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킬레우스의 노래 (리커버 특별판)
매들린 밀러 지음, 이은선 옮김 / 이봄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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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의 시대라고 명명하니 신비롭고 멋지고 명예롭고 신나는 시절처럼 들리기도 하지만법도 안전장치도 국가 간 협약도 없이 잦은 전쟁이 이어지던 시대이기도 하다살고자 한다면 영웅이 되고자 한다면 타인을 죽여야 한다.

 

명성이라는 게 희한한 물건이란 말이지이 세대에서는 존경의 대상이었던 것이 다른 세대에서는 혐오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기억의 대량학살 속에서 누가 살아남을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야. (...) 우리는 잠깐 타오른 횃불의 불길과도 같은 인간에 불과하지 않은가.”

 

우리는 피로 이루어진 세상그 피로 영광을 쟁취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었다싸우지 않는 건 겁쟁이들뿐이었다왕자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전쟁에 나가서 승리하든지 전쟁에 나가서 죽든지둘 중 하나였다.”

 

절박한 절명의 시대라도혹은 그런 시대이니 목숨을 건 사랑이 가능했을 지도 모르겠다우리가 복기하고 찬양하는 지극한 사랑에는 언제나 죽음의 배경이 짙고 깊다시대도 상황도 다르나 누구의 사랑이라도 간절함과 지고한 존재 방식 때문에 감정의 밀도가 높아서 슬픔도 눈물도 참지 못하게 된다.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그의 존재가 신발 속으로 들어온 돌멩이와 같아서 모르는 체할 수가 없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렀던 것 같다그의 이름이 나를 뚫고 지나갔다.”

 

내가 그를 못 알아볼 거라고 생각한 걸까나는 살짝 스치는 감촉만으로도제 체취만으로도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눈이 멀어도 그가 숨 쉬는 소리와 땅을 밟는 소리를 듣고 알 수 있었다죽더라도 땅 끝에서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과몰입도 모자라서 소리 내어 읽고 있었다문장들에 설렌다계절이 바뀌는 저녁이라 줄어드는 자외선 탓을 해본다넘긴 페이지가 많아질수록 신 내린 듯 쓴 문장들이 늘어난다이토록 실감나는 전쟁의 장면전쟁이 시작되기까지의 과정긴장충돌공포기대를 각자의 것들로 모두 체험한 듯 기록하고 그려낸다.

 

그리스 로마 신화를 다룬 이야기들에서 아무 지분도 없었던부재도 모자라 모멸 당하던 존재인 님프를 <키르케Circe (2018)>에서 주인공으로 내세워 온 세상을 뒤집어엎을 듯한 작품을 만들어 낸 저자의 저력을 다시 느낀다<키르케>가 두 번째 작품이나 먼저 읽은 탓에 이렇게 느낀다.

 

호메로스일리아스아킬레우스라는 이름들에 익숙한 이들이 많을 것이다완역본을 읽어 보려 노력은 했지만 결국 읽지 못한 나도 이름과 간단한 이야기들만은 기억한다그럼 파트로클로스Patroklos, Πάτροκλος를 아는 이들은 얼마나 될까그는 주변과 가장자리와 경계와 약한 존재를 주인공으로 삼는 능력자 매들린 밀러의 화자이며이 작품 속에서 완벽한 부활을 누린다.

 

최고가 되는 것이 가장 중요한극심한 우수성의 문화에 살았던 그리스 영웅들그런데 파트로클로스는 자신이 아닌 친구 아킬레우스가 최고라는데 만족하는 인물이다그와 친구가 되고 그의 그림자가 되는 걸로 충분하다 여긴다파트로클로스는 그런 자신의 성정에 괴로워하지 않았고그것이 바로 파트로클로스를 독특한 인물로 만든다나는 이 놀라운 인간에게 목소리를 주고 싶었다.” 저자의 말 중에서



첫 소설인 <아킬레우스의 노래The Song of Achilles (2011)>는 10년간 집필한 작품이다그 노고를 짐작해보면 재밌고잘 읽히고다음 내용이 궁금하다고 얼른 페이지를 넘기는 동작이 미안해진다평생 대단한 관심을 가지지 않은 신화 속 영웅 아킬레우스가 생을 가진 인물로 살아나고사랑하는 이야기에 홀린다.

