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들을 위한 심리학 - 자꾸만 나를 잃어가는 것처럼 느껴질 때
반유화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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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가 12년간 1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만나며 임상을 경험하다 필요에 의해 여성학을 공부하고 쓴 글이다그런 통찰에서 온 것일까아이스크림콘이 떨어진 방향과 녹은 모양의 표지가 눈을 사로잡는다혼란한 기억 속 어느 순간나도 저런 망연자실한 일을 겪고 울었던가싶기도 하다.



우리는 일상에 공기처럼 배어 있는 성차별과 성별 고정관념을 감지하게 된 상태를 빨간 약을 먹었다고 표현합니다자연스럽게 숨 쉬며 살아왔던 공기 안에 미세먼지가 있고 그 미세먼지가 몸에 해롭다는 것을 안 순간이전처럼 공기를 편하게 들이킬 수 없겠죠이전으로 돌아가고 싶어도 그럴 수 없습니다동시에 엄청난 해방감도 느낍니다.”

 

진료실 내에서 환자의 증상을 연구하는 일에 더해 개인과 세계 사이에 일어나는 일들을 이해하고 그로 인한 고통을 지고 자신을 찾아오는 이들의 여정을 탐색하기 위한 노력이라 한다의학 공부 이외의 공부가 의학적 진단과 치료에 필요하다고 느끼고 보충한 저자의 판단과 결단이 귀하고 감사하다.

 

임상 연구 결과이자 경험을 글로 정리해서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제공해 준 점도 감사하다모든 여성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관계에 관한 문제 12가지 사례들이 담겨 있다나와 남을 이해하는 좋은 공부이자 해법이 될 것이란 높은 기대로 읽었다.

 

현재의 삶에서 심리적물리적으로 무엇을 얻고 있고무엇을 잃고 있는지를 가공 없이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는 걸 추천합니다.”

 

비교적 객관적 시선을 학습하듯 정독하고자 했던 마음과 태도가 무색하게 무척 따뜻한 공감과 조언이 가득했다조급하지 않은 종합적이고 현실적인 이야기들과 조언들을 읽어가는 것만으로 좀 더 걷기 편한 길이 나타난다그 길을 선택할 것인가는 독자의 몫이다.

 

목차를 보고 먼저 읽고 싶은 내용을 골라 읽고 다시 순서대로 일독하였다제대로 극복한 것도 아닌데 세월이 지나다 보니 이젠 더 이상 내 문제가 아니게 된 상황들도 눈에 띄었다참 다행이다 싶다.

 

1

 

결혼을 하기로 결정했다면 반드시 확인해야 할 것들을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가장 먼저상대가 나의 가치관을 허락해주는 사람이 아닌 나와 한 팀이 될 수 있는 사람인지 확인하세요그리고 팀 안에 다른 사람 (부모님친구들익명의 타인 등)을 넣지 않을 만한 사람인지 곰곰이 생각해봐야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성인으로서 자신이 새로 구성할 가족과의 유대를 가장 우선적으로 생각하는지그리고 자신의 과거 양육자와 적절한 분리가 되어 있는지를 확인하는 과정입니다.

 

양육자와 적절히 분리되어 있는지를 알 수 있는 방법은 상대가 부모의 행동에 지나치게 불안해하거나 책임감을 느끼는지그리고 그것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배우자인 나에게 무언가를 요구하거나 책임을 전가하는지를 알아보면 됩니다.

 

정말 중요한 일이나 사랑과 연애에 관한 신화가 하도 강력해서인지 온갖 시행착오가 난무한다결혼을 한 자식을 여전히 돌봐 주는 한국의 독특한 환경도 한 몫을 보탤 것이고결국은 경제적으로 정서적으로 정신적으로 독립할 수 없는 사회 환경이 가장 큰 문제이다어쨌든 이 문제만 잘 예방되어도 수많은 사회 문제와 범죄들을 예방할 수 있을 것이며 막장 드라마가 전파 낭비하는 상황을 그만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누군가의 안식처가 되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 가장 먼저 내가 안전한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2

 

나는 왜 이렇게 사소한 일에 화가 나는 걸까?”가 아니라, “겉으로 사소해 보이는 이 일에 어떤 의미가 있기에 나는 이렇게 화가 나는 걸까?”로 바꾸어 질문해야 합니다.

