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의 오해 - 10판
키이쓰 E. 스타노비치 지음, 신현정 옮김 / 혜안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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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을 주제로 하는 책이지만 비판적 사고를 다루는 책으로 마이클 셔머류의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귀에 쏙쏙 들어올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하고 누군가가 자기를 규정해주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다. MBTI, 타로 같은게 유행하는 이유 아닐까. 하지만, 이 책에서 강조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한 방에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것이다. 과학이란 느린 발걸음으로 진실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향해 가설을 세우고 검증하고, 공개돼서 반박당하는 지난한 과정이라고 저자는 소개한다. 이런 방면의 책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익숙할 상관관계나 인과관계의 차이, 반증가능성, 수렴적 증거 같은 단어들이 등장하는데 저자가 아주 편하게 서술하기 때문에 팝콘 씹는 기분으로 가볍게 읽을 수 있다는 게 이 책의 장점이다. 반면 영성류서적을 좋아하는 사람은 환상이 깨지는 것 같아서 불편할 수 있다. 영성서적류는 흔히 증언서를 증거로 삼는데 이 책에서는 증언서의 신뢰도를 낮게 평가하기 때문이다. 저자의 태도가 확장된다면 기적은 없으니 발 밑이나 똑바로 쳐다 보라.” 정도의 세계관이 될 것이다. 현실적이고 나름 상당히 터프한 세계관이지만 동시에 지루하고 맥빠지게 하는 세계관이기도 하다. 프로이트가 검증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신화에 불과하다고 하는 대목도- 지금 라캉을 읽고 있는 나로서는- 인상적이다. (대안연에서 심리학을 강의하는 선생님은 프로이트가 시한이 다한 화석이지만 재평가 되는 면이 있다는 정도의 내용의 링크를 보내 주셨다. 내가 생각한 반론은 과학적 검증 모형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영역도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툴을 적용할 수 없다고 그런 대상을 아예 외면해 버리는 것은 또다른 퇴보 아닐까?(지금 방금 든 뇌피셜이다.) 어쨌든 비판사고기술과 더불어 현대 심리학의 분위기를 알 수 있다는 점(심리학의 분야가 상당히 광대하고 구분이 모호하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대안연 선생님의 인용은 심리학은 행정구역의 편의상 구분된 것이다.”)에서 ,그것도 엄청나게 쉽게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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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텍스트나 장면들, 순간들, 타인이 발신한 기호들을 완벽히 이해하는 것이 만만하지 않은 것 같다. 내가 지금까지 본 책들과 영화들, 나는 그것들을 정말로 제대로 본 것일까? 처음에 무심히 지나갔던 문장들, 장면들이 어떤 경험을 한 후에야 그 안에 얼마나 많은 의미가 꾹꾹 눌러 담겨있는지 알아차리게 되는 경우가 있다. 어떤 글을 읽을 때에는 거의 빙의 수준이 되어야 그 글을 이해할 수 있는 걸까. <바보의 벽>은 실제로 존재한다.

 

지금까지 <중경삼림>을 한 다섯 번쯤 봤는데 세 번째 봤을 때 겨우 이해한 장면이 있다. 깨발랄한 왕페이가 몰래 들어간 양조위의 집에서 걸려온 자동응답기를 조작하는 장면이다. 난 그 짧은 장면을 매번 아무 생각 없이 지나쳤었는데 세 번 봤을 때에야 그 장면이 왕페이가 양조위의 전애인이 보내온 재결합요구메시지를 삭제하는 장면이라는 알고 충격을 먹었다. <중경삼림>은 지극히 무해하고 상큼발랄한 영화가 아니라 스토킹 영화였던 것이다. 왕페이는 양조위의 인생에 애교정도로 봐 줄 수 있는 수준으로 잡입한 게 아니라 아예 양조위의 인생항로를 바꿔버렸다. 만약 남녀 주인공의 설정이 반대였다면 <캘리포니아 드리밍>에 마냥 흥겨워할 수 있을까?

