슨 일을 하든 노둥 소득으로는 집을 못 산다. 대출도 믿을 만한 방식은 아니다. 분양은 로또와 마찬가지이고 어떤 사전비리들이 개입하는지 알 수도 없다. 이 책의 주인공 영선처럼 물려받을 수 있다면 ‘세대주’가 될 수는 있다. 행운이라고 봐야할까.
“영선은 수도권에 있는 4년제 대학의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 문학은 투자한 시간 대비 대가가 돌아오는 일은 아니었다.”
삶에서 ‘비례 관계’인 것은 무엇이 있을까? 어쩌면 재료 계량에 따른 결과물이 가장 만족스러운 것은 요리뿐일 지도 모르겠다. 레시피북을 읽고 따라한 요리는 성공적일 수 있지만 인문학을 공부하는 것, 아니.. 구체적인 가이드라는 자기계발서를 읽고 따라 해본 삶조차 크게 만족스러운 성과를 보기 어렵다.
영선은 29살이다. 당연히 상당한 재산을 모아 두었을 리가 없다. 어머니와 동생 영우와 살던 집은 전세였지만, 계약을 연장할 수 없는 처지이다. 가진 것은 전세 보증금 1억 2천이다. 그리고 엄마의 청약통장을 발견한다.
“돈이 아닌 통장을 상속받으라고요? 뭐가 다른 거죠?”
집구하기의 어려움과 서러움을 모르고 살 수 있었던 영선은 비교적(?) 운이 좋아 순진무지한 상태로도 지낼 수 있었다. 이제 세대주가 되어 하나부터 다 배워야 하는 처지이긴 하지만. 그렇게 부동산의 세계에 들어가 보니 주변에는 부동산으로 인해 시난고난을 겪는 사람들이 가득하다. 빚이 괴물보다 무서운 영선에게 대출이란 어떤 의미일까.
“대출은 빚 맞아요. 하지만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대출은 거인의 어깨에 올라타는 것과 같죠. (...) 물론 거인의 크기는 개개인에 따라 다를 수 있겠지만요.”
바로 몇 해 전에도 대출이자를 엄청 내릴 테니 ‘돈 빌려 집사라’는 것이 무슨 대단한 경제정책인 양 이름까지 붙여 - 초이노믹스 - 언론을 도배했다. 물론 그때 대출 받아 집 산 이들의 집값이 올랐다면 당사자들에게는 완벽하게 유리하고 현명한 최고의 정책이라 여겨질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돈의 가치는 하락한다. 시간은 공짜가 아니다. 시간은 돈이다.”
부디 대출이자가 워낙 싸서 그때 왕창 빌린 이들이 여전히 그 빚을 잘 감당하며 지내시길 바란다. 내 주위에도 있지만 차마 물어볼 생각은 하지 못한다. 어쨌거나 뭘 하든 세계 순위권에 들고야 하는 ‘한국’답게 부동산 투기로 인한 사회문제 역시 반드시 폭발할 뇌관 연결에 성공했다는 불길한 생각이 자꾸 든다.
“영선이 바란 것은 결코 특별한 삶이 아니었다. 노력하면 가질 수 있는 미래를 바랐을 뿐이다. 하지만 아무리 달려도 가난한 현실은 끝이 보이지 않고 자신감은 상실되어 갔다.”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이 배우고 가장 오래 일하지만 가장 가난한 세대, 영선의 사치는 멜론정액제와 가끔 카페에 가는 것이다. 소속된 곳이 없다는 불안감과 아무 것도 못 되고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거라는 절망감이 있다. 현실의 기회가 매일 사라지고 있다는 쓸쓸한 예감은 영선으로 대표되는 누구라도 우울하게 만들 것이다.
“자본의 방향과 흐름으로 세상이 움직이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삶에는 큰 흐름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여지와 대안이 있다고 하니 마음이 편안해지는 문장이나 이 삶이 가능한 사람은 두 부류쯤 된다. 자본이 많아서 자본의 흐름에 큰 영향을 받지 않는 이들, 그리고 정말로 용감하게 주도로에서 내려서 옆길로 걸어 나간 이들이다. 오해일지 모르나 후자의 경우 애써야할 일들이 태산처럼 많을 것이다. 별 도움은 안 되겠지만 힘껏 응원하고 싶다.
이렇게까지 현실 밀착인데도 확실한 소설이다. 해야 할 질문도 들어야할 답변도 많아지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