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드 오브 라이프 - 삶을 마감하는 가장 이상적인 방법을 찾아서
사사 료코 지음, 천감재 옮김 / 스튜디오오드리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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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7

 

담당의 하야카와는 인간은 어딘가에 자기가 죽을 시기를 예측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느낀다고 한다. 수많은 시한부 환자들을 만난 경험이니 그럴 것이다. 거짓을 말한 이유도 없다.

 

내가 바라는 것들 중에는 부디 죽을 시기를 알고 싶다는 것도 있는데, 그건 마지막에 신나게 살아 보겠다는 욕심 때문만은 아니다. 그렇게 돌아가시는 분들을 뵈어서 그렇다. 특히 할머니(아버지의 어머니)께서는 평생 자세와 표정조차 단단하게 유지하셨던 분인데 임종의 순간조차 더 이상 단정할 수가 없었다.

 

고가의 집을 안팎으로 반들반들 관리하며 사셨고, 언제 방문해도 머리칼 하나 흘러나온 모습을 뵌 적이 없다. 노후에도 자식과 합가하길 끝내 거부하시고 혼자 정정하게 지내시다, 임종 전날 유품 정리, 청소, 목욕을 모두 혼자 하시고 새벽에 아들에게 전화를 거셨다. 이제 갈 때가 되었으니 빨리 오라고. 옛 분들은 부모 임종 못한 자식은 불효가 크다고 여겨서 가장 마지막까지 그 걱정이 있으셨던가 싶다.

 

잠도 덜 깬 채로 달려가신 아버지와 어머니가 방에 뛰어 들어가 보니 반듯하게 이부자리에 누워계셨다고 한다. “도착했으니 되었다하고 다른 말씀 없이 손을 잡은 채로 숨을 거두셨다. 어머니는 이 차분하게 거짓말 같은 상황을 믿을 수 없어 평생 처음 시어머니를 안고 흔들었다고 했다. 일어나시라고. 따뜻한 체온의 부드러운 몸인데 눈앞에서 방금 생명이 사라진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고.

 

상례를 치르면서 떠나신 얘기를 하니 친지들과 동네 분들이 크게 놀라지도 않으셨다. 그런 일이 예로부터 없지는 않다고. 자신이 알려 준 날짜에 돌아가신 어르신들이 간혹 계신다고.

 

가능하면 나도 큰 폐를 끼치지 않고 당신처럼 그렇게 단정하게 떠나고 싶다. 할 수 있는 건 다 해놓았는데도 이것저것 걱정이 많다. 그래서 이번 편의 여러 사람들이 마지막을 감지하고 어떻게 받아들이고 남은 시간을 보내는지 모든 문장이 시험지처럼 읽혔다.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벚꽃 보실 수 있겠어요? 힘내실 수 있겠어요?”

…….”

그의 눈에 당혹감이 떠오르더니, 이윽고 눈시울이 젖어들었다.

못 보는구먼.” (...)

데구루루, 하야카와는 진실이 소리를 내며 환자의 품속으로 굴러드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요. 고맙습니다.”

 

하야카와는 앞으로도 수많은 환자들에게 비슷한 질문을 받을 것이다. 시한부 진단을 받은 이들이 가장 먼저 궁금해 할 것은 단 하나 밖에 없을 테니까. 환자 자신이 느끼고 있는 것을 의사의 질문을 접하고 확인하고 받아들이는 의식인 셈이다.

 

나는 확실히 느끼지 못한다는 점에서 감사할 바가 크고, 그렇기 때문에 불안 역시 크다. 건강을 해치는 것들을 고집하지도 않지만, 병도 죽음도 계획과 노력으로 예측 가능한 결과인 것만은 아니니까.

