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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렘린의 마법사
줄리아노 다 엠폴리 지음, 성귀수 옮김 / 책세상 / 2023년 8월
평점 :
궁금해서 이른 아침에 조금 읽자고 했다가 손에서 놓을 수가 없어서 챙겨 나갔다. 덕분에 가볍게 먹고 고요하게 읽는 행복한 점심시간을 보냈다. 이동 중 독서멀미가 아쉬울 정도로 다음 장이 궁금했다. 흑마법에라도 걸린 걸까.
소련과 러시아에 대해서 특별히 진지하게 역사를 공부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쉽게 접할 수 있는 정보만으로 살다가, 2022년 전쟁이 시작되고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한지가 의아하고 화가 나서 러시아 현대사를 찾아보았다.
푸틴을 중심으로 한 권위주의적 질서가 극단적 지배사회에서 타국과의 갈등을 해결하는 방식은 폭력적이었다. 푸틴은 누구이며, 그 정권은 어떻게 성립되고 유지되는지도 궁금했다. 장기집권용 대국민 가스라이팅 담론과 서방국가들의 무력한 대응도 절감했다.
KGB 첩보원이 권력 정당(party of power 자율적 정치조직과 달리 행정부-대통령의 수족처럼 행동하는 정당)의 리더가 되어, 전쟁과 테러의 한가운데서 지지율을 높여가는 과정이 잔혹 역사 드라마였다. 권한대행이 되고 지지율이 더 오르고, 선거운동도 TV토론 출연도 없이 대통령이 되었다.
다르고도 유사한 역학에 소름이 끼쳤다. 정책적 지지가 아닌 인기를 얻는 포퓰리즘의 방식으로, 권력의 독점과 정적 제거를 끈질긴 목표로 삼은 정치적 인물과 음습한 주변 세력이 만든 어두운 웅덩이들이 한국사회에도 무수하다.
이 책은 팩션 소설이다. 내가 아는 팩트 조각들의 빈틈을 더 생생하게 채우고 더 깊이 파고드는 유용하고 반가운 작품이다. 2023년 크렘린 궁정의 마법사, 바딤 바라노프 - 블라디슬라프 수르코프 - 를 마주하는 일은 서늘했다.
정책 전달과 이해를 위해 기획된 쇼가 아닌, 피칠을 한 무대에서 독재자(권력)의 욕망과 의지를 실현하기 위한 공연은 너무 어두워서, 자국만이 아니라 전 세계에 그림자를 길게 드리울 듯하다. 멸종을 가속화시키는 결과를 만든다.
“정치인 중 누구도 강력하게 맞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전쟁 아닌 전쟁을 원했어요. 인간적이랄까, 아메리칸 스타일의 전쟁.”
이들은 수식어를 붙이는 행위 자체가 민주주의의 오염과 변질이라고 인지하지 못한다. 자기정당화와 사욕없음을 굳건히 믿는 인간들의 흔한 오류가 익숙해서 갑갑하다. 전 세계 몇 나라에서 병리적이지 않은 민주정이 기능하고 있을까.
“우리가 중요하게 여길 동력은 여전히 인간의 분노입니다 (...) 어느 시대, 어느 체제에서든 좌절하고 실패하고 파산한 자는 있기 마련입니다. (...) 그건 사회를 지배하는 심연의 흐름 같은 거예요.”
소설을 읽고 있는데, 방대하게 축적된 사회학 데이터들이 섬세하게 구현된 문학 보고서 같다. 대단하다. 작가는 악성(정치)종양을 다루는 외과의사처럼 메스mes를 거침없이 필요한 만큼 사용한다.
“서구인들은 자기 자식들이 앞으로 자기들보다 못한 삶을 살거라 생각하고 있어요. (...) 상황은 그들의 통제력을 벗어나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치닫습니다. 더 이상 미래는 그들의 것이 아니에요.”
덕분에 과문했던 나는 소비에트 연방부터 현재 러시아에 이르는 권력층과 경제그룹이 연합하고 기생하고 붕괴되는 현대사를 노안이 다 나은 듯 선명하게 살펴볼 수 있었다. 소설이라서 더 대단하다.
10초 전에 한 말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고, 왜곡하는 뇌를 가진 인간들이 벌인 잡다하고 복잡한 사건과 풍경을, 타인의 발언과 행위를 기초로 삼아, 팩트에 가깝게 새롭게 창작하며, 독자에게 생존을 위한 진지한 질문들을 제공해주는 신기하고 놀라운 작품이다.
“인간으로 산다는 것, 싸우다 기꺼이 죽는다는 것이 무얼 의미하는지, 우리는 잊지 않았습니다. (...) 산다는 것과 죽지 않으려 애쓴다는 것은 매우 다릅니다. 저들은 잊었을지 모르나, 우리는 아니에요.”
장르와 형식이 무엇이건 읽으시길, 우리의 정치적 미래도 상상해보시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