 

연약하지만 성품이 곧은 이 파트로클로스 -를 사랑하는 것도그 대상에 무한한 사랑을 보여 주는 것도그 사랑을 죽음으로부터도 지키겠다고 하는 것도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내내 설렌다사랑은 목적도 없이 열렬하나 인간은 인간적일 뿐이라 슬프고 아름답다.

 

행복했던 영웅이 몇 명이나 있었을까영웅이 되는 길에 쏟아진 피를 생각하면 그 운명은 비극 외에는 어울리는 것이 없다고 느낀다아킬레우스는 행복한 첫 번째 영웅이 되고 싶었고저자는 그렇게 만들어 주고 싶었으나…….

 

트로이 전쟁은 기록된 전쟁사로 기억했을 뿐 참여했거나 휘말린 실제 인간들이 있었다는 것을 공감까지 하며 상상해 본 적은 없었다아킬레우스가 느끼는 분노가 저자의 섬세한 서사로 극적으로 펼쳐지니 평생 공감하리라 상상 못 해본 인물의 분노를 받아 안은 듯 느끼며 읽는다.

 

신들의 거래란 늘 그랬다마지막에는 그 누구도 살려 주지 않았다이들이 자신의 사랑을 확인하는 방법은 예정된 죽음을 거부하지 않으면서도 초월하는 방식 밖에는그런 믿음 외에는 애초부터 없었을 것이다서로의 이름을 기억하며.


Achilles and Patroclus: Archetypal Heroes


The photo above shows Achilles mourning the dead Patroclus”, 

a scene from the front panel of a Roman sarcophagus that is currently at the museum of Berlin.


나이가 들어가니 믿고 싶은 것들이 늘어난다땅이 꺼지듯 슬프고 아픈 그리운 이들의 죽음 이후에 그들 모두가 어딘가 좋은 곳에 가 있어서 다시 만날 수 있다고 위로를 나누고 싶다저자의 명백한 의도에도 역시 동조하고 싶다이들이 저승 어딘가에서 영원히 함께하고 있다고.

 

추억이 샘물처럼 솟아나는 속도가 막을 수 없을 만큼 빠르다말로 나오는 게 아니라 꿈처럼비에 젖은 흙냄새처럼 피어오른다이런 게 있다고 나는 말한다이런 것도 있고 이런 것도 있다고여름 햇볕을 받으면 그의 머리칼이 어떻게 보였는지달릴 때는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수업을 받을 때면 올빼미처럼 진지했던 그의 눈빛이런그리고 이것행복했던 수많은 순간들이 쏟아져 나온다.”

 

읽는 동안 느낀 설렘은 결말에 이르자 그만큼의 슬픔으로 바뀐다그동안 쌓인 친분이 커서인지 슬픔의 크기가 오히려 더 크다내가 어설프게 알던 아킬레우스는 크리스타 볼프의 <카산드라>에서 그려진 오만하고 잔인하고 야만적인 이미지였다.

 

매들린 밀러는 고전을 재해석한다기보다 훨씬 더 설득력 있는 방식으로 재집필한다개연성에 휘말려 들어 설득되고 나면 중간에 빠져 나올 길이 없다감정의 쓰임이 운명에 도전하듯 강렬하다읽기 전이라면 마지막 페이지의 스포를 꼭 피하길!

 

퍼즐 풀이의 달인처럼 구성한 모든 질문들이 결말에 이르러 모두 정확하게 회수된다복선인 줄 모르고 지나친 내용들이 답지와 동시에 복선임이 밝혀진다도망치려고 한 모든 시도가 예언을 구현하는 조각들인간으로서는 벗어날 수 없는 그런 운명<아킬레우스의 노래>에 연주되는 것은 파트로클로스의 노래이다.

 

언어를 조금이라도 알지 못하는 곳들을 여행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언젠가 터키로 향한다면 가방 속엔 <아킬레우스의 노래>일정엔 아킬레우스와 파트로클로스의 무덤이 있을 것이다.

 

우리를 묻고 이름을 새겨줘우리를 자유롭게 놓아줘.”

 

인간이 사는 방식에는 승리보다 가치 있다고 평가할 수 있는 일들이 있다전능한 신이 아닌 나약한 인간이 이타적인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만의 기적이다신은 인간을 실패 없이 벌하는데 골몰하나인간은 사라지지 않는 고민거리들을 거듭 생각하며 앞으로 조금씩이라도 나아가려 한다.