 

가족도, 간병인도, 간호사도 해줄 수 없는 게 있어요. (...) 그 사람에게 가장 소중한 남은 시간을 성의를 가지고 생각해주는 의사를 만나느냐, 못 만나느냐에 따라 환자의 상황이 크게 달라져요. 본인 뜻에 반하는 연명 치료를 하지 않는 것, 임종 직전에 의식을 어느 정도 유지하도록 할 것인지도 최종적으로는 의사의 판단이 영향을 끼쳐요.”

 

이 사람이라면 정신적으로 버틸 수 있겠다, 이 가족이라면 환자에게 힘이 되어줄 수 있겠다. 그렇게 판단했다면 가능한 한 환자의 의식이 맑게 유지되게끔 해요. 하지만 (...) 가족과 사이가 나쁜 사람, 통증 때문에 패닉에 빠지고 괴로워 몸부림치는 사람도 있어요. 그럴 때는 의식 수준을 떨어뜨리도록 컨트롤해야 해요. 환자와 의사간에 신뢰 관계가 없으면 못 할 일이죠.”

 

확실하게는 모르지만 의사의 권한, 재량권, 결정권이 일본이 더 클 것 같단 생각을 한다. 판데믹에 샅샅이 드러나고 기록된 한국의 의료현실이 개선만을 위한 방향으로 변화되길, 변화에 필요한 것을 마련하는 이들이 지치지 않길 다시 바라게 된다. 인프라만으로 충분히 만족스러운 의료 환경을 만들 수는 없을 테지만.

 

환자의 인생관을 이해하고 그 사람에게 적합한 마지막 시간을 만들어주는 의사가 몇 명이나 있을까. 선고를 받는 측은 그 순간 가장 가혹한 말을 전해 듣는다. (...) 우리가 맞이하는 마지막 시간은 어떤 생각을 가진 의사를 만나느냐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임종과 관련된 일들을 의료 관계자에게 통째로 맡겨버리는 것 이 얼마나 무서운 일일까. 의사도 인간이다.”

 

옷을 살 때는 입어본다. 머리를 자를 때는 마음이 잘 통하는 미용사에게 맡긴다. 그런데 우리는 의사가 어떤 생사관을 가진 사람인지도 모른 채 자신의 운명을 맡긴다.”

 

남은 감정도 잔상들도 적지 않다. 고민은 더 복잡해질 수도 깊어질 수도 있다. 어쩌면 한국에도 재택의료가 시작된다고? 하며 놀랄 지도 모를 일이다. 번다한 일상과 정신으로 생의 끝과 죽음을 잘 준비하며 살지 못한다. 그래서 바라는 마음이 자꾸... 게으른 기도처럼 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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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혹과 잔혹의 커피사 - 당신이 커피에 관해 알고 싶었던 거의 모든 것의 역사, 개정증보판
마크 펜더그라스트 지음, 정미나 옮김 / 을유문화사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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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좋아하는... 실은 중독인 사람들은 모두 읽고 싶을 책이다오전에만 커피를 마시는 나는 주말 오전에만 읽을 수 있었다주중에는 수도승처럼 규칙적으로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모카포트를 올리고 주말에는 의지로 루틴을 헝클어보는 패턴의 일상을 산다.


커피의 발상지광풍이 일어난 시절홈쇼핑 광고처럼 들리는 과장 광고 등등관련된 재밌는 이야기가 가득하다모두 흥미롭고 재미있고 커피와 함께 살아온 사람들이 느껴진다현재까지 이어진 계급과 식민지에 관한 이야기는 무거운 마음을 더욱 짓누르기도 한다.

 

운이 좋아 북반구에 태어나서 나는 커피 소비자로 살지만아프리카나 중남미의 식민 지배를 받던 어느 국가에서 태어났다면 대농장에서 땀을 피와 섞어 흘리면 노예처럼 일하며 살았을 것이다커피콩에는 식민지독재내전자연재해투기 등등 국제정세가 다 담겨 있다.

