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여 오라 - 제9회 제주 4·3평화문학상 수상작
이성아 지음 / 은행나무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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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세계 유일한 분단국가로도 불리지만, 어쨌든 나는 국가 간, 인종 간, 민족 간 전쟁을 직접 겪지 않은 세대이다. 전쟁이 없는 환경이 기본 값이라고 여기는 운이 좋은 삶을 살았는데, 역사를 봐도 현실을 봐도 전쟁이 사라진 세상은 어디에도 없었다.

 

전쟁 선포를 하고 포로규약을 지키고 시작일과 종전일이 명확한 전쟁들 이외에도 삶의 많은 영역들이 전투태세를 방불해 하는 곳들도 아주 많았다. 그렇지 않고서는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 표현에 이렇게 많은 군사주의적 표현들이 생생할 리가 없다.

 

한 때 그런 표현을 제외시켜보고자 의식적으로 노력했으나, 삶은 고군분투, 악전고투, 각개전투를 벌여야하는 경우가 다반사였고, 나는 목표를 조준하거나 겨냥하는 태도와 집중을 요구받았다.

 

자신의 전투를 치르는 일이라면, 명분이 확실한 전쟁이라면 놀랍게도 아주 드물게 솔직한 대결 상황일 수 있다. 가장 악랄한 방식은 나의 이익을 위해 다른 이들에게 대리전을 시키는 짓거리다.

 

당시 세르비아군에게 내려진 명령은, “스레브레니차 거주민들에게 생존의 희망도 느낄 수 없도록 불안한 상황을 제공할 것!”이었다. 1984년 제주도의 토벌군에게 내려진 명령은, “모조리 다 쓸어버려라”였다.

 

희생이 필요 없는 안전지대에 머무는 이들, 전쟁은 권력과 자본과 이익 수단을 가진 이들에게 호기로 작용하고 이익을 남긴다. 영문을 모른 채 상대방을 미워하고 죽이고 자신도 죽임을 당하고 혹은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안고 사는 이들은 동원된 피해자들뿐이다.

 

“살인마들이 정당성을 주장하는 걸 보고 있으면 구역질이 나. 그런 자들의 변명을 지켜보고 있어야 되다니. 피해자들의 목소리에 더 귀 기울여야 되는 거 아니야? 그들에게는 언제 한번 마이크를 줘봤냐고.”

 

가정폭력의 소식을 거의 매일 듣고, 노동현장에서 사망한 분들의 소식도 계속해서 듣고, 바이러스로 사망한 이들의 숫자도 매일 확인하고, 거짓말과 혐오와 갈라치기로 누가 망하든 누가 죽든 권력을 잡아보자는 문명화한 전투 소식도 듣는다. 그리고 담요와 옷을 보내 도우려던 타국에서 산 채로 불 태워 죽임 당한 이들의 소식도 듣는다.

 

“우리가 뻔히 알고 있는 진실을 법정에서 가려보겠다는 건데, 애초에 법 따위는 안중에도 없던 학살자들에게 민주적인 법 절차라니, 이럴 땐 민주주의에 회의를 느껴.”

 

제주의 학살자도 광주의 학살자도 편안하게 장수하다 편안하게 죽은 기막힌 현실을 씹으며 뱉으며... 제주 4.3.의 직접적인 피해자의 후손이자 유족인 오랜 지인과 함께 읽었다. 무섭고 분하고 아팠다.



“시시비비를 가리기 전에는 사과도 용서도 함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섣부른 화해나 용서는, 제스처일 뿐이야. 정작 가해자들은 침묵하거나 발뺌만 하고 있는데 (...)”

 

내전이란 용어는 올바르지도 정확하지도 않는 표현이다. 두 세력이 힘을 겨루기 위해 전쟁을 발발한 것이 아니다. 빌미는 이유는 핑계는 어떤 것이라도 좋았다. 세르비아에서도 제주도에서도. 종교와 정치의 외피를 쓴 근거도 없는 정체성들. 학살을 위한 변명은 얼마나 엉터리이든 비겁하든 비극적으로 잘 작동했다.