 

현실의 현재의 인간이 그리스 비극에서처럼 성공으로 인한 오만에 빠져 파멸에 이르는 휴브리스휴먼이 아니라 스스로 야기한 문제들의 해답을 찾는 길을 가길 간절히 바란다.

 

휴브리스 hubris : 문학그리스 비극에서과거의 성공을 바탕으로 지나친 자신감에 빠져서 오만한 태도를 보이다가 신과 갈등을 일으키고그로 말미암아 파멸에 이르게 되는 주인공이나 영웅의 특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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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가 흐르는 곳에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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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구독에 열의가 없는 제가 알람 설정까지 해 둔 유튜버는 스티븐 킹 작가입니다불쾌한 적도 실망한 적도 없어 꾸준한 애독자가 되었습니다작가의 육성으로 듣는 작품을 무척 좋아하는데 <If it bleeds>를 낭독해 주어 신났지요여러 번 듣고 주변에도 권했습니다.

 


영어책 그대로 읽어도 좋고 중학생들도 읽을 수 있는 깔끔하고 멋진 문장들 - ‘빨리 빨리의 최강국 한국에서 번역 출간된 책으로 읽어도 즐겁고 행복한 일입니다더구나 체온 유지만으로 기운이 달리는 여름에는 단편이 좋은데이 책은 단편 4개로 이루어진 책입니다더 바랄 게 없습니다.

 

늘 그렇지만 600페이지가 아쉽습니다언제 다 읽었는지 서운합니다신간 기다릴 생각에 아득합니다시작하기 전에물과 식량을 준비해 두시고 화장실도 다녀오시고 휴대폰도 가능한 멀리 하시고 재밌게 읽으시기 바랍니다분명히 쉬지 않고 방해 받지 않고 빠져 들어 머물고 싶어지실 테니까요.

 

버릇처럼 의식처럼 표제작부터 읽어 봅니다.

 

1. 피가 흐르는 곳에

<아웃사이더>란 작품을 읽으신 독자에게 아마 더 반가울 작품입니다그 이야기의 연속이기도 하니까요결말을 알면 모든 매력을 다 알아 버린 듯해 급격히 흥미가 떨어지는 것이 추리스릴러이지만 다시 생각해도 재밌는 작품이었습니다.

 

이 작품에는 무려 쉐이프쉬프터(shape shifter: 다른 사람으로 변신할 수 있는 능력자)가 등장합니다이것만으로도 엄청난 스포인가 고민스럽네요혹자는 이 설정은 이미 유효기간이 끝났다고도 여기는데 소설과 드라마에서 엄청 써 먹음 킹에게는 소재가 무엇이든 스토리는 늘 재밌으니 다 좋습니다.

 

작자 미상이라고 써서 읽어 보라고 해도 이건 스티븐 킹의 작품입니다. 초능력임에는 분명하지만 사람들이 호의를 가지지 않는 능력이고 보면 이 존재가 사는 모습이 행복할 리가 없겠지요더구나 다른 이의 고통과 슬픔을 식량으로 살아간다고 하면 더욱 꺼림칙하지요.

 

그런데 이런 방식으로 연명하고 살찌고 심지어 부를 누리는 존재는 우리 사회에도 있지요어쩌면 짐작보다 많을 수도 있겠네요제목 - 피가 흐는 곳에 이 의미하는 바를 아시면 바로 추축이 가능합니다타인의 고통과 슬픔이 특종이 되는 업계이니까요.*


* if it bleeds, it leads : 피가 흐르는 곳에 특종이 있다. 폭력적인 것이 더 잘 팔리는 미디어 산업.


 태생적인 부분은 그렇다고 치고자발적으로 적극적으로 순기능마저 사라진 끔찍한 괴물이 되기로 선택한 것은 분명 종사자들의 책임입니다.

 

괴물의 시선으로괴물 같은 어투로괴물 같은 기획으로혹은 협잡과 오보와 악의로 세간의 관심을 끌고 흥행을 목표로 하는 미디어의 행태는 그야말로 얼굴을 바꿔가며 제가 가진 직업의 공적 가치도 역할도 안중에 없이 제 이익만 챙기는 쉐이프쉬프터에 다름 아닙니다.