 

갈등과 언쟁이 성가셔서 가능한 피하는 태도가 있어서 세 번 정도는 참아본다든지어쨌건 실시간으로 반응하지 않는다든지 하는 방식을 따르며 살았다잘 작동할 때도 있고 그래서 실수나 후회를 분명 줄이기도 했다그러나 언제나 그런 긍정적인 결과만 뒤따르는 것이 현실이 아닌지라 이런저런 스트레스가 빼곡하게 차이기도 한다.

 

타인에게 어떻게 표현하든 적어도 자기 자신에게만큼은 그것이 가벼운 농담인지 아니면 진지한 고통인지를 확실히 구별했으면 좋겠습니다진지한 고통이라면 진지하게 자기 삶을 들여다보며 감정을 정리하고 솔루션을 찾아야 하기 때문입니다적어도 자기 자신만큼은 자신의 진심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인내심은 항상성을 유지하는 능력이 아니라 마침 고갈되었을 때 새로운 스트레스가 닥치면 위험천만한 도화선이 되기도 한다그럴 때마다 당면한 갈등이 너무 사소해서 어이가 없고 자신을 반성하거나 꾸짖는 패턴으로 향하기도 했는데좀 더 천천히 자신에게 친절한 방식으로 감정을 살피고자 하는 처방을 받은 기분이 들었다.

 

당연한 것이 어디 있냐고 말해주는 저자 덕에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좋은 게 좋은 거지와 사는 게 다 그런 거지’ 이런 말이 끔찍한 내 정서에는 이 책이 오래 그리워한 친구 같기도 하다이것이 힐링이라는 것인가.

 

충실하게 채워진 분량이지만 다 읽고 나니 분량이 적어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의지하고자 하는 마음이 커져서 그런가 보다마음이 헝클어지고 생각이 복잡할 때 일상이라는 최대 난적이 버티고 있을 때 의지할 수 있는 실질적인 내 편이 되어줄 책이다간결한 처방전을 받아 든 기분으로 더 생각하고 정리하고 바꿀 것은 스스로 바꾸자는 생각을 한다.

 

다시 떠올리는 멋진 수상소감,

 

세상이 바뀐 것이 아닙니다우리가 세상을 바꾼 것입니다.”(김숙)

 

저절로 바뀌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고 없을 것이다아무리 사소한 것이라 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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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메유의 숲 - 이상한 오후의 핑크빛 소풍 / 2020 볼로냐 라가치상, 앙굴렘 페스티벌 최고상 수상작 바둑이 폭풍읽기 시리즈 1
까미유 주르디 지음, 윤민정 옮김 / 바둑이하우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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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기도 두께도 설레지만 수채화의 향연이 마음이 아찔합니다이렇게 많은 색을 쓰면서도 유치하거나 요란하지도 않다니실제로 알록달록합니다그런데도 자연스럽게 모두 잘 어우러집니다.




색채들에 홀렸지만 이야기도 엄연히 존재하는 동화입니다이혼가정과 새엄마새언니들이라는 설정에 속으로 어이쿠소리가 들렸지만 설마 그 클리셰를 따라갈 거란 무서운(?) 상상은 하지 않았습니다우연히 들어간 숲 속에 독재자 고양이 황제의 생일파티가 열리고 있었다.’란 구절을 읽고는 바로 안심이 되었습니다완전 새로운 동화겠구나!

