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의 해변에서 혼자 현대문학 핀 시리즈 시인선 33
김현 지음 / 현대문학 / 2021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가 좋다동경한다공들여 잘 벼린 것들이 가지는 분위기가 아름답다그래서 읽지만 매번 읽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가끔은 풀 수 없는 수학공식을 들여다보는 기분이 든다읽지 못하는 시잠시도 내 것이 되어 주지 않는 세계는 쓸쓸하다.

 

시를 읽기 전 여타의 정보를 찾아보지 않는다새로 만난 시가 주는 느낌이 깨어질까봐어차피 오롯이 혼자인 유일한 경험원치 않는 색들로 채색될까 경계하는 것이다그러다 아무리 애써 봐도 읽혀 주지 않는 시들을 결국 놓아버린 기억이 오래지 않다.

 

그렇기도 하고고집스런 결심이 약해지기도 하고뭐든 방법이 있다면 결국엔 시를 잘 읽고 이해하는 쪽을 택하리란 이유를 들어 시인의 에세이를 먼저 읽어 보았다작가를 모르고서 작품을 잘 이해하는 일이 가능할 리 없다 하나 에세이 한 편 읽는 것이 얼마나 이해를 높일까도 확신은 없지만 이번에 그렇게 해 보았다.

 

선입견에 있어서 나는 참 구태의연한가보다시인의 에세이가 뜻밖에 뜨겁고 선명하고 강렬해서 그 어조에 놀라고 어색했다시인은 잠시 화가 난 게 아니라 분노하고 있다그래서 슬프고 그런데 모두 사랑하는 이야기이다 ― ♡시집을 넘기는 내 손 끝에서 따끔거리는 불꽃이 빠삭거린다.

 

그는 어디에도 머물지 않으며 누구와도 있지 않고 그 자신을 바라보지 않았다해변에서는 누구나 남길 것인가 지울 것인가선택의 기로에 선다해변에서 그런 갈림길에 서보지 않은 사람을 나는 가까이하고 싶지 않다가지 않은 길에 관해 후회 없이 인간다운 척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나는 그가 사랑의 기로에 서 있길 바란다몰락은 대체로 위대한 창조로 이어진다.”

 

오래 만나지 못해 더 그리운 친구가 옮겨 살고 있는 제주를 찾아가 어디든 적요하고 아름다운 해변에 앉아 함께 읽으면 좋겠다그러지 못해 아쉽다대신이라기엔 무례할 지도 모르지만 본 적 없는 동물과 새와 식물과 꽃이 함께인 강주리님의 작품 표지를 한참 보았다.



하나도 반가운 뿔소라가 세 개나 있다제주 삼춘들이 바다에서 캐다 준 뿔소라를 꽝꽝 깨부수어 꼬득또득 씹어 먹으라던 다사로운 친구가 더 그리워지고그리움은 이기적이라 그 곁에 가서 앉고 싶어 잔병이 들거나 눈물이 날 것 같다 ― ♡.

 

첫사랑은 그 이후의 모든 사랑은 가사처럼 어쩌다 생각이 나는 게 문제이다아무 일 없이도’ ‘언젠가 조용해진 연인이 되어’ ‘홀로 걷게 되는’ 날이 오면 소리 없이 흔들리는 나뭇잎도 나의 불행만을 확인해준다이별의 시간마저 달리하는 이별을 하고 비로소 헤어질 준비가 된 나는 [뿔소라]를 선물로 내민다그때의 뿔소라가 매끈하고 빛난다면 수명이 다했거나 속이 텅 빈 상태일 것이다이끼가 끼여 두텁다면 아직 살아 온기가 남은 마음이 거기 있을 것이다 ― ♡.

 

뭐 잘 뉘우치지 않는다는 것이 자랑은 아닐진대살리는 것보단 죽이는 게 쉬우니까/사시사철 뜨거운 사람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니까 [자국]’ ‘뿔소라의 내장에는 독이 있다는 핑계로 빈 공간으로 날뛰던 사랑도 부재를 견디지 못하던 슬픔도 모두 말 못 되는 지껄임이 되어상대가 홀연히 경쾌하게 자리를 옮기는 것을 보고서야 남은 할 말에 혼비백산하게 되어잘 사시는지잘 살고 있는지보이시나요저의 마음이왜 이런 맘으로 살게 되었는지보이시나요저의 마음이왜 이런 맘으로 살게 되었는지 ― ♡.’



네가 보여준 그 날의 바다 풍경이 오고서야 혼자서 해변을 걷노라니 온갖 상념이 반복적으로 밀려왔다 밀려가곤 했다의 구절을 이어 읽었다그 여름 해변에서 네가 내 손에 쥐여줬던 조개껍데기에 관해사랑할 때만 소중한 것에 대해.’ 인간은 사랑하기 때문에 발견한 사랑할 무언가를 사랑하는 이의 손에 자꾸만 놓아 준다오래 전 우리가 물고기였을 때 새였을 때 건네던 선물들을 기억하는 것처럼쥐여줬던 손과 손이 향연처럼 떠올라잠시 ― ♡.

 

(...)

어스름한 저녁에 책상 앞에 앉아 뿔소라에 귀를 대보면

언제 왔는지

어디서 왔는지

네가 어깨에 손을 올리고 묻는다

 

뭐 해 불도 안 켜고

(...)

 

큰 꿈을 꾸거나 큰 행복을 바라는 방법을 몰라서 평생 작은 것들만 욕심내며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나도 그렇다소확행을 바라는 큰 무리에는 끼지 못해 혼자 행복만을 알아보곤 한다언젠가의 내 행복도 도봉로 10길 잔치국수에 담겼던 적이 있다플라스틱이 아닌 그릇에 담긴 그릇에 행복했으니까작은 행복의 띄엄한 흔적으로 이어나가는 삶이지만 시인은 큰 시를 쓰기로 한다’ ‘어딘가 복스러운 사람을 보면/무럭무럭 자라서/인류의 등불이 되길/부러워서 부끄럽게/열심히 지켜보았다/해시태그 인생사.’ 나도 바라본다인류의 등불이 출현하길열심히.

 

삶은 오늘도 쏟아지지 않고 슬픔과 더불어 소년은 (...) 순식간에 사라졌다’ [인내의 이유]는 매일 충분하니 맞다대체로 삶이 문제다끝날 때까진 계속이니까계속 밀고 가야 하니까.’ 이제 남은 삶에는 쫒아 올 행복한 사람도 행복도 없을지 모른다그래도 이럴 수가 아름다워 보여서/희망적인 사람이기로 했다

 

(...)

꺾이지 않는

피를

흘리면서

도망쳤다

(...)

 

시를 소리 내어 읽으면 잘 울게 된다특히나 사랑이 사랑에게 사랑을 사랑하자는 스물 한 편의 시와 한 편의 에세이를 읽는다면이 모두를 세 시간에 완독할 수 있다는 네 말 때문에 나는 다시 다사로운 해변에 홀로이다움직이지 못하는 발 옆에 뿔소라가 하나셋 있어 주면 좋겠다두 귀에 입술에 대어보고 싶으니우두커니 남의 인생을 재생하다 보면 (...) 똑같이 따라 써보게’ 되면 따라 읽어 보게 되면. ‘그런 게 간혹 시가 되기도 하고시가 될 뻔 하기도 하고시가 되라고(...) ― ♡.’


...............................................................................

꼭 싸 안고 며칠을 지내 봐도 부화는 없다

그만 품에서 내어 놓을 때


시는


좋고

낯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