 

그나마 공정 무역과 생산자의 노동환경 개선에 관심을 갖는 이들이 늘어나며 일부 생산자들의 삶도 바뀌는 중이라지만산림 파괴와 수질 오염 등의 문제도 다 해결된 것은 아니다이 책을 통해 버드 프렌들리’ 커피에 대해서도 홍보가 많이 되면 좋겠다.

 

입맛이야말로 누가 뭐라 할 수도 없고 설득할 수도 없는 문제이다. 특히 ‘커피라고 단일 재료처럼 부르지만 그 맛이 다양하다는 점에서 커피에 대한 의견도 설명은 못지않게 많다나는 산도가 높고 향이 풍부하며 깔끔한 풍미의 맛을 좋아한다.

 

책을 읽다보니 그런 커피를 주로 고지대 중앙아메리카에서 전통적으로 키웠고여러 가지 나무를 이용해 그늘 재배로 길러서 습식법으로 콩을 수확했다고 한다다만인증 받은 유기농 커피조차 수질 오염을 유발한다니... 그동안 수질오염에 기여한 바가 적지 않을 것이다.

 

미식가도 아니고 탐미주의자도 아니고 극한의 쾌락을 추구하지도 않지만전쟁 시 군인들이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지참한 생두를 갈아 마신 커피 한 잔의 맛과 가치는 어떨지 몹시 궁금했다전쟁 시에 여러 기술이 폭발적으로 개발되는데 인스턴트 커피 역시 제1차 세계대전 동안 탄생했다.

 

“1930년대에 닥친 세계 대공항으로 인해 그 뒤로 수년간 커피는 물론 거의 모든 것의 가격이 하락하고 대량 실업에 시달리는 시대가 이어졌다하지만 이 검은 음료를 끊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350

 

미국 시민들은 커피 가격이 오르기만 하면 왜 그렇게 어김없이 흥분했을까그런 소동 뒤에는 라틴아메리카인과 아프리카인들에 대한 외국인 혐오가 깔린 불신이 숨겨져 있었던 건 아닐까 하는 의문을 지울 수가 없다.” 577

 

우리의 목표는 사람들이먹거리를 재배하는 이들이나 그 먹거리가 유래되는 생태 환경과 다시 소통할 수 있도록 그 방법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625

  

내게 커피는 여러 가지 이유로 즐거움만큼 죄책감도 느끼는 대상이다특히 며칠 전엔 전 세계 물이 카페인과 약품에 오염되었다는 분석 결과를 보았다. 고민이 많은 와중에 이 책을 읽는다는 핑계로 주말에도 기꺼이 굴복하는 은밀한 즐거움을 누렸다.

 

무척 계산적인 성격이라 쾌락보다 고통이 커지면 잘 포기한다그런데... 커피에 대해서도 그런 태도를 유지할 수 있을까할 수 있을까봐 두렵고 하지 못할까봐 불안하다차를 마시는 친구들의 근황이 부쩍 궁금해진다. 그동안의 추억을 뒤적여 보고 올 해 안에는 꼭 결정해야지... 




커피 한잔. 7유로

커피 한잔 부탁합니다.” 4.25유로

안녕하세요커피 한 잔 부탁합니다.” 1.4유로

 

출처경향비즈 곽원철 칼럼화제가 된 프랑스 카페의 가격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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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드 오브 라이프 - 삶을 마감하는 가장 이상적인 방법을 찾아서
사사 료코 지음, 천감재 옮김 / 스튜디오오드리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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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4

 


읽기가 참 힘들었다쓸데없이 재빨리 판단하려는 생각을 누른 채 과잉 반응하는 감정도 잡은 채로나카야마란 인물의 고통에 집중해 보려 했다.

 

척수경색을 일으켜 24시간 내내 심한 통증에 시달리지만 통증을 없애는 방법을 찾을 수 없다결론은 재택요양이다그의 처지에 비집고 들어가니 무척 화가 난다병원이란 곳이 의사들이 할 수 있는 처방과 치료가 그게 다란 말인가.