 

쓰다 보니 너무 많은 내용 노출에 미안합니다그래도 킹의 작품은 직접 읽으면 다른 차원의 재미와 즐거움이란 걸 이마 다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2. 해리건 씨의 전화기

너무 슬픈 일이 떠올랐지만 스티븐 킹의 결말을 믿고 끝까지 읽을 수 있었습니다가까운소중한 이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번호를 나의 연락처 목록에서 볼 때지울 때혹은 지우지 못할 때.

 

상대의 사후에 어떤 이유로든 그 상대의 번호로 전화를 걸어본 적이 있나요만약 걸 수 있다면…… 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인가요.

 

내가 떠올려야 하는 아픈 기억들과는 별개로 이야기 속의 인물들은 상반된 두 세대에 속한 각각의 인물들로서 불완전한 기술을 사용해 서로 연결됩니다무척 특이하고 새로운 이야기입니다.

 

3. 척의 일생

물리학에서 다루는 세상 프랙털 과 물리학에서 현재까지 불가능하다고 밝힌 세계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가 함께 어우러져 배경으로 설정되어 있습니다엄청 재밌고 서글프네요삶의 끝을 알고 과거로 걸어가는 일이니까요.

 

끝을 안다는 건 나라면 안심이 되는 일이기도 하겠지만 척의 할아버지에게는 괴로운 일이었습니다하지만 슬픔에 빠져 살지 않고 무척 성실하게 사신 점이 멋집니다그가 경험한 시간은 다른 이들이 보편적으로 경험하는 시간과는 아주 다른 것이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합니다.

 

무한대는 숫자가 아니라 과정입니다그리고…… 사람은 누구나 온 세상을 품고 있다.”

 

4. 


(안 돼라고 소리 내어 외쳤습니다마지막 편입니다.)


주인공은 마침(?) 작가입니다창작의 고통은 잘 모르지만 알 것도 같습니다다른 모든 일에도 가장 어려운 것은 0에서 1을 만드는 것이니까요. 1에서 100까지 확장하는 것은 사실 누구나 주의하고 노력하면 할 수 있지요하지만 최초의 창조창작새롭게 무언가를 만드는 일은 다른 차원의 일이라 생각합니다.

 

드류 라슨은 자신의 유일한 장편을 쓰기 위해 위험한 거래와 모험을 감수합니다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파우스트와 악마의 거래처럼마침내 영감이 떠올랐을 때 그것을 글로 옮기기 위해 외딴 곳에 위치한 별장으로 가는데…….

 

정신적으로 고통스럽고 체력적으로 힘들 뿐만 아니라잇따른 창작의 실패가 가족마저 위험하게 만드는 경험을 한 작가의자신을 극한까지 몰아붙이는 엔딩은 무엇일까요?

.

월요일 연휴가 낯설어 땅에 발을 제대로 못 딛고 살짝 허둥지둥 시간을 보내는 기분이었습니다그럴 때는 책 한 권 골라 잡는 것이 착지에 도움이 되지요다행히 그 책이 스티븐 킹의 신작이라서 오후가 말끔하게 행복해졌습니다.

 

읽을 때 가장 재밌었던 작품과 책을 덮고 나서 떠오르는 작품이 다르네요다른 독자들의 최애가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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뿜빠뿜빠 노래하는 자동차 네버랜드 우리 걸작 그림책 72
김삼현 지음 / 시공주니어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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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도 생각을 못해봤네요.

자동차들마다 음감이 다 다른 소리를 낼까요?

 


노란 자동차는 음만 낼 수 있어요.

혼자지만 , , 노래를 부르며 다녔지요.


 

혼자도 좋지만 여럿이면 더 즐거울 수 있지요.

특히! 다른 차들이 다른 음을 낸다면,

우리가 모두 모여 풍성한 노래를 함께 부를 수 있다면.

 

시도 시도란 음을 내는 특별한 차는 누구일까요?

책에서 만나시라 언급을 피해봅니다.

 

집에 머무는 시간이 계속 이어지니

거리를 마음껏 다니는 차들의 모습도 부럽습니다.

글도 재밌지만 그림을 낱낱이 샅샅이 보는 일도 즐겁네요.

 

차를 타고 다니며 지나친 많은 것들을 멋진 일러스트로 만날 수 있습니다.

