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열정 (무선) -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9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9
아니 에르노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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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의 무의미한 손짓 하나, 목소리 하나 까지 사랑스럽게 보인다. 다른 사람이었다면손을 내저었을 혐오스러운 모습에는 눈을 감고 모른척한다. 그가 곁에 없을 때는 온갖 불안과 망상으로 괴로워한다. 이런 감정을 이해 내지는 상상할 수 있다는 것이 축복일까, 저주일까. 사랑에 빠진 사람은 한없이 취약해진다. 한가지 위안은 지금의 고통 역시 사라질 거라는 것. 사랑이 언젠가 사라졌던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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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스로 되돌아가다
디디에 에리봉 지음, 이상길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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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김진영의 아도르노 강의집 <상처로 숨쉬는 법>(한겨레출판) 에는 같은 어항의 물고기는 같은 물을 먹게 되어 있다라는 문장이 나온다.(정확한 워딩은 아니다.) 비슷한 뜻으로 저자는 판결은 미리 내려져 있다라는 표현을 쓴다. 어항 속의 물이 만약 깨끗하지 않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저자가 노동계급 출신이면서도 줄곧 자신의 출신과 갈등하는 이유는 노동계급의 모습이 적어도 바람직하지 않다거나 제대로 이해받지 못했다는 판단이 있었을 것이다. 책의 전반부에서 저자가 겪고 묘사하는 노동계급의 삶은 계층상승의 가능성이 배제된 분할된 구역 안에서 제살깎아먹기를 하는 느낌이다. 주류가 가진 정상성의 규범을 지킬만한 자원이 없는 노동계급이 주로 느끼는 감정은 수치심이다. 한 여성학자가 글쓰기 수업에서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은 고통과 여유를 가진 중간계층이라고 말한 것이 기억난다. 고통만 가진 하류층은 글을 쓸 만큼 고민할 여유가 아예 없고, 고통이 없는 상류층은 글을 쓰기 위해 고민할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중간계층은 노동자를 어떻게 서술할 것인가? 바라보는 자와 바라보는 대상 사이의 간극은 불가피하게 오해와 갈등을 초래한다. 노동계급 역시 해방보다는 부르주와에 대한 선망과 질투를 가진 예비부르주와일 수 있고, 단일한 서사로 존재하지 않는다. 저자는 노동계급 출신으로 자신의 출신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노력하는 동시에, 사회적 위계질서와 맞서 싸우지만, 솔직한 자기성찰은 저자 역시 그 위계질서를 체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랭스로 돌아간저자는 자신의 정체성을 보듬어안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실은 품위없고, 무식하고, 지루한 자신의 뿌리를 스스로 혐오하고 있다는 것을 고백한다. 결국 노동계급 출신인 저자가 노동계급을 말할 때는 자기 자신과 대면해야 한다. 그리고, 이 작업은 지난한 자기성찰 과정을 예비한다. 저자는 아버지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된 자신의 멜랑콜리를 프로이트류의 정신분석학이나 심리학적 관점으로 보는 것을 철저히 배제하고, 구조적 관점에 천착한다. 그리고, 그 근거는 바로 자신의 삶이다. 게이인 저자는 성이라는 가장 사적인 영역도 공적인 규범의 산물이라고 성찰한다. 이 지점에서 약간..이라는 느낌도 든다. 모든 것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자는 게 아니다. 진실 여부를 떠나서 그래도 밟히는 지렁이도 꿈틀할 수 있다는 관점이 이탈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출발점을 만들어 내는 것 아닐까?

미리 수많은 가능성을 거세당한 채 구조적으로 결정된 삶을 사는 모습, 정상성의 규범아래 돌이킬 수 없는 오염된 정체성을 가지고 평생 멍에를 짊어지고 사는 삶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나는 이 책에 등장하는 노동자나 성소수자의 삶을 연민해야 하는가? 나는 노동자인가? 그렇다. 하지만, 모든 오해를 무릅쓰고 말한다면 이 책에 등장하는 노동자보다는 상위계층이라고 짐작한다.