 

그런데... 가족과의 관계에 이르면 나는 또 말리려는 손짓보다 더 빨리 그의 입장에서 튕겨져 나온다한 살배기 딸에게 아내를 빼앗겼다니그게 할 소리인가당신의 병이 통증이 가족 누구의 탓이란 건가...

 

얘가 달라붙으니까 아내가 내 간병을 안 해줘요난 이 모양 이 꼴이잖아요수발을 좀 들어 주면 좋겠는데 아내는 애를 챙겨야 돼요그러니까 난 아무것도 못 해요. (...) 솔직히 난 애 같은 건 원하지 않았어요내 자식인데도 도무지 예뻐 보이지가 않아요달려들면 온몸이 죽을 것처럼 아파서 나도 모르게 뿌리치고 만다고요아내도 애도 돌볼 수 없는 신세예요살아 있어 봤자 통증 때문에 아무것도 못 해요이런 나한테 사는 의미가 있을까요?”

 

와중에도 의료진이 여덟 명이나 환자의 집에 함께 온 상황이 부럽다그들은 가만히, 40분이나 그의 이야기를 들어준다하긴 할 수 있는 일이 그것 외엔 없기도 하다.

 

가족의 편에 서고 싶었던 나는 아주 조금 나카야마의 곁으로 다가간다사라지지 않는 통증을 안고 산다는 것을 다시 기억하자 그의 분노와 떨림은 그대로 억울함이라 느껴진다.

 

나는 ‘사는 의미에 대한 고민은 더 이상 하지 않는다생명이 우연의 산물이라는 것을 배워버렸다그러니 답할 수 없는 질문으로 더 이상 곤란하지도 없고 슬프지도 않다아쉬운 것은 그 귀한 한번뿐인 우연을 잘 해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좋아하는 것들로 채워나가지 못한다는 것뿐이다.

 

내가 이번 생에서 배울 건 가족을 사랑하기예요알고는 있지만 난 그러질 못해요만약 제대로 못 배우고 다음 생에 태어나게 된다면그건 지옥이겠죠.”

 

나카야마는 이렇게 말하고 사건을 일으킨다잔혹함과 강렬함에 불쾌할 정도로 놀랐다자신을 식칼로 세 번이나 찔러 칼날이 심장을 찢고 폐에 닿아 있었다.

 

아내는 조용히 옆을 지켰다나카야마의 눈을 바라보며 그녀가 말했다. “다 알아……고마워.” 부부끼리만 통하는 은밀한 대화였다.

 

놀라운 비극은 2주 후나카야마가 나아졌다는 것이다이런 생각을 하는 나의 잔인한 성정에 흠칫하지만그가 죽었으면 했던 것이 아니라그가 앞으로 견뎌야할 통증과 괴로움이... 짐작이 안 될 정도로 숨 막히기 때문이다.

 

아내가 이혼하자고 하더라고요처자식도 다 떠나고내 몸은 1년 내내 아픕니다이런 내가 살아 있을 의미가 있을까요좀 가르쳐주세요난 이제 50대예요앞으로 20, 30년을 이렇게 아픈 채로 아무것도 못 하고 살아가겠죠지옥이 따로 없습니다그래도 죽지 못한다는 건 이상하지 않나요왜 계속 살아야만 하는 거죠작가님 같으면통증 때문에 아무것도 못 하고 아무 생각도 못 하는 인생을 몇 십 년씩 살아야 하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나요통증을 참아내는 의미 같은 게 있을까요?”

 

가르쳐주세요나한테 산다는 의미는 뭘까요?”

 

나카야마가 가장 고통스러워한 것은 무엇인가... 생각할수록 확신이 없다.


내가 가장 견딜 수 없는 고통은 무엇인가... 생각하기가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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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유학 정산서 - 생존했더니 성장했더라
자상남 지음 / 지식과감성#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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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권이 아닌 곳으로 유학 가는 이들에게 놀람부러움존경을 가지고 있다친구들이 여러 명 독일 유학을 선택해서 나도 가고 싶었지만도저히 독일어로 휴가도 여행도 아닌 학위과정을 할 엄두가 생기지 않았다.

