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관계는 나에게 달려 있다 - 익숙한 내 삶의 패턴을 바꾸는 마음 성장 수업
황시투안 지음, 정은지 옮김 / 미디어숲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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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모든 관계는 나에게 달려 있다, 가 맞을까 한참 생각해본다. “내 모든 관계는 나에게 달려 있다”는 일리 있는 말이다. 관계를 지속할지 단절할 지의 결정은 내가 내리는 것이니까. 부디 선택이 아닌 제공된 관계 속에서 폭력과 범죄 피해를 입은 이들에게 비난을 돌리는 생각이라 생각지는 말아 주시길. 선택 가능한 상황에서 가능한 휘둘리지 않는 관계 관리에 대한 이야기이다.

 

한국 사회에 만연한 무슨무슨 모임에 거의 나가지 않는 편인데, 딱 한 번 초등동창회 나갔다가 초등시절 추억만 내내 하는 걸 경험하고 다시 간 적이 없다. 유학시절 한 순간의 향수병이었는지 유학생 모임에 딱 한 번 참가했다 모교 정문 사진 보고 울고 위로하는 거 보고 스스로에게 매질을 하며 돌아왔다.

 

이런 내게도 운이 좋아 오랜 시간 나를 참아 주고 견뎌 주는 친구들이 있다. 신비롭게 생각하고 감사하게 느낀다. 내게 오랜 친구는 오래 전에 알던 친구가 아니라 오래 알아오는 이들이다. 그 시간 동안 경험이 달라지면서 우리 모두는 다른 사람이 된다. 그러니 한편으로 오랜 친구란 만날 때마다 새로 사귀는 것과도 같다.

 

서로가 변한 부분 - 감정, 사고, 관계 패턴 - 이 함께 할 수 없으면 관계는 서글프지만 역사가 된다. 보통은 이 몇 문장처럼 매끄럽게 모든 게 정리되지도 않을 뿐더러 고민도 많다.

 

우정과 관련된 고민을 차치하고도, 가해자는 멀쩡하게 사는 반면 10년이 넘게 증오로 버티며 사는 내담자의 이야기를 만난다. 어렵고 아프고 화가 나는 상황이다. 그래도 조금이라도 속 시원하게 잊어주고 욕 실컷 해주고 더 이상 너 따위에게 내 귀한 시간을 쓰지 않을 것이며 휘둘리지도 않겠다 싶은 여지와 힘이 있으면 부디 그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확실히 범죄를 밝히고 처벌하고 해야 하는 일이라면 반드시 그래야하고 잊지 말아야 하겠지만, 심정적 앙금과 오래된 분노가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라면 부디 조금이라도 편해지시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연세 드신 분들이 지난 세월 얘기를 반복하시는 경우가 많은데, 도저히 용서가 안 된다, 가슴에 맺혔다, 이런 내용들이 나오면 헤아리지 못해 안타깝기 그지없다.

 

저자는 ‘스스로를 피해자로 본다면 어디로 도망하든지 결과는 똑같고 모든 곳은 지옥’이라고 하는데, 분명 일리가 있겠지만, 나는 망각이라는 도망법 역시 치유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잊어버릴 수 있는 불쾌한 경험과 분노는 잊는 것으로 다시는 마주치지 않게 잘 도망가는 것도 좋다.

 

예를 들어 공공장소에서의 성추행범을 잡을 길이 없으면 그 불쾌한 느낌에 내내 시달리지 말고 한시 바삐 잊자. 그놈은 그런 짓을 계속하다 언젠가 꼭 처벌 받으리라 믿자.

 

- 분노는 정상이고 정당한 것이지만 스스로를 향할 때는 조심해보자. 자신을 벌주는 형태로 바뀌면 힘껏 멈춰보자.

 

- 저자는 두려움이 무력감을 느낄 때 생긴다고 한다. 역시 맞는 말이다. 나는 기후위기만 생각하면 무력감에 두렵다. 두려움으로 인해 자신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도록 애써보자.