자동차들의 디자인들도 멋지고 거리의 모습도 재밌고

교통과 관련된 많은 것들이 자세하고 다채롭게 담겨 있습니다.


 

축제!

신나고 떠들썩하고 활기 찬 그 장소가 시간이 그립습니다.

함께 모여 노래 부를 수 있어 자동차들 즐겁고 멋져 보입니다.



차를 좋아하는 가족도 잘 모르는 가족도 모두 함께

웃고 감탄하며 볼 수 있는 사랑스럽고 멋진 책입니다.

그림책은 언제나 언제나 좋습니다.



https://blog.naver.com/kiyukk/222472302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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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쓴 것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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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띠지를 벗겨내지 않는데 주방 선반에서 약상자를 꺼냈다라고 시작되는 책의 표지가 궁금해 확인해보았다이 약들은 어떤 효과가 있을까부서진 모양새는 무슨 뜻일까.

 

일상과 현실을 판판하게 깔아두고 별다른 손질 없이 보여 주는 조남주 작가의 작품들은 신기하게도 한계와 좌표를 동시에 드러낸다상냥하진 않지만 그래서 친절한 시선이자 엄격한 질문이다.


나는 내 경험과 사유의 영역 밖에도 치열한 삶들이 있음을 안다고내 소설의 독자들도 언제나 내가 쓴 것 이상을 읽어 주고 있다고 쓴다.”

 

내게서 출발하는 관계의 대상으로 타인을 인식하다가 이런 책을 만나면 선 자리를 바꿔 서보자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상대의 발자국 위에 내 발을 포개다 그곳에 담긴 뜨겁고 아픈 것들에 화들짝 놀라거나 날 것 그대로의 화를 흡수하기도 한다.

 

어느 때는 차분하게 상대의 아픈 속을 먼저 헤아리고 눈물을 보태는 경우도 있지만살면서 누구에게라도 뾰족하게 무감하게 뱉은 모든 말들이 날아들어 몸에 꽂히는 기분이 들 때도 있다.

 

내가 소리 내어 속상하고 억울한 것들 조목조목 원망할 수 있었을 때에도그런 목소리도 없이 미루고 포기한 상태로 여전히 타인을 돌보는 일을 멈출 수 없었던 존재들의 일상과 삶이 보인다.


정애 씨가 가고 싶어 갔겠어돈은 없지할 수 있는 것도 없지돌아갈 친정도 없지애들은 둘이나 집에 있지근데 어떻게 해정애 씨 욕하지 마세상에 정애 씨 욕할 수 있는 사람 한 사람도 없어!”

 

욕 안 한다아플 뿐이다해줄 수 있는 게 별반 없어 속이 상하지만 느슨하더라도 놓치지 않는 연대를 이어가는 방법을 찾으면 좋겠다비대면 시절을 사느라 그런 마음은 점점 더 해시태그와 후원으로 간편 수렴되어 무람하다.


부디 그런 저런 것들이라도 누군가에게는 필요한 만큼의 온기가 될 수 있을까시간이 날 때 여유가 있을 때 우리는 서로의 동아줄을 조금씩이라도 수선해 두어야 하지 않을까.

 

결국 내가 내게 다시 물어야할 질문 역시 매번 조금 다르고도 같다여성으로 산다는 것나이가 든다는 것나이든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어떻게 살 것인가어떻게 살고 싶은가.


작가는 자신의 경험인 듯 아닌 듯한 이야기 속에서 "적의는 호의보다 훨씬 힘이 셌다"고 한다알지 못하는 누군가가 나를 멋대로 판단하고 비난을 넘어 존재를 추궁하고 살의에 가까운 적의를 내비친다면 그건 도대체 얼마나 거친 폭력일까 소스라친다.


그래서 10대에서 80대의 화자들의 목소리로 들려 준 이야기들이 재밌고 통쾌하고 슬프고 감정적이고 이성적이고 다 좋아서 그게 또 아프고 감사하다나는 딱히 이유를 설명할 수도 없는 문장들에 눈물을 줄줄 흘리며 읽었다.

 

스피드퀴즈처럼 진행되는 욕설과 지나쳐버리는 설명의 기회가 게임처럼 펼쳐지는 속도전의 삶에서 우리에게 글이 있다는 것읽고 쓴다는 것은 생존의 몸짓이다이 글을 썼으니 억울한 것들을 당장은 밝히지 못해도 더 살아갈 수 있다.

