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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는 말들 - 우리의 고통이 언어가 될 때
조소연 지음 / 북하우스 / 2024년 6월
평점 :
! 글에서 혹시 발견될 무례나 오독은 순전히 제 무지와 무능력에서 비롯된 것이지 ‘의도’는 없습니다.
말을 잃고 숨을 들이키게 되는 쓰기의 출발 - 어머니의 자살 - 이다. 읽을 수 있을까 질문했고, 고민했고, 자주 멈췄고, 한참 펼치지 못했다. 다시 펼쳤고, 약간의 어지럼증과 감정적 동요를 느끼며 끝까지 읽었다. 내 손가락은 마지막 장을 넘길 때도 떨렸다.
저자는, “나의 이야기는 당신에게 가닿기 위해 태어났고, 당신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세상에 나온 것이다. 그러니 부디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달라. 당신의 목소리, 당신의 언어, 당신의 말, 당신의 몸으로 들려달라.” 고 하지만, 나는 이 책을 닮은 형태로는 들려줄 수 없을 듯하다.
여태 그랬던 것처럼, 도무지 성장하지 않는 나를 안타까워하는 방식으로, 친구가 되지 못한 관계를 애틋해하는 일은, 어리광이나 투정처럼 가능하겠지만……. 아직... 인지, 영원히 불가능한지... 도 모르겠다.
이 책은 감정의 토로나 불행의 회고가 아니다. 결연한 방식의 복원이고 고발이다. ‘우연히’ 그 시절에 태어나 ‘우연히’ 그 환경에서 살아가느라 부서지고 망가진 ‘사람’의 복원이고, 그렇게 만든 ‘거대한 것들’에 대한 고발이다. 헛되이 기다리던 구원자는 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저자가, 딸이 썼다.
“가정도, 종교도, 윤리도, 법도 지켜내지 못한 내 어머니의 삶은 어디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일까?” *
* 수치심: (...) 여성의 ‘성적 수치심’은 힘에 의해 뭉개지고 압살된, 분노, 불쾌, 아픔, 억울함에 가깝다. 여기에는 부끄러움과 욕됨, 더럽혀짐, 깔보임, 굴욕감을 느끼도록 강제되는 사회 문화적 제도의 존재가 내포되어 있다. 이 책에서는 이 단어가 여성에게 가해져 온 모든 성적 억압과 폭력의 역사를 함의하는 상징적 의미로서 사용된다.
저자의 어머니가 자식들에게 온통 몰입했기 때문에. 자식들은 생존하고 교육받을 수 있기도 했지만, 그랬기 때문에 힘들고 아프기도 했다. 나는 내 어머니가 그런 유형이 아니라서 빚진 기분이 없어서 고맙다고 생각했지만, 내 생존과 성장에 내 어머니의 몫과 덕분이 없을 리가 없다.
그럼에도 내 애정은 얕아서, 초혼招魂과 같은 의식을 이토록 깊은 애정으로 치러낼 수 없을 것이다. 그 애정이 자신의 회복과 다른 아픔들 속에 갇힌 다른 존재들의 목소리를 더하며 나아가는 흐름이 깊은 바다에 도착한 서늘한 물빛 같다. 문득 고개를 들어 제주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느껴보고 싶었다.
“자신의 슬픔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 속에 자리한 무수한 타자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타인의 슬픔은 가닿지 못할 영원한 불모의 땅이 될 것이기에.”
‘살기 위해 글을 쓴다’는 적지 않은 고백은 과장도 허언도 아니다. 쓸 용기가 없는 나는 평생 내가 들어선 구덩이를 제 손으로 더 깊이 파는 어리석음을 반복할지 모르겠다. 저자는 깊은 슬픔의 구덩이도 깜깜한 고통의 터널도, 글자를 새기고 문자를 디딤돌 삼고 쓰기를 빛 삼아 빠져나왔다.
“기억을 언어화하는 일은 내가 죽음에서 삶으로 돌아오는 방식이다.”
영화처럼 그 끝에 온통 밝은 행복이 가득하지는 않겠지만, 저자는 생존 도모가 아닌 ‘온전한 삶’을 살 것 같다. 내가 쓴 어떤 표현들이 혹 무례가 될까 불쑥불쑥 불안이 짓쳐들지만... 썼다. ‘써야만 했던’ 이 책이 많은 분들에게 가닿기를 바란다. 누구의 고통도 깊어지지만은 않기를 바란다.
“문학이라는 것은 오래도록 울부짖기 위해, 음악이 될 때까지 비명을 내지르기 위해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