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가명 > 국립중앙도서관은 장정일씨를 싫어한다?

아주 옛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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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가명 > 니체와 겐지,그리고 조셉캠벨

아주아주 오랜 옛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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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신화를 읽는 시간 - 신화학의 거장 조지프 캠벨의 ‘인생과 신화’ 특강
조지프 캠벨 지음, 권영주 옮김 / 더퀘스트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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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 영성, 민담, 상징, 융심리학 같은 것에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는 푸짐한 밥상 같은 책이다. 캠벨이 한 대중강연록이기 때문에 내용이 알차면서도 지루하지 않다. 책장은 술술 넘어간다. 캠벨도 이제 약간 낡았다는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영웅신화만 해도 이제는 익숙하게 느껴진다.) 서양을 책임과 자유를 짊어진 개인으로, 동양을 자아가 삭제된 사회질서로 시종 설명하는데 너무 전형적이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서양에서는 개인을 고유의 현상으로 존중하며 일찍이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세상에 대한 특별한 선물로 보므로 개성을 억압하지 않고 길러주려 한다.” 는 문장은 전형적인 하루키 스타일’(<고양이를 버리다>,비채)이다. 키르티무카의 전설을 통해 삶의 잔인성을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투쟁과 살상을 긍정하는 캠벨 특유의 흥미로운 세계관도 다시 나온다. 캠벨은 이를 세상의 슬픔에 기쁜 마음으로 참여한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신화와 인생>,갈라파고스) 캠벨이 신화를 무의식과 상징이라는 도구로 설명하면서 융심리학과 연결된다. 재미있는 건 융의 개성화를 캠벨이 자아의 실현으로 설명하면서 서구 사이드에 위치시킨다는 것이다. 반면 김영은 <우파니샤드, 비밀의 서>에서 칼 융의 개성화를 자아를 극복한 참나의 실현과 연관지으며 동양 사이드에 놓는다. 같은 도구를 전혀 다르게 해석하는 것도 재밌다. 심지어 자아와 참나의 차이다.

과학의 시대에 이미 허구라고 드러난 신화(종교를 포함하여)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캠벨은 신화를 정신의 사실로 정의한다. 신화는 개인에게 의미와 정체성을 부여하는 신호의 집합체이다. 인간은 여타의 동물과 달리 하나의 주체로 활동하기 위해 오랜 준비기간이 필요한데 이 때 2의 자궁역할을 하는 것이 신화이다. 또한 신화는 일종의 게임규칙이다. 이런 게임규칙 때문에 인간은 정의되지 않은 공허라는 잠재력을 벗어나 자신의 제한된 삶을 실현시킬 수 있다. 이러한 신화와 리츄얼이 사라진 현대는 일종의 아노미상태다. 인간의 삶에는 환상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환상을 잃으면 믿고 의지할 확실한 대상과 도덕률도 같이 사라질 것이다.(21p) 지평이 사라진 시대에서-예를 들어 이제 우리는 중국을 더 이상 세계의 중심, 중화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제는 개인의 내면을 알게 해주는 신화를 찾아야 할 것이다. 하나의 문장에 많은 배경지식이 깔려 있기 때문에 한 번 읽고 넘길 책은 아니다. 재미있는 히스토리 채널 프로그램 보는 느낌이다. 통찰력이 담긴 계시적인 문장은 읽을수록 위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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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카를라 3부작 1
존 르카레 지음, 이종인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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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 옥스브리지가 등장하네 울나라 사법부같은 권력층도 이런 뉘앙스로 형성된 거겠지. 결국 사건을 해결하는 스마일리가 오쟁이진 남편에 안티마초 같은 이미지라는 것도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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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은 놀이공원과도 같다. 놀이기구처럼 삶을 이리저리 갈아타며 기쁨. 성냄. 슬픔. 즐거움 등을 두루 맛보는 장소다. 에고라는 아이가 성숙하여 유희가 시들해질 때까지 우리는 이 놀이터에 머문다. 힌두교에 따르면 언젠가는 모두가 으로 돌아간다.

