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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유학 정산서 - 생존했더니 성장했더라
자상남 지음 / 지식과감성# / 2022년 2월
평점 :
영어권이 아닌 곳으로 유학 가는 이들에게 놀람, 부러움, 존경을 가지고 있다. 친구들이 여러 명 독일 유학을 선택해서 나도 가고 싶었지만, 도저히 독일어로 휴가도 여행도 아닌 학위과정을 할 엄두가 생기지 않았다.
대학원과정 필수조건이 제1외국어와 제2외국어였기 때문에 간신히 독일어 읽기는 가능한 수준이 되었지만 - 전공 한정, 사전 지참 - 그렇게 해서야 연구를 할 수는 없다. 미국은 싫고 다른 유럽어는 자신이 없었는데 운이 좋아 영어를 사용하는 유럽에 갈 수 있었다.
“첫 학기 동안 극한의 스트레스를 받은 나의 모습을 떠올렸다. 비록 내 성적은 여태껏 받아본 적 없는 낮은 성적이었지만 나는 만족한다. 다들 어렵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독일 교과과정에서 패스를 이뤄냈으니까. 울기 직전까지 공부했고 덜 자고 공부하여 받은 성적이었다.”
한국 대학 입학 후 한글 텍스트보다 영어로 읽고 쓰고 시험을 본 세월이 대부분이었는데도 첫 학기는 초등 새 학기에 버금가는 도전과 스트레스가 팽팽했다. 힘들고 불행했다는 건 아니다. 재밌고 신나고 힘들고 불안했다. 한 학기가 지나 성적이라는 결과가 나오기까지는 내가 공부하고 적응하는 방식이 맞는 건지를 알 방법이 없었으니까.
그 밖에는 오히려 쓸데없는 스트레스들이 많이 사라졌다는 편안함이 있었다. 게으르지만 잘 참지도 않는 성격, 이상한 건 따지는 버릇, 학창시절 나는 왜 그렇지요? 왜 그래야하지요?를 남발했고 친구들이 나를 부른 별명들 중에는 외계생명체도 있었다. 그 영광은 모두 부모님께 돌린다.
1987과 629선언의 영향력이 확대되고 전교조가 출범하여 떠들썩했고 알고 보니 교직원 중 60여 명이 가입한 공립 고등 학교였다. 학생들 누구나 벽보를 써 붙일 수 있는 공간을 만들자는 나의 평범한(!) 의견은 통과되었다. 어차피 완벽하게 단속하지 못할 바에는 학내에 담뱃재 털고 꽁초 버릴 쓰레기통을 마련하자고 제안한 것은... 오래 놀림 받았다.
학교에서는 모래를 채운 큰 항아리들을 여러 개 마련했고, 당시만 해도 쉬는 시간마다 담배를 피우던 교사들이 낮에 사용하고, 야간학습을 하는 동안에는 흡연 학생들이 사용했다. 모르는 다른 반 학생이 자판기 커피를 뽑아 주거나 책상 속에 사탕이 들어있기도 했는데 흡연클럽 멤버였을 지도 모르겠다.
건강권이나 인권을 잘 알아서 주장했던 것이 아니고 화장실이 더러워지는 것이 싫었을 뿐이다. 어쨌든 본질적으로 보수적이고 위계적이지만 한국보다 논쟁과 협의로 사회를 구성하는 근대화 과정을 겪은 영국에서 성격 나쁜 내가 사는 일이 더 어렵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읽고 쓰고 발표를 거듭하는 과정은 체력 경쟁이었다. 청순가련저체중에 맞춰 산 적이 없음에도 필요하면 거뜬히 밤을 새는 동기들에 비해 6시간은 자야 뇌가 멈추지 않는 몸 상태가 아쉬울 때가 많았다. 인간의 몸에서 에너지를 가장 많이 쓰는 뇌는 끊임없이 음식을 요구했고, 나는 삼시세끼에 간식까지 다섯 끼를 먹으면서도 말라갔다.
“일요일인 어제까지 나는 쉼 없이 글을 읽었다. 하지만 내용이 잘 정리되지 않았다. 일단 양이 많았다. (...) 양보다 더 문제는 질이었다. 꼭 읽어야 하는 논문임에도 문체가 도통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모르는 단어가 많아 사전을 찾는 것은 둘째 치고, 장황한 정보를 전달하는 논문을 읽다 길을 잃은 것 같았다.”