저자가 완벽한 해방은 불가능하고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 것만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대목에서는 처연한 슬픔이 느껴진다. 과장하자면 삶이란 이런 것인가, 마치 내가 어쩔 수 없는 거대한 대양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느낌이다. 완벽한 불완전함, 이 책은 아마 그런 불완전함에 대한 고백일 것이다. 그런데, 저자도 지적했듯, “말한다는 것이 오히려 차별을 공고하게 할 수도 있지 않을까? 부르디외,푸코 등 관련한 배경지식이 필요하고 문장도 무거운 편이다. 휙휙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다.

 

PS. 68년 혁명 때 학생들의 행진을 보며 누군가 했다는 말: “집으로들 돌아가세요! 20년 뒤 당신들은 전부 공무원이 될 테니까

묘한 기시감이 든다. 기억나는 무라카미 류의 인터뷰 전공투는 한번도 진지한 적이 없었다그리고 아마도 하루키의 경험으로 짐작되는 <상실의 시대>의 미도리와 도시락 에피소드.. 


"그 때 생각했어. 이 자식들 모두 엉터리라고.적당히 그럴 듯한 말이나 늘어놓고 의기양양해하면서 신입생 여자에 눈길을 끌어서는 스커트 안에 손이나 집어넣을 생각밖에 안 해, 그 사람들. 그러다 4학년이 되면 머리를 짧게 깎고 미쓰비시 상사니 TBS니 IBM이니 후지은행이니 하는 좋은 기업에 들어가서는 마르크스 같은 거 읽어보지도 않은 귀여운 마누라를 얻어서 아이한테 폼나는 이름을 지어 주는 거야. 산학 협동 분쇄는 무슨. 너무 웃겨서 눈물이 날 지경이야. 다른 신입생들은 또 어떻고.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다 안다는 표정으로 실실 웃어. 그리고 나중에 내게 이렇게 말하지.너 바보네, 모르더라도 그냥 알았다고 예예, 하면 그만이라고. 있지, 더 열받는 얘기도 있는데,들어 볼래?"(P. 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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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kus Gabriel VS - 마르쿠스 가브리엘의 차이와 분열을 극복하는 철학, 서로 이해할 수 없는 사람과 살다
마르쿠스 가브리엘 지음, 오노 가즈모토 엮음, 쓰키타니 마키.노경아 옮김 / 사유와공감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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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뇌가 아니다>는 가독성이 있는 것 같으면서도 철학에 대한 배경지식이 있어야 소화할 수 있었던 책으로 기억한다. 그에 비해 일본의 저널리스트들과 줌회의끝에 탄생했다는 이 책은 예전 강신주의 <다상담> 같은 느낌이랄까, 저자의 철학적 식견을 가지고 현실적인 이슈에 관해 툭툭 잽을 날리는 느낌이다. 난민, 계급, 종교 등으로 극도로 분할된 이 세계에 타자와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 타자와 마주할 때 발생하는 차별의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저자는 인간에게 고정된 정체성은 없으며  우리는 모두 다른 존재인 동시에 꿀벌처럼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에 행복이란 '테니스같은 사회적 활동'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저자가 중요시하는 것은 대화다.(그것도 오감을 이용한 '대면 대화'다.) 아프간의 탈레반과는 어떻게 대화를 해야 할까? 먼저 필요한 태도는 '허용'과 '승인'이다.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는 사람과 즐겁고 생산적인 대화를 나누는 법>(위즈덤하우스)에서 저자 리 매킨타이어가 플랫어스주의자들과 대화하는 법은 인내심을 가지고 상대방을 존중하고, 경청하며 신뢰를 구축하는 것이다. 그리고,이 책에서 저자가 탈레반에게 던지는 질문은 이거다 "당신들은 자신이 옳다고 믿는다. 혹시 우리에게 가르쳐줄 것이 있는가?". 