회전목마처럼 돌아가는 윤회 속에서 저마다 놀이기구처럼 삶을 체험한다. 롤러코스터처럼 고정된 궤도(운명)를 도는 삶도, 운전대를 잡는 범퍼카처럼 나름의 자율성(의지)을 발휘하는 삶도 있다. 하지만 주어진 시간이 지나 음악이 멈출 때까지 모두가 기구() 안에 갇힌다. 주어진 조건을 벗어나는 방법은 자신이 기구에 종속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 알아채는 것(해탈)뿐이다. 기구에서 눈을 떼고 창(내면)을 바라보기만 하면 된다. 창밖에는 진짜 세상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물론 빙글빙글 돌아가는 탈것() 위에서 눈을 떼기란 쉽지 않다. 큰일이라도 난 듯이 울려대는 경보와 뭔가 잘못됐다는 듯 번쩍거리는 계기판…… 그래 봤자 놀이기구 아닌가. 

                                    < 우파니샤드-인도 비밀의 서>(김영, 씨아이알) 184p 


김영 선생님이 대안연에서 한 <바가바드 기타> 강의 중 (아트앤스터디에서 볼 수 있다.) 세상을 놀이공원에 비유한 적이 있다. 우리가 태어난 것은 놀이공원에 입장한 것과 같은 것인데, 놀이공원에서 놀아봐야 아무 쓸데 없으니 빨리 집에 가라는 게 불교의 가르침이라는 거다. 이 비유도 재미있었지만 마지막에 덧붙인 선생님 말씀도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표 사서 들어온 게 다 이유가 있는 거죠."

 

임사체험 후 영적 교사로 변신한 아니타 무르자니가 말하는 '자기사랑'을 처음 접했을 때 민망함과 낯간지러움이 느껴졌다. 아마 모든 사람들에게 자기혐오라는 감정은 어느 정도 있을 것이다. 조건부 사랑과 (마이클 싱어의 항복실험처럼) '내려놓음'을 말하는 기존의 영적 전통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에고까지 포함한 조건없는 자기 사랑을 적극적으로 설파하는 아니타 무르자니의 언설은 신선한 반전일 것이다, 하지만, ’자기 사랑이 갑자기 저자의 임사체험 결과로 튀어 나왔다고나 할까, 여전히 저자의 주장은 소화가 되지 않는 느낌이었다. 대안연에서 진행한 <우파니샤드>강의에 비춰보자 비로소 아니타의 주장이 입체적으로 느껴졌다. 앞서 인용한 김영 선생님의 '게임 세계관을 아니타 무르자니도 공유하기 때문이다. 아니타는 임사체험에서 자신의 본질이 만유,일자,순수의식,oneness 같은 것이라고 깨달았다고 한다. 그것은 완벽하고 조건없는 사랑이며 모든 것이 개체이면서도 연결되어 있어 동시에 하나인,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바깥이 없는 전체이다. (내 뇌피셜로는 애플티비의 <플루리부스>가 이 세계관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것은 선악과 같은 이원성을 초월한 것이며 하나의 완벽하고 거대한 태피스트리이다. 아니타는 임사체험에서 살아 돌아온 이유가 자신의 소명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한다. 만유,일자,무한한 자아가 스스로의 창조성을 표현하기 위해서, 순수 의식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인간 감정을 경험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나기로 선택한다는 것이다. 상식적인 표현으로는 개개인마다 천성이나 적성, 개성 같은 게 있다는 개념일 텐데, 아니타는 영혼의 의도, 목적이라는 말을 쓴다. 즉 우리 모두는 무한한 자아의 현현이며(우파니샤드 세계관에서는 아트만이라고 한다.) 무한한 자아가 자신을 표현하려는 시도라는 것이다. 기존의 수행전통에서는 낯선 "자기사랑은" 이 세계관에서는 적절하다. 무한한 자아가 현실세계에 태어나서 자신의 소명을 찾고, 자신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보살피고 격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에고는 자신의 본질이 신성이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여정에서 필요한 일종의 행동대장이다. 행동대장을 격려하고 응원해야 행동대장이 자신의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겠는가? 아니타도 '자기포기'를 마이클 싱어와는 다른 측면에서 이야기하긴 한다. 마이클 싱어가 글자 그대로 외부의 상황에 항복하는 "항복 실험"을 했다면, 아니타가 경구처럼 반복하는 "두려움 없이 자기 자신이 되세요"라는 말에서 '두려움 없이'라는 부분이 아니타 버전에서의 자기포기다. 어쩌면 마이클 싱어가 남자라는 것과 아니타 무르자니가 여자라는 차이점인지도 모르겠다. 여성이라는 포지션에서 강요되는 수동성, 억압, 차별이 탑재된 에고는 무한한 자아가 자신의 의도를 펼치는 것을 두려움에 사로잡혀 저항할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이 되라는 말은 자신의 본질이 신성이라는 것을, 순수의식-힌두식으로 표현하면 브라흐만-에 연결되라는 뜻이다. 자신이 장엄한 존재라는 것을 자각하고 영혼의 목적을 파악해 그것을 삶에서 실현시키는 것, 그 방법론이 아니타가 말하는 자기사랑인 것이다. 참고로 출간된 아니타 무르자니의 세 권의 책 중 저자가 말하는 자기사랑이라고 표현한 부분을 대충 정리해보면 아래와 같다.