 

- 용서는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말 역시 맞는 말이다. 그런데 용서에는 절차가 필요하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가해자가 제3삼자가 피해자에서 쉽사리 용서란 제안을 먼저 하지 않길 바란다. 그런 짓은 용서할 수 없다.

 

- 내 인생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나로부터 시작된다는 말은 내가 듣기에는 많이 강하다. 그렇지만 내가 내 인생을 주도할 권리 행사자라는 생각도 잊지 말고 살자. 그래야 남이 함부로 내 삶을 망가뜨리거나 이용하려 들 때 잘 알고 저항할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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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산 - 신의 숲, 왕의 산
김호상 지음 / 지식과감성#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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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에 어떤 기억이 있으신가요? 경주 단체 사진이 있는 제 세대 분들도 있으실 테고, <나의문화유산답사기> 읽고 방문하신 분들도 있으시겠지요. 물론 고향이시거나 근무처이시거나 현거주지이시거나 각자의 의미가 있는 장소이겠지요.

 

저도 그렇습니다. 여러 장면들이 있는데, 어느 해 한 겨울 경주에 무척 많은 눈이 내린 날 방문한 불국사는 아주 진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가장 좋아하는 풍경이기도 합니다. 바쁜 친구 덕에 한 여름에 남산 등반을 하기도 했습니다. 안전요원들이 조심해서 잘 다녀오라고 걱정하던 다정한 눈빛들도 기억이 나네요.

 

그리고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태가 터지고 경주 동국대 의대 교수이자 환경연합 활동 하시는 김익중 교수께서 <한국 탈핵>을 출간하시고 북토크 겸 강연하실 때 뵙고 경주에 다시 내려가 보았습니다. 수많은 분들의 추억과 시간이 흐르는 땅에 무슨 짓을 한 건지…… 몹시 분노했습니다.

 

장소를 방문하는 일은 책을 읽는 일과 비슷합니다. 일독으로 알 수 있는 내용이 한정적인 것처럼 방문으로 알 수 있는 것들도 제한적이지요. 오늘은 익숙한 듯 싶었던 경주에 ‘낭산’이 있다는 것을 처음 배웁니다.


김호상 저자는 역사고고학 연구자로서 낭산*의 가치와 역사성을 알리기 위해 문화유산해설서인 이 책을 출간했습니다. 오래 전 <언덕에 올랐다 산에서 내려온 잉글리시맨>이 생각나는 도심의 낮은 구릉을 경주에 사시는 분들은 산이라고 오래 부르셨습니다. 예전 모습은 많이 달랐을 수도 있겠습니다.

 

* 낭(狼)산 : 이리 랑. 산의 지형이 ‘이리’가 길게 엎드려 있는 모습.

 

“신라인들에게 낭산은 신들이 하늘에서 내려와 노니는 성스러운 숲으로 추앙받았던 곳이며, 높은 격을 지닌 나라의 제사를 지낸 진산 (...)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작은 동산이지만 (...) 신라문화의 깊은 금광 같은 곳.”

 

낭산의 행정수도는 경주시 보문동입니다. 동네 이름도 역시 보물 가득한 명칭답습니다. 무려 실성왕 12년(413)년부터 성스러운 산으로 여겨졌고, 선덕 여왕릉, 사천왕사지, 능지탑, 마애불, 황복사지 삼층 석탑이 낭산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왕들의 장례를 지낸 곳이고 비를 세운 곳이고 왕사를 포함한 절들을 지은 곳이니 낭산은 신라시대 경주의 행사장이자 광장이자 무대였습니다. 신화와 역사의 경계처럼 느껴지는 솔거, 양지, 월명, 최치원과 같은 인물들 역시 낭산에 역사적 흔적을 두고 있습니다.

 

이 책을 읽고 경주 낭산에 대한 자료들을 찾아보니…… 많습니다. 잘 알고 역사기행을 다니시는 분들도 계시고 조사 연구하는 분들의 글도 있고 보도 자료들도 있습니다. 명칭 하나를 안다는 것이 경주라는 세계에 대한 경계선을 쭉 늘려 줍니다.