 

“국가폭력이라니, 나는 그 말도 받아들일 수 없다. 때릴 수도, 침을 뱉을 수도, 그가 가진 꿈과 사랑을 짓밟고 망가뜨릴 수도 없는 국가가 가해자란 말인가? 그렇다면 나의 원한은 어디를 향해야 한단 말이냐. 이것은 도대체 무엇을 위한, 누구의 설계란 말이냐. 결국 누구에게도 이해받을 수 없는 극단의 고독이 나를 집어 삼켰다. 그게 암 덩어리가 되었겠지.“

 

발칸 반도를 피로 적신 비극도 제주를 피로 덮은 학살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위계와 계급과 빈부가 있는 모든 곳에는 국경으로 가를 수 없는 상처들이 새겨져 있다. 남편은 총에 맞아 죽고 아내는 집단성폭행을 당한 후 태어난 톰, 제주4.3 평화공원의 각명비에 태아로, 신생아로, 이름도 생기기 전에 살해당한 어린 생명들, 아무도 가리지 않는 살해를 명령하는 종교와 이념의 정당성을 설명할 수 있는 이들은 누구인가.


 

* 제주 4.3 학살: 1947년 3월 1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7년 7개월에 걸쳐 자행되었다.

** 세르비아/발칸반도의 학살: 강간 캠프까지 만들어 무슬림 여성들을 조직적으로 강간하고 수용소에 감금했다는 증언도 있다.

 

나중을 살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는데, 나중에, 나중에, 라는 답변만 들린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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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책 수선가의 기록 - 망가진 책에 담긴 기억을 되살리는
재영 책수선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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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도 어제도 우연히 지인들과 모든 직업군에서 에세이 한편씩 시리즈로 출간해서 읽어 보면 좋겠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생계형 직업만이 아니라 무언가를 오래 추구한 분, 삶을 오래 바라보신 분 등등 누가 쓰셔도 좋겠지요. 특히 에세이라는 장르는 그런 상상과 기대를 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두둥! 인간이 만든 발명품 중에 최고라고 생각하는 책, 남들이 반려인간, 반려동식물 자랑할 때 반력독(讀)물이 최고라고 은밀히 생각하는 저는 이 에세이가 특별한 선물 같습니다. 책을 좋아하지만 수선할 생각은 해본 적이 없어 더 그렇습니다.

 

멋집니다. ‘내 직업은 책 수선가’라고 자신을 소개하시니. 이 문장은 더 멋집니다.

 

“나는 망가진 책의 기억을 관찰하고, 파손된 책의 형태와 의미를 수집한다.”

 

한 때는 엄청난 고가의 수제품이자 고급 예술품이었던 책은 이제 10만부, 100만부도 찍어낼 수 있는 상품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내게 의미 있는 책은 내가 만나 읽고 함께 한 그 한권이라는 것에 여전히 동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간혹 읽은 책을 달라는 지인에게 새 책을 사주기도 합니다. 내용은 같지만 이미 전혀 다른 책이니까요.

 

차분하고 잔잔하고 엄격하고 감동적일 거라 생각한 것이 무색하게 저자의 위트에 신나게 웃기도 했습니다. 저자가 사람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책에게 오래 살아남는 팁 - 가늘고 길게 살아남는 방법 - 을 알려 주는데 고심을 거듭한 진심이 느껴집니다.

 

예를 들어 ,

 

1. 누가 봐도 귀하거나 중요한 책이 되는 것.

“쉽지는 않겠지만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 <구텐베르크 42행 성경>과 같은 책으로 태어나면 온 세계가 나서서 지켜줄 것이기 때문에 살아남는 일은 별로 걱정할 필요가 없다.

 

2. 책을 무척 아끼는 사람의 집으로 가는 것.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물리적으로도 책을 아끼기 때문에 운이 좋으면 망가지더라도 버려지지 않고 나 같은 책 수선가에게 데려가줄 가능성이 높다.”

 

3. 인기가 없는 책이 되어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지는 것.

“약간의 운도 필요하다. 인기가 없어도 너무 없는 책은 폐기처분될 위험도 많기 때문에 그 정도는 곤란하고, 계속 서점에 진열될 명분은 있되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은 남기지 않으면 된다.”