 

    ① 인정욕구 버리기, 자신의 진실(이런게 있다면) 따르기

내 영혼을 보살피는 것, 내 욕구를 돌봐주는 것, 나를 소홀히 대하지 않고 친절하게 대하는 것

자신을 판단하지 않고 비난하지 않는 것

행동하기보다는(‘머리로 산다는 뉘앙스) ‘존재’(‘가슴으로 산다는 뉘앙스)할 것. 두려움이 아닌 열정으로 살 것

매순간 고양된 상태로 있는 것

자신의 개성을 존중하고 자신의 창조성을 표현하는 것. ‘생존모드’(두려움에 사로잡힌 이미지)를 피하는 것

내 느낌을 저항하지 않고 수용하는 것

스스로를 보살피고, 자신의 창조성을 표현하며, 자신의 장엄함을 확인하는 것

내면의 신비가를 믿는 것 (직관, 느낌을 믿을 것)

 

아니타가 얼마나 자기사랑을 강조하냐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등을 돌려도 자기 자신을 사랑하라고 말할 정도다. 아니타가 말하는 우리의 본질은 조건없는 사랑이고, 나는 존재하는 이유만으로도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 자신에 대한 일체의 무판단에서는 일말의 죄책감조차 들어설 여지가 없다. 내가 어떤 일을 했던, 그건 그 상황에서는 최선이었고, 설사 잘못된 일이었어도 그것은 당시의 무지 때문이어서 어쩔 수 없지만 그럼에도 완벽하다는 뉘앙스다. 여기에는 힌두교의 인드라망과 비슷한 아니타의 태피스트리세계관이 있다. 인드라의 궁궐을 덮고 있는 광대한 그물에는 코마다 보주가 달려 있는데, 각각의 구슬이 다른 구슬 전부를 비춘다고 한다. (인도 비밀의 서 우파니샤드, 152P) 각각의 구슬(개인)이 우주의 중심이고 구슬 하나에 생기는 일이 그물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셈이다. 반면 아니타는 임사체험 시 만유, oneness를 거대한 태피스트리로, 태피스트리를 이루는 각각의 실을 개개인으로 느꼈다고 한다. 각각의 실이, 즉 개개인의 행동이 전체 실을 건드려 태피스트리에 영향을 미치고, 그렇게 바뀐 태피스트리는 여전히 완벽하고 장엄하다. 마치 자동온도조절시스템 같은데 태피스트리의 실 하나가 어떤 행동을 하더라고 모든 실이 움직여서 최종적으론 똑같이 장엄하고 완벽한 모습으로 전체 태피스트리가 바뀐다는 것이다. 이원성의 세계인 현실은 고통과 슬픔이 넘쳐나지만 피안의 세계는 완벽하다는 비유다. 그리고 차안의 세계는 이러한 신성의 현현인 것이다. 때문에 아니타는 더 높은 관점에서 보면 현실은 완벽하다고 한다.(아니타의 두 번째 책 <나로 살아가는 기쁨>의 원제는 <WHAT IF THIS IS HEAVEN?> 이다.)