 

정확히 계산한 적은 아니지만 70억이 넘은 인구 중 아무리 적어도 10억 정도는 경험했던 아픔이 아닐까 합니다태어나 보니 이런 세상이런 가족이런 현실온갖 억울함과 불합리와 몰이해와 과도한 기대와 어긋난 애정과 때론 못 살게 구는 형제자매들까지어려서 아무 힘도 없을 때에는 정면 대결보다는 피하게 되는 일이 많습니다.



그 장소로 나만의 세계를 만들기도 하고 찾기도 합니다그 세계에서는 원하는 모습으로 살 수 있다고 믿습니다그런데……아름다운 색들로 빛나고재미난 요정과 다정한 친구들이 있고즐거운 모험이 가득한 세상도 완벽하지만은 않습니다. ‘독재자 고양이 황제의 존재는 완벽과 거리가 먼 세계를 상징합니다.



불완전함은 불평과 불만으로 갈등으로 점점 피곤한 지경에 이릅니다현실에 지친 아이가 자신만의 세계에서도 고단해지는 장면들은 안타깝고 가엾습니다그래도 이야기 주인공 는 돌아갈 다른 세상이 있지요그리고 돌아간 는 숲으로 들어왔던 와는 다른 경험을 한 다른 사람입니다작은 손을 가족들을 향해 흔드는 장면은 긴장이 사라지고 편안한 기분이 들게 합니다다 알 수도 이해할 수도 없지만 서로를 찾고 식사를 나누고 나쁘지 않은 관계의 시작입니다.

 

그럼 주인공 말고 다른 가족의 입장을 생각해봅니다새언니들의 심정은 어땠을까요갑자기 생긴 막냇동생이 자신들을 노골적으로 싫어한다면그러다 혼자 숲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면자신들만의 엄마였는데 자신들의 고민에 공감하기 보다는 새로운 동생에 대한 흉을 못 보게 혼낸다면조에 못지않게 언니들의 마음도 불안하고 불만이 있고 걱정도 많았겠지요.

 

.. 저희 부모님도 이혼하셨고요심지어 아빠는 지금 새 엄마랑 있어요.


할머니1: .. 그래서그게 큰 일인 거니?


할머니2: 너는 무엇을 원하는 건데두 분이 순전히 너를 기분 좋게 해주기 위해 같이 있는 거?

 

그런데 제목의 베르메유는 누구일까요알록달록한 조랑말들입니다숲에서 자유롭게 살아야지누군가가 가두면 빛을 잃습니다강요받는 것을 견디지 못합니다조랑말만이 아니라 조용한 강요를 사회화해서 그에 맞게 살아가는 우리들 중 누구는 이미 빛을 잃어버렸을 지도 모릅니다자유롭다고 모든 것이 나의 선택이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갇혀 살아가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해야 해서 하는 일들이 없지 않지요그것들 중 억지로 하는 일은 없나요?



놀이도 모험도 사라지고 꿈도 희망도 흐릿해지고 사라질 수 있는 나만의 세계도 찾기 쉽지 않습니다모두 다 언제라도 다시 찾을 수 있다고 믿기는 하지만 간단하지는 않을 것입니다그래도 제게는 매일 만날 수 있는 책도 영화도 있습니다.

 

처음 책을 펼치고 색의 향연에 놀라 감탄한 제 심정을 이제는 이렇게 외칠 수 있습니다메르베유!* 


메르베유: merveille [mεʀvεj] 경이롭고 경탄할 만하며 신비롭고 아름다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원더랜드wonderland를 프랑스에서는 '메르베유merveille의 나라'라고 부릅니다.


마지막으로 아무도 안 물어 봤지만 저의 최애 캐릭터는 모리스입니다귀여운 외모에 결단력이 굉장하고 정의롭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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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책
류이스 프라츠 지음, 조일아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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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처음 도서관에 간 기억이 나시나요?

