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초에 내 의도는 존 버거가 ‘보는 방법’을 알고자 하는 것이었다. 사고의 작동방식. 즉 그가 중요시 여기는 의미와 그 의미가 어떤 순서와 구조로 그의 글에 흔적 되어 있는지 하는 것을 알고 싶었다. 여기서도 ‘맥락’이라는 키워드를 찾아냈다. 그걸 ‘되먹임의 연결고리’라고 해도 될지 모르겠다. 존 버거의 보는 방식. 그걸 습득하진 못했다. 당연히.. 수 많은 되먹임의 과정을 거쳐야 얻어지는 것일 테니까. 대신 그 여정에서 좀 달라 붙은 것들은 있다. 화가, 사진가들 그리고 그들의 작품들에 대한 지식의 알갱이들. 그뤼네발트의 이젠하임 제단화의 더 속 깊은 내용, 조르주 루오를 아낀 스승이 최근에 관심 갖게 된 귀스타브 모로라는 사실 같은 것들. 책을 읽고 나서 [Way of Seeing] 번역본도 마저 구입했다. 더 많은 되먹임을 하고 싶은 작가다.
거북의 등딱지를 보석과 금으로 화려하게 장식하는 장면부터 취향의 기괴함이 솔솔 피어 오르기 시작한다. 복화술을 하는 여성, 남자 같은 근육을 지닌 여성과의 잠자리 장면도 눈요기거리다. 눈요기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이유는 이 소설 전체가 실상 눈요기거리기 때문이다. 플롯이 있는 작품이라기 보다는 자기 취향을 늘어놓은 선반이 있는 방 안을 둘러보는 기분을 들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작품 안에서 얘기되는 것들 모두가 눈요기거리가 되는 셈이다. 수많은 향수로 음악을 작곡하듯 하는 장면이나, 디킨스의 작품을 읽고 런던으로 여행을 떠나려다 파리의 런던분위기 술집을 경험하곤 그냥 돌아오는 장면 등도 거북이 등딱지와 복화술 하는 여성과의 잠자리보다는 덜 하지만 아주 대단한 눈요기거리다. 이에 비하면 라틴어 문학이나 작가 위스망스와 동시대 작가들에 대한 비평, 회화 작품에 대한 뚜렷한 주관을 설파하는 부분은 평범하다. 씨니컬 하지는 않지만 날 선 혓바닥을 지닌 화자의 어투가 처음에는 좀 거북했지만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맘에 들기 시작했다. 덕분에 귀스타브 모로의 회화작품을 알게 된 것은 수확이다. 또 한 명의 호기심 가는 화가를 발굴한 기분. 졸라, 공쿠르, 보들레르, 베를렌, 말라르메 등 프랑스 작가/시인들에 대한 그의 말들엔 별 관심이 안 갔지만 디킨스와 에드거 앨런 포에 대한 호감 어린 입장은 두 작가에 대해 내가 느끼고 있는 의무감에 무게를 더 하게 만들기도 했다. 데 제쎙트(주인공)가 화려한 생활 후 성불능이 되었다는 것. 파리와 완전히 먼 어느 동네가 아니라 파리 근교의 한가로운 시골에 은둔한다는 것. 펑펑 써 버려 절약하긴 해야 하나 그래도 여전히 자기 취미를 위해선 써 버릴 수 있는 여유가 있다는 것. 결국 의사의 진찰결과에 굴복해 다시 파리로 돌아가게 된다는 것 등등.. 뻔한 은유일 지도 모르지만.. 동시대의 대세(자연주의 문학)를 거스르는(거꾸로) 위스망스의 취향은 은근 매력적인 데가 많다. 오타쿠 문화의 선두주자였다고나 할까..
