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역거부의 질문들 - 군대도, 전쟁도 당연하지 않다 ㅣ 오봄문고 6
이용석 지음 / 오월의봄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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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는 ‘전쟁없는세상’의 창립부터 19년간 병역거부를 한 당사자이자, 평화활동가로 활동하여 왔다. 얼마나 많은 고민들과 경험들이 많았을까. 그런 생각을 하니 이 책이 너무도 얇게 느껴진다.

 

나는 2000-2007년 사이의 한국 상황을 경험하지 못했다. 심정적으로는 전후 2-3년도 떠날 준비하느라, 귀국은 했지만 해외기업에서 일하느라 제대로 살지도 도착하지도 못한 세월이 길었다. 그래서 그 기간의 한국사회가 담긴 이 책을 내 시간의 빈틈을 채우는 목적으로도 읽어 본다.

 

주위에 병역거부자도 없고 병역의무를 곧 이행할 이들도 없지만, 전쟁, 분단, 종전, 반전, 평화, 자유, 헌법, 폭력 등과 긴밀히 연결된 한국사회의 병역제도에 대한 관심이 없지는 않다. 입장은 있으나 아는 바는 적었는데, 덕분에 읽고 구체적인 역사와 현실과 주장과 반응을 배워본다.

 

“첫 번째 수감 기록 이해, 약 80여 년 동안 1만 9,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들의 죄는 병역거부, 남을 해치지 않겠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 한국 최초의 병역거부 수감 기록은 1939년. 일제는 징병을 거부하고 신사참배를 거부한 조선의 여호와의 증인 신자들과 성경 공부를 하던 66명을 잡아 갔다. ‘등대사 사건’으로 불린다.

 

- ‘양심적 병역 거부’라는 개념이 없던 시절, 2001년 2월 “차마 총을 들 수가 없어요”라는 제목의 기사가 <한겨레21> 345호에 실렸다. 12월, 불교 신자이자 평화활동가인 오태양이 병역거부를 선언했다.

 

- 2002년 평화인권연대, 인권운동사랑방,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등 36개 시민단체가 모여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 실현과 대체복무제도 개선을 위한 연대회의’를 정식으로 발족했다.

 

- 세계사 속에서 공식 기록에 등장하는 첫 병역거부자는 서기 295년, 로마군의 징집을 거부해 처형당한 그리스도를 따르던 막시밀리아누스.

 

- 병역거부가 평화운동으로 거듭난 것은 20세기 초반 1차 세계대전 때였다.

 

- 효림 스님은 유신시대 말기에 입영영장을 받고 입대했지만 수행자로서 양심에 위배되는 군사 훈련을 받으며 가치관의 혼란을 느끼고 병역거부를 선택해 감옥살이를 했다.

 

-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 초반까지는 다양한 이유로 군복무를 거부하는 현역군인들이 등장했다. 당시에는 ‘양심선언’이라고 불렀다. 1991년 강경대가 백골단의 강경진압으로 사망하자 전투경찰 해체를 주장하던 박석진, 육군보안사령부가 민간인을 사찰한 것을 폭로한 윤석양, 대학시절 정보기관의 프락치 역할을 했다는 고백, 독배다 전두환이 머무는 백담사를 지키는 업무를 할 수 없다는 이유로 병역 거부 등.

 

- 전쟁이 국제적인 정치행위이듯 병역거부도 국제적인 저항이다. 한국전쟁 참전을 거부한 다른 나라의 병역거부자도 있다.

 

- 미국과 한국군에서도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며 병역을 거부한 이들이 있었다. 제주4.3과 한국전쟁을 몸소 겪은 제주 출신 김이석. 제주 출신 김동희.

 

- 병역 거부는 종교적 거부에서 군사주의에 저항하는 시민불복종으로, 국가에 의해 배제된 다양한 이들의 목소리로 의미를 넓혀왔다. 저자에게는 ‘군사주의에 저항하는 평화활동으로서의 시민불복종’의 의미라고 한다.

