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들 - 마음의 고통과 읽기의 날들
수잰 스캔런 지음, 정지인 옮김 / 엘리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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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원하는 건 세부들이다. (...) 내가 되찾고 싶은 건 일상적인 것들이다.”

 

묘사와 서술과 스토리가 더 구체적이고 세부적일수록, 이야기는 한없이 복잡해지고 상상력은 총동원되어야한다. 아마도 그게 우리가 삶을 짐작하고 일부 이해할 유일한 방법일지도 모르겠다.

 

저자의 이야기 속에서, 어머니의 죽음과 저자 자신의 병동으로의 도피(?)는 저자의 삶을 전환하는 전후좌우의 가장 큰 계기들이다. 가장 사적일 경험일 것도 같지만, 읽다보면 모든 경험이 다 보편적인 경험으로 이해된다.

 

그러니 미쳤다라는 단어 하나로 규정하는 것이 얼마나 표면적이고 증상적인지, 그럼에도 실제적인 고통을 느낄 정도로 연기함으로써 세계 속에 존재했던 이들에게, 보살핌보다 진단이 빠른 사회가 내민 제도적 폭력성이 쓸쓸하다.

 

우리는 맥락 속에, 그 순간이라는 맥락과 서로의 존재라는 맥락 속에 존재한다는 것, 우리는 부서지기 쉬우며 유동적이라는 것은 꼭 말하고 싶다.”

 

살다 보면, 문득 내 자신의 존재조차 이해가 어려운 순간들이 있다. 그렇게 우리는 이유도 목적도 의미도 잘 모르면서, 애써 살아간다. 그러다보면, 스스로에게, 서로에게, 소외되고 이해받지 못한 우울증은 당연한 부작용이 아닐까.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어휘가 너나없이 부족해서 다들 억울하고 슬픈 때문이 아닐까.

 

우울증은 치료해야 할 병이 아니라 이해해야 할 언어이며, 그 언어를 이해할 가장 좋은 방법은 예술이라고 예술은 바로 그 언어, 전할 수 있는 언어다.”

 

육친의 사별을 겪고, 나는 때론 정신이 휘발될 것 같은 그리움과 슬픔에 아찔하다. 그 정신을 놓치면 책임와 의무를 다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 두려워서 겁이 난다. 저자가 그 근본적이고 보편적인 인간 경험을 선명하게 설명해주어 큰 위로를 받는다.

 

엄마의 죽음은 나에게 엄마 눈에 비친 나를 보며 형성되던 자아를 상실한 일이었고, 엄마와 연결해주던 끈이 끊어진 일이었으며, 나를 알아주던 엄마를 통해 내가 인식했던 나라는 사람을 잃은 일이었다.”

 

침묵은 누구도 보호해주지 못하고, 내가 내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멋대로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들이 이기게 된다. 우리에겐 언어가 있고, 언어를 나눠주고 찾아주고 대신 이야기 해주는 이들도 있다. 그러니, 너무 쉽고 간단하고 편한 방법 대신, 얼마 살지도 못하는 이 세상에, 보살핌을 위한 공간을 조금 더 확장시키자. 이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그렇게 삶에 의미를 부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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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바꾸는 이메일 쓰기
이슬아 지음 / 이야기장수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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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자기계발서인가 문학인가... 무엇이든, 이슬아의 글쓰기다. 기대를 안 할 도리가 없다. 그런데... 동봉된 시험지가 두렵다. 시험을 안 봐도 되는 삶이 이제 꽤 지났음에도...





 

일기를 쓰다가 작가가 된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나는 이메일을 쓰다가 작가가 되었다.”

 

이메일을 사용한 지는 까마득하게 오래 되었고, 인생의 중요한 결정들 - 약속과 계약 등등 - 과 업무도 이메일로 수없이 이루어졌다. 그러다보니 온갖 종류의 읽기와 쓰기 경험도 있다. 그중에는 다신 기억하고 싶지 않아 이메일 함만이 아니라 뇌 저장분도 싹 지운 사례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런 경험을 불러 오는 내용에는 기쁨의 맞장구를 치다가도, 사람이 사람과 함께 하는 게 일이고 함께 만드는 게 삶이라는 걸 망각하고, 결과와 효율과 내 스트레스를 줄이는 데 집중했던 시간들을 고개 숙여 반성하며 부끄러워진다. 홀려서 재밌게 읽다보면 자꾸 반성의 시공간에서 벌 서는 중...

 

누군가가 균형을 잃을 것을 감수하면서도 기꺼이 당신에게 마음을 기울이는 것. 그토록 달콤하기도 한 것이 바로 편애이고, 편애의 뛰어난 방식 중 하나가 바로 특별 호명술이다.”