오랜만에 맘에 드는 한국소설을 만났다. <<달려라, 아비>>의 김애란을 만난 후 처음이다. 그림자 : 주요 등장인물들 모두가 한 번 이상씩 겪는 어떤 상태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절망의 다른 이름. 여주인공인 은교가 처음 그림자를 이야기할 때 그것은 굉장히 리얼한 것의 은유적 표현이라 여겨졌지만 곧 남자주인공인 무재를 비롯한 주요 등장인물들이 모두 그림자를 경험했었다는 이야기가 전개됨으로써 왠지 기묘한 환상과도 연결된다. 그런 리얼과 환상의 연결은 더욱 더 그 ‘희망 없음’의 절박함을 부각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 같다. 마르케스의 <<백 년 동안의 고독>>에서 하늘로 날아 올라간 누군가 마냥. 현실에선 벗어날 수 없는 무력함을 절절히 느끼게 해 준다. 공간 : 도입부에 나오는 숲, 철거가 진행되고 있는 크고 낡고 미로처럼 꼬여 길 찾기 어려운 상가, 그리고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섬. 은교와 무재의 집, 은교 아버지의 집 등등. 상징성이 두드러지는 공간 설정 자체가 이미 품고 있는 서사가 아주 자연스럽게 녹아져 있다. 나는 이런 공간성에 대한 작가들의 감각들을 눈 여겨 보는 편인데 김애란도 그렇고 황정은도 그렇고, 간결하지만 리얼을 잃어버리지 않는 그런 센스가 돋보인다. 대화의 투 : 은교와 무재의 대화방식은 실제 있을 법하지 않는 어투다. 하지만 무어라 말 하기 힘든.. 책의 뒤에 붙어 있는 신형철의 비평에서는 ‘윤리’라는 말을 쓰던데.. 그래 그런 말을 써도 되긴 하겠다. 그렇지만 좀더 직설적으로 얘기하자면 ‘섹스에 대한 욕망’을 완전 잠재운 듯한.. 절대 중요하지 않다는 어투. 뭐랄까.. 아다치 미츠루의 H2 같은 만화에서 주인공들이 서로를 존중하며 하는 말들. 즉 우정의 말투다. 그래서 오히려 은교와 무재가 섹스에 대한 얘기를 할 때 그건 유머로 다가와 아주 선(善)하게 들린다. 연애 : 은교와 무재의 연애.. ‘사랑’이라는 말은 둘에게 사용하기엔 좀 노골적으로 들린다. 연애라는 은근슬쩍 한 단어가 뉘앙스에 더 적합한 기분이다. 절망의 과정 중에서도 독자로 하여금 풋. 하고 웃음짓게 만드는 이들의 연애이야기는 딱 사춘기 첫사랑 같은 풋풋함이 풍겨 소설의 중심을 이루는 어둠에 질척거리지 않게, 저 멀리 아주 희미하게 깜빡이는 별을 볼 수 있게 해 준다. 현실의 두 세 발자국 바깥에서 그것의 심장을 꿰뚫어 보는 소설.
수 년째 블로그에 독서리뷰를 써 오고 있지만, 글쓰기 솜씨는 그대로.. 답보 상태에 머물러 있는 기분입니다. 그 원인(요즘은 ‘원인’들 때문에 여러모로 고민이 많다. 포텐셜 엑스, 바이탈 퓨 엑스.. 식스시그마 때문에)을 나름 분석해 보면, 책 한 권에 리뷰 하나라는… 블로그 초기부터 이어져온 나름의 규칙 아닌 규칙도 여러 원인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독서 행위는 무엇보다 ‘과정’이고 ‘길’이며 ‘삶’입니다. 한 권의 책을 읽더라도 앞부분과 뒷부분에서 느끼고 배우는 것이 얼마든지 다를 수 있고 그날 그날 내게 생긴 일에 의해서도 감상은 저 밑바닥에서 기거나 푸른 하늘 위에서 훨훨 날기도 하지요. 그러니 책 한 권을 통독하고 꼬랑지에서 감상 몇 줄 남기는 것은 ‘정리’라는 측면에서는 유용할지 모르나 그날 그날의 저 개인의 역사(나중에 스스로 읽어보면 말이죠..)에는 아무런 자취도 남기지 못하는 행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로 이 책 <<독서일기>>를 읽고 나니 이런 생각이 듭니다. 한 권의 독서 후에 한 편의 독서리뷰도 나쁘지 않고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이긴 하지만, 읽다가 그만뒀거나 미뤄둔 책. 책 한 권 전체로는 얘기할 게 없어서 건너뛰었지만 문장 하나가 맘에 들었다면 그거라도. 또는 오늘 내가 겪은 일을 설명해주고 위로해줄 수 있는 책을 찾아 일부만을 읽더라도 말이죠. 저의 삶과 함께 뛰어 놀고 웃고 울고 센티멘탈해지고.. 그런 것들을 포함한다면 책 읽는 도중이라도 아님 읽다가 던져 놓더라도 말이죠. 얘기할 것은 얘기하고 쓸 것은 쓰자. 맘을 그렇게 먹게 되었습니다. 망구엘의 <<독서일기>>는 딱 블로그에 적합한 글쓰기 형식을 보여줍니다. 개인적인 경험과 생각의 단편들. 개인의 취향과 사회적 역사적 맥락과의 적절한 균형감. 이런 분위기 때문인지 작가와 굉장히 친숙해진 느낌입니다. <<독서의 역사>>보다 저는 이 책이 더 좋네요. 망구엘의 책으로는요.