 

<파란 책>의 주인공은 무척 운이 좋습니다난생 처음 가본 도서관에서 우연히’ 책 속으로 들어가 역사와 모험을 경험하는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나니까요.컴퓨터게임 천재이지만 역사 과목은 낙제인 중학생현실에 있을 법한 인물이 불만을 표하는 말이 무척이나 익숙합니다역사는 의미 없는 지루한 암기과목이라고 여겼던 십대의 저 역시 이런 생각 안 해본 것은 아니니까요.

 

대체 몇 백 년 전에 살았던 사람들 이름을 힘들게 외워서 뭐하자는 건데누가 워털루전투에서 나폴레옹을 이겼는지 아메리카 대륙을 누가 발견했는지 따위가 왜 중요하냐고오백 년 전에 세상을 뜬 사람들의 인생이 나랑 무슨 상관이냐고

 

결국 책 한 권을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읽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단 한 번도.”

 

세계사에 관해 지금보다 더 무지할 시절에는 이 표지와 같은 푸른색은 스페니쉬 블루로 인식했습니다스페인에서 수입한 푸른 타일들을 무척 좋아했지요어쨌든 스페니쉬 블루이기도 한제목마저 파란 책인 이 책의 저자는 바르셀로나 근교에서 태어나 미술과 고고학을 전공했습니다역사와 모험과 마법이야기의 창조자답습니다.



판타지도 마술적 리얼리즘도 좋아하는 저로서는 다소 도전적인 이야기 속의 이야기로 빠져드는 환상 세계로의 여정이 재밌고 즐겁습니다.애독자 분들은 바로 미하엘 엔데의 <끝없는 이야기>를 떠올리실 지도 모르겠습니다저는 친절한 저자가 대화 속에서 언급해 줘서 비로소 생각이 났습니다.

 

미하엘 엔데의 <끝없는 이야기>에서 바스티안 발타자르 북스가 환상의 세계 여왕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아트레유를 돕는다는 이야기에 빠져본 적도 없을 테고 말이야.”

 

그러니<파란 책>의 주인공은 도서관을 방문한 레오 발리엔테이기도 하고이야기 속 도서관에서 발견한 <파란 책> 이야기의 주인공은 폴츠입니다그리고 레오와 친구들은 <파란 책> 속으로 들어가 폴츠와 함께 모험을 떠납니다이 구성만 받아들이시면(?) 내용은 엄청나게 재미나게 즐기며 읽을 수 있습니다헷갈리지 않도록 우리가 읽는 <파란책>은 검은 글씨로레오가 읽는 <파란책>의 내용은 파란 글씨로 적혀 있습니다.



사실이라니까요소리도 들리고요주인공과 똑같은 감정을 느꼈다고요마치 그와 내가 하나가 된 것처럼요이건 정상이 아니잖아요!”

 

이렇게 생각하면 어때요책에 쓰인 내용이 전부 사실이고주인공과 같은 시간을 살고 있다면이야기 속에서 사는 것과 마찬가지 아닌가요?”

 

누구나 책을 읽을 때는 책 내용의 일부분이 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고요안 그래요? (...) 그런 식으로 책과 동화되는 게 바로 독서니까요.”

 

온전한 창작의 시간과 세계만은 아니라 우리가 경험한 역사에 단단하게 기반하고 있습니다늘 가보고 싶은하지만 무식한 로마군이 불태운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을 지은 알렉산더대왕의 영토 확장 시기와 중세 십자군 시기에 이르는 세계사가 함께 합니다.

 

다리우스를 굴복시켰을 당시 알렉산더대왕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좀 알아봐줘파사르가대라고 불리는 왕궁과 관련된 것이라면 모조리 환영이야.”

 

알렉산더대왕은 다리우스를 쫓았다그러나 그의 병사들 대부분이 기력을 다해 중도 포기했고설상가상으로 말들도 죽어나갔다불과 열하루 만에 310킬로미터를 행군했다.”

