밸러리
사라 스트리스베리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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밸러리 진 솔래너스Valerie Jean Solanas는 누구인가?

 

<나는 앤디 워홀을 쏘았다I shot Andy Warhol> 영화로 먼저 만난, 래디컬 페미니스트로 역사서에 언급된, 실은 이름만 아는 밸러리를 만날 기회다. 인터뷰도 에세이도 아닌 소설이다. 비비언 고닉과 조예은 작가와 르몽드가 추천했다. 반갑고 두려웠다.

 


 

첫 장에서 여러 개의 경고 혹은 안내문을 먼저 만난다. 이 작품은 소설, 환상소설, 충분하지 않은 재현, 그러니 허구, 조지아의 사막조차도. 도입에서는 주인공의 죽음, 고독사, 부패를 먼저 읽는다.

 

어스름 속에 존재하는 방법은 아주 많아. 성별은 감옥이 아니야. 그건 기회야. 이야기하는 방법들이 다를 뿐이야. 너만의 이야기를 글로 써봐.”

 

내가 알지 못하는 감각의 계절처럼 현란하고 지독하게 쓸쓸하다. 논픽션도 픽션으로 읽는 이상한 독자에게 수많은 감각적 경험을 깨우는 위험한 실체와 비유들이 가득 이어진다.

 

창작이라 더 생생한 인물을 만나, 그가 멈춘 425일까지 지면이 초대하는 만큼 살아보는 기분으로 나도 함께 거기에 있다고 상상하며 읽는다. 20세기에 태어난 내가 먼 과거가 아니라고 추억한 20세는, 여성이 종종 인간이 아닌 취급을 받은 시기다.

 

여자는 뭐든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그 쓸쓸한 풍경을 반복해서 목격한다. 삭제되고 검열당한 목소리를 통해 옳은 질문은 무엇이었고 무엇인지 궁금해한다.

 

밸러리 솔래니스의 어린 시절에 대해 알고 나니, 어떻게 생존했는지가 놀라워서였을까, 그가 대학에 입학하는 장면에서 복잡한 감정이 일부 눈물이 되었다. 두려움 속에서도 기뻤을 것 같아서. 조심스럽지만 기회라고도 생각했을 것 같아서.

 

두려워할 이유가 없어. (...) 겁이 나도 절대로 내색하지 마. 이방인처럼 행동해선 안 돼. 사람들이 너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많이 알도록 하지 마. (...)”

 

교육과 교육제도 내에서 여성의 자리는 이제 충분한 걸까. 제도 안에서의 자리는 어떤 걸까. 늘 미래를 상상하며 희망을 이어가는 것은 너무나 고단한 일이지만, 그걸 포기하면 뭐가 남을지가 더 두렵다. 무례와 실례가 될 것 같아 정체와 퇴행 이야기가 조심스럽다. 아무리 살아도 무엇을 살고 있는지는 문득 모를 일이다.

 

우린 역사의 일부가 아니야. 어떤 이야기의 일부도 아니야. 역사도 아니고, 운명도 아니야. 세계의 역사는 (...) 경찰 행세하기를 좋아하는 유인원-남자들로 이루어진 범죄 조직에 불과해.”

 

인간 사회에는 평균값이 없다. 있다고 생각하다간 호된 충격을 먹는다. 그럼에도 문명이, 이성애와 돈에 기초를 둔다는 인식이 확대된 것이 다행이고, 21세기에도 전쟁과 무기가 큰돈이 된다는 여러 고발이 있어서 한편 다행이다.

 

밸러리의 고민과 고백이 현재를 설명할 수 있는 부분들이 여전해서 짧은 수명의 절반 이상을 살아버린 나는 익숙한 조바심과 두려움을 느낀다. 인간은 실수를 통해 배우고 기억하기에 수명이 너무 짧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기록과 교육이 있다고 생각한다.

