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가명 > 인공의 생태계는 언제 끝장이 날까?

기후위기의 시대 가짜엘리트의 시대다 초등학생 자기 딸 검사 시킨다고-마치 지금 검사가 된 것 마냥 자랑스럽게 말하던 그 아조씨는 지금 어떤 기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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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트 카우>는 느린 미니멀리즘 연출로 미국 독립영화를 대표하는 감독 중 하나인 켈리 라이카트가 우정을 주제로 연출한 서부극이다. “새에게는 둥지, 거미에게는 거미줄, 인간에게는 우정이라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지옥의 격언으로 시작한 영화는 강변에서 산책하던 한 여성이 파묻혀 있는 두 구의 유골을 우연히 발견하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이후 영화는 갑자기 서부 개척 시대로 소급하여 그 유골에 얽힌 사연을 시간순으로 보여준다. 떠돌이 노동자 쿠키킹 루를 중심으로 진행되던 이야기는 등장인물이 영화의 도입부에서 유골이 놓인 자세로 눕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영화의 초입 부분과 수미상관의 구조를 이루며 끝난다. 블레이크의 격언과 두 명의 주인공이 등장하는 순간부터 관객은 이 영화의 방향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영화는 그들의 우정을 극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그런데도 주인공들의 죽음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는 마지막 장면은 관객에게 잔잔하지만 오랜 여운을 남긴다. 감독은 우정이라는 주제를 위해 왜 때깔이 좋지 않은서부 개척 시대 떠돌이 노동자들을 선택했을까? 그들의 죽음을 생략한 갑작스러운 마무리는 어떻게 관객에게 충격을 주는 것일까?

무의미에 의미는 있는가?

감동과 의미는 일관된 거대 서사나(외계인과 의기투합해서 우주를 구한다) 합리적 결론(나무에 노란 손수건을 달아 사랑을 확인한다)에서만 도출되는 것일까? 무엇인가가 한 때 단지 존재했다는 이유만으로 의미와 감동을 줄 수 있을까? 오히려 존재하는 것이 무의미하기 때문에 주는 의미라는 게 있을까? 예를 들어 <미술관 옆 동물원>(이정향, 1998)에서 결혼식장 촬영기사인 춘희(심은하 분)가 손홍민의 찰칵자세를 하면서 이렇게 해서 바라보면 전부 의미가 있어 보여하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지겨운 일상의 공간도 프레임 안에 넣고 시선을 보내면 영화적 공간처럼 의미 있어 보인다는 것이다. 영화의 서사를 시간순으로 배치하지 않고 두 구의 유골이 산책하는 여성에 의해 우연히 발굴되는 설정으로 감독은 보이지 않던 것에 찰칵자세를 취한다. 침묵하던 이들은 목소리를 얻고 들어주는 이가 없었던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감독이 선택한 인물은 지옥의 격언에 어울리게 녹록지 않은 삶을 살고 있다. 일거리를 찾아 대륙을 방황하고(킹 루는 피라미드를 본 적도 있다고 한다.) 부모는 출생 이후 제대로 만난 적이 없다. 게다가 쿠키는 우유를 훔치면서 소를 다독이는 장면에서 보여주듯 생존이 먼저인 서부 개척 시대에 걸맞지 않게 부드럽고 섬세한 성격이다. 우연히 만난 두 사람은 떠돌이 생활을 청산하고 남쪽에서 여행자들을 위한 호텔을 운영하는 계획을 세운다. 이를 위해 요새를 관리하는 장군이 소유한 소의 우유를 훔쳐 쿠키를 만들어 팔다 뜻밖의 대박을 터트리며 소의 주인인 장군에게까지 쿠키를 팔게 된다. 요새에는 소가 단 한 마리(퍼스트 카우)였기 때문에 우유를 훔쳤다는 사실이 들통날 수 있었으나 새로운 미래를 꿈꾸는 이들은 계속 절도 행각을 하다 장군에게 발각되고 추격을 피해 도망치게 된다. 감독은 4:3의 화면비로 두 주인공에게 시선을 모은다. 그들이 남루한 삶을 사는 만큼 화면을 채우는 것은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카메라는 끈기 있고 진지하게 이들의 행동을 바라본다. 그 진지함이 등장인물의 죽음이라는 결말과 함께 이들이 실존했다라는 느낌과 그리고 영원히 상실되었다라는 느낌을 준다. 카메라가 이들에게만 진지한 게 아니다. 이들이 쿠키를 팔고 요새 안을 지날 때 카메라는 서사와는 전혀 상관없는 인물들과 행동들을 차례로 보여준다. 이때 단 몇 개의 동작으로 이루어진 이들의 행동은 이야기와는 무관해 보인다. 하지만 카메라는 단순히 영화의 리얼리티를 보여준다는 목적 외에도 이들을 그 자리에 원래 있었던 것처럼 대하며 그들만의 시간과 서사를 상상하게 한다. 만약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감동을 준다면 그것은 단순히 이들의 우정 때문만은 아니다. 겉보기에는 이들 우정의 깊이를 가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보통 우정을 강조하기 위해선 우정 앞에 먼저 시련이 닥쳐야 하고 그 시련을 우정이 극적으로 극복하는 서사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은 추격을 피해 도망치던 두 명이 재회하며 반가워하는, 과장 없이 연출된 장면이다. 만약 그들이 도주에 성공했다면, 호텔 운영에 성공했다면 둘의 우정이 언제까지 유지됐을까? 영화 초반 쿠키는 식량 부족 때문에 동료들에게서 구박받는 상황에서도 킹 루를 몰래 도와준다. 하지만 그 장면을 동료에게 들켰더라면 무리에서 서열이 낮아 보이는 쿠키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쿠키가 추격을 피해 도주하다 킹 루를 찾은 것이 우정 때문이었을까? 숨겨놓은 돈 때문이었을까? 관객들이 답을 찾기 전에 이들의 삶은 너무나 급작스럽게 끝나버린다.

