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아웃
심포 유이치 지음, 권일영 옮김 / 크로스로드 / 2021년 11월
평점 :
절판


2000년에 출간된 작품이 다행스럽게 복간되어 읽어 볼 기회가 생겼다번역은 최근일수록 더 완벽해지니 오히려 다행이다극찬하는 이들이 많아 큰 기대로 설레며 읽는다.

 

화이트 아웃은 그 자체로 재난 이외의 다른 연상이 되지 않는다시각이 중요한 내게는 특히나 공포설산만으로도 위험은 헤아릴 길이 없는데 테러... 누군가 테러도 막고 인질()도 구하고 살아남는 것보다 전멸이 더 어울리는 극한의 상황이다.

 

알지 못하는 산을 작가의 문장들을 따라 다녀보았다시간을 보낼수록 깊이 장소에 들어갈수록 20도가 넘는 실내 온도에도 손이 시린 기분이 들었다인물을 놓치면 미로와 같은 깊은 산에서 조난을 당할 것 같은 마음으로 바짝 붙어서 빠져 나오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긴장이 치솟는 장면들도 위험천만한 장면들도 곳곳에 포진했다이렇게 힘든 상황에서의 24시간은 짧은 시간이 아니다산 속의 해는 더 빨리 가라앉고 어둠은 깊고 무겁다설산에서 구해야할 목숨들과 내 생사를 가르는 시간들...

 

시야를 가리며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이 온통 흰색이 되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눈앞에 흰색 어둠이 펼쳐졌다.

화이트아웃이다.”

 

도가시와 요시오카는 댐에서 근무하는 직장인이다산악부였다고는 하지만 조난자를 구할 직접적인 책임은 없다하지만 구하지 않으면 죽을 것이 분명한 사람을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흔할 것인가그래도 불안하고 불길한 생각을 떨치지 못했다자연이란 인간의 사정을 봐주는 법이 없으니까.

 

오래 전 겨울 설악산에서 만난 두 명의 등산객은 장비가 무척 허술했다나는 우리 일행이 아이젠을 찍어가며 겨우 통과한 그 길을 운동화로 오른다는 이들을 더 말리고 싶었지만 그들은 멈출 생각이 전혀 없었다하산한 며칠 후 한 명이 산에서 사고를 당했고 구조를 청하러 떠난 사람 역시 동사했다는 보도를 접했다.

 

조난자와 구조가 모두가 눈 덮인 산에 갇혔다그대로 머물면 희망이 없어 한 명을 보내 구조를 요청하려 한다그리고... 어떻게도 할 수 없는 화이트 아웃을 만난다도가시는 결국 구조 요청을 보내지만너무 늦어 버렸다아무도 정확히 예측할 수 없는 미래그가 자신의 행동의 결과를 짐작할 수 있었다면...

 

더 심한 고통에 시달린 뒤에야 쉴 수 있다는 건가?

아직도 더 많은 고통을 맛보아야 하는 거로구나.”

 

인간이 겪은 비극에 무심하게 시간을 흐르지만 잊지도 묻지도 못하고 흔적을 찾아 기억을 찾아 그리운 마음이 향하는 곳으로 오는 이가 있다하필 그 사람이 요시오카의 약혼녀 지아키이다그리고 하필 그 날은 테러가 벌어지는 비극의 한복판이다모든 인질 모든 목숨이 중요하지만 고시로가 마주하고 구해내야 할 지아키의 존재는 설산의 눈처럼 엄청난 무게이다.

 

맞지요시오카아니라고는 못 할 거야.”

 

인간이 만든 거대한 댐은 그로 인해 테러의 수단이 되어 엄청난 위협을 낳을 수도 있지만한편으로는 타협이 불가능한 자연인 설산이 아니라 댐이 배경이 되어 도가시가 초인적 활약을 할 수 있었다그는 댐 전문가니까.

 

무기는 없어도 침입자들보다 유리한 점이 적어도 하나는 있었다.

그들보다 댐 내부에 대해 더 잘 안다는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그가 설산에서 맨몸으로 다니는 장면은 목숨이 열 개라도 모자랄 상황들이 너무 많아서 침대 이불 속에서도 잠시 심장이 떨리곤 했다눈에 젖는 것도 모자라 수영... 불 피워서 말린다고 될 일인가 싶게 소스라치게 냉기가 끼쳤다.

 

추위에 얼어붙어 신경 줄이 끊어졌는지 고통도 못 느끼고 손발도 움직이지 않는다

제발 손가락 하나라도 움직일 수 있게 얼어붙은 몸에 입김을 불어 얼어붙은 신경을 녹여다오

그러면 그 온기에 기대어 몸을 움직이겠다.”

 

재난 스릴러물은 어느 내용에서 스포일러를 멈춰야 하는 건지 정신을 차려본다사방이 눈이라 화이트 아웃이 오는 일도 있고설산이 아니라 일상에서도 우리 눈을 멀게 하는 일들은 있다산 속의 화이트 아웃이 절벽으로의 추락을 유도할 수 있다면 일상에서도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테러의 이유가 더 거창하고 적이 더 거대하기를 바라는영상 미디어에 익숙해진 기대도 없진 않았지만춥고 놀라면서도 끝까지 읽었다마치 그 방법만이 화이트 아웃을 벗어날 유일한 길인 듯해서.

 

다 읽고 나니 왜 이렇게 분량이 많아야 하는 지가 이해된다보기 드물게 모든 인물들이 존재감이 확실하게 펄펄 살아있는 작품이다댐 설계자가 아닌가 싶게 세심하게 공들인 이야기 전개를 예상하지 못한 순간 화들짝 뒤집는 반전은 최고다.

 

다 읽었다따뜻한 문명의 음식을 먹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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