 

 

실제 병역거부자들이 재판에서 마주한 질문들을 읽고 나는 무척 놀랐고, 어떤 논리로 판단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어떤 답변들을 했을까, 그 답변들은 충분히 참작되었을까? 함께 생각해보면 좋을 듯해 일부를 적어 둔다. 질문들이 타당한가요?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 일본군 ‘위안부’ 피해 여성이 존재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

- 군사력 불균형으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가 발생한 것 아닌가?

- 일본군이 피고인의 지인 여성을 성노예로 삼기 위해 데려갈 경우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 군대는 침략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침략으로부터 나와 가족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것 아닌가?

- 칼을 든 강도가 침입해 여동생을 강간하려고 하고 당신에게 총이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저자는 병역거부를 이유로 실제 수감되었다. 대체복무제도를 도입하기로 한다는 소식은 2007년 9월이었으며 2009년 3월부터 시행하기로 했다. 그리고 2012년에도 여러 사람들이 대체복무제 입법 촉구를 위한 전시를 국회의원회관 로비에서 진행했다. 도와주는 이들도 많고 반대하고 욕하는 이들도 많다.

 

병역거부 혹은 대체복무제 운동을 하는 여성들도 있는데 - 사실 생각을 못 해봐서 처음 알았다 - 시민운동사회에서의 성별 역할도 가시성도 주류사회와 닮아 있어서 씁쓸하다. 물론 당사자들이 인지하고 있다는 것은 중요한 차이이다. 저자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여성활동가들을 역할을 열렬히(?) 자랑한다고 하니 인정과 존중이 늘어갈 것이라 믿는다.

 

그리고... 아픈 현실이지만, 한국의 전쟁무기 수출 관련 내용들도 피하지 않고 읽어본다. 한국산 무기와 시위 진압 장비는 여전히 국제시장에서 팔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 의하며 바레인, 예맨, 태국, 인도네시아의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협하고 시민들의 목숨을 빼앗는데 사용되었다 한다. 이율배반이 가득하고 모순이 팽배하고 불합리한 일들 지천이지만, ‘원래 세상은 그런 거’라고 해도 되는 건지, 나의 양심에 거듭 물어보며 내 대답을 준비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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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의 이중과제와 한반도식 나라만들기
백낙청 지음 / 창비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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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20세기에 만난 분들을 책으로나마 다시 만나 다시 배워보는 그런 날인가 합니다. 학자로서의 활동과 저작과 강연을 꾸준히 이어오시는 분이라 늘 접한 주제 같기도 하지만 쉬웠던 적도 없습니다. 이번 창작과 비평 가을호 담론을 읽어 보았는데 역시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단행본을 읽기 위해서는 가능한 모든 도움을 다 찾아봅니다.

 

https://magazine.changbi.com/201230/?cat=2466 (칼럼)

 

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1020459.html (인터뷰)

 

https://www.youtube.com/watch?v=oeb2rAVHaso (간담회)

 

근대와 근대성에 대해 정의 내리시는 개념을 잘 이해하고, 그로부터 출발한 한국 사회의 이중과제론, 즉 적응과 극복을 추구하자는 꾸준한 논의를 다시 처음으로 만납니다. 사유의 출발이기고 한 수준 높은 추상적 담론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자본주의가 특정 지역과 사회가 아니라 전 지구적으로 인류가 살아가는 시공간을 규정하고 지배하는 현실에서 이를 다루는 담론이라 전체 그림을 보려면 고공으로 추상으로 높이 올라가볼 수밖에 없습니다.

 

(...)

세워주지 않는 저 기차에 우리 모두가 이미 타고 있다

(...)

기차가 멈추지 않고 달릴 수 있도록 우리는

몸을 던져 연료가 되는 자들이다

(...)

저 기차가 왜 우리에게 있을까 아무도 묻지 않을 만큼

우리는 내릴 수 없는 기차에 타고 있다

 

<기차에 대해서> 백무산

 

629세대가 있었다면 우리는 촛불세대라 불릴 수도 있겠지요. 개헌을 했어야 새로운 출발이 되었을 것인데, 아직도 1987년 헌법을 고치질 못했으니, 아무리 법이 가장 나중에 마지못해 바뀌는 분야라고해도 참 비동시성의 노골적인 괴리이다... 싶습니다.