 

단편적인 것에 시선을

 

그렇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숨겨 놓지 않았지만,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서사는 아름답다. 철저하게 세속적이고, 철저하게 고독하며, 철저하게 방대한 훌륭한 서사는 하나하나의 서사가 무의미함으로써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다. ” (기시 마사히코 ,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 중)

 

우리가 추억을 담은 사진을 찍고 그 사진을 보며 회한에 젖는 것은 그 순간의 유일무이성과 상실감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이 영화는 그런 일회성과 유일무이성이 남루하고 단편적인 삶의 순간조차 감동적으로 만든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들이 자신들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죽는 것을 암시하는 장면으로 이 서사는 하나의 완결된 우주가 되고 한 때 존재했지만 영원히 더는 없는 것이 되어 버린다. 도리어 이들의 삶이 초라했기 때문에 이들이 존재했다는 사실이 도드라져 보인다. 이들의 우정은 아직 증명되지 않았지만, 도망치다 재회한 이들이 서로 반가워하는 장면은 더없이 안온하고 부드럽다. “자네가 떠난 줄 알았어라고 말하며 서로를 얼싸안는 장면은 평생 떠돌이로 살았던 그들의 삶과 겹치며, 그 순간만큼은 그들이 서로에게서 안식처를 찾았음을 보여준다. 한때 그 순간이 존재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그들이 삶이 가치 있어 보이고, 다른 가치판단은 필요 없어 보이는 것이다. 영화는 구체적으로 보여주지 않지만, 그들은 그들의 삶처럼 어이없고 초라한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 킹 루는 곧 떠날 거야라고 말하며 쿠키의 옆에 눕지만, 관객은 그 말이 지켜지지 않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자신들의 운명을 알지 못하고 미래에 대한 기대를 품는 등장인물을 보며 관객은 그들을 더 깊이 연민하며 감정을 이입하게 된다.

 

무의미하기 때문에 더 아름답다.