 

역사기행을 가보면 좋겠습니다. 모임을 통해 공부하고 가도 좋고 문화해설사와 함께 해도 좋고 가족과 느긋하게 다녀와도 좋겠습니다. 꼭 많이 배우고 봐야겠다는 마음을 내려놓고 겸사겸사하는 마음으로 옛날 옛적 신라인들처럼 신화와 현실의 경계에서 상상하고 소원하고 즐겁게 문화를 누리는 경험이어도 좋겠습니다.

 

판데믹 시절에 국내의 여러 장소들과 관련해서 새로 계발한 관광포인트들만이 아니라 역사 이야기를 발굴해 주는 책들이 많아지면 반갑겠습니다. 차를 달려 남한 한 바퀴 돌고 답답하다, 갑갑하다 하소연한 시간들이 조금 부끄럽고 후회되는 독서였습니다.

 

"모든 여행은 정확히 그 속도만큼 더 따분해진다."  미술평론가, 존 러스킨

 

귀한 시공간인 경주와 거주민들 그리고 우리 모두를 위해 경주 땅 속에 묻은 방사성폐기물 처분장 - 경주방폐장 - 에 대한 대책도 수명이 진작 끝난 월성핵발전소에 대한 대책도 하루빨리 잘 마련되길 더불어 바라며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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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버스 - 3,000년 아랍 역사 속을 달리는 ㅣ 한 권으로 끝내는 역사 버스 시리즈 4
이희수 지음, 한창수 그림 / 니케주니어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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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좋아하시는 분들 중에 이슬람과 아랍 역사에 대해 잘 아시는 분들이 많으신가요. 한국은 아주 오랫동안 일본과 미국의 시선으로 본 역사를 자국민들에게 교육해왔고 그 덕분에 세계사에 관해 저는 아주 무지했습니다.

 

유럽으로 유학을 가니, 서유럽이긴 했지만 미국 시각에서 벗어난 다른 역사가 좀 보였지요. 그래도 여전히 유럽 중심 역사이긴 했습니다.

 

귀국한 뒤 이리저리 찾아봐도 미국과 유럽, 즉 패권국가들 이외의 역사에 대해 읽고 배울 책들조차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다행히 르몽드(Le Monde diplomatique)*지가 한국어로 번역 출간된다고 해서 구독하게 되었습니다. http://www.ilemonde.com/

 

* 일간지 르몽드의 자매지. 약칭은 르 디플로. 국제 뉴스를 다루는 월간지. 30개 언어로 51개 국제판이 발행 중. “세계를 보는 창” 노암 촘스키 https://www.monde-diplomatique.fr/

 

그래서 세계사에 대해 세계의 현실에 대해 잘 알게 되었나, 하면 그런 것은 아닙니다. 어릴 적부터 받은 훈련이 부족하고 각 나라들에 대한 기초 지식과 정보가 부족하고 공감할 감수성과 기억이 없으니 읽는 것조차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거의 유일한 창이라 의무교육처럼 읽고 있습니다. 여러 해 전에 지하철에서 르몽드지를 읽는 교복 입은 학생을 보고 반가워 말 걸 뻔하다 간신히 자제한 적도 있습니다. 현실 역사 속의 인류로 말고, 다른 한편 우리는 이슬람과 아랍에 대해 아주 익숙하기도 합니다. 할리우드 영화 속 테러납치범들은 모두 이들이었으니까요.

 

“아랍 사람들과 유대인들은 <성서> 속의 같은 백성이야. 함께 유일신을 믿고 팔레스타인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사막 땅에서 2천 년간 유목과 목축을 하며 물과 먹을 것을 나누고 평화롭게 살아왔지. 아마 역사에서 이렇게 오랫동안 서로 싸우지 않고 협력해 온 민족도 없을 거야.”

 

유대인과 이런 역사를 나누었는데, 유대인 자본이 많은 영화계가 이런 영화를 만들어왔다는 모순이 참 현실답습니다. 적이 있어야 힘이 나고 전쟁이 있어야 수출이 매끄러운 군산복합체 거대산업을 운영하는 미국은 2001년 9.11 비극 이후 내내 자본을 투자하고 스타 배우들을 내세워 이슬람과 아랍에 대한 문화적 적대성을 키워왔습니다.

