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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자들
정해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5월
평점 :
드디어 정식 출간본이다. 용의자들 중 누가 진범이라 밝혀져도 몹시 슬플 것이다. 설마 모두 다 연관이 있을까. 아프지만... 끝까지 읽어서 진범을 만나야겠다는 기분이 들게 하는 긴 설명 필요 없는 정해연 작가의 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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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한테 잘해주려고 무리하지 않을 자신이 있냐는 말이야. 나한테 잘해주려고 노력하지 말고, 애쓰지도 말고, 불행하지도 말고, 힘들지도 않을 자신이.”
슬픈 대신, 마음이 너무 따가워서 울고 싶었다. 소설인데, 가장 작위적인 연출과 구성을 뛰어 넘는 현실 범죄를 다큐멘터리로 자세히 들여다본 기분이다. 사건의 내용과 해설이 아닌, 작가가 밀도를 높인 사회 문제의 구조적이고 관계적인 원인들이 더 강력하게 전달되니 무서울 정도로 담담한 진술 같은 문장들이 더 무시무시하다.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솔직하게 대면하는 것이 첫 번째 단계라는 조언은 자주 들었지만, 우리는 정말 그런 솔직함을 바랄까,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새삼스럽게 들었다. 모두 괴롭고 힘든 면면이 있다는 것은 설명일 수 있으나 변명은 될 수 없다.
“사람은 이상하다. 다른 사람의 약점을 들으면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용하려 든다. 나약해서인지도 모르고 사악해서인지도 모른다. 그건 습성이 아니라 본성이다.”
각자가 느낀 절박함의 강도를 헤아려보는 일은 별 의미가 없다. 수치로 정량화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각자의 저항력과 방어력과 돌발 계수는 또 다르니까. 세상만사를 시스템 탓으로 돌릴 생각은 없지만, 도망갈 구석도 없고, 도움을 받은 통로도 없고, 그저 혼자 안간힘을 쓰다 망가지는 이들이 이렇게 많은 건 분명 시스템의 미비다.
“자신을 때리고 나면 비는 남편, 선생을 사람이기 이전에 신선으로 여기는 학부모들. 선생은 어떤 곳에도 한눈팔지 않고 금욕적이고 도덕적이어야만 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만 허용됐다. 그 어떤 곳에서도 선생은 인간이어서는 안 됐다.”
힘을 모아 다 같이 조금만 덜 힘들게 살 수 있도록 사회를 바꿔나가는 일은 뭐가 그리 어려워야하며, 왜 그렇게 많은 방해를 받아야 할까. ‘낯선 사람을 조심하라’는 부모와 학교의 경고가 허망할 정도로, 친족과 가까운 이들에 의한 범죄율이 더 높았다. 부정할 수 없는 통계 앞에서 나는 지독한 비밀을 발견한 것처럼 두렵고 서글펐다.
우정도 사랑도 가족도 이겨 먹는, 얼룩덜룩한 인간의 다른 욕망, 욕심, 시기, 질투, 억울함, 간절함, 추악하고 잔인한 생존욕구, 폭력으로 일그러진 꿈이라 믿는 위선들. 인간은 이렇게 생겨 먹었고, 그런 상태로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면, 그런 사회를 원하지 않는다면, 다른 지향을 가진 교육과 사회화가 반드시 필요하다.
괴로워서 오래 외면한 뉴스와 신문 기사들 몇 년 치를 한 권에 압축해서 목도한 기분이다. 기억나는 작품들 중 가장 무서운 마지막 페이지를 언제 담담하게 감당할 수 있게 될지 모르겠다. 어른이라서 미안한 것들이 너무나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