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범도 1~2 - 전2권
방현석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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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학을 전공한다는 핑계로, 한국근현대사 공부를 등한시해서 평생 무지했다. <미스터 션샤인> <암살> <밀정> <봉오동 전투> 등 영상을 통해 조금 배우고 잠시 기억하는 수준이었다. 2021년 홍범도 장군 유해봉환식을 통해 현실에서 못 다한 미완의 역사와 약속을 재소환한 경험이, 역사서와 역사소설을 읽어보는 계기가 되었다. <범도> 출간일이 봉오동 전투 개전일이라 의미가 깊다.

 

과문한 나와 달리, 어른들에겐 그저 9년 전이지만, 2014년 참사와 정치적 격변을 지켜본, 우리 집 십 대 아이들은 시사와 역사에 관심이 많다. 어른들이 낯 뜨거워지는 솔직한 의견과 사회비판도 들려준다.

 

2022년 봄, 과거의 기록으로 일단락되었다고 착각한 전쟁이 먼 나라에서 발발하고, 국내에서는 친일 청산에 실패한 대가를 처참하게 치르는 작금이다. 이제라도 가족 모두 한국사와 세계사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민족의 영웅 안중근><하얼빈>에 이어 <범도>로 가족 책모임을 이어나갔다. 누구의 삶도 전체와 무관한 것은 없다는 것을 다시 배운다. 여기저기 조각들을 모아 전체 풍경을 채워나가는 읽기와 공부가 때론 벅차고 때론 서글펐다.

 

생생하게 살아계신 홍범도 장군을 따라 다니는 이 책을 읽다가 장군이 머문 마지막 집의 사진을 보고 눈물이 쏟아졌던 순간이 떠올랐다. 우리는 누구를, 무엇을 잊고, 어떤 허깨비 같은 삶을 살아가는 것일까.

 

오늘 살아 있는 나는 평생의 내가 살아오기를 선택한 결과이인 동시에, 내가 살 수 있도록 애써준 모든 이들의 덕분이기도 하다. 내 삶에는 타인의 노력과 꿈도 묻어 있다. 역사를 잊지 않고, 귀하게 배우고, 삶이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더 빨리 더 많이 더 제대로 배울 수 있었다면, 이기고 죽이는 각자도생의 경쟁 사회 대신 다른 공동체를 만들 수 있지 않았을까.

 

반민 특위 해체라는 첫 단추가 잘못 끼워졌어도, 두 번째 단추부터는 제대로 채웠을 수 없었을까. 분단된 남한 내부의 학살과 참사는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복잡한 심정으로 다를 수 있었던 상상들을 서럽게 이어갔다.

 

그 아쉬움을 작가가 소설 범도에서 안중근과 홍범도 두 분이 만나는 설정으로 위로해준다. 홍범도 대장이 추천해준 총을 들고 안중근 의사가 단독 작전에 착수한다. 현실이었다면 싶은 역사에 명치 어디쯤이 아팠다.

 

고등학생인 큰 아이는, ‘생계를 위해 열다섯의 나이에입대했다가 떠돌이 포수로 살아간, 홀로 일본군을 처단한 범도에 놀라고, 단단한 생각과 실행력에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평범한 일상에서 평범하게 행복하다고 느낄 때마다, 책에서 만난 독립 운동가들이 생각날 거라고 한다. 자신은 도저히 감수할 수 없을 희생을 치르며 굽힘없이 살아가신 분들이 놀랍고, 감사를 전할 방법이 없어 안타깝다고 한다.

 

결단이 필요하지 않은 시대가 더 좋겠지만, 차마 할 수 없는 짓을 하고, 차마 일어나선 안 될 일이 벌어지는 현재의 풍경은, 시민으로서 권리와 의무를 할 수 있었던 격발의 순간을 거듭 놓쳤기 때문이라는 회환이 두껍게 쌓여간다.

 

신분제 사회의 그늘이 짙었던 시절의 독립운동은 물론, 한국사회의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공부할 때마다 참여한 분들의 면면이 다양하고, 여러 직업군이 함께여서 먹먹하다. 엘리트가 주도하는 역사라는 편견과 선입견이 얼마나 강고한지 절감한다. 소설 속에서, 머슴, 포수, 나팔수, 승려, 막일꾼, 광부 등의 일을 하던 이들이 개연성을 얻어 빛나는 직조물을 채워나가는 시간이 눈물겨웠다.