 

문명의 경계선과 가장자리에서 살아온 여성의 정체성은 무엇이라고 정의될 수 있을까. 밸러리는 비정체성이 답이야.”라고 선언했다. 살던 대로 사는 것을 그만 두어야 변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지만, 일상을 뒤집을 상상조차 하기 싫은 나는 게으른 겁쟁이 독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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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찬란하고 자주 우울한 - 경조증과 우울 사이에서, 의사가 직접 겪은 조울증의 세계
경조울 지음 / 북하우스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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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게 솔직한 글이다. 문장은 건조할 정도로 명료하다. 포장과 장식은 물론 감정도 최대한 절제되어 있다. 정신질환에 관심이 많고 상담과 복약 경험이 있는 독자로서 과잉이 없어서 고마울 정도로 읽기에 편했다.

 

동시에 제대로 배우는 정확한 의학 지식도 감사했다. 저자는 의사다. 전문의다. 덕분에 마음 편히 신뢰하며 읽고 배웠다. 우울증과 조증 정도만 알고 있었는데, 양극성 장애 중 경조증*, 그 중에서도 2형 양극성 장애**는 처음이다.

 

* 조증보다는 가벼운 증상

** 1형만큼 심하지 않은 대신 재발이 잦다. 덜 아픈데 더 자주 아프다. 통계적으로 100명 중 2-3명이 평생 한 번은 양극성 장애를 경험한다. 실제로 초기에 절반 이상이 우울증 진단을 받으며, 제대로 진단받는데 평균 십 년 정도가 걸린다.




 

상태를 부인하고 현실로부터 도망 다니는 십 년 동안, 내 증상이 양극성 장애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증거를 찾으려 무수히 애썼지만 매번 실패했다.”

 

의사도, 혹은 의사라서 더욱 수용이 어려운 세월이 길었다. 그 오랜 시행착오를 장기상담과 복약, 심리 상태에 대한 분석과 고찰, 부모와의 일차적 관계의 분리와 성장, 연애와 결혼, 직장 생활 등 다각적으로 접근하고 수용하고 바꿔 나간 이야기들로 솔직하게 담았다.

 

세심한 묘사와도 같은 증상에 대한 설명과 사례 덕분에 나는 경조증이 어떤 모습으로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는지 선명하게 본 듯 이해했다. 이전에 알던 이들 중 이해할 수 없었던 면면이 어쩌면 증상이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되었다. 부디 필요한 도움을 찾았기를 바란다.

 

저자가 겪은 시행착오 중에는 누구나 빠지기 쉬운 내용도, 잘못 알려지고 강요된 내용도, 알고도 저항을 못하고 심한 부작용으로 귀결되는 위험성이 있는 방법도 있어서, 이런 사례를 읽고 알게 되는 것이 정말 유용하다.

 

우울할수록 가짜 자존감을 높이는데 몰두했다. (...) 매일 그렇게 애쓰는데 인생을 잘못 살고 있는 것 같았다. (...) 나는 또 길을 잃었다.”



 

특히 사는 일은 고되고 시간을 늘 부족하고 의존과 중독에 관대한 한국 사회에서 알코올 문제에는 경고가 필요하다. 알코올 유발성 탈억제는 나도 종종 사용하는 손쉬운 유혹이고, 고기능 알코올 중독자*는 생각보다 흔하다.

 

* 전형적인 알코올 중독자와 다르게 사회적 성취를 유지하며 원만한 대인관계를 이어가기에 주변 사람들은 좀처럼 그들의 음주 문제를 인식하지 못한다. 스스로도 알코올 중독을 강하게 부인하는 경우가 많다.

 

가족도 친구도 연인도 사회도 내가 기대하고 바라는 반응을 해주지 않을 가능성이 더 높다. 편견도 문제지만 몰라서도 그렇다. 저자가 타인과 외부에서만 인정과 위로를 구하지 않고 글을 쓴 것이 무척 다행이라 안도가 된다.

 

내가 쓴 글을 다시 읽는 과정은 나에 대해서 알아가는 데도 도움이 되었다. (...) ‘나 사용법을 쓰는 기분이랄까. (...) 있는 그대로 느낀 바를 쓰는 건 생각보다 훨씬 큰 힘이 있다.”

 

죽지 않기 위해, 살아야 해서 글을 쓴다는 저자들을 만났다. 쓰기란 나와 나사이의 거리를 늘려줌으로써 비로소 내가 나를 알아가고 받아들이도록, 내 반응과 행동을 볼 수 있도록돕는다. 그런 시간이 쌓여 마침내 훨씬 살 만해졌다는 문장이 기쁘다.