하지만, 이러한 극단적인 자기사랑은 외려 역효과를 낳지 않을까? 현실적인 관점에서 아니타의 주장에서 도움을 받는 사람은 소심한 I형일 것이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자마자 죄책감을 삭제하기 시작해 다시 우경화로 흐르는 전후 일본 사회같이 뻔뻔한 경우라면? 보통 수치심은 개인의 인격에 대한 비난인데 반해 죄책감은 특정행동에 대한 비난이라고 한다. 자기교정이라는 차원에서 볼 때 어느 정도의 죄책감은 필요하다는 것이 내가 아는 심리학계의 중론이다. 게다가 아니타는 자신의 본질이 완벽해서 이미 내가 되려고 하는 그것이고 이미 모든 것을 가졌기 때문에 그것을 허용하기만 하면 된다고 말한다. 때문에 자기계발을 부정하는 기이한 자기계발서가 탄생하게 된다. 자신이 완벽하다 보니 병에 걸렸을 때 치료방법 조차 내면의 신비가가 말하는 느낌대로 선택하라고 한다,(이 말 듣고 기겁을 하는 흰 가운을 입은 의사가 연상된다.) 아니타 무르자니가 신뢰하는 느낌직관이 실은 누적된 편견에서 나오는 반응일 수도 있지 않을까? 마치 흑백커플을 본 미국의 인종차별주의자가 반사적으로 경악하는 것처럼? “‘허용하기를 해도 원하는 것이 나에게 오지 않는다면 그것은 나에게 속한게 아니며 진실로 좋은 게 아니다”, 라는 빠져나가기는 점집에서도 써 먹는 방법이다. 아니타 무르자니의 무한대의 자기 사랑은 자칫 자신의 잘못과 나태함을 합리화하는 면죄부가 되지 않을까? 조건없는 자기사랑은 우리를 그냥 유아기로 퇴행시키는 것 아닐까? 아니타의 주장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종교를 믿을 것 같은 편안함을 느낄 수도 있다. 내가 실은 완벽하고, 세상에 태어난 신의 일부이고 내 뒤에 신이 있다는데! 이건 또다른 인민의 아편노릇을 하게 되지는 않을까? 김영 선생님의<인도 비밀의 서 우파니샤드>에 따르면 경전은 항상 인격이 없는 사람에게 가르침을 베풀지 말라고 경고한다고 한다. 아무한테나 진리를 스포하지 말라는 얘기다.

 

아니타 무르자니의 주장에 깔린 가장 근본적인 관건은 과연 나는 나를 신의 현현이라고 자각할 수 있겠는가? ” 이다. 크리스 나이바우어였던 것 같은데 카지노 주인의 딜레마에 관해서다. 카지노 주인은 카지노에서 절대 재밌게 놀 수가 없다, 당연히 돈을 따든 잃든, 자기 돈이 이 주머니에서 저 주머니로 옮겨가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이때 카지노 주인이 자기 카지노에서 재밌게 놀 수 있는 방법은? 그냥 자기가 카지노 주인이 아닌 척하면 된다. 정 뭣하면 빨간약 대신 파란약을 먹고 기억상실에 걸리면 된다. 과연 우리는 재밌게 놀고 싶어서 게임에 접속한, 자신이 누구인지 잊어버린 신의 아바타인가? <우파니샤드> 대안연 수업에서 김영 선생님의 첫 시간 첫마디는 이런 물음이었다. “여러분은 여러분을 신이라고 생각하시나요?”

 

ps. 스와미 비베카난다의 <마음의 요가>19세기 후반에 서구에서 우파니샤드 철학을 강의한 강연록이다. 저자는 이 쪽 세계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두 번 들어봤을 유명인이다. 아니타 무르자니의 임사체험을 처음 접했을 때도 이게 브라흐만과 아트만 비유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는데 이 책을 읽고 나면 힌두 철학과의 유사성에 놀라게 된다.( 결국 스켑틱들에게는 좋은 트집거리가 될 것이다. 아니타 무르자니는 <그리고 모든 것이 변했다>에서 자신이 성장하면서 베단타 철학을 공부했다고 서술했다) <마음의 요가>에서 줄창 강조하는 것도 세상은 무한한 일자의 현현이고 고통조차 신성하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모두에게서 신을 볼 수 있어야 한다. (투사라는 개념을 적용해서 심리학적 관점에서 이 주장을 분석하는 것도 재밌겠다.) 영혼 안에 자신의 가치와 가능성이 잠재적으로 내재해 있으며 겉으로 표현하기만 하면 되는 것인데 이를 막는 것이 악이고 이를 돕는 것이 선이라고 스와미 비베카난다는 말한다. 아니타 무르자니와 판박이 같은데 두려움없이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서 스와미 비베카난다가 말하는 방법은 자기사랑이 아니라 자의식을 여의는 것이다. “두려움은 오직 이기적인 자에게만 찾아들기 때문이다. 우리의 본성은 조그만 자아가 아니라 탄생도 죽음도 없는” “전능한 자다. 아니타 무르자니는 본인의 신성을 자각하라는 힌두 세계관을 진로 찾기자아찾기같은 속세 버전으로 바꾼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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