 

여성들이 조력자나 소비자로만 장식되거나 소비되지 않고, 아내로서, 동지로서 의미 있는 생을 사는 묘사도 반가웠다. 백무아와 더불어 <싸우는 여자들, 역사가 되다>에서 처음 만난 김알렉산드라도 반갑고 좀 더 잘 알고 싶어졌다.

 

내가 어릴 적 위인전은 오히려 유해했다. 그래서 아이가 엉터리 신화나 영웅담이 아니라, ‘인간으로 태어나 사는 삶에 대해 스스로의 속도로 읽고 생각하고 정리할 수 있는 텍스트를 만난 것이 기쁘다. 현대물리학은 생명탄생이 우연이며, 의미도 가치도 없다고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의미와 가치를 찾아서 사는 삶이 중요하다는 것을 기억해줬으면 한다.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겠어요?” 여러 상황에서 비슷한 질문을 듣고 묻기도 했다. 국내의 정치 상황과 전 지구적인 기후재앙을 겪으며 사는 매일이 불안하고 고단하다. 그래도 포기와 좌절은 진짜 마지막에 하면 되니, 뭐라도 한다.

 

눈앞이 어두워지면, 그건 아직 몸을 덜 낮춰서그렇다고, 내가 밟고 선 곳이 길이라고, 허공만 쳐다보지 말자고, 기어서라도 한 걸을 앞으로나아가자고, 예측과 낙관은 못해도, 싸워야 할 내일이 있다면 계속 하자고 새로 결심할 것이다.

 

큰 희생을 치르는 선택은 못할 것이다. 계속 부끄럽고 미안할 것이다. 다만 나는 뭐라도 하면 결코 ‘0’이 되지는 않는다는 계산을 믿는다. 내 선택이 누군가에게 보탬이 될 거란 희망을 놓지 않으려 한다. 다른 대안은 없다.

 

미래는 지금 우리가 한 모든 선택이고, 어떤 태도로 살 것인지는 각자의 몫이다. 이 책 속의 사람들이 살아간 면면을 보고 자신의 것을 다듬어 갈 기회로 삼아 봐도 좋겠다. 내가 더 이상 아무 도움을 줄 수 없는 미래에도 아이들은 독서를 통해 자신의 시대를 바로 보고 애쓰며 살아 갈 힘을 키울 수 있기를.

 

독립국가에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견디기 힘든 모욕감을 자주 느낀다. 이 현실을 내가 만든 것이 아니라고 항변하고도 싶지만, 전혀 무관하다고 할 수도 없어 미안하다. 화만 내고 살면 지치고 무기력해진다. 눈도 귀도 닫고 싶어진다. 그렇게 도피하고 침묵하는 모든 순간은 상황을 더 나쁘게 만든다.


역사공부가 과문한 짧은 생각이지만, 식민지와 전쟁을 통해 한국 사회는 전쟁과 냉전의 산물들을 일상화시켰다고 본다. 비가시적으로 숨어들어 익숙해진 모든 악영향이 현재 목격하는 차별과 폭력과 혐오와 불의의 산실일 듯하다.

 

적극적으로 오용하고 악용하는 이들, 공동체나 사회 전체보다, 이어나갈 미래보다는 당장의 패거리 이익 계산에 무엇이든 망치고 훔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의 뿌리가 친일의 역사 속에서 번창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드라마 속에서 갓난쟁이를 보내고 끝까지 총탄전을 벌이다 죽어가는 어미이자 독립운동가의 늦더라도 동지들이 친일파 네 놈을 찾아갈 거라는 대사가 사무쳤다. 그 딸이 자라 부모의 원수이자 민족반역자인 친일파를 제거하는 장면이 현실이었으면 해서 서러웠다.

 

겁쟁이에다가, 큰 희생은 감당 못하고 할 수 있는 참여와 후원과 응원만을 하며 살지만, 저자께서 소명처럼 온 힘을 다해 취재하고 조사하고 집필한 이 책을, 찬찬히 읽고 배우는 것도 참여라고 믿고 싶다. 기록은 중요하고 기억은 힘이 세고 읽고 쓰는 것은 저항이자 미래를 위한 선택일 수 있다고.