 

다른 한편 본토에서 미국의 꼭두각시 대변자 역할을 잘 할 정권 수립에 애써 오다 다 실패하고 얼마 전 그야말로 야반도주하듯 도망을 갔지요. 20년 동안 미국이 선전한 세상에서 언젠가 살게 될 거라 믿고 살았던 사람들은 이제 어떻게 살아야하는 걸까요.

 

너무 미국 얘기만 하는데 이 시기에 저는 영국에 살았습니다. 부시의 푸들이란 멸칭으로 불리던 총리는 천만 명이 넘는 영국인들이 반전 시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습니다. 학교 직원이 인디펜던트지에 실린 인권변호사 출신 한국 대통령도 참전에 동의했다는 기사가 났다고 알려 주기도 했지요.

 

저는 이슬람 근본주의자도 아니고 그들에게 동의하는 바는 전혀 없습니다. 이슬람의 역사에 대해 뭘 하는 것도 참 없습니다. 19억 명이 넘는 무슬림들이 대략 3,000년이 넘게 지구상에서 함께 살았는데 가장 친숙한 이미지가 검은 피부의 테러납치범이라니…….

 

“무함마드는 (...) 종교적 명상을 하면서 마음속에 품어 왔던 사회의 악습과 모순에 대해 고민하던 중 610년에 알라의 첫 계시를 받아.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전해진 하느님의 계시는 22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단다. (...) 계시를 받은 내용을 아내에게 예기하면 아내가 그것을 받아 적었어. 그게 <꾸란>이야.”

 

“압바스 왕조는 아랍 사람들의 특권을 인정하지 않았거든. (...) 무슬림이라면 아랍 사람이든 아니든 똑같은 세금을 징수했지. 이슬람을 믿는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원칙을 실천한 압바스 왕조는 아랍 제국이 아니라 진정한 이슬람의 가치를 실현한 이슬람 제국이라고 할 수 있단다.”

 

어쨌든 친미라면 지지 않는 한국에서도 미국 뒤처리에 동참하는 한편 한국에 조력한 이들에 대한 책임을 진다는 대의로 무사히 탈출시켜서 한국 땅에서 살아갈 준비와 대책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디아스포라의 삶을 살게 될 이들의 처지를 생각하며 아주 쉬운 이 책으로 가족 모두와 읽고 배워봅니다.

 



역시나 여기저기서 걸러지고 취사선택된 언론에서 뿌려대는 이미지와 기사 내용들은 부족할 뿐만 아니라 불의합니다. 게으른 제 탓도 크지만 여성에게 생지옥과 같은 세상이란 공포가 심했는데, 나라 별로 여전히 계급과 자산에 따른 기회의 불평등은 있지만, 어쨌든 이슬람 국가들에서도 직접 선거를 통해 여성 대통령, 총리를 선출하고, 사형 제도를 폐지하는 등 개혁 조치들이 점차 더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제 이슬람 여성을 다른 각도로 바라봤으면 좋겠어. (...) 항상 떠올리는 억압과 폭력, 전근대성의 이미지는 종교적인 문제보다는 사회 구조적인 문제에 더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이니까. (...) 이슬람 사회 역시 가부장제 사회에서 양성평등의 사회로 바뀌고 있으니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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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하다는 착각
마이클 샌델 지음, 함규진 옮김 / 와이즈베리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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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에 담은 정치철학적 개념들을 모두 사라지게 만드는 번역본의 제목. 그 점이 아쉽다.


The Tyranny of Merit: What's Become of the Common Good? (2020년)

  

<세계지식포럼> 덕분에 미뤄뒀던 책을 일단 펼쳐 보았다. 아주 오래전 대학원 강의에서 만난 존 롤즈의 정의론도 띄엄... 띄엄... 겨우 떠오르고 여타의 지식정보도 생각도 산만하단 생각에 일독을 결정했다.

