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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킬레우스의 노래 (리커버 특별판)
매들린 밀러 지음, 이은선 옮김 / 이봄 / 2021년 7월
평점 :
품절
신화의 시대라고 명명하니 신비롭고 멋지고 명예롭고 신나는 시절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법도 안전장치도 국가 간 협약도 없이 잦은 전쟁이 이어지던 시대이기도 하다. 살고자 한다면 영웅이 되고자 한다면 타인을 죽여야 한다.
“명성이라는 게 희한한 물건이란 말이지. 이 세대에서는 존경의 대상이었던 것이 다른 세대에서는 혐오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기억의 대량학살 속에서 누가 살아남을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야. (...) 우리는 잠깐 타오른 횃불의 불길과도 같은 인간에 불과하지 않은가.”
“우리는 피로 이루어진 세상, 그 피로 영광을 쟁취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었다. 싸우지 않는 건 겁쟁이들뿐이었다. 왕자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전쟁에 나가서 승리하든지 전쟁에 나가서 죽든지, 둘 중 하나였다.”
절박한 절명의 시대라도, 혹은 그런 시대이니 목숨을 건 사랑이 가능했을 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복기하고 찬양하는 지극한 사랑에는 언제나 죽음의 배경이 짙고 깊다. 시대도 상황도 다르나 누구의 사랑이라도 간절함과 지고한 존재 방식 때문에 감정의 밀도가 높아서 슬픔도 눈물도 참지 못하게 된다.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 그의 존재가 신발 속으로 들어온 돌멩이와 같아서 모르는 체할 수가 없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렀던 것 같다. 그의 이름이 나를 뚫고 지나갔다.”
“내가 그를 못 알아볼 거라고 생각한 걸까? 나는 살짝 스치는 감촉만으로도, 제 체취만으로도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눈이 멀어도 그가 숨 쉬는 소리와 땅을 밟는 소리를 듣고 알 수 있었다. 죽더라도 땅 끝에서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과몰입도 모자라서 소리 내어 읽고 있었다. 문장들에 설렌다. 계절이 바뀌는 저녁이라 줄어드는 자외선 탓을 해본다. 넘긴 페이지가 많아질수록 신 내린 듯 쓴 문장들이 늘어난다. 이토록 실감나는 전쟁의 장면, 전쟁이 시작되기까지의 과정, 긴장, 충돌, 공포, 기대를 각자의 것들로 모두 체험한 듯 기록하고 그려낸다.
그리스 로마 신화를 다룬 이야기들에서 아무 지분도 없었던, 부재도 모자라 모멸 당하던 존재인 님프를 <키르케Circe (2018)>에서 주인공으로 내세워 온 세상을 뒤집어엎을 듯한 작품을 만들어 낸 저자의 저력을 다시 느낀다. <키르케>가 두 번째 작품이나 먼저 읽은 탓에 이렇게 느낀다.
호메로스, 일리아스, 아킬레우스라는 이름들에 익숙한 이들이 많을 것이다. 완역본을 읽어 보려 노력은 했지만 결국 읽지 못한 나도 이름과 간단한 이야기들만은 기억한다. 그럼 ‘파트로클로스Patroklos, Πάτροκλος’를 아는 이들은 얼마나 될까. 그는 주변과 가장자리와 경계와 약한 존재를 주인공으로 삼는 능력자 매들린 밀러의 화자이며, 이 작품 속에서 완벽한 부활을 누린다.
“최고가 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극심한 우수성의 문화에 살았던 그리스 영웅들. 그런데 파트로클로스는 자신이 아닌 친구 아킬레우스가 최고라는데 만족하는 인물이다. 그와 친구가 되고 그의 그림자가 되는 걸로 충분하다 여긴다. 파트로클로스는 그런 자신의 성정에 괴로워하지 않았고, 그것이 바로 파트로클로스를 독특한 인물로 만든다. 나는 이 놀라운 인간에게 목소리를 주고 싶었다.” 저자의 말 중에서
첫 소설인 <아킬레우스의 노래The Song of Achilles (2011)>는 10년간 집필한 작품이다. 그 노고를 짐작해보면 재밌고, 잘 읽히고, 다음 내용이 궁금하다고 얼른 페이지를 넘기는 동작이 미안해진다. 평생 대단한 관심을 가지지 않은 신화 속 영웅 아킬레우스가 생을 가진 인물로 살아나고, 사랑하는 이야기에 홀린다.
연약하지만 성품이 곧은 이 - 파트로클로스 -를 사랑하는 것도, 그 대상에 무한한 사랑을 보여 주는 것도, 그 사랑을 죽음으로부터도 지키겠다고 하는 것도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내내 설렌다. 사랑은 목적도 없이 열렬하나 인간은 인간적일 뿐이라 슬프고 아름답다.