 

대학원과정 필수조건이 제1외국어와 제2외국어였기 때문에 간신히 독일어 읽기는 가능한 수준이 되었지만 전공 한정사전 지참 그렇게 해서야 연구를 할 수는 없다미국은 싫고 다른 유럽어는 자신이 없었는데 운이 좋아 영어를 사용하는 유럽에 갈 수 있었다.

 

첫 학기 동안 극한의 스트레스를 받은 나의 모습을 떠올렸다비록 내 성적은 여태껏 받아본 적 없는 낮은 성적이었지만 나는 만족한다다들 어렵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독일 교과과정에서 패스를 이뤄냈으니까울기 직전까지 공부했고 덜 자고 공부하여 받은 성적이었다.”

 

한국 대학 입학 후 한글 텍스트보다 영어로 읽고 쓰고 시험을 본 세월이 대부분이었는데도 첫 학기는 초등 새 학기에 버금가는 도전과 스트레스가 팽팽했다힘들고 불행했다는 건 아니다재밌고 신나고 힘들고 불안했다한 학기가 지나 성적이라는 결과가 나오기까지는 내가 공부하고 적응하는 방식이 맞는 건지를 알 방법이 없었으니까.

 

그 밖에는 오히려 쓸데없는 스트레스들이 많이 사라졌다는 편안함이 있었다게으르지만 잘 참지도 않는 성격이상한 건 따지는 버릇학창시절 나는 왜 그렇지요왜 그래야하지요?를 남발했고 친구들이 나를 부른 별명들 중에는 외계생명체도 있었다그 영광은 모두 부모님께 돌린다.

 

1987과 629선언의 영향력이 확대되고 전교조가 출범하여 떠들썩했고 알고 보니 교직원 중 60여 명이 가입한 공립 고등 학교였다학생들 누구나 벽보를 써 붙일 수 있는 공간을 만들자는 나의 평범한(!) 의견은 통과되었다어차피 완벽하게 단속하지 못할 바에는 학내에 담뱃재 털고 꽁초 버릴 쓰레기통을 마련하자고 제안한 것은... 오래 놀림 받았다.

 

학교에서는 모래를 채운 큰 항아리들을 여러 개 마련했고당시만 해도 쉬는 시간마다 담배를 피우던 교사들이 낮에 사용하고야간학습을 하는 동안에는 흡연 학생들이 사용했다모르는 다른 반 학생이 자판기 커피를 뽑아 주거나 책상 속에 사탕이 들어있기도 했는데 흡연클럽 멤버였을 지도 모르겠다.

 

건강권이나 인권을 잘 알아서 주장했던 것이 아니고 화장실이 더러워지는 것이 싫었을 뿐이다어쨌든 본질적으로 보수적이고 위계적이지만 한국보다 논쟁과 협의로 사회를 구성하는 근대화 과정을 겪은 영국에서 성격 나쁜 내가 사는 일이 더 어렵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읽고 쓰고 발표를 거듭하는 과정은 체력 경쟁이었다청순가련저체중에 맞춰 산 적이 없음에도 필요하면 거뜬히 밤을 새는 동기들에 비해 6시간은 자야 뇌가 멈추지 않는 몸 상태가 아쉬울 때가 많았다인간의 몸에서 에너지를 가장 많이 쓰는 뇌는 끊임없이 음식을 요구했고나는 삼시세끼에 간식까지 다섯 끼를 먹으면서도 말라갔다.

 

일요일인 어제까지 나는 쉼 없이 글을 읽었다하지만 내용이 잘 정리되지 않았다일단 양이 많았다. (...) 양보다 더 문제는 질이었다꼭 읽어야 하는 논문임에도 문체가 도통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모르는 단어가 많아 사전을 찾는 것은 둘째 치고장황한 정보를 전달하는 논문을 읽다 길을 잃은 것 같았다.”