곧 사라질 수밖에 없는 존재가 보여주는 감동이 있다. 그것은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존재가 곧 사라짐에도 불구하고 존재하며, 다시는 반복되지 않을 영원한 사라짐으로 향할 때 오는 감동이다. 그런데 역설적인 것은 이런 종류의 감동은 그것이 무의미하고 사소할수록 더 드러난다는 것이다. 피라미드나 외계인과 합심하여 우주를 구하는 이야기에는 자체 발광하는 의미와 영원의 아우라가 있다. (하지만 착시다. 진실은 피라미드나 우주도 결국엔 사라지는 덧없는 것이다) 반면 두 명의 떠돌이 노동자의 삶은 사소하고 무의미했기 때문에 그 사라짐은 관객을 직격한다. 감독은 구체적인 사라짐의 장면을 생략함으로써 더 효과적으로 그 충격을 전달한다. 관객이 등장인물의 죽음을 상상하며 그들의 삶을 적극적으로 완성하는 순간 그들의 실존에 더 근접하게 되는 것이다. <퍼스트 카우>보여주기의 예술인 영화에서 보여주지 않기라는 역설로 무의미의 역설을 전달하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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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가 드디어 피같은 내 돈 3천원까지 쓰게 만들며 기어이 이 영화를 보게 만들었다. 이게 대체 어떤 인물이기에 영화속 빌런 현실판 이란 말인가 하는 궁금증이 든 것이다.뭐 극영화니 신빙성이 있는지는 추가로 확인을 해야 하지만, 트럼프가 갑툭튀 괴물이 아니라 어떤 흐름 안에서 탄생한 인물이라는 설명은 상황을 납득하게 하는 알리바이가 된다. 트럼프를 만든게 로이 콘이라는 변호사라는 게 영화의 설명인데, 의외로 실존인물이고 이 사람 다큐도 볼 수 있다. 

 

첫째 공격,공격,공격해라.

 

둘째 진실을 부인해라

 

셋째 져도 이긴척 해라 

 

트럼프가 로이콘에게서 배운 원칙이다. 

 

트럼프타워나 코모도 호텔이 빈자를 위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부자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결국 부자들이 트럼프를 더 부자로 만든 것이다. 어찌보면 트럼프는 민주주의를 이용해서 고객의 범위를 평민으로 늘려서 장사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예전에는 판 대가가 돈이었다면 지금은 표로 바뀐 것이다. 영화가 만듦새가 떨어지지는 않지만, 엄청 재밌지는 않다. 그냥 트럼프 인생 서사를 차례로 늘어논 거라..

 