벤야민의 <<일방통행로>>에 담긴 내용. ‘책과 창녀는 무척 젊게 만들어 준다.’ 소설의 주인공인 노인네는 아흔 살 생일을 맞이하여 스스로에게 처녀를 선물하기를 결정했다. 한 번도 결혼한 적 없고 여자에게 화대를 주지 않고 관계를 맺은 적이 없었다는 노인네. 수백 수천의 창녀와 관계를 맺었다는 노인네. 수십 년 동안 일간지 등에 칼럼을 게재하고 책 읽기를 즐긴 인물. 이 노인네의 젊음(정력이라고 말해야 할지도) 유지 비결이 그럼 벤야민이 말했듯 책과 창녀? 그게 이 소설의 전부인가? 물론.. 아닌 것 같다. ~것 같다. 고 말하는 이유는 까짓 꺼 그런 내용이라고 생각하고 읽어도 전혀 지장이 없을 것이기 때문. 나는 이 소설을 ‘시간을 다시 흘려 보내기’에 대한 이야기로 보았다. 사랑 없이 섹스만 하고 집에서 책만 읽고 신문에 자질구레한 칼럼만 써 대는 바보가 구십 세를 살았다 한들 그 구십 년의 세월은 둑에 막혀 고인 웅덩이에 불과할 뿐이고 시냇물처럼 강물처럼 졸졸 콸콸 흐르는 시간은 아니라는 것. 즉 나이는 구십이지만 실은 사춘기 소년 정도에 불과한 것. 구십의 노인네에게 다가온 처녀(라기 보다는 소녀)와의 첫사랑은 따라서 제대로 시간을 다시 흘려 보내는 일. 즉 정상적(?) 늙음(또는 성장)이 시작됐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 하지만 의문점 하나. 그럼 그 구십 평생은 쓸모 없는 것이었는가? 어쩌면 이 노인네의 첫사랑 타령은 순 거짓부렁일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마치 전에 사랑했던 여자가 새로운 사랑 때문에 제쳐질 때, 남자들 흔히 하는 말이.. 너는 내 사랑이 아녔어. 새로운 사람이 진짜 내 사랑이야... 라고 말하는 것처럼. 아주 쉽게 역사를 왜곡하는 습관이 이 노인네에게서도 나타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떠나질 않는다 것. 즉.. 수백 수천의 창녀들 중 맘에 둔 여자는 하나도 없었어. 구십 평생 사랑은 이 처녀(라고 말하는 게 맞는 것이 이 소설에서 노인네와 소녀는 단 한마디의 말도 육체적 관계도 나누지 않는다)뿐. 이라는 말은.. 이거야 원. 이걸 믿어야 해? 말아야 해? 그러니까 나는 건강한 심장으로 백 살을 산 다음, 어느 날이건 행복한 고통 속에서 훌륭한 사랑을 느끼며 죽도록 선고 받았던 것이다. 라는 자기충족적 예언을 끝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는 점에서 나의 이런 의심은 더욱 굳어져 가고.. 마르케스. 이 양반.. 나이가 들어도 장난끼가 멈출 줄을 몰라… 위에.. 이렇게 썼는데 오늘 읽은 반 고흐의 편지엔 이런 문장이 있었다. ‘늙은 여자란 없다.’ (사랑하는 한 사랑 받는 한 늙은 여자는 없다는 말) 남자도 다를 바 없을 테니… 이대로라면 시간을 다시 흘려 보내기라는 내 말은 크게 곡해한 것이 된다. 이 말대로라면 이 노인네가 아흔에 사랑을 시작했으니 이제 늙지 않을 터이다. ^^ 뭐 어때. 어떻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