 

여전한 분단 상황, 노동 안전, 성차별, 날선 혐오, 기세등등한 적폐 세력, 기막힌 수준저하를 보이는 언론 개혁, 정체가 무엇인지 혼란스러운 검찰 세력 등등, 산재한 문제들은 전 방위적입니다. 게다가 판데믹, 기후위기, 환경 파괴로 인한 답례가 거세게 돌아오는 현실입니다.

 

이전에 많이도 회자되었지만 별로 잘 실천하지는 못했던 지구적 사유와 지역적 실천Think globally, act locally이 삶의 방식이 되어가는, 되어야하는 여정이지 않나 싶습니다.

 

“속도를 줄이고, 규모를 줄이고, 욕망의 크기를 지구가 수용 가능한 용량 안으로 줄이는 것 말고 대안을 없습니다.” 라는 지적은 누구나 수긍함직한 상식이다. 이 작업이 개개인의 작은 실천을 포함해야 한다는 것 또한 상식이다. 그러나 (...) 개인의 친환경적 실천이 아무리 성실하더라도 (...) 석탄발전소 하나를 폐쇄하거나 새로 못 짓게 만드는 데 비하면 그 성과가 미미한 게 엄연한 사실이다. (...) 트럼프의 재산을 막아낸 일이 석탄발전소 몇기를 줄이는 행동보다 훨씬 큰 영향을 미칠 것 또한 분명하다. (...) 미국이 빠리기후협정에 복귀하고 반환경정책을 대폭 줄이더라도 인류가 기후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이런 사실과 현실만 더 정확히 분석하다보면 무척 허망하고 기운이 자꾸 빠집니다. 회의하지 않을 수 없고 그런 태도가 오히려 합리적인 의심이라 볼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개인적 실천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하려면 어떤 다른 이유가 필요할까요.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이 중요한지 아닌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 우리 자신에게 중요하다는 것은 알고 있다.” <불교는 기후위기에 맞설 수 있을까> 데이비드 로이 녹색평론 2020년 3-4월호 152면

 

기후위기를 막고자 하는 이들이 체제변화를 촉구해야 하는 이유를 상세하고 결연하게 설명해주신 부분은 마음이 단단해지는데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여러 이론적 배경이 되는 사상들을 깊이 내용 있게 잘 이해할 수 없어 안타깝지만, 다시금 역사를 짚어보는 일은 우리가 멈춘 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위로 받고 잠시 스스로를 칭찬해주는 시간이라 좋습니다.

 

더 잘하지 못해 속상한 것, 더 빨리 바꾸고 싶은데 답답한 것, 확신할 수 없는 미래의 결과로 불안한 것,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변하고 있다는 것을 기록으로 보게 됩니다. 조금 안심이 됩니다.

 

몹시 추웠던 겨울 밤, 23번의 집회에 모두 나가지는 못했지만 그때 반대했던 것, 바랐던 것, 상상했던 것, 꿈꿨던 것들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87세대들이 지난하고 고단하게 애쓰며 살며 때로 실망하고 부정하고 이탈한 것처럼, 우리도 그런 세월을 살아가겠지요. 그리고 나중에... “그때는 이런 세상을 살게 될 줄 몰랐는데, 참 많이 바뀌었다.” 호호 다 늙어서 호기롭게 “세상 참 좋아졌다!” 그렇게 말해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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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읽는 세계사 - 전면개정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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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초판 발행이 된 책을 2021년에 다시 만난다. 같고도 다른 책이다. 저자도 그러하고 독자인 나도 그러하다. 인류가 20세기를 보낸 기록을 읽으며 20세기형 인간의 면면이 많은 나의 기록도 읽는다.