 

고고학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자신의 상상력을 한껏 살려 고대 국가들이 남긴 유적과 유물과 사건들을 무척 흥미롭고 풍성하게 경험할 수 있습니다.더구나 도서관 방문으로 이 모든 이야기들이 전개되니 소설 속이지만 사서 선생님 이름이 옥스퍼드! - 이 추천하는 책들을 찜하는 즐거움도 더합니다.

 

이 작품은 특이하게도 책 자체를 미스터리 모험의 중요한 소재로 삼았답니다그래서 띠지에 가려 보이지 않던 표지 숫자의 비밀과 모두가 궁금해 하는 존재그리고 마지막 대반전이 약이 오르면서도 통쾌했습니다<쥬만지> 보듯 재밌게 읽다가도문득책을 읽고 있는 나의 존재와 사실이라고 믿은 이 세계를 진심으로 의심해보는 인지적 혼란을 즐기며 읽었습니다아무리 생각해봐도 인류 최고의 발명품은 여전히 입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확인하게 되지만 스페인 문학과 예술이 참 좋습니다덕분에 오래 전 영화관에서 감탄을 거듭했던 <판의 미로>의 환상적 파랑도 떠올라 더 즐겁습니다<파란 책>을 언젠가 영화로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레오가 물었다.

당연하지너는 내가 어디에 사는지 알고 있잖아.” 보가스는 동그랗고 깊은 두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그래청소년 열람실이지.’ 레오는 슬픈 마음을 애써 감추며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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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의 아이, 크리 오늘의 청소년 문학 31
일요 지음 / 다른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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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에서 기개가 남달랐던 여성들을 그림도 사진도 없는 상태에서 복원한 작품들을 보면 서양 중세 시대 성경 그림과 다를 바가 없다는 느낌을 받는다이상적인 이미지와 구현하고자 하는 분위기가 기정사실화되어 대상 인물의 연령과 신분에 관계없이 후덕한 중년 양반가 여인이 되고 만다



뜬금없이 초상화를 언급하는 이유는 표지의 주인공의 모습과 분위기가 마음에 들어서이다신간임이 분명한데 아주 오래 믿어온 가치를 담고 있는 이야기로 읽혔다거짓은 드러나고 진실은 밝혀지고 노력은 보상받고 자유는 확대되는 것이 인류가 진보하는 방향이라고 올곧게 전하는 메시지가 있다.

 

거대담론을 내다버리자는 거대담론들에 지치고 일상에 소모되어 오래 잊고 지냈던크리의 나이였던 나 역시 모두 다 이해하지 못해도 의심할 바 없이 믿었던 주제이다개인으로서의 나는 나를 실현시키고 그 길은 더 나은 세계를 만드는 일로 수렴된다는 가치가 유의미하게 해석되던 시절이었다.

 

일요일에 태어나 고요하고 느긋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자신을 소개한 작가는 온전히 이율배반적인 작품을 완성했다예민하고 판단력이 뛰어나고 행동력도 남다르고 초능력까지 갖춘 매우 열심히 노력하는 주인공이다느긋하게 다룰 수 있는 주제라곤 하나도 없다차별혐오폭력은 그 무엇도 합리화될 수 없다고각자도생은 올바른 길이 아니라고부조리는 깨부수고 출발은 평등해야 한다고 말한다.

 

추억에 반응하듯 마음이 간질거리고 생각은 복잡해졌다거침없이 현실을 끌어다 쓰고 정면 돌파를 권하는 작가 덕분에 능력도 없이 문화 비평가의 마음가짐으로 읽었다쓸데없이 진지한 읽기 태도에도 다행히 재미는 사라지지 않았다.

