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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을 말하는 사람이 없다면 ㅣ 민음사 모던 클래식 30
존 맥그리거 지음, 이수영 옮김 / 민음사 / 2010년 7월
평점 :
절판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여름이었는지 늦봄이었는지 아니면 초가을이었는지.. 그쯤에.
어머니의 손을 잡고 외가댁까지 걸어서 간 적이 있습니다. 그 나이 때까지 한 번도 걸어 가본적은 없었어요. 늘 버스나 오토바이, 이런 걸 타고 가야만 했던 거리였는데 그날 어머니는 많이 슬펐고 혼란스러워했고 서러워했었기 때문에 나는 장난감 하나 들고 따라 나서야 했습니다. 가다가 내가 힘들어 하자 읍내를 벗어날 즈음에 있는 냇물 가에 앉아 쉬었는데 그때 꽤나 길게 자란 갈대(잡초였는지도 모릅니다만)가 바람에 흐느적거리고 있었고 물소리는 졸졸도 아니고 콸콸은 더욱 아닌 어떤 소리. 흐르는 소리를 내며 제 앞에 가로놓여 있었습니다. 지는 태양 때문에 반짝이는 물빛은… 어린 제 마음조차 짠하게 만드는 그 무엇이 있는 풍경이었어요. 그때 그곳 아주 오래 전에 있었던 아주 소소한 사건이었지만 묘하게도 세세한 부분까지 묘사할 수 있을 정도로(더 자세히는 말하고 싶지 않네요) 기억에 선명합니다.
<<기적을 말하는 사람이 없다면>>의 화자는 어쩌면 저의 ‘그런 날’과 같은 ‘날’을 묘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굉장히 중요한 날이었지만 미처 그때는 알지 못했던, 그러면서도 선명한 기억으로 결코 잊혀지지 않는 그 어떤 날에 대해서 말이지요.
잉글랜드의 어느 도시, 다세대 주택이 자리한 거리를 보여줍니다. 늦여름 아주 밝고 화창한 날. 마약 하는 젊은이들, 이제 이사가야 하는 젊은이들, 손에 화상을 입은 장년, 병에 걸려 살 날이 많지 않음을 아는 노인, 노느라 정신 없는 쌍둥이, 자기 세계에 빠져 있는 여자아이 등등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들의 과거와 현재와, 풍경, 소품들.. 차분한 리듬감으로 하나하나 묘사 되어 나갑니다. 그 중심에는 ‘사건’이 있습니다. 3년 전 그때의 시제로 진행되는 챕터와 3년 후 과거를 회상하는 그때 그 자리에 있었던 여인의 3년이 지난 지금의 삶이 진행되는 챕터가 교차 편집됩니다. 그리고 차츰.. 그 날의 ‘기적’이 드러나지요..
저는 이런 내러티브를 좋아합니다. 엄청난 서사 때문에 소소해 보이는 낱말, 문장은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 듯한 소설 보다 말입니다. 전지적인 시점이지만 전능의 시점은 아닌 듯한 그런 관점도 맘에 들고요. 무엇보다도 별 것 없는 다세대 주민들의 어쩌면 신산스러울 법한 이야기들을 풀어나가면서도 독자의 가슴에 파란빛만 남기게 하는, 생각할수록 마법 같은 문체. 특히 그게 마음에 듭니다. 아주 아주 많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