 

‘만약 책으로 태어난다면’이란 질문을 받고는 ‘애정을 가진 주인의 책’으로 태어나 수선되고 아껴지며 오래오래 몇 세기 동안 살아남아 언젠가 유물로 발견되어 쾌적한 환경의 박물관에서 전문가들로부터 완벽한 케어를 받으며 호의호식하고 싶다고! 야심 가득한 꿈입니다!

 

몇몇 사례를 잘 소개하고는 싶은데, 역시 이 책은 수선 전후의 사진을 보며 감탄을 거듭하셔야 하는 종류의 책인지라... 그래도 일단 소개는 해봅니다. 첫 작업입니다.


 

“반 우스갯소리로 종이책은 부동산과 직결된 문제라고들 한다. 그만큼 책은 무게와 부피를 많이 차지하는 물건이라는 뜻이다. 실제로 책은 이사를 할 때마다 견적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하고, 일본에는 책이 너무 많아서 무너진 집도 있다고 한다.”



“의뢰인이 책을 다시 찾으러왔을 때 한 말은 책 수선가로서 나의 태도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어렸을 적 친구가 다시 돌아온 것 같아요.’

 


내 친구도 아닌데 눈물이 빙그르르 차올랐습니다.

 

다음 내용은 책 수선가로서 책과 친해지는 법을 들려주는데, 나로서는 단 하나만 빼곤 모두 시도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책과 친해질 수 있다면... 책 수선가가 있으니 조금은 안심을 하고 신나게 사귀어보는 쪽이 더 좋다고 생각해서 소개합니다.

 

“나는 어쩌면 책을 아끼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최악 중에서도 최악을 모아놓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책에다 연필이든 볼펜이든 가리지 않고 마구 밑줄을 긋거나 메모와 낙서를 하는 건 기본이고, 읽던 곳을 표시할 때는 페이지 모서리를 접는 걸 넘어서서 아예 페이지의 반을 접어버린다. 책이 잘 펼쳐지지 않으면 책들을 꾹꾹 누르기도 한다. 뭘 먹던 손으로 책장을 넘기거나 잡는 것도 꺼리지 않고, 바닥에 떨어뜨려 모서리가 찍히거나 흠집이 나고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무거워서 들고 다니기가 힘들면 책을 반으로 쪼개기도 하고 (..).”

 

책을 학대하라는 것이 아니라 책과 친해지기 위해 노력하라는, 독서 습관을 기르라는 말로 읽어 달라 합니다. ‘정을 붙이는 법’이라고. 자신의 흔적이 많이 남을수록 그 책과 더 가까워진다고 생각한다고. 책 수선을 맡기는 이들 중에는 ‘낙서를 지우지 말라’고 하는 분들이 있다고 합니다. 낙서는 추억이고 그 책을 세상에 단 한권인 내 책으로 만드는 마법이기도 하겠지요.

 

어머니의 유품인 책을, 70년이 지난 할머니의 일기장을 읽고 수선하는 작업 과정들을 읽으며 꽤나 울었습니다. 나와 책과 맺은 인연과 그리움과 슬픔에 대해서도 생각해봅니다. 함께 묻히고픈 책은 있는데 누군가에게 남기고픈 책은 생각 못해봤습니다. 내지에 손편지를 써서 전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듯합니다.


내가 어린이 독자였다면 나도 책 수선가를 꿈꿔볼 수 있을 텐데... 아무래도 이번 생에선 힘들 것 같습니다. 대신 할머니 유품으로 받은 규방가사가 더 낡게 되면 재영책수선에 맡겨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생전에 읽으시던 모습이 음성이 그대로 보이고 들리는 문서라 어떤 흔적이라도 사라지는 게 싫지만, 가능한 외향의 변화는 없이 오래 안전하게 보존할 방법을 의논드려 봐야겠습니다.


 

참! 책만이 아니라 종이가 재료인 물건들도 수선을 의뢰 상담하실 수 있습니다.


“재영 책수선은 세상의 모든 망가진 종이들을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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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TS와 철학하기 - 소유에서 존재로, 넘버원에서 온리원으로, 진리에서 일상으로
김광식 지음 / 김영사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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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탄소년단의 뮤직비디오를 보신 분들은 내용이 한 가득, 꽈악 들어차있다는 것에 동의하실 것이다. 알아보는 상징은 이해가 되니 반갑고 감동이고 모르는 줄도 모르고 지나가는 상징 역시 신기하게 즐겨도 무방하다.

