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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이커 ㅣ 래빗홀 YA
이희영 지음 / 래빗홀 / 2024년 5월
평점 :
후회와 함께 바꿀 수 없는 과거를 돌아보는 일은 아프다. 이희영 작가는 아마... 그 간절함을 밀도 높은 생생함으로 작품 속에서 경험하게 해줌으로써 누구에게나 유일한 현실이자 삶인 현재에 더 집중하게 해줄 것이다.
“평생을 오직 한 사람으로 살아간다고 믿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수많은 ‘나’들이 찰나에 존재했다. 덧없이 사라지고 다시 존재함을 반복하는 것뿐이었다. 탈피하고 그 껍질을 버리는 갑각류처럼, 인간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애틋하고 서러운 나의 기억들과 함께 읽게 될 반가운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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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중년의 선입견이 이토록 강고한 사람이 되었을까. 표재와 소재에서 짐작한 것보다 훨씬 더 묵직한, 철학적인 토로와 고찰을 이어나가는 구성에, 청소년 소설 맞지, 하는 질문이 거듭 떠올랐다.
생각해보면 전작 <페인트>도 무척 진지하고 심층적인 소재와 메시지였는데, 빨리빨리 대충대충 피상적인 현실의 분위기에 시달려서인지, 그렇게 휩쓸려 사는 게 편해서 동조하며 살아서인지, 결정에 이르기까지 오래 선택을 고민하는 과정이 오랜만의 감동이라서 진짜 같아서 먹먹해진다.
“이렇듯 말도 안 되는 상상이 현실이 됐는데 나우는 오히려 주춤거렸다. 거짓말 같은 행운을 얻기 위해서는 자신의 삶 전부를 잃어야 하니까.”
과거로 돌아가 친구의 생명을 구할 수 있다면 내 삶이 바뀌는 것을 감수하고라도 과거의 장면을 바꿀 것인가. 그 선택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내 곁에 없을 결과라고 하더라도?
이런 힘든 일은 아무에게도 일어나지 않으면 좋겠지만, 작가가 독자를 데려가는 곳은, 미리 상상할 수 있는 흔한 둘 중 하나의 결과가 아니었다. 그래서 기대한 만큼 좋았고 고마웠다.
“인생에서 뒤늦은 ‘if’는 의미 없는 상상에 불과했다. (...) 이 모든 지나간 if는 삶에 아무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인간이라 말할 수 있었다. 무의미하게 과거를 생각하고 그때마다 반복되는 후회로 아쉬워하니까.”
‘지금은 그것만’ 생각하는 법을 종종 잊는다. 생각은 내 몸이 경험하지 못한 속도로 사방으로 달려 나간다. 도착지가 실상이 아니라서 생각은 곧 길을 잃는다. 아무리 고민해도 내 생각과 상관없이 일어나는 일들은 너무 많다.
“길이 없으면 어떻게든 만들기라도 할 텐데, 갈 수 있는 곳도, 가야 할 곳도, 가고 싶은 곳조차 없었다. 어디를 도착하면 이 모든 혼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생각한다고 찾을 수 있는 답이 몇 개나 될까, 행동한다고 유의미하게 바뀌는 미래는 얼마나 될까. 하지만, 생각과 행동을 빼면 다른 살아갈 방법이 뭐가 있을까.
친구의 생명이 걸린 문제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질문도 답도 친구와는 관계가 없어서, 오랜 숙원처럼 깊은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 같아서, 청량한 바람을 들이킨 듯 머리가 시원해졌다. 우리가 천착하는 건 스스로에게 묻는 질문들이다.
“신은 인간에게 미래를 준비할 혜안을 빼앗는 대신, 그 미래가 현실로 닥쳤을 때 해결할 수 있는 능력과 버텨 낼 힘을 주었다. 그것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나우는 깨달았다.”
우주와 세상의 비밀을 조금 알았을 땐, 막 종교에 입문한 것처럼 완고해졌다. 인간의 짧은 수명을 반(넘어) 살아보니, 겨우 생각들이 말랑해진다. 시공간을 감각하는 것도, 몹시 자연스럽게 시제를 넘나들줄 알게 되었다.
작품에서의 시간 여행은, 사랑하는 상대의 눈을 잠시만 바라봐도, 꿈과 현실의 경계가 흐려지고, 직접 경험한 지난 삶조차 내 것이라 할 만한 게 있었는지, 얼마나 공고히 실재했는지 지금은 알 도리가 없다.
다만, 상처를 지닌 마음들이 상처를 입은 채로도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서는 매일 배우는 중이다. 매일 애틋하고 매일 응원하는 중이다. 읽고 나니 주인공 ‘나우’*의 이야기가 치열한 고민을 차분하게 함께 나눈 귀한 만남처럼 느껴진다. * 지금, 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