행복했던 영웅이 몇 명이나 있었을까, 영웅이 되는 길에 쏟아진 피를 생각하면 그 운명은 비극 외에는 어울리는 것이 없다고 느낀다. 아킬레우스는 행복한 첫 번째 영웅이 되고 싶었고, 저자는 그렇게 만들어 주고 싶었으나…….
트로이 전쟁은 기록된 전쟁사로 기억했을 뿐 참여했거나 휘말린 실제 인간들이 있었다는 것을 공감까지 하며 상상해 본 적은 없었다. 아킬레우스가 느끼는 분노가 저자의 섬세한 서사로 극적으로 펼쳐지니 평생 공감하리라 상상 못 해본 인물의 분노를 받아 안은 듯 느끼며 읽는다.
신들의 거래란 늘 그랬다. 마지막에는 그 누구도 살려 주지 않았다. 이들이 자신의 사랑을 확인하는 방법은 예정된 죽음을 거부하지 않으면서도 초월하는 방식 밖에는, 그런 믿음 외에는 애초부터 없었을 것이다. 서로의 이름을 기억하며.
Achilles and Patroclus: Archetypal Heroes
The photo above shows Achilles mourning the dead Patroclus”,
a scene from the front panel of a Roman sarcophagus that is currently at the museum of Berlin.
나이가 들어가니 믿고 싶은 것들이 늘어난다. 땅이 꺼지듯 슬프고 아픈 그리운 이들의 죽음 이후에 그들 모두가 어딘가 좋은 곳에 가 있어서 다시 만날 수 있다고 위로를 나누고 싶다. 저자의 명백한 의도에도 역시 동조하고 싶다. 이들이 저승 어딘가에서 영원히 함께하고 있다고.
“추억이 샘물처럼 솟아나는 속도가 막을 수 없을 만큼 빠르다. 말로 나오는 게 아니라 꿈처럼, 비에 젖은 흙냄새처럼 피어오른다. 이런 게 있다고 나는 말한다. 이런 것도 있고 이런 것도 있다고. 여름 햇볕을 받으면 그의 머리칼이 어떻게 보였는지. 달릴 때는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수업을 받을 때면 올빼미처럼 진지했던 그의 눈빛, 이런, 그리고 이것. 행복했던 수많은 순간들이 쏟아져 나온다.”
읽는 동안 느낀 설렘은 결말에 이르자 그만큼의 슬픔으로 바뀐다. 그동안 쌓인 친분이 커서인지 슬픔의 크기가 오히려 더 크다. 내가 어설프게 알던 아킬레우스는 크리스타 볼프의 <카산드라>에서 그려진 오만하고 잔인하고 야만적인 이미지였다.
매들린 밀러는 고전을 재해석한다기보다 훨씬 더 설득력 있는 방식으로 재집필한다. 개연성에 휘말려 들어 설득되고 나면 중간에 빠져 나올 길이 없다. 감정의 쓰임이 운명에 도전하듯 강렬하다. 읽기 전이라면 마지막 페이지의 스포를 꼭 피하길!
퍼즐 풀이의 달인처럼 구성한 모든 질문들이 결말에 이르러 모두 정확하게 회수된다. 복선인 줄 모르고 지나친 내용들이 답지와 동시에 복선임이 밝혀진다. 도망치려고 한 모든 시도가 예언을 구현하는 조각들. 인간으로서는 벗어날 수 없는 그런 운명. <아킬레우스의 노래>에 연주되는 것은 파트로클로스의 노래이다.
언어를 조금이라도 알지 못하는 곳들을 여행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언젠가 터키로 향한다면 가방 속엔 <아킬레우스의 노래>가, 일정엔 ‘아킬레우스와 파트로클로스의 무덤’이 있을 것이다.
“우리를 묻고 이름을 새겨줘. 우리를 자유롭게 놓아줘.”
인간이 사는 방식에는 승리보다 가치 있다고 평가할 수 있는 일들이 있다. 전능한 신이 아닌 나약한 인간이 이타적인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만의 기적이다. 신은 인간을 실패 없이 벌하는데 골몰하나, 인간은 사라지지 않는 고민거리들을 거듭 생각하며 앞으로 조금씩이라도 나아가려 한다.
현실의 현재의 인간이 그리스 비극에서처럼 성공으로 인한 오만에 빠져 파멸에 이르는 휴브리스* 휴먼이 아니라 스스로 야기한 문제들의 해답을 찾는 길을 가길 간절히 바란다.
* 휴브리스 hubris : 문학) 그리스 비극에서, 과거의 성공을 바탕으로 지나친 자신감에 빠져서 오만한 태도를 보이다가 신과 갈등을 일으키고, 그로 말미암아 파멸에 이르게 되는 주인공이나 영웅의 특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