타자에 대한 차별을 아우르는 것은 결국 정치의 영역이다. 귀의 길이를 아무도 신경쓰지 않듯 성별, 출신 등이 아무런 표지가 되지않는 단계까지 정치는 각자의 차이를 인식하고 보듬어야 한다. 

 <다상담>같은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연애와 자유 죽음 등을 다룬 후반부에 더 꽂힐 것이다.  자유란 '올바른 속박을 선택할 자유'이고, 연애를 하는 방법은 적당한 거리두기를 하고 타자와 끊임없이 교섭하는 것이다. 저자는 맥빠지게도 사랑에는 지혜와 수련이 필요하며, 이게 첫사랑이 빨리 끝나는 이유라고 말한다. '(자신에게) 실제 상처를 주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라는 문장은 불교의 '상카라'를 떠올리게 한다. 도덕에 관한 관점도 눈에 띈다. 저자는 도덕이 타자와의 관계 뿐만 아니라 자신과의 관계와도 관련있다고 한다. 타인에 대한 의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의무도 있는 것이다. 이 책도 전작의 세계관이 이어지고 문장하나하나에 배경지식이 깔려 있지만, 그렇게 심하지는 않다. 와닿지 않는 문장은 대충 스킵해도 핵심을 놓쳤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 편하면서도 시사점을 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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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폭력 - 전족의 은밀한 역사
도러시 고 지음, 최수경 옮김 / 글항아리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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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족을 중심으로 한 프레스코벽화라고나 할까. 전족에 관해서 이런거 까지 내가 알 필요는 없는데 하는 부분도 있다. 사실 한국인인 나에게는 전족이라는 것이 낯선 소재이지만, 중국인들에게도 전족의 기원을 가지고  15,16세기에서부터 갑론을박이 있었다고 한다. 저자는 전족이 사라지는 근대의 과정을 먼저 서술하는 일종의 도치법전략을 사용한다. 익히 예상할 수 있듯 조선의 경우처럼 서구의 근대화를 받아들인 민족주의자들이 여성을 억압하는 전근대적악습으로 반전족운동을 벌이기 시작하면서 전족은 사라졌다. 여기서 여성은 수동적인 피해자이거나 남성을 유혹하는 팜므파탈의 이미지로 그려졌다. 하지만, 역순으로 거슬러올라가 조망한 전족은 그 의미와 범위가 시대에 따라 변화해 왔고 단일한 스펙트럼으로 수렴되지 않는다. 이미 명나라 시대 정도에서 근대의 반전족주의자들이 말하는 논리가 있어왔고, 전족은 사회적 신분의 역할을 하며 여성들의 열광을 이끌어 내기도 했다. 저자는 "고통으로 파괴된 세계에서뿐만 아니라 계속되는 의미의 창조와 전개과정에서 여성의 능동성과 주체성을 탐색해 보고" 싶었다고 한다. 전족이라는 하나의 현상이  발생하고 전개되어 종교처럼 떠받아들여지기까지 하다가 소멸되는 과정을 음미할 수 있는 책이다. 비단 전족뿐이랴. 여성들이 전족에 열광하는 모습을 보면 뜬금없이 입시경쟁이 연상되기도 하고 지금의 성형수술 열풍이 떠오르기도 한다. 

설렁설렁 재미로만 읽기에는 무리인 책이다. 물론 설렁설렁 재미로라도 읽어서 저자가 말한 것 열 가지중 한두가지를 건진다고 해서 나쁜 독법은 아닐 것이다. 옛날기록들을 읽는 재미도 제법 있고, 비위가 약한 사람은 전족을 묘사하는 대목에서 칠판을 손톱으로 긁는 듯한 소름이 돋을 수도 있다. 가끔씩 내놓는 젠더문제에 대한 저자의 통찰도 눈에 띈다.