 

마침 대선 정국으로 들어선 한국 정치계에서는 능력주의에 관한 어떤 기본적인 이해에서 출발한 건지 모를 능력주의를 언론 패널 이외에 별 다른 경력도 없는 야당 대표가 주장하여 몹시 빈정이 상해있던 시기이기도 했다.

 

수업 시간에 만난 미국 자유주의자들의 논문에는 참 이상한 예시들이 많았다. 언제나 무언가 부족한 상황에서 ‘골고루’ 나누다 다 죽는 것이 더 나은가, 한 명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살리는 게 옳은가? 뭐 그런 논조.

 

듣다 지쳐서 왜 매번 이러냐고, 이건 원하는 답을 위한 설계된 질문 아니냐고, 왜 세상을 보는 눈이 이 따위(?)냐고 발작하듯 말이 튀어나온 적이 있다. 그리 친하다는 생각도 동류란 의식도 없던 교수님이 “우리랑은 논조의 전제가 많이 다른 것 같아.”라고 말해서 놀랐다.

 

어쨌든 나는 그런 류의 분석도 질문도 결론도 아주 별로이다. 만인의 만인의 투쟁 상태에서 제한된 자원을 획득하는 방법은 자신의 노동력 혹은 능력을 활용하는 것이고, 그런 행위로 온전히 사적인 소유물로 만드는 성취만이 정당하다는 쪼잔한 논리.

 

현실에서 여전히 큰 목소리를 가진 능력주의는 물론 이런 소박한 수준이 아니다. 샌델이 지적했듯이 ‘각자의 재능에 따라 뭐든 주는 대로 받을 자격이 있다’고 한다면, 재능이 뛰어난 이들이 획득한 성공에 대해 사회는 아무런 간섭을 할 수가 없다.

 

그 논리가 성립하려면 성공의 모든 공덕이 주체 혼자의 재능에 한정한 이라는 확인이 필요하다. 물론 그런 일은 없고 그럴 수도 없다는 것이 더 현실적인 분석이다. 어쨌든 능력주의에 따르면 덜 성공한 사람들을 배려할 이유는 전무하다. 따라서 능력주의를 믿는, 신념으로 삼은 이들에게 연대는 무의미하다.

 

실생활 공간에서 공중 부양해서 아무 도움 없이 뭔가를 성취한 뒤 다시 착지한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샌델은 능력주의의 문제점들에 대한 해답은, “우리가 설령 죽도록 노력한다고 해도 우리는 결코 자수성가적 존재나 자기충족적 존재가 아님을 깨닫느냐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운이 좋아 살아남았고 운이 좋아 성공했다는 말은 농담이 아니다. 그것 이외에 인류 전체가 모두 다른 출발선에서 출발하는 현상을 설명할 방법은 없다. 국적, 사회, 지역, 가정, 가족, 학교, 친구 그리고 살아가면 영향을 주고받는 모든 것은 우연의 산물들이다.

 

그러니 국가와 사회는 모두 다른 출발선을 세심하게 살펴 잘 맞춰 주고 부족한 것들을 채워주는 그런 상냥한 역할을 하면 이상적일 것이나, 그런 호시절은 인류가 전쟁을 멈춘 적이 없는 것처럼 불가능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니 결심만 하면 바뀔 수도 있는 개인들이 좀 더 겸손하고 관대하면 좋겠다.

 

능력을 이유로 부디 타인에게 적의를 드러내지 않았으면 한다. 각자의 능력의 차이란 것도 알고 보면 별반 대단하지 않을 뿐더러, 어떤 인간도 능력의 우위를 영원히 유지할 수 없다. 연령에 따라 변하는 체력은 물론이고 아이들과의 지력 대결에서 늘 이길 수 있는 어른도 없다.

