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 퀘스천 - 삶의 의미라는 커다란 물음 Meaning of Life 시리즈 1
줄리언 바지니 지음, 문은실.이윤 옮김 / 필로소픽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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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경험기계(매트릭스의 세계) 안에서 살 기회를 거부할 때 우리가 행복보다 우위에 놓는 것은 무엇일까? 내가 볼 때 가장 그럴듯한 답은 우리가 ‘진실성(authenticity)’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는 가치들을 소중히 여긴다는 사실이다. 라고 줄리언 바지니는 말한다.

그러면서도 ‘진실성’이 무조건 행복보다 더 나은 가치라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어쨌든 행복보다 더 중요한 가치를 부여하는 무엇이 있음을 입증한다고 하면서, ‘우리는 인생의 의미를 찾는 일이 그저 행복이 무엇인지, 어떻게 행복해질 것인지를 결정하는 문제라고 가정해서는 안 된다’ 라고 말한다.

의문. 과연 매트릭스에서 빨간 약과 파란 약 중에서 빨간 약을 선택한 것이 네오가 ‘진실성’이라는 가치를 더 소중히 여겨서였을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줄리언 바지니와 다른 생각을 했다. 진실성이라기 보다는 호기심. 즉 이미 경험했던 매트릭스 말고 다른 세계에 대한 욕망이 더 크지 않았을까?

줄리언 바지니는 이 책에서 신앙, 이타주의, 대의명분, 행복, 성공, 쾌락주의, 해탈, 허무주의. 이렇게 여덟 가지, 삶의 의미라는 질문에 자주 언급되는 것들에 대해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관점에서 각각의 가치들이 단 하나로는 인생의 의미가 될 수 없음을 차근차근 논박해 나간다. ‘진실성’이라는 가치를 언급하는 대목은 Happy를 논하는 챕터에서 다루고 있는데, 나의 의문은 이런 것이었다. 여덟 가지라고는 하지만 모두다 욕망 아닌가? 뭐야 뭐 하러 여덟 가지씩이나 들먹여가며 이렇게 길게 얘기한 거야 대체.. 이렇게 좀 투덜거리긴 했지만, 이 책. 보기 보다 엣지 있다. 읽는 맛이 난다. 기름기가 없고 겉멋이 느껴지지 않는다. 논리는 심플하고 명료하다. 때로 놓친 것들도 있는 것 같지만, 겸허하게 (때론 소심하게 느껴질 정도로) 그럴 수 있음을 인정한다.


<갈매기>는 희망 없이 끝나지 않는다. 포부가 넘치는 배우 니나는 극의 말미에 다가갈 무렵 말한다. “이제는 알아요. 마침내 이해하게 되었어요. 콘스탄틴, 우리에게는 말이예요, 글을 쓰든 연기를 하든지 간에 중요한 것은 내가 꿈꾸었던 명예와 영광이 아니예요. 중요한 건 견뎌내는 힘이예요.”

성공에 대해 논하는 챕터에서 바지니는 체호프의 소설 등장인물 니나를 예로 들며 ‘성공’이나 ‘명예’보다 더 중요한 ‘투쟁’을 말한다. 이때 좀 울컥했는데, 이렇게 동조할 수 밖에 없는 (즉 감동적인) 예시를 책에 사용하면 독자의 관심이 완전히 다른 데로 갈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예시로 이 책 보다는 체호프의 소설들이 더 눈에 아른거렸으니까… 어쨌든 성공도 삶의 의미라고 말하기엔 미진하다. 라고 저자는 말한다.


삶의 의미는 몇 가지 가치를 실로 엮어 내야 하는 것 같다. 줄리언 바지니의 결론처럼.
진실성, 견뎌내기(투쟁), 카르페 디엠.. 나도 이런 말들이 다른 것들 보다 더 많이 끌린다. 이 말들에는 윤석철의 <<삶의 정도>>에서 읽은 naked strength가 느껴진다. 몸으로 느끼는 전율 같은 거. 전적으로 부딪치는 것. 지금 후쿠시마 원전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이들에게서 느껴지는 것. 그런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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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모메 식당 디 아더스 The Others 7
무레 요코 지음, 권남희 옮김 / 푸른숲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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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어이없는 행복감.
축 늘어진 퇴근길에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 시작한 카모메 식당은 내 발걸음을 자연스럽게 동네 카페로 이끌었다. 이 기분. 행복감을 멈춤 없이 즐기고 싶은 마음. 사치에의 삶에 대한 태도. 그 태평스러움은 일본대지진과 리비아 사태, 손해보고 있는 주식과 직장에서의 스트레스, 그건 것들에 대한 나의 반응을 싹 쓸어버리고 있었다.


발목을 잡는 것들을 어떻게 요리해야 하나?
친한 여자 동료들이 작년부터 그 어느 때 보다 많이 해외를 들락거리고 있다. 그 친구들이 나더러, 밥 해줘야 할 사람이 없는 나 같은 솔로라면 편한 마음으로 그냥 쓩 언제라도 날아가겠다고 한다. 그래 도대체 내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정말 바보 같이 어느새 젖어버린 것 아닌가? 습관에 쩔은 것 아닌가? 긴 여행, 돌아오는 것을 기약하지 않는 여행을 가고 싶어.. 라는 말은 소망일뿐, 결국 지금 여기에서 할 수 있는 무언가를 나는 놓치고 보내 버리고 낭비하고 있는 것 아닌가? 사치에는 오랜 준비 끝에, 미도리와 마사코는 자신을 붙잡고 있는 것들이 느슨해 졌을 때 느닷없이 갑작스럽게 그냥 아무 뒷생각도 없이 일본을 떠나 아주 먼 곳. 핀란드로 날아왔다. 느닷없음과 태평스러움. 읽는 내내 행복했던 이유는 아마도 이 둘 때문이었을 것이다.


