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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가 흐르는 곳에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8월
평점 :
유튜브 구독에 열의가 없는 제가 알람 설정까지 해 둔 유튜버는 스티븐 킹 작가입니다. 불쾌한 적도 실망한 적도 없어 꾸준한 애독자가 되었습니다. 작가의 육성으로 듣는 작품을 무척 좋아하는데 <If it bleeds>를 낭독해 주어 신났지요. 여러 번 듣고 주변에도 권했습니다.
영어책 그대로 읽어도 좋고 - 중학생들도 읽을 수 있는 깔끔하고 멋진 문장들 - ‘빨리 빨리’의 최강국 한국에서 번역 출간된 책으로 읽어도 즐겁고 행복한 일입니다. 더구나 체온 유지만으로 기운이 달리는 여름에는 단편이 좋은데, 이 책은 단편 4개로 이루어진 책입니다. 더 바랄 게 없습니다.
늘 그렇지만 600페이지가 아쉽습니다. 언제 다 읽었는지 서운합니다. 신간 기다릴 생각에 아득합니다. 시작하기 전에, 물과 식량을 준비해 두시고 화장실도 다녀오시고 휴대폰도 가능한 멀리 하시고 재밌게 읽으시기 바랍니다. 분명히 쉬지 않고 방해 받지 않고 빠져 들어 머물고 싶어지실 테니까요.
버릇처럼 의식처럼 표제작부터 읽어 봅니다.
1. 피가 흐르는 곳에
<아웃사이더>란 작품을 읽으신 독자에게 아마 더 반가울 작품입니다. 그 이야기의 연속이기도 하니까요. 결말을 알면 모든 매력을 다 알아 버린 듯해 급격히 흥미가 떨어지는 것이 추리스릴러이지만 다시 생각해도 재밌는 작품이었습니다.
이 작품에는 무려 쉐이프쉬프터(shape shifter: 다른 사람으로 변신할 수 있는 능력자)가 등장합니다. 이것만으로도 엄청난 스포인가 고민스럽네요. 혹자는 이 설정은 이미 유효기간이 끝났다고도 여기는데 - 소설과 드라마에서 엄청 써 먹음 - 킹에게는 소재가 무엇이든 스토리는 늘 재밌으니 다 좋습니다.
작자 미상이라고 써서 읽어 보라고 해도 이건 스티븐 킹의 작품입니다. 초능력임에는 분명하지만 사람들이 호의를 가지지 않는 능력이고 보면 이 존재가 사는 모습이 행복할 리가 없겠지요. 더구나 다른 이의 고통과 슬픔을 식량으로 살아간다고 하면 더욱 꺼림칙하지요.
그런데 이런 방식으로 연명하고 살찌고 심지어 부를 누리는 존재는 우리 사회에도 있지요. 어쩌면 짐작보다 많을 수도 있겠네요. 제목 - 피가 흐는 곳에 - 이 의미하는 바를 아시면 바로 추축이 가능합니다. 타인의 고통과 슬픔이 특종이 되는 업계이니까요.*
* if it bleeds, it leads : 피가 흐르는 곳에 특종이 있다. 폭력적인 것이 더 잘 팔리는 미디어 산업.
태생적인 부분은 그렇다고 치고, 자발적으로 적극적으로 순기능마저 사라진 끔찍한 괴물이 되기로 선택한 것은 분명 종사자들의 책임입니다.
괴물의 시선으로, 괴물 같은 어투로, 괴물 같은 기획으로, 혹은 협잡과 오보와 악의로 세간의 관심을 끌고 흥행을 목표로 하는 미디어의 행태는 그야말로 얼굴을 바꿔가며 제가 가진 직업의 공적 가치도 역할도 안중에 없이 제 이익만 챙기는 쉐이프쉬프터에 다름 아닙니다.
쓰다 보니 너무 많은 내용 노출에 미안합니다. 그래도 킹의 작품은 직접 읽으면 다른 차원의 재미와 즐거움이란 걸 이마 다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2. 해리건 씨의 전화기
너무 슬픈 일이 떠올랐지만 스티븐 킹의 결말을 믿고 끝까지 읽을 수 있었습니다. 가까운, 소중한 이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번호를 나의 연락처 목록에서 볼 때, 지울 때, 혹은 지우지 못할 때.
상대의 사후에 어떤 이유로든 그 상대의 번호로 전화를 걸어본 적이 있나요? 만약 걸 수 있다면…… 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인가요.
내가 떠올려야 하는 아픈 기억들과는 별개로 이야기 속의 인물들은 상반된 두 세대에 속한 각각의 인물들로서 불완전한 기술을 사용해 서로 연결됩니다. 무척 특이하고 새로운 이야기입니다.
3. 척의 일생
물리학에서 다루는 세상 - 프랙털 - 과 물리학에서 현재까지 불가능하다고 밝힌 세계 -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 가 함께 어우러져 배경으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엄청 재밌고 서글프네요. 삶의 끝을 알고 과거로 걸어가는 일이니까요.
끝을 안다는 건 나라면 안심이 되는 일이기도 하겠지만 척의 할아버지에게는 괴로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슬픔에 빠져 살지 않고 무척 성실하게 사신 점이 멋집니다. 그가 경험한 시간은 다른 이들이 보편적으로 경험하는 시간과는 아주 다른 것이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합니다.
무한대는 숫자가 아니라 과정입니다. 그리고…… “사람은 누구나 온 세상을 품고 있다.”
4. 쥐
(안 돼! 라고 소리 내어 외쳤습니다. 마지막 편입니다.)
주인공은 마침(?) 작가입니다. 창작의 고통은 잘 모르지만 알 것도 같습니다. 다른 모든 일에도 가장 어려운 것은 0에서 1을 만드는 것이니까요. 1에서 100까지 확장하는 것은 사실 누구나 주의하고 노력하면 할 수 있지요. 하지만 최초의 창조, 창작, 새롭게 무언가를 만드는 일은 다른 차원의 일이라 생각합니다.
드류 라슨은 자신의 유일한 장편을 쓰기 위해 위험한 거래와 모험을 감수합니다.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파우스트와 악마의 거래처럼. 마침내 영감이 떠올랐을 때 그것을 글로 옮기기 위해 외딴 곳에 위치한 별장으로 가는데…….
정신적으로 고통스럽고 체력적으로 힘들 뿐만 아니라, 잇따른 창작의 실패가 가족마저 위험하게 만드는 경험을 한 작가의, 자신을 극한까지 몰아붙이는 엔딩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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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연휴가 낯설어 땅에 발을 제대로 못 딛고 살짝 허둥지둥 시간을 보내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럴 때는 책 한 권 골라 잡는 것이 착지에 도움이 되지요. 다행히 그 책이 스티븐 킹의 신작이라서 오후가 말끔하게 행복해졌습니다.
읽을 때 가장 재밌었던 작품과 책을 덮고 나서 떠오르는 작품이 다르네요. 다른 독자들의 최애가 궁금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