마지막 인터뷰 장면은 지금 상황이 너무 절묘하게 오버랩이 되어서 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트럼프 빨리 엿먹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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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당신보다 더 잘 안다 - 숲속 현자의 내맡김 수업
마이클 A. 싱어 지음, 이균형 옮김 / 라이팅하우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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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점은 추상적인 단어 때문에 약간의 인내가 필요하고, 차크라, 샥티 같은 용어가 등장해서 스켑틱한 사람들에게는 이야기를 듣기 전에 던져버릴 가능성이 있다는 점. 장점은 수행과 명상의 논리를 요즘 유행하는 ‘ABC’론처럼 간단하고 명쾌하게 설명해 준다는 것이다. 차크라와 샥티가 맘에 안 들면 그 부분만 제껴놔도 좋다. 나머지 논리만 해도 충분히 설득력이 있고 현실적이다. 다른 불교 명상가인 고엔카의 저서들에도 가장 중요한 개념이 아마 삼스카라, 상카라인데 외부의 감각의 좋고 나쁨에 집착해서 만들어지는 인간의 내면의 패턴이다. 이런 행동패턴 때문에 우리는 고통에 빠진다. 원하는 것은 이루어지지 않고 원하지 않는 것은 닥치는 게 세상만사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 논리에 인도 요가의 용어인 샥티같은 개념을 추가한다.(저자의 멘토는 암릿 데자이나 요가난다 같은 인도의 요기들이다.) 우리 같은 중생들의 피부에 와 닿게 현대물리학과 현대인의 일상생활을 인용하며 내려놓음을 하라고 가르친다. 외부의 현실은 수십억년의 더께를 가진 것이고 그것은 우리의 호오와는 상관없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오만하게 삶과 세상에 자신의 호오를 투사하며 자신의 호불호에 따라서 기뻐하거나 슬퍼한다. 우리는 대개 외부의 조건을 성취하면 행복하리라고 믿지만 저자는 그것은 부질없는 짓이고(외부의 조건은 항상 변하기 때문에) 조건없는 내면의 행복을 찾으라고 한다. 저자가 그리는 영혼의 지도가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개인적 인격, 자아라는 것은 삼스카라가 만들어낸 생각과 감정의 총체라는 것이다. 개인의 인격을 존중하는 서구적인 느낌이라면 이런 호불호나 감정을 소중하게 생각하여야 할 터인데 저자에게 이런 인격은 참나로 가는 길을 막는 장애물이다. 심지어 보통 긍정적인 의미로 쓰이는 '연애'조차 삼스카라 덩어리들의 충돌일 뿐이다.(삼스카라라는 단어가 와 닿지 않으면 '트라우마'라고 바꿔보자.) 하지만, 괸계를 포기할 필요는 없다. 삼스카라는 내면의 에너지인 삭티를 막는 장애물인데 우리가 내려놓음을 할수록 샥티의 에너지는 우리를 참나로 이끌어 우리는 조건없는 사랑과 평화,열정을 느낄 것이라는 게 저자의 구도다, 명상에 관심있는 사람이면 한 두 번 들어봤을 그저 지켜보기’, ‘내려놓음같은 키워드는 여전하다. 흔히 명상에 따라붙는 비판 중 하나가 명상한다고 세상이 바뀌냐? 일 텐데 저자는 삶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삶에 대한 개인적 반응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모든 호오를 포기하면 인생을 사는 목적이 뭔가? 하는 생각도 들 수 있는데 저자에게 인생의 목적자체가 삼스카라를 제거하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개인적인 삼스카라를 포기하면 조건없는 사랑과 열정, 창조성이 우리를 움직일 것이다. 사랑과 창조성의 특징이 자기를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랑과 창조성으로 지금 눈 앞의 순간을 받들어 봉사하는 것이 저자가 이상적으로 바라보는 삶의 표정이다. ‘깨달음 이후의 빨랫감때문에 고민할 필요는 없다는 이야기다. 고엔카의 위빠사나처럼 구체적인 매뉴얼이 안 나오는 것은 아쉬울 수 있다. 그래도 저자는 독자가 체감할 수 있게-스타워즈까지 패러디하면서- 여러 가지 표현으로 내려놓음지켜보기를 설명한다. 명상과 수행의 기본논리를 접하고 싶은 사람에게 권한다. 아 물론 이 책 읽는다고 해탈할 리는 없다. 나 같은 중생은 진짜 포기해야 돼? 다른 방법 없어요? 하는 아쉬움부터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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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린 호흡과 미니멀리즘적 연출이 특징인 슬로 시네마로 미국 독립영화의 대표하는 감독 중 하나인 켈리 라이카트는  서부 개척 시대 유랑 노동자들을 주인공으로 새로운 서부극을 연출한다. “새에게는 둥지, 거미에게는 거미줄, 인간에게는 우정”. 윌리엄 블레이크의 지옥의 격언으로 시작한 영화는 강변에서 산책하던 사람이 파묻혀 있는 두 구의 유골을 우연히 발견하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나란히 누운 자세로 발굴된 유골을 바라보는 사람의 의아한 표정에서 갑자기 영화는 1820년대의 서부 개척 시대로 소급하면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전개된다. 과연 이 두 구의 유골은 왜 강변에 나란히 누워 있는 것일까?