 

방학임에도 보충 학습하러 학교에 나오라던 시대, 상당히 건전한 반항의 방식이었을까, 이 책을 읽으며 천천히 걸어서 등교했다. 대충 읽으려했는데 꽤나 몰입을 했는지 횡단보도를 건너서 전봇대에 이마를 콩! 박았다. 잠시 세상이 거꾸로 뒤집혔다 돌아오는 기분.

 

그 날의 보충수업을 어떻게 들었는지는 기억이 안 나고, 따끈따끈한 이마와 뭉근한 통증과 ‘거꾸로’ 읽어보는 세계사의 파노라마가 밤까지 이어졌다. 어째서 이런 흥미진진하고 중요한 역사를 두고 무능한 왕가의 족보나 외우다 교과서가 끝나는지 수업이 더 지루해졌다.

 

북토크를 들으며 책 읽기, 이런 게 가능한 즐거운 세상이다. ‘세계를 지금 모습으로 만든 결정적인 열한 가지 사건들’을 다루지만, 단독 사건이란 건 없으니 관련된 수백 가지 역사적 장면들이 함께 한다.

 

“인간이 다른 인간을 죽이는 방법을 찾기 시작한 순간 과학은 전쟁과 손을 잡았고, 둘의 협력이 최고 수준에 다다랐을 때 핵폭탄이 태어났다.”

 

“오늘 우리는 그때와 얼마나 다를까?”

 

역사서란 분명하게 발생한 ‘사실’을 근거로 해야 하고, 역사를 보는 시선과 논점에 따라 여러 무늬를 가지는 기록이다. 나는 유시민 저자가 직조한 무늬가 마음에 든다. 섬세한 묘사가 즐겁고 질문 없이 많은 질문은 던지는 방식이 좋다.

 

워낙 엉터리 정보들과 오독인지 왜곡인지의 말과 글들이 많아서 지저분하게 흩어지고 갈라진 시간의 틈을 메우고 잘 정리하는데 도움을 주는 책이다. 예전과는 다른 논조가 예전과는 다른 독자인 내게 더 편안하다. 담담하고 묵직하게.

 

궁금해서, 반성을 위해, 교훈을 위해, 미래를 위한 상상력을 위해... 각자가 역사서를 찾아 읽는 목적은 다를 것이다. 나는 이 제목을 가진 책이 반갑고, 저자의 변화가 궁금하고, 내 기억이 흐려져서 읽어 보았다.

 

혹시 가능하다면 불안과 절망을 느낄 필요가 없다는 위로도 찾을 수 있으면 좋겠다 싶었다. 저자가 이전처럼 역사의 발전을 ‘확신하지 않는다’ 는 내용을 만나고 실망스럽지는 않다. 확신이라는 말이 신기한 개념이지, 현실에서 확신할 수 있는 것은 하나 밖에 없으니까.

 

“인간의 삶과 죽음은 특별한 의미가 없는 '원자 배열상태의 일시적 변화'일 뿐이다. 그러나 '역사의 시간'은 다르다. (...) 기껏해야 100년을 사는 인간에게는 '역사의 시간'도 너무나 길다. 그래서 일시적이고 상대적인 것들을 영원하고 절대적인 것인 양 착각하고 집착한다.”

 

“어떤 경우든 우리가 아는 '역사의 시간'은 머지않아 끝난다. 논리적으로는!”

 

아마도 거의 확실하게 30년 후에는 다시 개정판을 만나지는 못할 것이다. 저자도 독자들도 이 세상에 없을 가능성이 더 크다. ‘우리들의 기록’이 남았다는 기분이다. 어리석고 대단하고 미련하고 신기하고 수많은 모든 사건들의 총합인 인간의 기록.

 

“지구의 주인이자 생태계의 파괴자인 호모사피엔스가 신이 되려고 한다. 힘은 세지만 책임의식이 없는 신은 가장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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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여 오라 - 제9회 제주 4·3평화문학상 수상작
이성아 지음 / 은행나무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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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세계 유일한 분단국가로도 불리지만, 어쨌든 나는 국가 간, 인종 간, 민족 간 전쟁을 직접 겪지 않은 세대이다. 전쟁이 없는 환경이 기본 값이라고 여기는 운이 좋은 삶을 살았는데, 역사를 봐도 현실을 봐도 전쟁이 사라진 세상은 어디에도 없었다.