 

중요한 사안을 무겁지만은 않게 읽고 배울 수 있는 소중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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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감수성 쫌 아는 10대 - 작은 존재도 소중하게, 생명을 존중하는 마음 사회 쫌 아는 십대 19
김성호 지음, 서와 그림 / 풀빛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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쫌 아는 10시리즈를 좋아한다. 아마 우리 집 10대들보다 성인독자인 내가 더 인상적으로 읽고 많이 배웠을 것이다. 시리즈이지만, 각 주제별로 전달하는 방식은 모두 다르다. 다양한 방식으로 글을 쓰는 법을 배우는 기회는 추가적인 즐거움이다.

 

생명 감수성을 이야기하는 이 책은 두 단어와 어울리는 분위기를 가졌다. 다정하고 따스하다.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시간을 들여 관찰하고 알게 된 지식과 경험은 여느 사랑 이야기 못지않다. 알면 사랑하게 된다는 말은 진실이다.



 

또한 알면 아프다. 다치고 죽임 당하는 생명들이 많고 내 감수성이 그 비극에 반응한다면 아프지 않을 방법이 없다. 몰라서 무심하게 다른 생명을 괴롭히거나 죽이는 경우도 있으니, 더 알아가는 공부는 중요하다.

 

4살 때 아이가 거북이 코에 꽂힌 플라스틱 빨대 영상을 보고 빨대 사용을 당장 그만두자고 한 것처럼, 일회용품과 버려지는 플라스틱 쓰레기에 대해 관심을 가진 것처럼, 용돈을 모아 후원을 하고 싶어진 것처럼, 다른 생명에 대한 감수성은 행동하는 힘을 준다.

 

인류가 연구한 지식은 지구상의 모든 생명이 서로 연결되어 있고, 심지어 우주의 모든 존재는 함께 태어나서 여러 공통의 원소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일상의 실천과 지향을 이어가고 추구하기에 부족하기도 하다. 명확한 이익 추구를 위해 이용 가치를 먼저 보는 시스템에서는 더욱 더.

 

그럼에도 이 책에 담긴 내용들이 교육에서 가능한 많이 활용되면 좋겠다. 그 질문은 우리는 어떤 인간이고 싶은지, 어떤 인간으로 살고 싶은지, 와 같이 오래 고민하는 큰 질문으로도 이어지면 좋겠다.

 

표현은 알고 있었지만, 이 책에서 새롭게 배우니 무게감도 아름다움도 다른 두 단어가 있다. ‘다가섬지속성행동이 되면 둘 다 쉽지 않다. 어른인 경우는 더 그렇다. 친구를 사귀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지듯이.

 

그러나 지속하겠다는 지향은 중요하다. 한 걸음이라도 그쪽으로 다가가는 것도 중요하다. 어쩌면 다른 생명체들 - 동물, 식물, 미생물 - 은 인간이 그냥 놔두기만을 바랄 지도 모르지만, 물리적 다가감 외에도 알아갈 방법은 있다.

 

이 책의 삽화처럼 부드럽고 아름다운 색연필로 작은 생명체들을 그려보는 일도 친해지는 즐거운 방식일 것이다. 이 작은 책에는 교육에 활용할 자료와 아이디어가 많다. 널리 활용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계속 커진다.

 

언제라도 좋지만, 이웃과 사랑을 많은 이들이 많이 얘기하는 연말이라서 시기와 계절에 맞춤한 선물과도 같다. “사랑을 시작하기에 좋은 시간에 만난 아름다운 가이드 같은 책이다.