지옥의 인간이 살아남는 방법

일거리를 찾아 떠도는 따라지 인생쿠키틸리컴 요새로 일거리를 찾으러 가는 도중 킹 루라는 중국인을 도와주게 된다. ‘지옥의 격언처럼 이들의 삶은 녹록지 않다. 부족한 식량 때문에 쿠키는 시종 동료들에게 시달리고 킹 루는 우여곡절 끝에 러시아인을 죽이고 그 패거리들에게 쫓기고 있다. 쿠키는 동료들 몰래 킹 루에게 음식과 잠자리를 제공한다. 블레이크의 경구와 더불어 이 시점부터 영화의 콘셉트을 대충 짐작할 수 있다. 이후 틸리컴 요새에서 재회한 둘은 의기투합하여 요새를 지휘하는 장군이 소유한 젖소의 우유를 훔쳐 쿠키를 만들어 팔아 재미를 보다 주인인 장군에게까지 쿠키를 팔게 된다. 요새에는 젖소가 단 한 마리(퍼스트 카우)였기 때문에 우유를 훔쳤다는 사실이 들통날 수 있었으나 새로운 미래를 꿈꾸는 이들은 계속 절도 행각을 하다 장군에게 발각되고 추격을 피해 도망치게 된다. 영화는 이들이 도망 중 영화 초반 유골이 놓인 자세대로 쉬는 장면에서 갑자기 끝나며 이들의 꿈이 끝내 좌절됐음을 암시한다.

인간에게는 우정을,  단편적인 것에게 시선을

이들 우정의 특징은 그렇게 극적이지도, 증명되지도 않았다는 점이다. 이들의 우정은 흔히 우리가 칭송하는 우정일까? 엄밀히 말하면 쿠키는 우유를 훔쳤고 킹 루는 살인자 아닌가? 보통 엡스타인과 트럼프의 관계를 우정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과연 쿠키가 영화 초반 킹 루를 도와주는 장면을 들켰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영화 후반 둘이 같이 도망친 게 우정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나무에 숨겨둔 돈 때문이었을까? 아니, 이 영화 전체에서 우리가 영화관에서 기대하는 특별한 것이 없다. 영화는 시종일관 잔잔하고 영화 속 킹 루의 남루한 오두막처럼 사소한 행동들로 채워져 있다. 하지만, 이들이 프레임 안에 들어와 시선을 받는 순간 이들의 동작과 대화는 의미 있어 보인다.’ <미술관 옆 동물원>(이정향, 1998)에서 결혼식장 촬영기사인 춘희(심은하 분)가 손홍민의 찰칵포즈를 하면서 이렇게 해서 바라보면 전부 의미가 있어 보여하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지겨운 일상의 공간도 프레임 안에 넣고 보면 영화적 공간처럼 의미 있어 보인다는 것이다. 이 영화의 미덕이라면 단편적인 것’, 글자 그대로 이름 없이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아마도 평생 고된 삶을 보내다 오리건주 강변에서 어이없는 죽음을 맞이한 노동자 두 명에게 목소리를 입혀 주었다는 것일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킹 루는 곧 떠날 거야라고 말하며 쿠키의 옆에 눕지만, 그가 자신의 말을 지키지 못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관객은 그들을 연민의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 한없이 사소하지만 그렇기에 의미 있는 이야기를 영화는 보여준다,

 

유치원에 다닐 때 기묘한 버릇이 있었다. 길 위에 굴러다니는 무수한 돌멩이 가운데 아무것이나 적당히 주워 몇십 분 안 지그시 바라보는 버릇이었다. 이 드넓은 지구에서 순간에 장소에서 나에게 주어 올려진 .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음과 무의미함에 난 전율할 만큼 감동했다.

 

내 손바닥에 올려놓은 돌멩이는 그 하나하나가 둘도 없는, 세계에 하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세계에는 하나밖에 없는 것이 온 천지 길바닥에 무수히 굴러다니고 있다.” (기시 마사히코,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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