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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책 수선가의 기록 - 망가진 책에 담긴 기억을 되살리는
재영 책수선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1년 11월
평점 :
지난주에도 어제도 우연히 지인들과 모든 직업군에서 에세이 한편씩 시리즈로 출간해서 읽어 보면 좋겠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생계형 직업만이 아니라 무언가를 오래 추구한 분, 삶을 오래 바라보신 분 등등 누가 쓰셔도 좋겠지요. 특히 에세이라는 장르는 그런 상상과 기대를 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두둥! 인간이 만든 발명품 중에 최고라고 생각하는 책, 남들이 반려인간, 반려동식물 자랑할 때 반력독(讀)물이 최고라고 은밀히 생각하는 저는 이 에세이가 특별한 선물 같습니다. 책을 좋아하지만 수선할 생각은 해본 적이 없어 더 그렇습니다.
멋집니다. ‘내 직업은 책 수선가’라고 자신을 소개하시니. 이 문장은 더 멋집니다.
“나는 망가진 책의 기억을 관찰하고, 파손된 책의 형태와 의미를 수집한다.”
한 때는 엄청난 고가의 수제품이자 고급 예술품이었던 책은 이제 10만부, 100만부도 찍어낼 수 있는 상품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내게 의미 있는 책은 내가 만나 읽고 함께 한 그 한권이라는 것에 여전히 동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간혹 읽은 책을 달라는 지인에게 새 책을 사주기도 합니다. 내용은 같지만 이미 전혀 다른 책이니까요.
차분하고 잔잔하고 엄격하고 감동적일 거라 생각한 것이 무색하게 저자의 위트에 신나게 웃기도 했습니다. 저자가 사람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책에게 오래 살아남는 팁 - 가늘고 길게 살아남는 방법 - 을 알려 주는데 고심을 거듭한 진심이 느껴집니다.
예를 들어 ,
1. 누가 봐도 귀하거나 중요한 책이 되는 것.
“쉽지는 않겠지만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 <구텐베르크 42행 성경>과 같은 책으로 태어나면 온 세계가 나서서 지켜줄 것이기 때문에 살아남는 일은 별로 걱정할 필요가 없다.
2. 책을 무척 아끼는 사람의 집으로 가는 것.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물리적으로도 책을 아끼기 때문에 운이 좋으면 망가지더라도 버려지지 않고 나 같은 책 수선가에게 데려가줄 가능성이 높다.”
3. 인기가 없는 책이 되어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지는 것.
“약간의 운도 필요하다. 인기가 없어도 너무 없는 책은 폐기처분될 위험도 많기 때문에 그 정도는 곤란하고, 계속 서점에 진열될 명분은 있되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은 남기지 않으면 된다.”
‘만약 책으로 태어난다면’이란 질문을 받고는 ‘애정을 가진 주인의 책’으로 태어나 수선되고 아껴지며 오래오래 몇 세기 동안 살아남아 언젠가 유물로 발견되어 쾌적한 환경의 박물관에서 전문가들로부터 완벽한 케어를 받으며 호의호식하고 싶다고! 야심 가득한 꿈입니다!
몇몇 사례를 잘 소개하고는 싶은데, 역시 이 책은 수선 전후의 사진을 보며 감탄을 거듭하셔야 하는 종류의 책인지라... 그래도 일단 소개는 해봅니다. 첫 작업입니다.
“반 우스갯소리로 종이책은 부동산과 직결된 문제라고들 한다. 그만큼 책은 무게와 부피를 많이 차지하는 물건이라는 뜻이다. 실제로 책은 이사를 할 때마다 견적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하고, 일본에는 책이 너무 많아서 무너진 집도 있다고 한다.”
“의뢰인이 책을 다시 찾으러왔을 때 한 말은 책 수선가로서 나의 태도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어렸을 적 친구가 다시 돌아온 것 같아요.’
내 친구도 아닌데 눈물이 빙그르르 차올랐습니다.
다음 내용은 책 수선가로서 책과 친해지는 법을 들려주는데, 나로서는 단 하나만 빼곤 모두 시도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책과 친해질 수 있다면... 책 수선가가 있으니 조금은 안심을 하고 신나게 사귀어보는 쪽이 더 좋다고 생각해서 소개합니다.
“나는 어쩌면 책을 아끼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최악 중에서도 최악을 모아놓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책에다 연필이든 볼펜이든 가리지 않고 마구 밑줄을 긋거나 메모와 낙서를 하는 건 기본이고, 읽던 곳을 표시할 때는 페이지 모서리를 접는 걸 넘어서서 아예 페이지의 반을 접어버린다. 책이 잘 펼쳐지지 않으면 책들을 꾹꾹 누르기도 한다. 뭘 먹던 손으로 책장을 넘기거나 잡는 것도 꺼리지 않고, 바닥에 떨어뜨려 모서리가 찍히거나 흠집이 나고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무거워서 들고 다니기가 힘들면 책을 반으로 쪼개기도 하고 (..).”
책을 학대하라는 것이 아니라 책과 친해지기 위해 노력하라는, 독서 습관을 기르라는 말로 읽어 달라 합니다. ‘정을 붙이는 법’이라고. 자신의 흔적이 많이 남을수록 그 책과 더 가까워진다고 생각한다고. 책 수선을 맡기는 이들 중에는 ‘낙서를 지우지 말라’고 하는 분들이 있다고 합니다. 낙서는 추억이고 그 책을 세상에 단 한권인 내 책으로 만드는 마법이기도 하겠지요.
어머니의 유품인 책을, 70년이 지난 할머니의 일기장을 읽고 수선하는 작업 과정들을 읽으며 꽤나 울었습니다. 나와 책과 맺은 인연과 그리움과 슬픔에 대해서도 생각해봅니다. 함께 묻히고픈 책은 있는데 누군가에게 남기고픈 책은 생각 못해봤습니다. 내지에 손편지를 써서 전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듯합니다.
내가 어린이 독자였다면 나도 책 수선가를 꿈꿔볼 수 있을 텐데... 아무래도 이번 생에선 힘들 것 같습니다. 대신 할머니 유품으로 받은 규방가사가 더 낡게 되면 재영책수선에 맡겨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생전에 읽으시던 모습이 음성이 그대로 보이고 들리는 문서라 어떤 흔적이라도 사라지는 게 싫지만, 가능한 외향의 변화는 없이 오래 안전하게 보존할 방법을 의논드려 봐야겠습니다.
참! 책만이 아니라 종이가 재료인 물건들도 수선을 의뢰 상담하실 수 있습니다.
“재영 책수선은 세상의 모든 망가진 종이들을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