 

인간의 뇌는 왜곡을 일삼지만, 가소성도 뛰어나서 죽을 때까지 우리는 새롭게 배울 수 있다고 배웠다. 용기 있고 대의를 삶의 가치로 알아보는 사람으로 모두가 태어나지는 못하지만, 이 작품에서 모두가 각자의 성장을 이루듯, 우리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함께 지향하고 애쓰는 모두가 그러모은 의지와 힘이 백 년 전의 탄환처럼, 무겁고 느리지만 반드시 표적에 정확히 도착하는 이미지를 떠올렸다. 모욕감에 힘들고, 빠르게 변화를 만들지 못해 무력해지기도 하지만, 싸울 내일이 있으면 그 방향으로 한 걸음, 반걸음 기어서라도 다가가면 될 일이다.

 

2000 페이지나 되지만, 청산리 전투에서 끝나는 이야기가 아쉽다. 헌법도 무시되는 참담한 시절이지만, 마침 제헌절이라서, 이어지는 길고 긴 역사 이야기가 고프다.

 

영상으로 눈앞에 그려지듯 생생한 표현과 문체, 실존과 같이 입체적인 인물들, 꼼꼼한 자료 조사와 치밀한 설계, 작가의 길고 긴 고군분투의 시간이, 어느 해 67일에, 이 작품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로도 만나고 싶다. 죽임 당하고 잊힌 이들이 화면 속에서 살아 돌아오는 모습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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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육점 주인들의 노래클럽
루이스 어드리크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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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선 4권의 책은 저자의 어머니쪽, 북미 선주민들의 우주가 태고적 별빛처럼 반짝이고도 처연하게 펼쳐진, 신비로움과 고통이 농도를 높여가던 작품이었다. 처음 맛본 메뉴처럼 바로 꿀꺽 삼키지는 못하고 조심스럽게 맛을 보았다.

 

이 책은 저자의 독일계 아버지 쪽의 자전적 이야기가 담긴 작품이다. 표지부터 재밌고 기분이 가벼워진다. 비건 소시지라도 구워서 맥주를 마시면서 읽고 싶어졌다. (결국 구웠다. 소시지 볶음밥은 실수인 듯)





 

그나저나 유럽에서 머물 줄 알았는데, 독일 저격수였던 인물이 미국 식빵 맛에 반해 미국으로 와버렸다. 그리고 정육점을 연다. 전쟁은 잊혔지만 생존이 그보다 덜 힘들지는 않다. 흉흉한 시절이라 폭락과 대공황과 흉작마저 닥친다.

 

화내고 뭘 부수고 누굴 때리는 대신 노래를 부른다는 전개가 너무나 안심이라서 눈물이 고일 뻔 했다. 물론 도살이나 도살실의 존재에 속이 울렁이긴 했지만, 그 장소가 노래클럽 모음에 사용되는 것이 묘하게 유쾌했다.

 

삶을 휘두르는 전쟁에도 불구하고 놀랍도록 다양한 직군의 노래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인다. 지금은 사라진 직업이 등장해서 재밌기도 하고, 주류 밀매자, 보안관, 의사, 은행가가 모두 노래를 즐긴다는 점이 새삼스럽기도 하다.

 

몇 년 전만 해도 부모님께서도 뭘 배우러 다니시고, 모임도 많았는데, 팬데믹과 더불어 사라지고 다들 급격하게 노화되신 점이 쓸쓸하고 안타깝다. 함께 노래는 부르는 장면이 그립고 아름답다. 서로 호흡을 나누는 풍경 같다.

 

물론 이렇게 즐겁게 들떠서 맥주도 맘대로 마시고 밤새 노래 부르는 이들은 모두 남자들이다. 여자들은 뭐하고 있나 궁금해진다. 그럼에도 서로 좋아하는 노래를 불러주고 가르쳐 주는 장면은 참 좋았다.



 

파편화된 관계와 사회, 매일 화면을 들여다보는 시절, 그렇지 않은 분들도 많고, 집회는 항상 수천수만 명이 모이지만, 일상에서도 우리는 어쩌면 함께 뭘 좀 같이 하고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배워야하는 건가 싶을 때가 왕왕 있다,

 

인류 문명사에 전쟁이 부재한 시기는 드물고,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이 때론 생명을 위협하는 아이러니가 있다 하더라도. 지향이 없다면, 한 걸음씩 내딛는 발걸음이 없다면 산다는 건 또 무엇인가. 왜 애쓰며 살아야 하는가.