 

언어가 사유의 방식이고 의사표현의 주된 도구라면 그 언어로 이루어진 노래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BTS는 그런 점에서 - 내 생각이지만 - 자신들이 들려주려는 주제를 노래가사로 쉽게 소비하지만은 않는다는 점에서 차별적이다.

 

진지한 사람을 벌레로 호명하는 사회에서 이들의 메시지를 오랜 세월 잘 듣고 심지어 좋아하는 문화적 반응이 있다는 것이 기성세대인 나로서는 뜻밖의 기쁜 감동일 때가 있다.

 

그렇다고 본격, BTS 노래철학을 탐구해볼 생각은 못 했는데, 글을 쓰신 김광식 교수도 대단하시고 출간한 김영사도 멋지다. 그런데 이 책 독서연령은 어떻게 되는 것인지. 몇 해 전까지만 해도 BTS보다 다른 그룹을 좋아하던 우리 집 십 대들도 읽을 수 있는 것 맞는지.

 

뮤직비디오는 일단 모두 감상이 가능하지만 관련 철학은 다 알 수 없다. 완전히 낯설지 않은 몇 가지만 문해력 낮은 감상을 섞어 소개한다. 무척 방어적인 이름이지만 무척 도전적인 음악을 하는 이들에 대한 철학, 결론부터 말하자면 재밌었다!

 

Track 1. BTS vs 니체 / 피 땀 눈물과 초인의 철학

 

https://www.youtube.com/watch?v=hmE9f-TEutc

 

“‘자기 넘어섬’은 자기를 부정하는 동시에 자기를 긍정하는 것이고, 자기를 내리는 동시에 자기를 올리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자기를 부정해 자기를 긍정하는 것이고, 자기를 내려 자기를 올리는 것이다. 상승을 위한 몰락이고, 창조를 위한 파괴이다.”

 

두 달 전에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해설서를 읽었는데 그새 손실이 크다. “생명은 끊임없이 자신을 극복해가는 존재라는 것” 그 의지가 힘에의 의지라는 것, 창조를 위해 낡은 것을 먼저 파괴해야 하는 끝없는 자기극복의 과정 정도는 기억이 난다.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사는 삶에 대해 깊이 공감하기에 좋은 음악이자 철학적 지침이다.

 

이것이 삶이던가.

좋다. 다시 한 번!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니체

 

Track 3. BTS vs 프롬 / Dunamite 외 존재의 철학

 

https://www.youtube.com/watch?v=gdZLi9oWNZg

 

지난달에는 프랑크푸르트학파인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 읽기‘를 읽었다 - 일단 읽기는 했다. 20년 전보단 느긋하게 이해한 척 할 수 있는 내용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물론 다 오독일 수 있지만. 그래서 또 다른 프랑크푸르트학파인 에리히 프롬의 철학이 <다이너마이트>와 어떤 접점들을 이루는지 정독해본다.

 

“사회 구조뿐만이 아니라 인간의 성격과 성향도 함께 변화해야 한다고 진단한다. 자본주의사회에서 사람들이 지니는 소유 지향의 성향을 존재 지향의 성향으로 변화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프롬에 따르면 소비 지향은 소유 지향과 마찬가지다. 내가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는지 과시하고 보여주기 위해 소비하기 때문이다. (...) 존재를 지향하는 이는 ‘나는 행위하거나 체험하거나 경험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 어떻게 사느냐가 그 사람이 누구인지 보여준다.”

 

그러니 폭파! 스스로를 파괴하며 빛나는 삶을 살아보라...

 

Track 4. BTS vs 하버마스 / Am I Wrong 과 소통의 철학

 

하버마스의 의사소통행위이론은 내가 가장 사랑한 타인이 전공했고, 가장 유쾌한 친구도 전공한 철학이다. 그래서 무척 익숙하지만 아는 바가 없다. 내가 갈 길이 이과 전문직이라고 믿기 전의 시절로 돌아가면 의사소통과 관련된 공부를 해보고 싶다.