 

어떻게 살 것인지도, 혼자 뭘 성취하는 것도 힘들지 않은가. 그러니 비교, 비난, 순위, 탈락, 배척하는 세상 말고 좀 더 다정한 공적 삶을 상상하고 만들어 나가는 일에 집중하는 건 어떨까. 평소 게으르다는 말을 너무 자주 하는 내가 하는 말은 설득력이 없을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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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인간에 대하여 - 라틴어 수업, 두 번째 시간
한동일 지음 / 흐름출판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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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일 교수의 책입니다. 유학 중에는 피할 수 없어 라틴어 공부를 잠시 하긴 했지만 - 그리스어보다는 쉽다는 위안 - 살면서 그것도 한국에서 라틴어 책을 읽고 강의를 막 듣고 싶고 저자의 팬이 될 줄이야. 최고로 유쾌한 뜻밖이고 우연이고 조우였습니다.

 

예수천국 불신지옥은 믿지 않지만, 삼위일체론을 연구하신 큰 이모부 논문도 재밌게 읽었고, 존경하는 수녀님과 추기경과 교황도 계시고, 동네가 가까웠으면 그 교회에 다녔을지 모를 무척 멋진 목사님도 내내 좋아하고, 스승처럼 여기는 불교계 승려도 계시고, 존경하는 유학자도 계시니, 어떤 의미로 저는 무척 ‘종교적인 무종교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인류가 새로운 믿음을 받아들였던 건 궁극적으로 그것을 받아들였을 때 뭔가 좋은 점이 있으리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미 무엇에든 믿음을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새로운 종교를 받아들이는 마음에는 좀 더 나은 삶에 대한 희망과 기대, 안식처에 대한 간절함이 깃들어 있었겠지요.”

 

한국적 특색을 지닌 종교계의 모습에 때론 충격을 받기도 하고 동의할 수 없는 주장들도 만나지만, 한동일 교수께서 하시는 이야기는 불안도 두려움도 없이 다 반갑게 듣고 싶습니다. 공감과 동의를 기대했는데, 그 이상의 놀라운 이야기들을 만나 다시 한 번 반합니다. 참 어려울 이야기를 참 쉽게 들려주십니다.

 

“교회는 대중이 교회와 멀어지게 된 이유에 대해 세속주의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박해와 시련 때문이 아니라 교회 스스로가 사람들을 교회로부터 멀어지게 한 경우가 훨씬 더 많았습니다. (...) 인간은 자기의 욕망을 위해서라면 신에 대해서조차 조작하기를 서슴지 않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이런 모순된 상황을 신앙으로, 또 종교로 받아들이며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신실한 믿음만 가진 이들이 아닌 목사 혹은 신부라는 타이틀을 가진 종교인들의 지위에 관해 설명해주시면서 믿지 않는 혹은 믿지 못하는 이들이 사고하는 방식을 분석하듯 명쾌하고 친절하게 들려주십니다. 물론 진심을 담아 잘 전하고 싶으신 이야기 주제는 종교와 믿은 이들에 대해서겠지요.

 

“많은 사람이 자신의 종교를 밝히고 큰 성당이나 교회, 사찰을 비롯해 각자 자기가 섬기는 신에게 경배 드리는 성전을 찾아갑니다. 기도하거나, 성경이나 불경을 필사하기도 하지요. 그러나 그 같은 모습 자체가 그를 종교인으로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 태도가 그 사람을 보여줍니다. 자기의 종교적 신념이나 가르침이 드러나는 어떤 행동은 우리 사회와 이웃에 그 종교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는 사실을 늘 잊지 말아야 합니다.”



무종교인들에게 아무런 불편함을 주지 않는 종교이야기라는 점에서 이 책은 최고로 강력한 전도서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라틴어 수업>에 홀리신 분들은 언제가 되든 꼭 읽게 되실 책일 지도.



....................................................

 *     O vos omnes qvi transitis per viam,

attendite et videte si est dolor sicvt dolor mevs.

 

오, 길을 지나는 모든 사람들이여,

나의 고통과 같은 아픔이 있다면

주의를 기울여 보십시오.