 

사실도 진실도 본질도 중요하지 않다는 괴성들이 지나가길 기다려 저주의 가시밭길을 빠져 나와 우리는 쓴다이 글이 누군가의 삶을 덜 아프게 가볍게 해주길 바라며 기록한다다른 더 좋은 방법이 없어서책은 오래되고 느리지만 힘을 다 잃은 것이 아니라서진짜 억울한 사람이 살아남는 방법은 이거 하나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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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iesis 2021-08-15 2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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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징용자의 질문 - 일제 강제노역 피해자 문제,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
우치다 마사토시 지음, 한승동 옮김 / 한겨레출판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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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제목으로 삼은 잘못하고도 고치지 않으면이를 잘못이라고 한다.”는 2016년 6월 1베이징에서 체결된 미쓰비시 머티리얼 중국인 강제연행 강제노동 사건 화해에서 이 회사의 업무집행 임원인 기무라 히카루씨가 회사를 대표해서 중국인 수난자 유족들을 대표한 옌이청(86), 장이더(88), 간슌(95딸이 대리 참석씨 등 생존 수난자들에게 얘기한 사죄문’ 중의 한 구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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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안에 살아가는 인간들의 사정과는 무관하고도 서늘하게 흐르는 시간은 멈추지 않아 오늘은 광복 76년을 맞는 날이다홍범도 장군은 유해로 101년 만에 귀국하신단 소식을 듣는다그리고 대한민국 국정원이 일본 극우와 부당거래를 했다는 다큐멘터리를 보았다아베 전 수상은 올 해도 전쟁 범죄자들이 봉안된 야스쿠니신사에 참배했다두터운 비구름보다 어둡고 차가운 현실이다.

 

양국 간에 쌓인 원한으로 따지자면 한국 못지않은 중국과는 중국인 강제동원 피해 해결을 보았다는 내용을 만난다피해 규모는 한국이 훨씬 크지만 극우보수가 장악했을 가능성이 큰 일본 법정에서 이런 판결이 나왔다는 것이 한편 반갑고 다른 한편 고통스럽다.

 

일본의 극우보수 정권이 거침없이 한국을 모욕하고 얕잡아보고 무시하는 배경에는 돈 받고 자국민의 정보를 팔아넘기는 국정원과 같은 행태를 내내 해 온 이들이 있을 것이다.

 

“X년 팬티까지 뒤지라 해!”라는 반감과 적의가 가득한 지시는 일본 극우가 아니라 한국 국정원의 입에서 나온 소리다일본 공항에 도착한 위안부 진실 규명 활동을 하는 여성들의 속옷은 모욕을 주라는 목표에 충실하게 모두 공개되었다.

 

일본인 변호사이자 지식인인 저자 우치다 마사토시는 중국 강제동원 피해 해결을 주도했던 변론 당사자이며한국의 강제 동원 피해자 문제도 역시 해결 가능하다고 전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

 

어쩔 수 없이 일본 극우의 자금을 받아 <반일 종족주의> 따위를 출간하고 부끄러운 줄 모르고 주장하는 이들학자의 타이틀을 가진 이들이 불쾌하게도 떠오른다. 1965년 한일협정 당시 요정에서 일본전범에게 술과 요리를 접대하고 한국 육군 사열식까지 받게 해준 박정희 정권의 실세 김종필도 떠오른다.

 

“ 청구권협정에는 무상 3억 달러당시 환율로 1,080억 엔 상당의 금액을 (...) 10년에 걸쳐 분할되어그것도 현물 지급’ 형태로 지급됐습니다일본 정부는 신일철주금 등의 국내(일본)기업으로부터 플랜트를 사서 이를 한국에 제공했습니다이처럼 청구권협정은 일본기업에 이익을 안겨주는 일석삼조의 협정이었습니다배상금 지급이 모두 이런 현물배상 형태로 이뤄짐에 따라 일본기업들이 다시 아시아로 진출하는 계기가 됐던 것입니다.”

 

식민지 당시 친일파들은 할 수 있다면 조선인의 피도 모두 갈아 바꾸고 싶다 했다던데광복일 이후 내내 온존했던 친일파들의 행적과 그들의 후손인 21세기의 친일파들 역시 그런 심정으로 황국신민으로 제 머리를 조아리며 살고 있는 듯하다.

