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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읽는 세계사 - 전면개정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21년 10월
평점 :
1988년 초판 발행이 된 책을 2021년에 다시 만난다. 같고도 다른 책이다. 저자도 그러하고 독자인 나도 그러하다. 인류가 20세기를 보낸 기록을 읽으며 20세기형 인간의 면면이 많은 나의 기록도 읽는다.
방학임에도 보충 학습하러 학교에 나오라던 시대, 상당히 건전한 반항의 방식이었을까, 이 책을 읽으며 천천히 걸어서 등교했다. 대충 읽으려했는데 꽤나 몰입을 했는지 횡단보도를 건너서 전봇대에 이마를 콩! 박았다. 잠시 세상이 거꾸로 뒤집혔다 돌아오는 기분.
그 날의 보충수업을 어떻게 들었는지는 기억이 안 나고, 따끈따끈한 이마와 뭉근한 통증과 ‘거꾸로’ 읽어보는 세계사의 파노라마가 밤까지 이어졌다. 어째서 이런 흥미진진하고 중요한 역사를 두고 무능한 왕가의 족보나 외우다 교과서가 끝나는지 수업이 더 지루해졌다.
북토크를 들으며 책 읽기, 이런 게 가능한 즐거운 세상이다. ‘세계를 지금 모습으로 만든 결정적인 열한 가지 사건들’을 다루지만, 단독 사건이란 건 없으니 관련된 수백 가지 역사적 장면들이 함께 한다.
“인간이 다른 인간을 죽이는 방법을 찾기 시작한 순간 과학은 전쟁과 손을 잡았고, 둘의 협력이 최고 수준에 다다랐을 때 핵폭탄이 태어났다.”
“오늘 우리는 그때와 얼마나 다를까?”
역사서란 분명하게 발생한 ‘사실’을 근거로 해야 하고, 역사를 보는 시선과 논점에 따라 여러 무늬를 가지는 기록이다. 나는 유시민 저자가 직조한 무늬가 마음에 든다. 섬세한 묘사가 즐겁고 질문 없이 많은 질문은 던지는 방식이 좋다.
워낙 엉터리 정보들과 오독인지 왜곡인지의 말과 글들이 많아서 지저분하게 흩어지고 갈라진 시간의 틈을 메우고 잘 정리하는데 도움을 주는 책이다. 예전과는 다른 논조가 예전과는 다른 독자인 내게 더 편안하다. 담담하고 묵직하게.
궁금해서, 반성을 위해, 교훈을 위해, 미래를 위한 상상력을 위해... 각자가 역사서를 찾아 읽는 목적은 다를 것이다. 나는 이 제목을 가진 책이 반갑고, 저자의 변화가 궁금하고, 내 기억이 흐려져서 읽어 보았다.
혹시 가능하다면 불안과 절망을 느낄 필요가 없다는 위로도 찾을 수 있으면 좋겠다 싶었다. 저자가 이전처럼 역사의 발전을 ‘확신하지 않는다’ 는 내용을 만나고 실망스럽지는 않다. 확신이라는 말이 신기한 개념이지, 현실에서 확신할 수 있는 것은 하나 밖에 없으니까.
“인간의 삶과 죽음은 특별한 의미가 없는 '원자 배열상태의 일시적 변화'일 뿐이다. 그러나 '역사의 시간'은 다르다. (...) 기껏해야 100년을 사는 인간에게는 '역사의 시간'도 너무나 길다. 그래서 일시적이고 상대적인 것들을 영원하고 절대적인 것인 양 착각하고 집착한다.”
“어떤 경우든 우리가 아는 '역사의 시간'은 머지않아 끝난다. 논리적으로는!”
아마도 거의 확실하게 30년 후에는 다시 개정판을 만나지는 못할 것이다. 저자도 독자들도 이 세상에 없을 가능성이 더 크다. ‘우리들의 기록’이 남았다는 기분이다. 어리석고 대단하고 미련하고 신기하고 수많은 모든 사건들의 총합인 인간의 기록.
“지구의 주인이자 생태계의 파괴자인 호모사피엔스가 신이 되려고 한다. 힘은 세지만 책임의식이 없는 신은 가장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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