(p125) "이 우월감은 가족 시스템속에서 연장자인 그녀의 지위로부터 오는 것이었다. 가족의 안전망 밖에서 자신의 미모를 팔아 타인의 시선을 끌지 않을 수 없는 창부나 배우들과 달리 그녀는 아들을 낳고 시부모를 봉양하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안전과 권력을 획득했다.... 즉 지식여성과 전통여성이 각각 주체를 위치시키는데 있어서 드러난 괴리는 여성에게 성공의 길을 제공하는 두 가지 각기 다른 권위구조에서 기인했다. 이는 곧 신식학교와 구식 가정 사이의 충돌이었다. "


(p305) "우리가 근대 이후 강조해 온 '객체'와 '주체'의 차이는 너무나 이원론적이고 기계론적이라 이 여성과 응시자들 사이의 역동적 관계를 포착하지 못한다. 그녀의 대상화된 위치 속에서 여성은 모종의 주체성을 표현한다. '객체'의 위치에 알맞게 그녀는 내재적 아름다움과 민첩성을 지녔고 아울러 상대를 응시하고 자연스럽게 돌아보는 능력도 갖게 될 것이다."


(p383) 싸움에 더 많은 사람이 참여할 수록 경쟁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격렬해진다. 이러한 상황에 이르면 승리자와 패배자는 태어나는 것이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믿음이 사회에 퍼진다. 이런 운명론은 패배의 치욕을 완화해주고, 점점 황망해지는 제도의 명성을 유지하는 역할을 했다. 심지어 이런 믿음은 사람들이 더 많이 경쟁에 참여하도록 유도했다. 금련 숭배로 전족은 사실상 이미 종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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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는 사람과 즐겁고 생산적인 대화를 나누는 법 - 의심을 생산하는 시대에 살아남기 위한 철학적 대화 실험
리 매킨타이어 지음, 노윤기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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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기넘치는 한국판 제목만큼 책이 재미있지는 않다. 내용이 늘어지고 신념, 믿음 같은 추상적인 단어들이 대량으로 출몰하는 탓이다. (원제는 "과학부정론자들과 대화하는 법"이다. ) 읽다보면, 비단 과학부정론자 뿐만 아니라 정치적 당파와 관련해서도 시사점이 있을 것 같다. (태극기 부대 vs 촛불집회? 같은 느낌이다. )   일단 플랫어스주의자들에게 과학적 증거가 부족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과학적 증거가 아니라 그들의 믿음 내지 신념이 그들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저자는 정확한 사실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런 사실이 제시되는 사회적이고 감정적인 맥락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저자가 제시하는 방법은 끝까지 상대를 존중하고, 경청하면서 신뢰를 구축하고 참여하는 것이다. 


ps. 내용 중에 "황금쌀"을 언급하는 부분이 있다. 저자는 과학부정론의 하나로 GMO 반대론을 들고 있다.  GMO 로 탄생한 황금쌀은 -GMO가 위험ㅁ하다는 편견에 물든- 그린피스의 반대로 아프리카에서 도입이 중지되어 (저자의 주장대로라면) 많은 아사자를 만들어 냈다고 한다. 저자는 계속 "수십만명의 어린이가 굶어죽는 것을 보고만 있을 것인가?"라고 GMO반대론자를 압박한다. 나는 여기서 충돌을 느꼈다. 아프리카의 빈곤은 황금쌀부족이 아니라 남아도는 식량과 분배의 문제아니었던가?. 반다나 시바는 <누가 지구를 망치는가>(책과 함께) 황금쌀에 비판을 가한다. 이미 죽은 노벨상수상자의 서명을 도용해 과학적 증거를 위장하고, 빌게이츠가 이윤을 목적으로 산업농업을 인도에 퍼뜨리려 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과학적 태도를 가지고 미신과 싸워온 마이클 셔머같은 느낌의 사람인데 여기서 뜬금없이 많이 비약하자면 이데올로기로 부터 완벽히 자유로운 과학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혹시 "과학만능주의"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맥락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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