 

하버마스는 왜곡되지 않고 억압받지 않으며, 자유롭고 평등하며 합리적이고 이상적인 의사소통으로 바람직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실시간으로 물어보고 싶기도 하다. 언론이 병들어 부끄러운 줄 모르는 왜곡이 판치는 사회의 의사소통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이냐고.

 

병든 사회, 병든 사람들은 ‘돈’되는 이야기를 제외하고는 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부자 되게 해준다는 이를 선출했고 또 반복될 지도 모를 일이다.

 

Track 9. BTS vs 롤스 / 봄날과 정의의 철학

 

https://www.youtube.com/watch?v=xEeFrLSkMm8

 

봄날은... 작품을 그냥 보시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한다. ‘무지의 베일’이라는 장치가 필요한 이유는 이해하지만, 땅에 붙어사는 사람들을 고공 관찰하듯 말끔하게 바라보는 존 롤즈의 시선이 나는 20여 년 전에도 불편했다. 그렇다고 롤즈의 <정의론>을 무척 잘 알아서 하는 평은 아니니 넌 그런가보다... 하시길.

 

Track 10. BTS vs 로티 / 작은 것들을 위한 시와 아이러니의 철학

 

https://www.youtube.com/watch?v=XsX3ATc3FbA

 

BTS의 음악과 로티의 만남은 마음이 간질거리는 기분이다. ‘세상이 변한 게 아니라 누군가가 바꾼 것이듯, 세상은 아무 말이 없고 말하는 것은 우리들이라는 것.’ 그리고 유일한 생존법은 연대라는 것을 글로 만나 기쁘다.

 

Track 12. BTS vs 버틀러 / 상남자와 젠더의 철학

 

https://www.youtube.com/watch?v=4XyPdnTz_Q0

 

한국에는 주디스 버틀러 전문가들이 엄청 많다. 전혀 몰랐다가 EBS 특강에 수백 개의 분석비판 댓글이 달리는 것을 보고 엄청 놀랐다. 친구가 권할 때 나도 공부 좀 해둘 것을...

 

그 정도로 뇌분석에 다름 아닌 수준 - 나는 당신이 어떤 페미 음모를 획책하는지 다 알고 있다 - 은 무리지만, 섹스(생물학적 성)도 젠더(사회적 성)도 본질적으로 구별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열심히 읽었다.

 

“모든 성 정체성은 규범에 영향을 받은 사회적 담론에 따라 사회적으로 만들어진다. (...) 여자는 없다.”

 

1세대가 남성과 같은 권리 보장을, 2세대 - 보부아르로 대표되는 - 가 젠더 운동 - 사회적 성 정체성 추구 -을 통해 여성의 젠더를 공동체의 이상으로 삼아 실현하려 했다면, 3세대 - 주디스 버틀러로 대표되는 - 는 퀴어주의queerism, 탈양성주의를 추구한다. 여성이라는 개념을 허물고 넘어서자는.

 

소개 못한 철학자들이 더 많다. 뮤직비디오와 더불어 재밌게 즐겁게 만나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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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아웃
심포 유이치 지음, 권일영 옮김 / 크로스로드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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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2000년에 출간된 작품이 다행스럽게 복간되어 읽어 볼 기회가 생겼다. 번역은 최근일수록 더 완벽해지니 오히려 다행이다. 극찬하는 이들이 많아 큰 기대로 설레며 읽는다.

 

‘화이트 아웃’은 그 자체로 재난 이외의 다른 연상이 되지 않는다. 시각이 중요한 내게는 특히나 공포! 설산만으로도 위험은 헤아릴 길이 없는데 테러... 누군가 테러도 막고 인질(들)도 구하고 살아남는 것보다 전멸이 더 어울리는 극한의 상황이다.

 

알지 못하는 산을 작가의 문장들을 따라 다녀보았다. 시간을 보낼수록 깊이 장소에 들어갈수록 20도가 넘는 실내 온도에도 손이 시린 기분이 들었다. 인물을 놓치면 미로와 같은 깊은 산에서 조난을 당할 것 같은 마음으로 바짝 붙어서 빠져 나오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긴장이 치솟는 장면들도 위험천만한 장면들도 곳곳에 포진했다. 이렇게 힘든 상황에서의 24시간은 짧은 시간이 아니다. 산 속의 해는 더 빨리 가라앉고 어둠은 깊고 무겁다. 설산에서 구해야할 목숨들과 내 생사를 가르는 시간들...