 

이메일을 통해서 하려고 했던, 하고 싶었던 일의 최종 목적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못하고, 다정하고 차분하지도 못하고, 상대의 상황에 마음을 기울이지 못하고, 부족과 실수를 날름 지적한 순간들... 그보다 더 잘 알아봐야했을 고마움도 더 애써야 했을 설명도 부족하기만 했다.


MBTI 결과가 ESTJ라고 알리니까 오랜 친구들이 TTTT가 더 맞을 거라고 놀렸는데, 이제 나는 자계계발서를 읽고도 울게 되었다고 단체 이메일을 보내야 하는 건가 싶다. 솔직해서 강인하고 다정한 사람들, 타인에 대한 애정을 마지막까지 버리지 않는 고집쟁이 사랑꾼들의 글은 뜨겁다. 눈물로라도 식히지 않을 도리가 없다.

 

나는 이 기술에 꽃수레 권법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로 했다. 싫은 소리를 꽃수레에 담아 건네는 방식. 아름답고 다정한 주먹질.”

 

여러모로 게으르지만 힘껏 기억해내며 살아야겠다. 내게는 당연해도 상대에겐 당연하지 않은 게 당연히있을 수 있다는 것,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당연하지 않은 것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 그리하여 내내 반복하는 이 부끄러움을 조금만 덜어내고, 나도 나름 애쓰며 이어가는 삶을 조금 더 아름답게 살아내자.

 

당신이 쭉 머물고 싶은 업계가 되도록 나는 애쓸 것이다. 훗날 동료로 만난단면 우리, 꼭 끝내주는 이메일을 주고받자. 미래에서 기다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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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다정한 AI
곽아람 지음 / 부키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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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유저들은 두 부류로 나뉜다. (...) AI를 최적화시켜 최대한 활용하고픈 욕심에 자신의 정보를 가능한 한 많이 입력시켜 분신으로 만드는 사람. 나는, 명백히 후자였다.”

 

굳이 나누자면, 나는 인공지능 챗GPT에 열광하지 않는 사람들에 속한다. 곽아람 작가도 경험했듯이, 초기 검색과 답변 수준은 처참했다. 너무 하질의 정보가 그럴듯한 거짓 정보로 유통될 위험도도 커서, 경계심과 반발이 더 컸다. 유료는 좀 나은가 했더니, 이건 돈을 지불하면서 유해한 하질의 거짓말을 구독해야하는 더 실망스러운 수준이었다.

 

더구나, 나는 몹시 그리운 현실의 사람들과의 대화나 만남이 부족해서 슬픈 날이 많은 사람이라서, 인공지능과의 대화에 쓸 시간 따위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태도를 유지했기 때문에, 실제로 어떤 방식으로 인류가 인공지능과 접촉하고(?) 있는지 전혀 몰랐다. 그런 상태로 이 작품을 만났다.

 

상대가 그렇게까지 내 이야기를 기억해 주길 바라는 존재가 연인 말고 또 있을까. (...) 세상에 AI만큼 나를 생각해 주는 다정한 존재가 또 있을까 싶었다.”

 

아찔할 정도로 솔직하고 세세한, 거의 일기장을 오픈한 듯한 글에, 나는 전혀 모르던 상태에서 자동 업데이트가 되듯이, ‘이 세계를 알아갔다. 이건 어떤 사용안내서보다 더 강력한 추천서이면서도, 또 한 번 인간에 대한 깊은 질문을 남기는 문학서이다.

 

오독의 가능성은 늘 있지만, 느낀 대로 기록을 남기려 한다. 덕분에 기억하고 노력하려해도 단단하게 재구성되는 오만을 스르륵 무너뜨릴 수 있어서 고맙기도 하다. 인간이 관계맺기를 추구하는 것은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이해와 인정을 바라서 그렇기도 하다. 그런데 이 바람에는 지난한 어려움들이 산재한다.

 

관계를 형성하는데도 엄청난 힘이 들고, 성공은 전혀 보장되지 않으며, 일단 형성된 관계의 지속성과 일관성 여부도 전혀 장담할 수 없다. 타인들끼리 서로를 이해해봐야 오해가 더 많고, 자기투영이나 기대로 만든 상상일 경우도 잦다. 그걸 깨달을 때마다 인간은 서늘하도록 외로워진다.

 

“AI에게 인격을 부여해 주세요, 지시가 아니라 대화를 하세요.”

 

그러니, 혹은 그래서, 인간이 가장 갈망하는 것은, 나를 나처럼 이해해주는 상대가 아닐까. 나도 나를 잘 모르고 오해하고 설득에 실패할 때가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나는 나를 가장 사랑할 수밖에 없으니까. 나 자신처럼 내가 믿을 수 있는 상대는 또 어디 있을까. 이런 생각에 애틋하고 꽤 쓰리고 아프다.