 

사는 일은 늘 어려운 일투성이지만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가장 뼈아픈 것들 중 하나인친일파를 제대로 처벌하고 정리하지 못한 시간은말끔하게 제거하지 못한 종양처럼 곳곳에 뿌리를 내리고 현재에도 끈질기게 사회와 사람들을 괴롭히고 병들게 한다.

 

일본 국내에서 예전의 침략전쟁을 부인하고나아가 미화하려는 세력이 시종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근년에 이런 움직임이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증가하고 있습니다이는 피해국 인민에 대한 또 다른 가해이며일본이 아시아 이웃 나라와 미래지향적 관계를 발전시키는 데에도 지장을 초래하고 있습니다이에 대해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공동으로 반대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양국 어디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 세력들이 더러운 거래로 얽혀 양국 모두를 망치고 있다일본의 길거리 극우단체들이 한국의 태극기 집회에 자연스럽게 참여하는 것을 달리 설명할 방법은 없다애서 찾아 볼 필요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특정 다수에 대한 미움과 혐오로 자칫 감정이 커지지 않도록 하는 힘이 되는 저자이고 책이라 마음을 다독이며 감사히 읽는다일본이 주장하는 한일 청구권협정의 오류를 일본이 변호사가 파헤치고 해법을 제시하는 귀한 내용이다.

 

- 1965년 체결된 한일기본조약(한일협정)과 청구권협정은 애초에 재검토되어야 할 협정

 

한일 청구권협정은 미국의 압력 아래 한국 측이 일본의 식민지배 청산 문제를 제대로 추궁하지 못한 채 어쩔 수 없이 응해 이루어진 것입니다일본 측에서 보자면 싼값에 식민지배 청산 문제를 처리한 것입니다.”

 

강제징용 피해자 보상에 관한 조약은 국가 간의 외교보호권 포기에 관한 내용이었을 뿐개인의 청구권 자체는 살아있는 권리(과거 일본 정부도 인정)

 

“1991년 8월 27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당시 외무성 조약국장은 시미즈 스미코 의원의 질의에 대해한일 청구권협정의 양국 간의 청구권 문제는 완전히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됐다라는 구절의 해석과 관련해 이는 한일 양국이 국가로서 지니고 있는 외교보호권을 서로 포기했다는 것입니다따라서 이른바 개인의 청구권 그 자체를 국내법적인 의미에서 소멸시켰다는 것은 아닙니다라고 답변했습니다.”

 

중국인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문제 해결 방식을 한국의 강제징용자 문제에도 적용 가능

 

“‘화해에는 다음의 3가지가 불가결합니다① 가해자가 가해 사실과 책임을 인정하고피해자에게 사죄한다② 사죄의 증표로 피해자에게 화해금(실손해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마음’)을 지급한다③ 장래에 같은 과오를 범하지 않도록 역사교육구체적으로는 수난비 건립수난자 추도사업 등을 진행한다.”

 

한국 뉴라이트 학자들이 쓴 <반일 종족주의>에서 언급된 강제징용 피해자들에 관한 거짓 주장을 조목조목 근거를 들어 비판

 

일본의 한국인 징용자들은 강제 동원된 적이 없다는 주장은 거짓이며, 1938년 국가총동원 체제가 만들어진 뒤 처음에는 모집’, 다음에는 관 알선’, 마지막에는 징용이라는 형태로 조선의 젊은이들을 일본에 강제 동원한 것이 맞다.”

 

일본은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전후의 국제 정세를 교묘하게 이용해 본래는 졌어야 할 전쟁 배상 의무와 식민지배 배상 의무를 모면해왔다. (...) 일본은 강제징용의 역사 자체를 은폐하려 하고 있다. (...) 한국은 이 아니며약속을 지키지 않는 쪽은 일본이라는 것 (...).”

 

- 한국어 판에는 당시 조선인의 현실에 관한 일본 측 자료들 인용

 

합병 뒤인 1912년에 발령된 토지조사령은 조선인의 토지를 큰 뱀처럼 삼킨 교활한 법령이었습니다. (...) 토지조사령으로 무주지無主地(주인 없는 토지)’가 된 땅은 총독부가 취득해서 조선에 이주해온 일본인들에게 나눠주었습니다토지를 빼앗긴 수많은 조선인들은 유민이 돼 결국 일본 본토로 흘러들어갔습니다이것이 강제징용자의 기원이 됐습니다.”