 

“시야를 가리며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이 온통 흰색이 되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눈앞에 흰색 어둠이 펼쳐졌다.

화이트아웃이다.”

 

도가시와 요시오카는 댐에서 근무하는 직장인이다. 산악부였다고는 하지만 조난자를 구할 직접적인 책임은 없다. 하지만 구하지 않으면 죽을 것이 분명한 사람을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흔할 것인가. 그래도 불안하고 불길한 생각을 떨치지 못했다. 자연이란 인간의 사정을 봐주는 법이 없으니까.

 

오래 전 겨울 설악산에서 만난 두 명의 등산객은 장비가 무척 허술했다. 나는 우리 일행이 아이젠을 찍어가며 겨우 통과한 그 길을 운동화로 오른다는 이들을 더 말리고 싶었지만 그들은 멈출 생각이 전혀 없었다. 하산한 며칠 후 한 명이 산에서 사고를 당했고 구조를 청하러 떠난 사람 역시 동사했다는 보도를 접했다.

 

조난자와 구조가 모두가 눈 덮인 산에 갇혔다. 그대로 머물면 희망이 없어 한 명을 보내 구조를 요청하려 한다. 그리고... 어떻게도 할 수 없는 화이트 아웃을 만난다. 도가시는 결국 구조 요청을 보내지만, 너무 늦어 버렸다. 아무도 정확히 예측할 수 없는 미래, 그가 자신의 행동의 결과를 짐작할 수 있었다면...

 

“더 심한 고통에 시달린 뒤에야 쉴 수 있다는 건가?

아직도 더 많은 고통을 맛보아야 하는 거로구나.”

 

인간이 겪은 비극에 무심하게 시간을 흐르지만 잊지도 묻지도 못하고 흔적을 찾아 기억을 찾아 그리운 마음이 향하는 곳으로 오는 이가 있다. 하필 그 사람이 요시오카의 약혼녀 지아키이다. 그리고 하필 그 날은 테러가 벌어지는 비극의 한복판이다. 모든 인질 모든 목숨이 중요하지만 고시로가 마주하고 구해내야 할 지아키의 존재는 설산의 눈처럼 엄청난 무게이다.

 

“맞지, 요시오카? 아니라고는 못 할 거야.”

 

인간이 만든 거대한 댐은 그로 인해 테러의 수단이 되어 엄청난 위협을 낳을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타협이 불가능한 자연인 설산이 아니라 댐이 배경이 되어 도가시가 초인적 활약을 할 수 있었다. 그는 댐 전문가니까.

 

“무기는 없어도 침입자들보다 유리한 점이 적어도 하나는 있었다.

그들보다 댐 내부에 대해 더 잘 안다는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그가 설산에서 맨몸으로 다니는 장면은 목숨이 열 개라도 모자랄 상황들이 너무 많아서 침대 이불 속에서도 잠시 심장이 떨리곤 했다. 눈에 젖는 것도 모자라 수영... 불 피워서 말린다고 될 일인가 싶게 소스라치게 냉기가 끼쳤다.

 

“추위에 얼어붙어 신경 줄이 끊어졌는지 고통도 못 느끼고 손발도 움직이지 않는다. 

제발 손가락 하나라도 움직일 수 있게 얼어붙은 몸에 입김을 불어 얼어붙은 신경을 녹여다오. 

그러면 그 온기에 기대어 몸을 움직이겠다.”

 

재난 스릴러물은 어느 내용에서 스포일러를 멈춰야 하는 건지 정신을 차려본다. 사방이 눈이라 화이트 아웃이 오는 일도 있고, 설산이 아니라 일상에서도 우리 눈을 멀게 하는 일들은 있다. 산 속의 화이트 아웃이 절벽으로의 추락을 유도할 수 있다면 일상에서도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테러의 이유가 더 거창하고 적이 더 거대하기를 바라는, 영상 미디어에 익숙해진 기대도 없진 않았지만, 춥고 놀라면서도 끝까지 읽었다. 마치 그 방법만이 화이트 아웃을 벗어날 유일한 길인 듯해서.