인종차별에 대해서는... 학내에서는 겪은 적이 없다 - 혹은 학습에만 집중한 탓에 시야가 극히 좁아져서 몰랐거나. 입학 오리엔테이션에서 가장 먼저 길게 교육받는 것이 차별에 대한 경고와 공부였고, 신고 시스템은 아주 간단하고 선명했다.
비슷하게 불쾌한 경험은 크리스마스이브에 길을 걷다가 술에 취한 스킨헤드 남성이 “미사일로 뭐 할 거냐? 다 죽일 거냐? 내 나라를 떠나!” 시비를 건 일이었는데, 그건 부시가 북한을 꼭 집어 악의 축이라고 하고 실제로는 토니 블레어와 이라크를 공격하는 야비한 짓을 할 때였다.
길 가던 사람들이 멈춰 섰고 그런 일에 쫄지 않고 단지 귀찮은 나는 “Happy Christmas to you, too”하고 지나가려했는데 사람들이 크게 웃으며 박수를 쳐서 성가신(?) 상황이 되었다. 나보다 더 참지 않는 언니 한 분이 “덤벼, 이 자식! 내 상대로 딱이네 Bring it on, Fucked fucking fucker! I am big enough for you.”라며 전투 자세를 잡아서... 못 가고 한숨을 쉬며 언니를 말리는 사이 남자는 비틀비틀 도망갔다.
운이 좋아 노골적인 인종차별(?)과 폭력을 경험한 건 그게 전부다. 안타깝지만 사람 사는 곳에 차별이 없을 리가 없으니... 폭행, 강도, 위협적인 차별을 겪고 심지어 목숨을 잃은 분들도 많다. 결코 내 경험을 일반화할 생각은 없다. 지금 생각하면 조심성이 참 없었단 생각도 들고.
“독일에 살면서 어쩔 수 없이 을의 입장이 되니 싫든 좋든 인내할 일이 많아졌다. 옷깃 스칠 정도의 불쾌함도 다소 크게 다가오는 것이 홀로 보내는 유학생활의 한 단면이다.”
지금은 영국의 상황이 아주 나빠졌지만 그렇다고 한국의 사회안전망보다 못하다고 할 수는 없다. 20년도 더 전의 영국에서는 유학생에게도 GP(General Practice : 가까운 병원 의사)가 바로 배정되었고, 치과치료 포함 모두 무료였다.
학위 과정과 평생 교육이 무료였던 독일과 달리 영국의 학위 과정에는 학비가 필요했다. 사회가 의무적으로 제공할 범위를 넘어선 교육이라는 뜻이다. 그럼에도 대학행정 아르바이트를 할 때는 소득이 법에서 지정된 기준에 못 미치면 나머지를 채워줬다 - 예를 들어, 400파운드를 받으면 “이런! 500파운드는 있어야 사람이 살지”하며 영국인이 아닌 내게 영국 정부가 100파운드를 통장에 넣어주는 것.
독일유학에세이를 읽고 영국유학얘기만 한다. 유럽 국가들은 심정적으로 아주 가까워서 - 역사적으로 마구 뒤섞이기도 했고 - 그럼에도 영국과 프랑스는 100년 전쟁 이후로 지속된 앙심이 남아 있다 - 거리상으로도 가까워 - 비행기로는 한두 시간 거리 - 적지 않게 들락거렸다.
워크숍과 프로젝트라는 좋은 핑계도 있었고 친구들도 있었다. 비가 오다 말다 또 오는 날씨를 탈출하고 싶을 때마다, 겨울에 눈이 오는 곳이 그리우면, 식재료 본연의 맛만 느끼는 식사가 우울하면, 한 달 기숙사비로 한 달 여행할 수 있는 -유로화 전이라 환율 차이가 컸다 - 아름답고 맛있는 다른 유럽에 늘 가고 싶었다.
물론 아무리 가까워도 분위기는 모두 다 다르고 유학생활의 경험 역시 다 다를 것이다. 당시에도... 뜻밖에 이후 직장까지 이어지며 만난 독일과 독일인들은 유쾌하고 좋은 기억들 밖에 없어서 이 책의 저자처럼 유학 생활에 관한 세세한 길라잡이, 다양한 사례의 역할은 못 될 듯하다.
3년 째 접어든 판데믹에 유학생들의 날벼락 같은 좌절과 어려운 얘기들도 종종 듣는다. 실질적 도움을 줄 길이 없어 안타깝기만 하다. 좌절의 시간을 현명하게 보내고 자신의 뿌리를 튼튼하게 한 저자의 기록으로부터 격려와 도움을 받을 독자들이 많기를 힘껏 응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