 

일독으로 다 배우기에는 쉽지 않은 책이다자료에 충실하고 논조가 선명한 글이라 내용이 어렵다는 것이 아니라관련법들증인증거역사적 자료들이 충실하게 제시되니 잘 아는 사실은 확인하고 잘 모르는 사건도 더욱 집중해서 읽을 필요가 있다.

 

그래도 노력이 즐거운 것은 사실성을 충분히 갖추었고 신뢰할 수 있는 책을 만났다는 반가움 때문이다나는 민족주의자가 아니라 부정의함에 폭력에 전쟁이라는 범죄에 전후 이어진 관련 범죄와 협잡들에반성이 없는 범죄자들과 그걸 정신적 유산으로 자랑스럽게 이어받은 이들의 뻔뻔함과 무참함에 분노하며 읽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에서 잠시 언급했듯이 일본인들을 미워하고 혐오하지 않으려 힘껏 노력할 것이다개인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오늘 새로 생긴 이유도 있다대통령 연설 중에 1945년 816일 독립운동가 안재홍 선생이 우리 동포를 향해 한 방송연설이 언급되었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이었던 선생은 패전한 일본과 해방된 한국이 동등하고 호혜적인 관계로 나아가자고 제안했다.” (...) “식민지 민족의 피해의식을 뛰어넘는 참으로 담대하고 포용적인 역사의식이 아닐 수 없다.”  2021년 8월 15일 대한민국 대통령 연설 중에서.

 

이 책을 읽고 우리가 겪은 근래의 시간을 몇 해 되돌아본다.

 

2018년 1030일 한국대법원에서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일본제철 원고가 1억원씩 배상하라는 판결이 나왔다고 해서무슨 의미인지어떻게 이런 판결이 가능한지 무척 궁금했다무려 1941~43년 일본제철 공장에 강제 동원되어 노역을 하며 임금을 받지 못한 엄청난 임금 연체 사실 그 이상의 의미가 있지만 -을 이 판결을 계기로 자세히 알게 되고 목록에서 계속 밀려난 현재도 마무리 되지 못한 근현대사에 대해 다시 관심을 나눴다.

 

일본제철은 배상금 지불을 거부했고 법원은 한국 내 일본 제철의 자산을 압류했다일본 정부는 그것을 기다려온 절호의 기회인 양 한국을 상대로 수출규제에 나섰다문재인 대통령은 일 일본 정부의 화이트리스트(백색국가제외 결정에 대해 "대단히 무모한 결정"이라고 비판하며 "어려움이 더해졌지만 우리는 다시는 일본에게 지지 않을 것"이라고 단호한 입장을 밝혔다.

 

물 밑 작업으로 무마하고 거래하는 외교가 아니라 대통령의 연설로 외교의 방향을 제시한 일을 처음 목격한지라 놀라고 떨렸다그 덕분에 관심을 두고 추이를 지켜보다 이제까지 모르던 민간외교에 대한 내용도 알게 되었다한일 양국만이 아니라 한중일 삼국에서 우호적인 민간 교류와 여러 복잡한 문제들을 함께 해결하고자 하는 다양한 노력들은 길게는 40년간 이어져 오고 있었다.



그러니 요란하고 목소리가 큰 폭력적인 이들에 겁을 내고 위축될 필요는 애초에 없을 지도 모른다세상에는 늘 상식적이고 합리적이고 문제를 똑바로 보고 옳은 일을 옳다고 하고 이해와 우호와 협력과 연대에 힘쓰는 이들이 많다그리고 이런 활동에 국적은 문제가 안 된다.

 

저자에게 깊이 감사하며 마치려한다생각도 감정도 복잡한 날이라 그것을 동력삼아 읽고 쓴 어수선한 글이 이 책의 함의를 흐렸을까 염려한다.

 

이 책의 주제는 역사에 유린당해온 개인들에 대하 위로와 사죄배상보상에 관한 것입니다코로나19로 인한 보상을 논하면서 코로나 이후의 세계를 모색하는 마당에 과거를 직시하며 역사에 유린당해온 사람들의 존엄을 회복하는 일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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