 

이 글귀 속 ‘비데테videte’라는 말에 주목해봅니다. 이 말은 ‘보다’라는 의미의 ‘비데오video’의 명령형입니다. 이 동사에서 ‘바라봄, 직관’을 의미하는 명사, '비시오visio'가 파생하고, 이 명사는 영어의 ‘비전vision’이 됩니다. 고통 속에 있던 예수는 우리에게 보기를 권하는 것이 아니라 ‘보라’고 강하게 명령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은 ‘바라봄viso’에서 시작됩니다. 개인의 고통도, 사회의 아픔과 괴로움도 그 해결을 위한 첫 단계는 ‘보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여기가 모든 이해의 출발점입니다. 우리는 국적, 성별, 나이, 종교를 비롯해 많은 부분에서 서로 다를 수 있지만, 인간이기에 분명히 ‘같은 아픔’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 바라봐야 하는 것은 ‘차이’가 아니라 ‘같음’입니다.

 

나아가 ‘바라봄’이 늘 타인을 향한 것이라면 타인의 단점, 잘못된 점만 쉽게 보게 되어 결국 상대를 탓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래서 타인을 바라보는 만큼 더 절실히 주의를 기울여 자기 자신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세상의 조화로운 질서에 관해 연구하려면, 인간은 자기 자신을 보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진실하고 치열하게, 내면을 바라보는 눈앞에 등불을 켜서 들어야 합니다. 들추고 싶지 않은 아픔이나 불편한 양심, 혹은 잘못한 것에 대한 회한과 고통은, 자기애와 만나면 이기적인 마음으로 변하기 쉽습니다. 또한 이런 감정들은 회피에 능해 자꾸 안으로 숨어들기 때문에 스스로 자주 불을 밝혀 바라봐야만 합니다.

 

“질문하는 인간에게는 분명히 언젠가 어떤 형태로든 답이 온다는 것을 믿으며, ‘나는 어떠한가’라는 질문을 해봅니다.”

 

사실 제게는 정말 하기 어려운 일, 하기 싫은 일이 ‘나의 부족함과 실패를 마주하는 것’이었는데요. 저는 이제야 그것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실패와 실수를 마주하기 위해서는 고통스럽고 괴로웠던 그 순간을 다시 떠올려야 합니다. 한없이 작게 부서지고 무너지는 자기 자신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지우고 감추려고 해도 그 기억은 결정적인 순간에 더 선명하고 또렷하게 다가와 저를 괴롭혔습니다. 무엇보다 나이가 들고 세월이 흘러도 실패했던 그 어느 한순간에 머물러 있다는 점이 고통스러웠지요. 거기에서 조금도 나아가지 못했다고 느꼈습니다. 그러니 살기 위해서라도 그 순간에서 벗어나야만 했는데, 그러려면 나의 실패와 정면으로 마주해야만 했습니다.

 

모든 문제 해결은 마주하기 싫은 것을 마주보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렇게 보기 싫은 것을 마주해나가는 것이 삶의 여정이며 일상의 진보가 아닐까 합니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돌아가신 부모님과 그 연배의 세대가 존경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그들이 어떤 업적을 남겼기 때문이 아니라, 각자 ‘어떻게 주어진 삶을 살아냈을까’에 대한 경의라고 해야겠지요. 어려운 시대에 성장한 것에서부터 직장을 얻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고, 장성한 자녀를 결혼시키고, 자신의 노년을 맞기까지, 그 어느 것 하나 쉽지 않았을 겁니다. 어디에도 어려움을 호소할 길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삶의 무게를 지고 걸어온 분들입니다.

 

어찌 보면 인간은 각자 남에게 말할 수 없는 아픔과 고통이 있다는 점에서 평등한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사막을 걷는 사람은 사막에 난 길을 보고 걷지 않는다고 합니다. 바람이나 비, 동물 때문에 변하는 길이 아니라 변하지 않는 밤하늘의 별자리를 보고 길을 걷습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에 바라보는 것. 저는 그것이 아마도 사막에서 바라보는 별과 같지 않을까 합니다. 어떤 별을 바라보는가에 따라서 우리가 가는 걸음의 방향은 달라질 겁니다. 그 별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길잡이가 늘 부지런히 움직이는 ‘사람’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지켜야 할 누군가, 사랑하는 누군가, 존경하는 누군가를 바라보며 인생의 방향을 찾아가기도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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