 

우리는 영원을 경험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데, 우리는 지극히 유한한 존재인데 어째서 우리에게 영원을 상상하는 저주가 내려진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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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렘린의 마법사
줄리아노 다 엠폴리 지음, 성귀수 옮김 / 책세상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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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해서 이른 아침에 조금 읽자고 했다가 손에서 놓을 수가 없어서 챙겨 나갔다. 덕분에 가볍게 먹고 고요하게 읽는 행복한 점심시간을 보냈다. 이동 중 독서멀미가 아쉬울 정도로 다음 장이 궁금했다. 흑마법에라도 걸린 걸까.

 

소련과 러시아에 대해서 특별히 진지하게 역사를 공부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쉽게 접할 수 있는 정보만으로 살다가, 2022년 전쟁이 시작되고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한지가 의아하고 화가 나서 러시아 현대사를 찾아보았다.

 

푸틴을 중심으로 한 권위주의적 질서가 극단적 지배사회에서 타국과의 갈등을 해결하는 방식은 폭력적이었다. 푸틴은 누구이며, 그 정권은 어떻게 성립되고 유지되는지도 궁금했다. 장기집권용 대국민 가스라이팅 담론과 서방국가들의 무력한 대응도 절감했다.

 

KGB 첩보원이 권력 정당(party of power 자율적 정치조직과 달리 행정부-대통령의 수족처럼 행동하는 정당)의 리더가 되어, 전쟁과 테러의 한가운데서 지지율을 높여가는 과정이 잔혹 역사 드라마였다. 권한대행이 되고 지지율이 더 오르고, 선거운동도 TV토론 출연도 없이 대통령이 되었다.


 

다르고도 유사한 역학에 소름이 끼쳤다. 정책적 지지가 아닌 인기를 얻는 포퓰리즘의 방식으로, 권력의 독점과 정적 제거를 끈질긴 목표로 삼은 정치적 인물과 음습한 주변 세력이 만든 어두운 웅덩이들이 한국사회에도 무수하다.

 

이 책은 팩션 소설이다. 내가 아는 팩트 조각들의 빈틈을 더 생생하게 채우고 더 깊이 파고드는 유용하고 반가운 작품이다. 2023년 크렘린 궁정의 마법사, 바딤 바라노프 - 블라디슬라프 수르코프 - 를 마주하는 일은 서늘했다.

 

정책 전달과 이해를 위해 기획된 쇼가 아닌, 피칠을 한 무대에서 독재자(권력)의 욕망과 의지를 실현하기 위한 공연은 너무 어두워서, 자국만이 아니라 전 세계에 그림자를 길게 드리울 듯하다. 멸종을 가속화시키는 결과를 만든다.

 

정치인 중 누구도 강력하게 맞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전쟁 아닌 전쟁을 원했어요. 인간적이랄까, 아메리칸 스타일의 전쟁.”

 

이들은 수식어를 붙이는 행위 자체가 민주주의의 오염과 변질이라고 인지하지 못한다. 자기정당화와 사욕없음을 굳건히 믿는 인간들의 흔한 오류가 익숙해서 갑갑하다. 전 세계 몇 나라에서 병리적이지 않은 민주정이 기능하고 있을까.

 

우리가 중요하게 여길 동력은 여전히 인간의 분노입니다 (...) 어느 시대, 어느 체제에서든 좌절하고 실패하고 파산한 자는 있기 마련입니다. (...) 그건 사회를 지배하는 심연의 흐름 같은 거예요.”

 

소설을 읽고 있는데, 방대하게 축적된 사회학 데이터들이 섬세하게 구현된 문학 보고서 같다. 대단하다. 작가는 악성(정치)종양을 다루는 외과의사처럼 메스mes를 거침없이 필요한 만큼 사용한다.

 

서구인들은 자기 자식들이 앞으로 자기들보다 못한 삶을 살거라 생각하고 있어요. (...) 상황은 그들의 통제력을 벗어나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치닫습니다. 더 이상 미래는 그들의 것이 아니에요.”