 

바이러스로 인한 판데믹 상황은 작금의 현실과 동일한 설정이나 이 바이러스는 인간을 좀비로 만드는 질병으로 분류되는 기능을 한다이야기 세계의 인간은 건강체와 잠복체로 구분되고 그러한 분류는 바로 차별과 혐오로 이어진다수직으로 곧게 선 타워에 삶의 공간을 만들어 운용하는 인류 문명그 자체로 계급적인 107층 타워 건물의 지하 17층에서 태어난 아이가 공고한 이 세계를 균열 낼 주인공 크리이다.

 

분리정책이 우리를 지킵니다각자의 자리를 지켜요생명을 지켜요태양은 잠복체를 죽여요.”

 

일견 간단명료한 분류일 것만 같은 체계가 진실로는 더 복잡하고 비밀이 많고 온갖 사정으로 오염되었다는 점은 현실의 우리가 자주 경험하는 조바심을 떠올리게 한다현실의 의제들은 정확한 공식을 사용하면 매끈한 정답을 주는 문제풀이처럼 해결된 바가 없고모든 과정에 영향을 미치는 외부력들 또한 사라진 적이 없었다.

 

그냥 통찰력이 멋진 문학 작품으로 읽고 싶은데멈칫거리는 구절들은 참 많기도 하다작가는 인류 문명의 면면과 이미 경험한 역사도 끌어들여 반성하고 바꾸자고 끈기 있게 글을 이어간다.

 

불안과 불신이 없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나이라 맞는 말에도 불편하고 힘겨워하는 독자가 되었다예의를 지키느라 세 문단을 읽어도 결국 하려는 말을 돌리고 마는 어른들의 문학과 달리 짧은 문장들에 직구를 던져 놓은 청소년 문학을 가끔 만난다오늘도 그런 날이다.



............................................................. 

"만약 어느 누구라도 그들이 누려야 할 권리를 누리지 못하고 있는 사람을 만나거든그의 편을 들어주고그가 그 권리를 찾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라, (...) 주변을 둘러 보라."

 

"최악의 태도는 무관심이다. (...)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겠어?

내 앞가림이나 잘 할 수밖에.(...)

이런 식의 태도는 분노할 수 있는 힘,

'참여'의 기회를 영영 잃어버리는 것이다."

 

"윤리정의지속 가능한 균형의 문제를 최우선으로 고려하여 '비폭력'을 택하여 평화적 봉기를 하며 분노하라."

 

부디 나는 언제나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편에 서 있길.


분노하라

작가
스테판 에셀
출판
돌베개
발매
2011.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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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고 싶을 때마다 한 발씩 내디뎠다 - 우울함과 무기력에서 벗어나 러너가 되기까지
니타 스위니 지음, 김효정 옮김 / 시공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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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과 조울증으로 인한 깊은 무기력에서 무려 마라토너로 변모하는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이다기뻐하며 박수를 보내기엔 얼마나 지독하게 힘들었으면 마라토너에 이르렀나 하는 생각에 내용을 읽기 전 마음이 짠해졌다.

 

사실 나는 희망을 지키고 싶었다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으면 진짜처럼 느껴지지 않는다이 작은 성취는 내 상상 속에만 존재했다앞으로 어떻게 될지 몰라도 당장은 희망을 붙잡고 늘어질 수 있었다.”

 

두 주 전쯤에 여성마라톤대회 소식을 보고 기분이 더 쓸쓸해진 기억이 난다젊을 적 추억만 돌리지 말고 나도 다시 달리고 싶은데…….

 

표지와 제목만 보고 든 감상은 그쯤하고 마라토너들이 그렇듯 아주 기분 좋은 솔직함과 진중함이 가득한 책을 펼쳤다생각을 다 떨치고 호흡에 집중하여 기분 좋게 달리는 상상을 하며.

 

뭐 이런 부모가사랑 대신 술을 권하는 부모라니. 10대에 폭음을 하고 여러 차례 위험에 처하고 20대에 체중을 줄이기 위한 집착으로 섭식 장애를 겪고도 변호사가 되었다니부모도 저자도 충격적인 인물들이다전문직이 되었는데 일시적 노동 불능’ 진단 번 아웃 으로 은퇴하고 가족들의 죽음이 잇따른다.