 

전쟁 선포를 하고 포로규약을 지키고 시작일과 종전일이 명확한 전쟁들 이외에도 삶의 많은 영역들이 전투태세를 방불해 하는 곳들도 아주 많았다. 그렇지 않고서는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 표현에 이렇게 많은 군사주의적 표현들이 생생할 리가 없다.

 

한 때 그런 표현을 제외시켜보고자 의식적으로 노력했으나, 삶은 고군분투, 악전고투, 각개전투를 벌여야하는 경우가 다반사였고, 나는 목표를 조준하거나 겨냥하는 태도와 집중을 요구받았다.

 

자신의 전투를 치르는 일이라면, 명분이 확실한 전쟁이라면 놀랍게도 아주 드물게 솔직한 대결 상황일 수 있다. 가장 악랄한 방식은 나의 이익을 위해 다른 이들에게 대리전을 시키는 짓거리다.

 

당시 세르비아군에게 내려진 명령은, “스레브레니차 거주민들에게 생존의 희망도 느낄 수 없도록 불안한 상황을 제공할 것!”이었다. 1984년 제주도의 토벌군에게 내려진 명령은, “모조리 다 쓸어버려라”였다.

 

희생이 필요 없는 안전지대에 머무는 이들, 전쟁은 권력과 자본과 이익 수단을 가진 이들에게 호기로 작용하고 이익을 남긴다. 영문을 모른 채 상대방을 미워하고 죽이고 자신도 죽임을 당하고 혹은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안고 사는 이들은 동원된 피해자들뿐이다.

 

“살인마들이 정당성을 주장하는 걸 보고 있으면 구역질이 나. 그런 자들의 변명을 지켜보고 있어야 되다니. 피해자들의 목소리에 더 귀 기울여야 되는 거 아니야? 그들에게는 언제 한번 마이크를 줘봤냐고.”

 

가정폭력의 소식을 거의 매일 듣고, 노동현장에서 사망한 분들의 소식도 계속해서 듣고, 바이러스로 사망한 이들의 숫자도 매일 확인하고, 거짓말과 혐오와 갈라치기로 누가 망하든 누가 죽든 권력을 잡아보자는 문명화한 전투 소식도 듣는다. 그리고 담요와 옷을 보내 도우려던 타국에서 산 채로 불 태워 죽임 당한 이들의 소식도 듣는다.

 

“우리가 뻔히 알고 있는 진실을 법정에서 가려보겠다는 건데, 애초에 법 따위는 안중에도 없던 학살자들에게 민주적인 법 절차라니, 이럴 땐 민주주의에 회의를 느껴.”

 

제주의 학살자도 광주의 학살자도 편안하게 장수하다 편안하게 죽은 기막힌 현실을 씹으며 뱉으며... 제주 4.3.의 직접적인 피해자의 후손이자 유족인 오랜 지인과 함께 읽었다. 무섭고 분하고 아팠다.



“시시비비를 가리기 전에는 사과도 용서도 함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섣부른 화해나 용서는, 제스처일 뿐이야. 정작 가해자들은 침묵하거나 발뺌만 하고 있는데 (...)”

 

내전이란 용어는 올바르지도 정확하지도 않는 표현이다. 두 세력이 힘을 겨루기 위해 전쟁을 발발한 것이 아니다. 빌미는 이유는 핑계는 어떤 것이라도 좋았다. 세르비아에서도 제주도에서도. 종교와 정치의 외피를 쓴 근거도 없는 정체성들. 학살을 위한 변명은 얼마나 엉터리이든 비겁하든 비극적으로 잘 작동했다.

