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스로 되돌아가다
디디에 에리봉 지음, 이상길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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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김진영의 아도르노 강의집 <상처로 숨쉬는 법>(한겨레출판) 에는 같은 어항의 물고기는 같은 물을 먹게 되어 있다라는 문장이 나온다.(정확한 워딩은 아니다.) 비슷한 뜻으로 저자는 판결은 미리 내려져 있다라는 표현을 쓴다. 어항 속의 물이 만약 깨끗하지 않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저자가 노동계급 출신이면서도 줄곧 자신의 출신과 갈등하는 이유는 노동계급의 모습이 적어도 바람직하지 않다거나 제대로 이해받지 못했다는 판단이 있었을 것이다. 책의 전반부에서 저자가 겪고 묘사하는 노동계급의 삶은 계층상승의 가능성이 배제된 분할된 구역 안에서 제살깎아먹기를 하는 느낌이다. 주류가 가진 정상성의 규범을 지킬만한 자원이 없는 노동계급이 주로 느끼는 감정은 수치심이다. 한 여성학자가 글쓰기 수업에서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은 고통과 여유를 가진 중간계층이라고 말한 것이 기억난다. 고통만 가진 하류층은 글을 쓸 만큼 고민할 여유가 아예 없고, 고통이 없는 상류층은 글을 쓰기 위해 고민할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중간계층은 노동자를 어떻게 서술할 것인가? 바라보는 자와 바라보는 대상 사이의 간극은 불가피하게 오해와 갈등을 초래한다. 노동계급 역시 해방보다는 부르주와에 대한 선망과 질투를 가진 예비부르주와일 수 있고, 단일한 서사로 존재하지 않는다. 저자는 노동계급 출신으로 자신의 출신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노력하는 동시에, 사회적 위계질서와 맞서 싸우지만, 솔직한 자기성찰은 저자 역시 그 위계질서를 체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랭스로 돌아간저자는 자신의 정체성을 보듬어안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실은 품위없고, 무식하고, 지루한 자신의 뿌리를 스스로 혐오하고 있다는 것을 고백한다. 결국 노동계급 출신인 저자가 노동계급을 말할 때는 자기 자신과 대면해야 한다. 그리고, 이 작업은 지난한 자기성찰 과정을 예비한다. 저자는 아버지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된 자신의 멜랑콜리를 프로이트류의 정신분석학이나 심리학적 관점으로 보는 것을 철저히 배제하고, 구조적 관점에 천착한다. 그리고, 그 근거는 바로 자신의 삶이다. 게이인 저자는 성이라는 가장 사적인 영역도 공적인 규범의 산물이라고 성찰한다. 이 지점에서 약간..이라는 느낌도 든다. 모든 것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자는 게 아니다. 진실 여부를 떠나서 그래도 밟히는 지렁이도 꿈틀할 수 있다는 관점이 이탈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출발점을 만들어 내는 것 아닐까?

미리 수많은 가능성을 거세당한 채 구조적으로 결정된 삶을 사는 모습, 정상성의 규범아래 돌이킬 수 없는 오염된 정체성을 가지고 평생 멍에를 짊어지고 사는 삶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나는 이 책에 등장하는 노동자나 성소수자의 삶을 연민해야 하는가? 나는 노동자인가? 그렇다. 하지만, 모든 오해를 무릅쓰고 말한다면 이 책에 등장하는 노동자보다는 상위계층이라고 짐작한다.

저자가 완벽한 해방은 불가능하고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 것만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대목에서는 처연한 슬픔이 느껴진다. 과장하자면 삶이란 이런 것인가, 마치 내가 어쩔 수 없는 거대한 대양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느낌이다. 완벽한 불완전함, 이 책은 아마 그런 불완전함에 대한 고백일 것이다. 그런데, 저자도 지적했듯, “말한다는 것이 오히려 차별을 공고하게 할 수도 있지 않을까? 부르디외,푸코 등 관련한 배경지식이 필요하고 문장도 무거운 편이다. 휙휙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다.

 

PS. 68년 혁명 때 학생들의 행진을 보며 누군가 했다는 말: “집으로들 돌아가세요! 20년 뒤 당신들은 전부 공무원이 될 테니까

묘한 기시감이 든다. 기억나는 무라카미 류의 인터뷰 전공투는 한번도 진지한 적이 없었다그리고 아마도 하루키의 경험으로 짐작되는 <상실의 시대>의 미도리와 도시락 에피소드.. 


"그 때 생각했어. 이 자식들 모두 엉터리라고.적당히 그럴 듯한 말이나 늘어놓고 의기양양해하면서 신입생 여자에 눈길을 끌어서는 스커트 안에 손이나 집어넣을 생각밖에 안 해, 그 사람들. 그러다 4학년이 되면 머리를 짧게 깎고 미쓰비시 상사니 TBS니 IBM이니 후지은행이니 하는 좋은 기업에 들어가서는 마르크스 같은 거 읽어보지도 않은 귀여운 마누라를 얻어서 아이한테 폼나는 이름을 지어 주는 거야. 산학 협동 분쇄는 무슨. 너무 웃겨서 눈물이 날 지경이야. 다른 신입생들은 또 어떻고.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다 안다는 표정으로 실실 웃어. 그리고 나중에 내게 이렇게 말하지.너 바보네, 모르더라도 그냥 알았다고 예예, 하면 그만이라고. 있지, 더 열받는 얘기도 있는데,들어 볼래?"(P. 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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