 

인종차별에 대해서는... 학내에서는 겪은 적이 없다 혹은 학습에만 집중한 탓에 시야가 극히 좁아져서 몰랐거나입학 오리엔테이션에서 가장 먼저 길게 교육받는 것이 차별에 대한 경고와 공부였고신고 시스템은 아주 간단하고 선명했다.

 

비슷하게 불쾌한 경험은 크리스마스이브에 길을 걷다가 술에 취한 스킨헤드 남성이 미사일로 뭐 할 거냐다 죽일 거냐내 나라를 떠나!” 시비를 건 일이었는데그건 부시가 북한을 꼭 집어 악의 축이라고 하고 실제로는 토니 블레어와 이라크를 공격하는 야비한 짓을 할 때였다.

 

길 가던 사람들이 멈춰 섰고 그런 일에 쫄지 않고 단지 귀찮은 나는 “Happy Christmas to you, too”하고 지나가려했는데 사람들이 크게 웃으며 박수를 쳐서 성가신(?) 상황이 되었다나보다 더 참지 않는 언니 한 분이 덤벼이 자식내 상대로 딱이네 Bring it on, Fucked fucking fucker! I am big enough for you.”라며 전투 자세를 잡아서... 못 가고 한숨을 쉬며 언니를 말리는 사이 남자는 비틀비틀 도망갔다.

 

운이 좋아 노골적인 인종차별(?)과 폭력을 경험한 건 그게 전부다안타깝지만 사람 사는 곳에 차별이 없을 리가 없으니... 폭행강도위협적인 차별을 겪고 심지어 목숨을 잃은 분들도 많다결코 내 경험을 일반화할 생각은 없다지금 생각하면 조심성이 참 없었단 생각도 들고.

 

독일에 살면서 어쩔 수 없이 을의 입장이 되니 싫든 좋든 인내할 일이 많아졌다옷깃 스칠 정도의 불쾌함도 다소 크게 다가오는 것이 홀로 보내는 유학생활의 한 단면이다.”

 

지금은 영국의 상황이 아주 나빠졌지만 그렇다고 한국의 사회안전망보다 못하다고 할 수는 없다. 20년도 더 전의 영국에서는 유학생에게도 GP(General Practice : 가까운 병원 의사)가 바로 배정되었고치과치료 포함 모두 무료였다.

 

학위 과정과 평생 교육이 무료였던 독일과 달리 영국의 학위 과정에는 학비가 필요했다사회가 의무적으로 제공할 범위를 넘어선 교육이라는 뜻이다그럼에도 대학행정 아르바이트를 할 때는 소득이 법에서 지정된 기준에 못 미치면 나머지를 채워줬다 예를 들어, 400파운드를 받으면 이런! 500파운드는 있어야 사람이 살지하며 영국인이 아닌 내게 영국 정부가 100파운드를 통장에 넣어주는 것.

 

독일유학에세이를 읽고 영국유학얘기만 한다유럽 국가들은 심정적으로 아주 가까워서 역사적으로 마구 뒤섞이기도 했고 그럼에도 영국과 프랑스는 100년 전쟁 이후로 지속된 앙심이 남아 있다 거리상으로도 가까워 비행기로는 한두 시간 거리 적지 않게 들락거렸다.

 

워크숍과 프로젝트라는 좋은 핑계도 있었고 친구들도 있었다비가 오다 말다 또 오는 날씨를 탈출하고 싶을 때마다겨울에 눈이 오는 곳이 그리우면식재료 본연의 맛만 느끼는 식사가 우울하면한 달 기숙사비로 한 달 여행할 수 있는 -유로화 전이라 환율 차이가 컸다 아름답고 맛있는 다른 유럽에 늘 가고 싶었다.