 

덕분에 과문했던 나는 소비에트 연방부터 현재 러시아에 이르는 권력층과 경제그룹이 연합하고 기생하고 붕괴되는 현대사를 노안이 다 나은 듯 선명하게 살펴볼 수 있었다. 소설이라서 더 대단하다.


 

10초 전에 한 말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고, 왜곡하는 뇌를 가진 인간들이 벌인 잡다하고 복잡한 사건과 풍경을, 타인의 발언과 행위를 기초로 삼아, 팩트에 가깝게 새롭게 창작하며, 독자에게 생존을 위한 진지한 질문들을 제공해주는 신기하고 놀라운 작품이다.

 

인간으로 산다는 것, 싸우다 기꺼이 죽는다는 것이 무얼 의미하는지, 우리는 잊지 않았습니다. (...) 산다는 것과 죽지 않으려 애쓴다는 것은 매우 다릅니다. 저들은 잊었을지 모르나, 우리는 아니에요.”

 

장르와 형식이 무엇이건 읽으시길, 우리의 정치적 미래도 상상해보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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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신 인연
나은숙 지음 / 지식과감성#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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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깊고 더 아픈 사랑> <어느 날 누구에게나 찾아온 행복> 그리고 이번 시집. 나은숙 시인께서는 일 년에 한 권씩 꾸준히 출간하시는군요. 반갑고 멋진 일입니다. 시인의 시선에 세상은 어떻게 달라졌을지 기대하며 펼칩니다.

 

어느새 8월입니다. 겨울, 봄이 지나고 한 여름입니다. 이렇게 말하니 짧은 시간 같기도 하지만, 세세한 기억들은 찾아보지 않으면 가볍게 떠오르지 않습니다. 시집 속에 계절들이 담겨 있어서 좋았습니다. 하나둘 생각이 납니다.

 

힘들고 슬프고 화나는 일이 있으면, 점점 더 작은 세계로 움츠러듭니다. 최대한 에너지를 아껴 방어와 생존에 쓰려는 것이지요. 그래서 올 해 봄은 더구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이런 봄 얼른 지나가버리라고 자주 생각했던 듯.

 

시인이 따스한 숨결에/만물이 요동치고 있다/ 그런 봄기운이 가속화될 전망이라고 해서 내가 놓친 봄을 이제야 아까워해 봅니다. 전 세계 하천과 강이 카페인 범벅이라고 해서 끊었던 커피를 가끔 사마십니다.

 

알게 뭐야, 커피 한 잔도 고민스런 삶을 산다고 기후붕괴를 내가 어쩔 거야, 싶은 못나고 뾰족한 마음이 듭니다. 잔을 받아 마주하면, 묵직한 현실이 체증처럼 먼저 옵니다. 그렇다고 마시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인생은 보이는 것보다/보이지 않는 곳에서/그 속에 감춰진 얼룩들로 가득하다는 구절을 오래 봅니다.


 

겨울에 태어났고 겨울이 좋은 나는 여름의 모든 것이 여전히 어색하고 힘이 듭니다. 더위 자체도 힘들지만, 창을 모두 열고 자야하는 밤은 불면이 잦은 시간입니다. 여름밤은 인간과 인간 아닌 존재들로 소란스럽습니다. 공기마저 수군거리는 듯합니다.

 

그럼에도 각자의 무더위와 각자의 지침과 각자의 삶의 굴레가 다르겠지요. 내 힘겨움의 강도가 휴식 같은 이들도 있겠지요. 택배 배송을 삼가는 날들이지만 무언가가 현관 앞에 도착하는 날도 있습니다. 남모를 열기를 견뎌 낸 이들의 충분한 휴식을 바랍니다.

 

산책길에 만나는 청단풍을 책 속에서 만나 반갑고 한여름 밤의 꿈을 꾸듯 빛나는 별빛이란 사랑스러운 소개에 기쁩니다. 나무 밑에서 길고 깊은 호흡을 하며 나무와 호흡을 교환합니다. 가을이 오면 나는 그저 늙고 나무는 다채롭게 빛나며 다음 생을 준비하겠지요.