 

다행히 정신과치료도 받고 치료 모임에도 나가고 명상과 글쓰기 수업도 듣고저자가 이렇게 움직이고 노력하는 것을 읽으며 잘 회복하리라 믿었다나 역시 우울증 완화법 중 하나로 의사에게 걷기를 권유 받았다운동센터 트레드밀 위에서 이어폰하고 20분 뛰는 것보다 훨씬 더 효과가 좋았다한발 한발 나아가는 걸음에는 가감 없이 딱 그만큼의 치유와 위로가 돌아온다.

 

물론 걷기와 달리기는 많이 다르다누구나 달리는 법을 아는 것도 같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부상 없이 잘 건강에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오래 달리려면 배우고 훈련 받는 과정이 필요하다저자이자 주인공 니타는 정말 용감하고 대단한 끈기로 차례차례 닥치는 고통과 어려움을 가 겪어내고 훈련을 계속한다나는 그런 과정을 이어가는 니타가 우울증과 조울증에 휘둘리지 않을 뿐더러 이전보다 훨씬 더 강인한 사람이 되었다고 확신했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상대는 나 자신이다나를 망치고 죽이려는 상대가 나 자신일 경우에는 도대체 어떻게 싸우고 이겨야 하는 걸까나도 다시 달리고 싶지만 심정적으로는 아마 니타와 비슷한 부정적인 마음이 많아질 지도 모르겠다예전에 달리기를 좋아할 때도 처음 10여분간은 늘 머릿 속에 이런 목소리가 들렸다. “도대체 이걸 왜 하는 거냐바보 같은 짓이다누가 하라는 것도 아니고힘들어 짜증스럽다 등등” 그런 시간이 지나면 소위 말하는 하이한 시간이 온다몸도 편안해지고 오히려 상쾌해지고 기분도 좋아지는매일이 그 반복이었다.

 

니타가 자신의 목소리들과 싸워나가는 이야기는 솔직해서 더욱 인간적이고 힘겨움이 고스란히 전해져서 무조건 응원하고 싶은 장면들이다두려움비아냥이성을 가장한 변명들달콤한 유혹의 목소리들……내밀한 심리적 묘사들은 니타만이 아니라 독자인 나를 향해서도 날카로움을 물리지 않는다내게 들리던 목소리들을 떠올리며 떨치며 다시 집중해서 읽어야 하는 순간들이 적지 않았다.

 

49의지박약우울증과 조울증이라는 양극성 장애공황장애를 앓던 니타는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만으로 니타는 삶을 바꾸었다침대에서 일어나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가 달렸다복잡하지 않다! “꾸준히 계속하기.”

 

경기가 끝나고 며칠간 사람들에게서 이런 말을 들었다인생을 바꾸는 경험을 하셨네요돌이켜 보니 풀 마라톤 결승선을 넘는 것은 최고의 경험 이상이었다. (...) 하지만 사실 그런 사건들이 인생을 바꾸는 것은 아니다인생을 바꾸는 것은 일생일대 사건의 전과 후에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과정이다.”

 

달리기가 우울증이나 음식에 대한 집착을 치료한 것은 아니었다. (...) 약을 끊게 해준 것도정신과 의사와 이별하게 해 준 것도 아니었지만 마음은 조금 평화로워졌다. (...) 내 감정은 여전히 배 밑의 파도처럼 들썩였지만 적어도 달리기를 하거나 글을 쓰는 날에는 자부심을 느꼈고 끊임없이 음식 생각만 하지도 않았다. (...) 문득문득 의구심이 들었지만 내 삶은 차츰 나아지고 있었다.”

 


풀코스 마라톤을 목표로 하지 않더라도,

다른 보상이 없더라도,

달리는 순간을 경험하기 위해서

다시 달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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