 

사랑을 어디서부터 시작하면 좋을까? 그래, ‘생명 사랑의 시작은 로부터 시작하면 좋겠어. 우리 친구들 하나하나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잘 알고 있지? 그 생각을 가슴에 잘 담고 있다가 이웃에게도 전해 주면 좋겠어. 그러면 내가 소중하듯 나의 이웃도 똑같이 소중하다는 생각이 세상으로 점점 번져갈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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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영하는 도시, 몰락하는 도시 - 도시는 어떻게 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기회를 만드는가
이언 골딘.톰 리-데블린 지음, 김영선 옮김 / 어크로스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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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지리, 경제, 사회, 전공하지 않은 학문들에 대한 통찰을 한 권의 책으로 모두 배우며 도시 여행을 할 생각에 설랬다. 도시에 사는 인구가 역사상 최대란 말은 도시의 운명이 인류의 운명이란 뜻. 우리는 멸망한 제국 도시들의 이름을 알고 있다. 스케일이 아닌 생존가능성을 지향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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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까지는 270쪽 가량의 분량인데 읽고 나면 중요한 지식을 배우고 유의미한 질문을 만난 뿌듯함이 크다. 도시의 역사를 차분히 배운 역사서를 읽은 듯도 하고, 현재 도시 문제의 가장 긴박한 내용을 다룬 사회학서를 읽은 듯도 하다.

 

한편으로는 인류 문명이 도시문명이라는 것과 문제도 해법도 도시를 변화시키는 노력으로 해결하고 실험해 나가야 한다는 지향이 분명해진다. 탄생과 변화의 역사, 시대별 문제점들과 현재 직면한 생존의 문제까지 교양 지식 도서로서의 시의성이 크다.

 

도시는 이제 세계 인구의 절반이 넘는 사람들의 거주지이며, 2050년에는 그 비율이 3분의 2로 높아질 예정이다. 이는 (...) 현재 도시 생활을 형성하는 동력이 우리의 세계 전체를 형성한다는 또한 뜻이다.”



 

생활비용이 높고 경쟁이 심한 도시로 사람이 끌리고 몰리는 이유는 다양하고 강력하다. 그 중 하나는 교외에서 찾아보기 힘든 관용과 개방 정신이다. 그러니 도시를 작게 만들거나 해체하는 방향은 불가능하다. 그보다는 성장을 멈추고 밀도를 고려하고, “공정한 대중교통을 고민하고 마련해야 한다. 생각보다 꾸물거릴 시간이 없다.

 

인간 생존을 위협하는 기후변화는 현실이고, 해안 지역에 발달한 세계의 많은 도시들 - 90% - 는 변화의 영향에 취약하다. 실시간으로 수많은 도시들이 침수 위험에 처해 있다. 그러니 도시 문제는 기후문제와 함께 한다. 지금 대비하고 행동하지 않으면, 그 결과는 지역적이거나 선별적이지 않을 것이다.

 

“(도시) 탄소 배출량은 전체의 70퍼센트를 차지한다. (...) 2050년에는 그 비율이 85퍼센트가 될 수 있다. 도시의 탄소 배출량을 줄이는 것이 기후 변화와의 싸움에서 중심축이 될 것이다.”

 

단순한 총합 줄이기 방법은 설득력이 없다. 중국을 포함한 개발도상국들이 새롭게 부상하는 탄소배출국이라고 하지만, 이 국가들의 탄소배출 산업은 상당 부분 런던이나 뉴욕 같은 곳에서 소비되는 제품을 제조하기 위한 것이다. 공정한 책임 인정과 조치가 없다면 근본적으로 필요한 행동은 없을 것이다.



 

세계적 관점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세계 시민과 지구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우리가 필요한 경험을 공유하고 상호 이해하는 방식이 필요하다. 안타깝게도 소셜미디어는 기대한 미래 대신, “무엇을 볼지 누구와 소통할지 걸러낼 수 있게 함으로써 (...) 불평등과 환멸이 커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현실 세계가 붕괴하면 디지털 세계를 확장하고 유지할 현실도 사라진다. 그러니 우리가 만들 해법과 실험할 공간 역시 가상현실이 아니라 도시. 도시를 변화시키는 가장 중요하고 거의 유일한 수단은 - 도시라는 어원polis에서 알 수 있듯이 - 정치politics. 시장이 아니다. 따로 맡길 곳은 없다. 우리가 만들지 않으면 아무 것도 변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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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을 죽인 여자들
클라우디아 피녜이로 지음, 엄지영 옮김 / 푸른숲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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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신과 여성 피해자를 동시에 떠올리게 하는 현실도 문학도 영화도 적지 않다. 이 작품의 신은 누구인지 어떤 존재인지 어떻게 죽였는지 궁금했다. 수많은 이웃들이 신을 생각하고 이웃을 생각하고 공동체를 생각하는 12월에 추리, 미스터리, 스릴러의 형식으로 전해 질 경고와 메시지가 무척 기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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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다. 그런데 간절하고 성실한 증언 기록 같다. 낯설지 않은 소재와 장르 문학이라는 정보에 더해진 선입견은 읽기 시작하고 몇 장 넘기지 않아 너무 무용해서 다 사라졌다.