 

“국가폭력이라니, 나는 그 말도 받아들일 수 없다. 때릴 수도, 침을 뱉을 수도, 그가 가진 꿈과 사랑을 짓밟고 망가뜨릴 수도 없는 국가가 가해자란 말인가? 그렇다면 나의 원한은 어디를 향해야 한단 말이냐. 이것은 도대체 무엇을 위한, 누구의 설계란 말이냐. 결국 누구에게도 이해받을 수 없는 극단의 고독이 나를 집어 삼켰다. 그게 암 덩어리가 되었겠지.“

 

발칸 반도를 피로 적신 비극도 제주를 피로 덮은 학살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위계와 계급과 빈부가 있는 모든 곳에는 국경으로 가를 수 없는 상처들이 새겨져 있다. 남편은 총에 맞아 죽고 아내는 집단성폭행을 당한 후 태어난 톰, 제주4.3 평화공원의 각명비에 태아로, 신생아로, 이름도 생기기 전에 살해당한 어린 생명들, 아무도 가리지 않는 살해를 명령하는 종교와 이념의 정당성을 설명할 수 있는 이들은 누구인가.


 

* 제주 4.3 학살: 1947년 3월 1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7년 7개월에 걸쳐 자행되었다.

** 세르비아/발칸반도의 학살: 강간 캠프까지 만들어 무슬림 여성들을 조직적으로 강간하고 수용소에 감금했다는 증언도 있다.

 

나중을 살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는데, 나중에, 나중에, 라는 답변만 들린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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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책 수선가의 기록 - 망가진 책에 담긴 기억을 되살리는
재영 책수선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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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도 어제도 우연히 지인들과 모든 직업군에서 에세이 한편씩 시리즈로 출간해서 읽어 보면 좋겠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생계형 직업만이 아니라 무언가를 오래 추구한 분, 삶을 오래 바라보신 분 등등 누가 쓰셔도 좋겠지요. 특히 에세이라는 장르는 그런 상상과 기대를 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두둥! 인간이 만든 발명품 중에 최고라고 생각하는 책, 남들이 반려인간, 반려동식물 자랑할 때 반력독(讀)물이 최고라고 은밀히 생각하는 저는 이 에세이가 특별한 선물 같습니다. 책을 좋아하지만 수선할 생각은 해본 적이 없어 더 그렇습니다.

 

멋집니다. ‘내 직업은 책 수선가’라고 자신을 소개하시니. 이 문장은 더 멋집니다.

 

“나는 망가진 책의 기억을 관찰하고, 파손된 책의 형태와 의미를 수집한다.”

 

한 때는 엄청난 고가의 수제품이자 고급 예술품이었던 책은 이제 10만부, 100만부도 찍어낼 수 있는 상품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내게 의미 있는 책은 내가 만나 읽고 함께 한 그 한권이라는 것에 여전히 동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간혹 읽은 책을 달라는 지인에게 새 책을 사주기도 합니다. 내용은 같지만 이미 전혀 다른 책이니까요.

 

차분하고 잔잔하고 엄격하고 감동적일 거라 생각한 것이 무색하게 저자의 위트에 신나게 웃기도 했습니다. 저자가 사람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책에게 오래 살아남는 팁 - 가늘고 길게 살아남는 방법 - 을 알려 주는데 고심을 거듭한 진심이 느껴집니다.

 

예를 들어 ,

 

1. 누가 봐도 귀하거나 중요한 책이 되는 것.

“쉽지는 않겠지만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 <구텐베르크 42행 성경>과 같은 책으로 태어나면 온 세계가 나서서 지켜줄 것이기 때문에 살아남는 일은 별로 걱정할 필요가 없다.

 

2. 책을 무척 아끼는 사람의 집으로 가는 것.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물리적으로도 책을 아끼기 때문에 운이 좋으면 망가지더라도 버려지지 않고 나 같은 책 수선가에게 데려가줄 가능성이 높다.”

 

3. 인기가 없는 책이 되어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지는 것.

“약간의 운도 필요하다. 인기가 없어도 너무 없는 책은 폐기처분될 위험도 많기 때문에 그 정도는 곤란하고, 계속 서점에 진열될 명분은 있되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은 남기지 않으면 된다.”