가족은 내가 원하는 관계가 아니다. 하지만, 가족 같은 관계는 진정으로 내게 필요하다.
결혼하고 아이 낳고 하는 가족. 거부감이 들지도 특별하게 애착이 가지도 않는 말. 가족. 이라는 말. 가만 생각해 보니 내게 필요한 것은 가족 같은 관계이지 가족은 아니다. 아무 관계도 없던 이들 세 명이 핀란드 헬싱키 카모메 식당에 모여 함께 일하고 생활하고 삶을 행복하게 향유할 수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비록 판타지라고 말할 수 있다 해도)을 보여 준다. 가슴 설레게 하는 것이 거기에 있다. 의지를 내세우지 않는 의지를 기반으로 한 친구 같은 가족 같은 관계. 수평적 관계. 그래서 언제라도 맘이 또 다른 데로 흘러가면 태평스럽게 그리로 또 떠날 수 있을 것 같은 관계. 카모메 식당은 그래서 열린 창문 같다. 산뜻한 바람이 불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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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집
김희경 지음,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 그림 / 창비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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킨들 가지고는 소용없을, 종이 페이지의 넘김으로만 느낄 수 있는 자잘한 재미를 주는 그림들이다.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의 그림은 쉽게 정이 안가고 조금은 딱딱하고 차갑고 무섭기까지 하지만, 페이지를 넘길 적마다 넘실거리는 그림들의 율동은 아.. 이 사람 그리 접근하기 까다로운 사람은 아닌 것 같아. 하는 생각을 품게 만든다. 김희경의 철학적 글과 100% 이상 매칭되면서, 마음은 ‘집’이라는 은유를 펼쳐 보인다. 
 


마음도 집처럼 결국 내 스타일대로 꾸려져 갈 것이라는 점에서, 좀 바꿔보고 다르게 활용해 보고 그러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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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성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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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예프스키의 <<분신>>은 뭉크의 <절규>와 어울릴 법한 소설이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불안과 분열을 형상화했다. 오르한 파묵은 <<하얀성>>에서 사랑을 이야기한다. 둘 다 도플갱어를 모티프로 했지만, 스펙트럼의 양 극단이랄 수 있는 이 차이가 파묵만의 차별성이라는 생각을 했다. <<분신>>은 사회 안에서 존재하는 ‘개인’을 말하고 있지만, <<하얀성>>은 개인뿐 아니라 거대한 ‘문화권’ 간의 경쟁과 혼합을 이야기 한다는 점도 다르다.

<<하얀성>>은 파묵의 다른 소설, <<검은 책>>과 <<내 이름은 빨강>>과도 또 느낌이 다르다. 훨씬 지적이다. 작품을 읽어나가다 보면 좌뇌가 우뇌 보다 훨씬 많이 자극 받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검은 책>>을 읽었을 때는 내내 이스탄불의 골목골목을 헤매는 기분이었다. 다리가 피곤할 만큼 많이 걸은 느낌. <<내 이름은 빨강>>에서는 비스듬히 누워 다른 이의 이야기를 조금은 느긋한 기분으로 듣는 느낌이었다면, <<하얀 성>>은 도서관에서 맑은 정신으로 역사나 천문학 같은 그런 종류의 책을 읽는 기분이었다. 세가지 색깔 소설은 그 색깔의 다른 만큼 스타일도 달랐다. 눈에 띌 정도로.

일본에서 큰 지진이 일어났다. 생각해 보면 한국과 일본도 마치 이 소설에서 베네치아와 이스탄불마냥. 도플갱어를 이루고 있는 관계 같다. 인간애와 이웃에 대한 관심이 필요한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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렉싱턴의 유령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사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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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침묵>에서 ‘깊이’와 ‘얼굴’을 말하는 마지막 부분을 출근하는 지하철 안에서 읽어 내려갔다. 지하철 특유의 기계음과 서 있는 자리에서도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는 부산스런 주변 사람들이 점차 희미해져 갔다. ‘깊이를 이해 못하는 사람’과 ‘얼굴을 갖지 않은 사람’을 이야기하는 오자와의 말에 집중하니 나는 내가 아는 사람들 하나하나가 눈 앞에서 나타났다 빠르게 사라져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얘기는 내가 하고 싶은 얘기 같았다. 내가 아주 우연한 기회에 누군가에게 쏟아내고 싶어했던 언어다. 그것은 내 얘기였고 내가 세상에 대해 품고 있는 근본적인 적의를 나타내는 말이었다. 그토록 무서운 파괴력을 속으로 단단히 품고 있는 그 낱말들을 아침 4호선 한강 위 출근길에서 맞이한 나는 이 하루를 또 어떻게 견뎌야 할지 잠깐 동안 아득했다.

견딘다.  


이토록 무겁게 느껴지는 한 마디.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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