 

물론 아무리 가까워도 분위기는 모두 다 다르고 유학생활의 경험 역시 다 다를 것이다당시에도... 뜻밖에 이후 직장까지 이어지며 만난 독일과 독일인들은 유쾌하고 좋은 기억들 밖에 없어서 이 책의 저자처럼 유학 생활에 관한 세세한 길라잡이다양한 사례의 역할은 못 될 듯하다.

 

3년 째 접어든 판데믹에 유학생들의 날벼락 같은 좌절과 어려운 얘기들도 종종 듣는다실질적 도움을 줄 길이 없어 안타깝기만 하다좌절의 시간을 현명하게 보내고 자신의 뿌리를 튼튼하게 한 저자의 기록으로부터 격려와 도움을 받을 독자들이 많기를 힘껏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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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3




잘 도착해서 좋은데읽기 전부터 울 것만 같았다간절한 것들은 모두 기적처럼 이루어지면 좋겠지만... 그런 일은 거의 없으니까.

 

시게미는 기적적으로 소강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하지만 코에 연결된 산소도 온전히 가슴으로 들어가지 않는 모양이었다오시타는 시게미를 부축해 수영복으로 갈아입혔다.”

 

아버지를 오래 간병한 내 친구의 경험과 결심을 따라 나는 20대부터 유서도 쓰고장기이식에 관한 서명과 등록도 해두고연명의료에 대해서도 사전의향서를 작성해두었다시게미씨도 아버지의 투병과 죽음을 겪고 이 결심을 하게 된 것이다.

 

시게미씨는 수영복을 갈아입고 휠체어에 앉은 채로 바닷물 속으로 들어갔다자신과 주변의 일이 아니면 상상력조차 지극히 제한되는 지라나는 휠체어를 탄 채 바다로 향하는 문장을 만나 무척 놀랐다.

 

마유카가 엄마 곁으로 달려오더니 뿌듯한 얼굴로 소라게를 보여줬다. “엄마이거 봐.”

시게미가 마유카의 머리에 손을 얹어보며 말했다. “마유카물 자주 마셔야 돼.”

.” 마유카는 페트병에 잠깐 입을 대고는 다시 바다로 뛰어갔다.

이거 봐

 

이 장면이 사랑스럽고 슬퍼서 아팠다마유카는 엄마와 바다에 온 것이 기쁘고엄마의 상태를 정확히 모르고엄마가 건네는 물 자주 마시라는 말이... 엄마만 건넬 법한 말이라 너무나 슬프다이 순간을 위해 기적처럼 버티었구나 싶다.

 

조금 전까지 씩씩하게 굴던 시게미의 눈에서 처음으로 눈물이 또르륵 흘러내렸다. “저 애를 남겨두고 왜 이렇게 젊은 나이에 죽어야만 하는 건지.”

.

.

차를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여기서 임종을 맞을 것이다교토로 돌아간다면 차 안에서 숨을 거둘 가능성도 있다. “어쩌죠?”

 

그때 걱정스러워하는 어른들 틈에서 내내 지켜보기만 하던 마유카가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집에 가자우리 집에 가자.” (...) 순간 갈팡질팡하던 모든 사람의 마음이 정해졌다.

 

가족과 한 모든 약속을 지킨 시게미씨그렇게 할 수 있게 각자의 최선으로 도운 사람들... 사는 일도 죽는 일도 이 정도의 존중과 배려는 누구나에게 돌아가는 사회를 만들기가 왜 어려울까태어나는 일과 죽는 일만큼 인류에게 큰 사건들이 더 있을까.

 

누군들 병실에서 죽어가길 원할까...

 

전문가가 자신의 지식과 권위로 환자를 설득하려거나 야단치려거나 하지 않아서 안심이 되었다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타인에게 강권하는 것은 의도가 무엇이건 옳은 일이 아니다때론 상대가 안타까운 결정을 한다고 믿더라도.

 

이야기 하나가 끝났고한 명의 삶이 끝났다.

 

살아 있는 지금... 내 시간을 좀 더 귀하게 여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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