 

다 읽고 나니 왜 이렇게 분량이 많아야 하는 지가 이해된다. 보기 드물게 모든 인물들이 존재감이 확실하게 펄펄 살아있는 작품이다. 댐 설계자가 아닌가 싶게 세심하게 공들인 이야기 전개를 예상하지 못한 순간 화들짝 뒤집는 반전은 최고다.

 

다 읽었다. 따뜻한 문명의 음식을 먹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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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의 중점 ㅣ 나비클럽 소설선
이은영 지음 / 나비클럽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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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절망감을 안추르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 놈은 오늘도 나를 따라왔다. 아니, 남들이 봤을 땐 내가 들고 온 것이었다.”

 

면접 대기 장소의 냉막한 풍경도 대단한데, 의자가 따라 온 면접자가 등장한다. 의자라는 사물이 인간을 향한 확실한 의지를 가지고 공포의 소재로 사용되는 작품이 잘 떠오르지 않아서 그 낯설음이 선뜩했다. 제목의 ‘사형을 당해야 할 의자’는 이 의자임에 틀림없다.

 

분명 면접을 보러 간 여자는 잠시 우주를 유영하는 듯한 문장들 속에 머물더니 ‘면접관이 보는 앞에서 의자에 올라가 목을 맸다’고 하여 멍하니 놀랐다. 인간을 죽이는 의자구나... ‘사형’이란 조금은 불편한 표현을 선택한 이유를 알겠다. 이 사건을 밝히는 내용인가 싶었는데 중점은 재빠르게 옮겨 간다.

 

“어쩌면 더 많은 사람들이 알지도 모르겠다. 인간의 삶 속에 내버려진 의자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인간이 의자에게 칠한 마음의 독성 물질이 어디까지 퍼질 수 있는지.”

 

저자가 모아둔 풍경 속의 의자들은 내가 가졌던 이미지와 아주 다르면서도 나도 이미 알던 것들이었다. 단지 인간의 의지와 행동만이 보였을 뿐, 그 의자에 앉았던 인간의 감정과 행동이 의자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 것이란 상상을 하지 못했다.

 

의자에 앉아 반성하는 벌을 받던 이들의 마음, 의자 위에 올라가 목을 맨 어쩌면 수많은 이들, 그리고 그로 인한 원망을 받아 내는 의자들. 의자에게도 복수심이 생겨날 수 있을까.

 

“의자에게 무슨 잘못이 있어? 그걸 자살 도구로 이용한 건 인간이잖아. 애초에 의자를 만든 것도 인간이라고.”

 

“의자를 발명하도록 인간의 상상을 유도한 건 의자가 가진 본질이자 심상이야. 인간의 지각을 뒤흔드는 생산적인 자극이 있었다는 거지.”

 

의자와 같은 무생물이 자신을 지켜보는 느낌을 받으면 공황발작이 일어나는 오빠, 언제부터인가 의자에 대해 경고하며 곁에 머무는 석희(席犧 자리 석 희생 희), 그리고 집 안의 의자들이 모두 이상해진다는 걸 깨닫기 시작하는 나.

 

인물들을 차례로 의심해보다 어느 의자가 살의를 가진 의자일까 고민해보다, 뜻밖의 전개에 소름이 싸악 끼쳤다.

 

“여은아 (...) 넌 말이야... (...) 의자에서 태어났어.”

 

의자에서 태어난 동생은 아무리 유기해도 집에 돌아왔고, 마물의 존재라고 생각한 아버지는 아들에게 당부의 말을 남긴다. 죽여도 죽지 않고, 자신이 싫어하게 된 주변인은 죽거나 크게 다치게 된다. 그런 사건이 일어날 때는 언제나 주변에 의자들이 많았다.

 

20년 마다 오빠가 위험해진다고 하는데 어떻게 될까...

의자인 동생은...혹은 의자라고 믿고 있는... 의자에 갇힌 동생은... 아니 의자는 사형을 당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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