 

‘만약 책으로 태어난다면’이란 질문을 받고는 ‘애정을 가진 주인의 책’으로 태어나 수선되고 아껴지며 오래오래 몇 세기 동안 살아남아 언젠가 유물로 발견되어 쾌적한 환경의 박물관에서 전문가들로부터 완벽한 케어를 받으며 호의호식하고 싶다고! 야심 가득한 꿈입니다!

 

몇몇 사례를 잘 소개하고는 싶은데, 역시 이 책은 수선 전후의 사진을 보며 감탄을 거듭하셔야 하는 종류의 책인지라... 그래도 일단 소개는 해봅니다. 첫 작업입니다.


 

“반 우스갯소리로 종이책은 부동산과 직결된 문제라고들 한다. 그만큼 책은 무게와 부피를 많이 차지하는 물건이라는 뜻이다. 실제로 책은 이사를 할 때마다 견적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하고, 일본에는 책이 너무 많아서 무너진 집도 있다고 한다.”



“의뢰인이 책을 다시 찾으러왔을 때 한 말은 책 수선가로서 나의 태도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어렸을 적 친구가 다시 돌아온 것 같아요.’

 


내 친구도 아닌데 눈물이 빙그르르 차올랐습니다.

 

다음 내용은 책 수선가로서 책과 친해지는 법을 들려주는데, 나로서는 단 하나만 빼곤 모두 시도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책과 친해질 수 있다면... 책 수선가가 있으니 조금은 안심을 하고 신나게 사귀어보는 쪽이 더 좋다고 생각해서 소개합니다.

 

“나는 어쩌면 책을 아끼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최악 중에서도 최악을 모아놓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책에다 연필이든 볼펜이든 가리지 않고 마구 밑줄을 긋거나 메모와 낙서를 하는 건 기본이고, 읽던 곳을 표시할 때는 페이지 모서리를 접는 걸 넘어서서 아예 페이지의 반을 접어버린다. 책이 잘 펼쳐지지 않으면 책들을 꾹꾹 누르기도 한다. 뭘 먹던 손으로 책장을 넘기거나 잡는 것도 꺼리지 않고, 바닥에 떨어뜨려 모서리가 찍히거나 흠집이 나고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무거워서 들고 다니기가 힘들면 책을 반으로 쪼개기도 하고 (..).”

 

책을 학대하라는 것이 아니라 책과 친해지기 위해 노력하라는, 독서 습관을 기르라는 말로 읽어 달라 합니다. ‘정을 붙이는 법’이라고. 자신의 흔적이 많이 남을수록 그 책과 더 가까워진다고 생각한다고. 책 수선을 맡기는 이들 중에는 ‘낙서를 지우지 말라’고 하는 분들이 있다고 합니다. 낙서는 추억이고 그 책을 세상에 단 한권인 내 책으로 만드는 마법이기도 하겠지요.

 

어머니의 유품인 책을, 70년이 지난 할머니의 일기장을 읽고 수선하는 작업 과정들을 읽으며 꽤나 울었습니다. 나와 책과 맺은 인연과 그리움과 슬픔에 대해서도 생각해봅니다. 함께 묻히고픈 책은 있는데 누군가에게 남기고픈 책은 생각 못해봤습니다. 내지에 손편지를 써서 전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듯합니다.


내가 어린이 독자였다면 나도 책 수선가를 꿈꿔볼 수 있을 텐데... 아무래도 이번 생에선 힘들 것 같습니다. 대신 할머니 유품으로 받은 규방가사가 더 낡게 되면 재영책수선에 맡겨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생전에 읽으시던 모습이 음성이 그대로 보이고 들리는 문서라 어떤 흔적이라도 사라지는 게 싫지만, 가능한 외향의 변화는 없이 오래 안전하게 보존할 방법을 의논드려 봐야겠습니다.


 

참! 책만이 아니라 종이가 재료인 물건들도 수선을 의뢰 상담하실 수 있습니다.


“재영 책수선은 세상의 모든 망가진 종이들을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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