 

겨울에만 머물러서 겨울 풍경 밖에 모르는 부다페스트의 사진을 꺼내봅니다. 무릎까지 푹푹 들어가던 가득했던 눈이, 펄펄 날리며 내게 달라붙던 커다란 눈송이들이 그립습니다. 폭염도 태풍도 지나고 비켜가고 고요한 계절들을 만나보고 싶은 8월의 첫 주입니다. 서리꽃 녹아내려 얼음꽃이 피어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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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3-08-03 01: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정도 소용돌이 물결 나무라면, 나이만큼이나 에너지도 상당하겠네요. 요즘 다시 읽은 [삐삐 롱스타킹] 에피소드 중에 나무 안에 들어가서 노는 장면이 나오는데 올려주신 사진 속 나무야 말로 놀이터삼아도 될만큼 크네요. 신비롭습니다!

poiesis 2023-08-07 23:24   좋아요 0 | URL
어릴 적 꿈이 커서(?) 삐삐가 되는 것이었지요. 커서 삐삐랑 결혼하는 게 꿈인 사람을 만났답니다.ㅎㅎ 나무 숭배자라서 전 세계 큰 나무들을 매일 찾아 봅니다. 편안하고 즐거운 여름 무탈하게 보내시기 바랍니다. 설레는 댓글 감사합니다.^^
 
페인티드 드럼
루이스 어드리크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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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잠을 편히 못자서 기절할 것 같은 날들(기절도 안 함), 루이스 어드리크 세계로 달아날 책들이 있어 다행이다. 네 번째 작품을 읽으니 이제야 제대로 도착한 느낌이다. 도착지가 안전지대가 아니라서 문제지만.

 

두렵고 걱정스러운 현실이야기처럼도, 모르는 신화 속 이야기처럼도 읽힌다. 여름이라서, 밤이라서, 아름다운 문장들이라서, 온통 상실과 그리움이 가득이라서. 현실은 누추하고 문학은...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반짝인다.

 

drum'이다. 북소리가 심장을 둥둥 울려줄 것만 같다는 생각을 했다. 죽은 이의 집에서 발견된, 스스로 울리는, 삼나무와 무스 가죽의, 상징이 가득 그려진, 채색된, 전통에 의하면 매매될 수 없는, 전수할 인간을 선택하는 북.



 

살과 뼈처럼, 북의 몸은 영혼을 담는 그릇이다. (...) 북은 계속 살아간다. 북은 생명 없는 사물이 지닌 인내심으로 기다리지만, 생명 자체의 힘으로 치유된다.”

 

제 자리라는 것이 정말 있을까. 있다면 그것은 여기서 살고 싶다란 기분이 드는 곳일까, 그저 살 수는 있겠다란 조건일까. 못 파는 것이 없는 자본주의 문명과 팔지 말아야 할 것이 있는 문명은 어떻게 세세하게 달랐을까.

 

인간은 북을 왜 만들었을까. 북을 울려 인간에게 닿는 소리는 어떤 힘을 가질까. 인간이 만든 북의 이야기를 이렇게 오래 차분하게 읽으며 그림을 맞춰가는 경험이 처음이라 벅차고 신비로웠다. 인간의 북의 화자가 되어 결국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는 인간/비인간의 무례한 구조가 없어서 그리운 세계다.

 

북을 울리는것은 무엇인지, 북에 힘과 능력을 부여한 것은 무엇인지, 찾아가보니 슬픈 풍경들이 가득했다. 층층이 다채롭게 슬펐다.

 

슬픔은 혼란이다. 죽음과 질병은 세상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게 한다. 북의 질서는 세상의 질서다. 그 질서 속에서 살아나가고 그 질서를 지키는 것은 절박하게 희망을 갈구하는 몸짓이다. 우리를 보호하소서. 우리를 구원하소서. 우리의 마음에서 슬픔을 걷어가 순수한 마음으로 세상을 찬미하게 하소서.”

 

작가와 작품이 전하는 바는 모녀 관계와 상호 구원의 내용이 있는 것도 같은데, ‘구원자체가 어려운 만큼 내게는 그 가능성이 옅어서 읽어도 읽히지 않았다. 너무 낯선 판타지, 어쩌면 나는 이 책을 읽지 못했을 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망각하려는 욕구가 있다. 나는 우리의 열병 같은 망각이 그쳤는지 아직 모르겠다. 우리는 늘 망각의 언저리를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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