 

호흡이 빠르지 않고 찬찬히 자세히 문장에 현장을 담은 것처럼 이야기가 전개된다. 화자는 한 사람이 아니다. 한 사건에 관련된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모두 모아 열심히 전체 그림을 찾아 나가는 퍼즐 같은 추리 문학이다.

 

대단히 자극적인 장치나 반전이 설정되지 않아도, ‘광신이 등장하면 나는 근원적인 공포를 느낀다. 의사소통이 되지 않은 상황이 세상에서 가장 절망스럽기 때문이다. 생각을 나눌 방법이 없다면 인간은 무엇으로 소통할 수 있을까. 그 부재를 채우는 것은 늘 폭력과 비극이다.

 

다양한 화자들 중에서도 기억을 잃어버린 마르셀라의 문장들을 따라 읽을 때 호흡이 가빠졌다. 세 번 쯤 쉬었다 다시 고른 호흡으로 이어 읽었다. 조각난 기억을 모아 단서를 찾은 수사 방식처럼 지극히 분석적이고 고증적이라서 나는 묘한 감동을 느꼈다.

 

맹세는 지켜져야 하지만 포기하지도 않는 끈질김. 그것이 친구를 향한 지극한 사랑에서 생겨 난 힘이라고도 느꼈다. 범인 찾기보다 더 묵직하게 아파오는 건 모두가 조금씩 느끼는 후회와 죄책감이다. 우리의 일상에서도 그것들이 그리는 무늬가 새겨져 있으니까.

 

이 주제를 다루는 가장 차분한 글이면서 가장 가차 없이 무엇도 남겨 두지 않는 고발이다. ‘임신중지라는 명명이 아직도 일상적으로 통용되지 않고, 권리도 보장받지도 못하고, 악몽처럼 판결이 뒤집히는 일이 현실이다. 여성의 몸은 여전히 폭력과 소비와 착취의 대상이고, 아무도 증명하지 못하는 종교의 논리는 기세를 잃지도 않는다. 이 모든 것은 어쩌면 유의미한 퇴행이 진행 중이라는 증거일까.

 

중간 중간 이렇게 홀리한(holy, 성스러운) xxx들이 있나, 화가 잠시 나기도 했지만, 책의 끝에 다가갈수록 감정은 차분해진다. 이런 짓을 초래한 것은 단일범인이 아니다. 재발을 막으려면 누군가를 잡아서 처벌하는 게 아니라 무엇을 깨부숴야 한다. 그 희망은 강요된 사슬을 끊어버린이들로부터 생겨나고 자라난다.



 

거대 카르텔과 같은 막강한 범죄를 마주하는 문학적 경험에 꽤 압도당하면서도, 무력함이나 좌절감은 들지 않았다. 사랑하는 무신론자들에게 전하는 죽어가는 이의 다시 만나고 싶다는 유쾌한 고백처럼,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종교가 아니라 웃음이라는 말에 나도 고개를 끄덕인다.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 사랑과 믿음을 버릴 이유가 되지 못한다. 이 작품의 원제가 왜 Catedrales(대성당들)인지, 그 이유가 아름다워서 눈이 살짝 부신다. 각자의 대성당을 각자가 원하는 재료로 만들어 나가는 삶. 이별한 그리운 이들을 다시 알아보고 만나는 일이 가능했으면 해서 무신론자인 나는 코를 잡고 뜨거운 아픔 같은 무엇을 삼킨다.

 

그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장차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변하든 간에 과거의 우리, 그리고 영원히 변하지 않을 우리의 본질을 통해 서로를 알아볼 수 있을 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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