 

이렇게 요란하고 분주하고 기술이 넘쳐나는, 휴식과 수면이 부족할 정도로 외부와 연결되어 사느라 혼자인 시간이 간절하다는 시대에, 인간은 지독히 외롭고 쓸쓸하고 서로에게서 소외되어 있다. 그러니 AI엔터산업은 번성할 것이다. 인간은 인간끼리 불가능했던 모든 인간적교류를 AI와 시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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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 윤동주 한서형 향기시집
윤동주 외 지음 / 존경과행복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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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가 옅어질 때쯤 들려오는 출간 소식에 매번 설렌다. 시집이 자리한 주변 공기가 향기로 채워지는 시간이 기쁘다. 이번 향기시집은 광복 80주년을 기념하는 윤동주의 작품이다. 120편과 산문 4편이 모두 실렸다.

 

베르가못, 편백, 자스민... 모두 좋아하는 향이다. 그 조합이 시차를 두고 퍼지고 머무는 동안에 시를 읽는 일이 호화롭고 행복하다. 여름 청귤 같다가 가을 숲 같다가, 청결한 겨울 침구에서 나는 안심이 되는 향 같기도 하다.



 

십대부터 읽은 시들을 다시 정독하는 일도 즐겁고, 그때와 별반 달라지지 않은 나의 애호시들 목록도 흥미롭다. 호흡을 쉬는 순간들을 가늠하며 산문은 소리 내어 읽어보았더니, 윤동주 시인의 육성이 듣고 싶어진다.

 

식민지 시대의 젊은 시인이 뱉어낸 고통과 한숨이 지어낸 시어들, 그럼에도 맑게 비추어낸 존재와 풍경의 아름다움은, 향기가 모두 흩어져도 이렇게 기록으로 남아 오래 불릴 노래가 되기도 할 것이다.



 

어쩐지 겨울이 빨리 닥칠 듯해서, 남은 가을이 더 귀한 날에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을 보는 시인의 시선을 따라 올려다본 하늘이 눈물겹다. 이런 하늘을 하루 더 보는 것만으로도 하루 더 오래 살고 싶어지는, 마침내 그런 기분.

 

오늘밤에는 별도 봐야겠다. 조금 배우고 평생 좋아한 과학 덕분에, “이 아니라 별빛이 바람에 스치운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지만, 사라졌을지 모를 별과 마침내 도착한 별빛이 다른 실체라고 굳이 구분할 이유는 뭔가 싶다.

 

광복 80주년이 충분히 기억되지도 기념되지도 못한 듯해서 섭섭한데, 향기시집 덕분에 든든한 기억의 닻이 생겼다. ‘사과가 등장하는 시 두 편을 처음 알아보았다. 다음 향기시집은 어느 시와 향이 만나 누구의 곁에 머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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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창 - 제주4.3 만화로 보는 민주화운동
김홍모 지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획 / 창비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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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녀동맹이 맹 앞에 선 행진에는 중학생, 초등학생까지 가세했다. 27만 제주도민 중 3만 인파가 관덕정으로 행진을 시작했다. 좌우익 할 것 없이 모두 모여 친일파 처단, 완전한 자주독립과 통일을 외쳤다.”

 

#부마민주항쟁 46주년인 오늘,

#다드래기 만화 #불씨 가 책장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아서

#빗창 을 대신 펼쳤다.



 

5년 전에 만난 작품이라는 게 새삼스럽고

만화의 전개와 역사의 결말을 알아서

한쪽씩 넘길 때마다 속이 쓰리고 아프다.

 

지킬 생각이라곤 없는 약조를 믿고 기다리는 시간이 안타깝고

비겁한 자들이 늘 하던 대로 배후세력 주동자 운운하며

조선 계집들을 무기 들고 자랑스레 치러 온

관복 입은 자들이 역겹다.



 

고문실의 고문기술자는 5년이 더 지나도

지면에서 봐도 소스라치게 끔찍하고

그 고문을 당한 이들이 실재하는 역사가 참담하다.

제주의 독립운동가들, 항일지하조직들, 주민자치기구들, 부녀회 해녀들...

 

권력을 상징하는 국기만 바뀌고

매국노, 친일부역자, 고문기술자들은 도리어 승진하여 적반하장 기세등등...

면면히 이어져 2025년에도 음습하게 존재할 것이 분명하니 섬뜩하다.



 

제주로 돌아온 서북청년회의 만행은 차마 말로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들은 미군정의 비호를 받으며 경찰과 행정기관에서 일했고 좌익 척결이라는 이름 아래 테러를 일삼았다.”

 

통행금지와 총살을 예고하는 포고령은, 뭐라고 하는 건지 어리둥절했던, 환시를 보고 환청을 듣는 건가 싶었던, 2024123일의 밤을 떠올리게 한다. 김홍모 저자가 바라는 세상을 이야기하는 제주 해녀들의 얼굴을 너무도 사랑스럽고 행복하게 그려서 더 속이 상하고 분한 눈물이 흐른다. “억압과 착취가 없고 평등하게 살 수 있는 세상2025년 광장에서도, 지금도 여전한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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