 

갑자기 <중경삼림>이 생각난 이유는 어제 네 번째로 본 <밀레니엄 맘보> 때문이다. 이 영화가 4K리마스터링 된 후 개봉한 것을 계엄 덕분에 놓쳤다가 상영관을 겨우 찾았다. 청춘을 추념하는 기분으로 에무시네마에서 연거푸 두 번을 관람했다. 그런데 , 영화사의 명장면이라는 오프닝 신을 부릅뜨고 본 후 서기와 하오하오가 처음 등장하는 장면에서 또 ~’하는 경험을 했다. 생일파티에서 신나게 놀고 들어온 서기가 하오하오의 아파트에 들어서자 하오하오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서기의 윗도리를 벗기고 사랑의 동작을 한다. 그리고 서기에게 다리 벌려라고 말한 다음 서기의 하반신으로 향하는데 물론 예술영화 답게 그 앞은 탁자가 가리고 있다. 그런데, 이번에 보면서 깨달은 것은 이게 사랑의 동작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오하오는 서기의 윗도리를 벗기고 서기의 몸과 머리에 코를 갖다대는데 에로틱하게 보이지만 실은 이게 냄새를 맡는 행동이라는 것을 처음 알아차렸다. 탁자가 가린 하반신에서도 하오하오의 상체는 그 짓을 연상하기에는 너무 상체가 아래로 내려가 있다. 하오하오는 놀고 들어온 서기가 바람피우지 않았는지 딴 남자 냄새를 추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왜 서기가 짜증을 내는지도 이해가 간다. 사실 하오하오가 귀가한 서기의 냄새를 맡는 장면은 영화 중간에도 나오는데 갑자기 서기의 브래지어가 노출되어서인지(수십년전 내가 dvd로 볼 때 누나가 한말.“너 서기 브래지어 볼려구 그러는 거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다 알았다고 생각했는데 알지 못했던 것이 또 하나 드러난다. 두 번 봤을 때 알아차린 것도 있는데 잭 카오와 도즈가 처음 클럽신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제 네 번째로 보면서 마지막 홋카이도 신의 타임라인도 추측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서기가 입고 있는 코트를 통해서다.

 

알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점점 적어진다. 결국 더 섬세해 지고 집중할 수 밖에 없다. 문장 하나하나에, 장면 하나하나에 삶의 순간들 하나하나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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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재계 : 계속 변화해온 라캉의 개념.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그냥 프로이트의 이드,자아,초자아처럼 하나의 모델로 받아들이는 게 나을지도. 절대로 상징화 될 수 없는 것. 이것은 상징계의 결여를 의미하고 우리는 이 결여를 메꾸기 위해 대상 a를 가지고 환상을 만들어 낸다. 라캉에게 현실은 '실재'가 아니라 상징작용과 의미들로 구성된 것이다.

 

“‘환상가로지르기는 주체가 실재계의 외상을 주체화하는 것이다.... 주체는 외상적 사건을 받아들이고 그 주이상스에 책임을 진다.”(p141)

 

라캉의 모델은 무엇인가를 찾아 영겁을 떠도는 그리스 신화의 주인공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파랑새는 없다. 더 중요한 것은 애초에 파랑새를 잃어버린 적도 없다는 것이다. 영원한 허기에 시달리며 끝없이 대상 a’를 찾아 다니며 시련을 겪고 그것을 찾은 후에는 다시 실망하고 떠도는 인간 이미지... 하지만, 환상가로지르기는 오히려 주체로서 책임을 지는 것이라는 느낌이다. 당당한 시지포스의 느낌?...주이상스는 대상 a를 찾게 만드는 힘인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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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에게 무의식은 억압된 트라우마라기보다 상징계가 주체에게 미치는 효과에 따라 탄생하는 것이다. “나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 그것은 타자가 나의 생존에 절대적일 때의 생존방법이기도 하고, 언어라는 대타자를 애초에 내가 만들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가 타자의 언어와 욕망을 통해서 우리의 욕망을 말할 수 밖에 없는 이상 무의식은 타자의 담론이다.”(p112.)

 

나는 타자의 사랑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결여의 존재이고, 타자 역시 완전하지 않은 결여의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된다. 나는 타자가 나를 사랑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 타자가 원하리라 짐작되는 것을 내가 가지면 나를 사랑할 것이기에- 타자가 결여한 것을 원할 수 밖에 없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영원히 알 수 없다. 나는 대체물로만 만족해야 하고, 그러한 욕망을 가지는 순간 주체가 된다. 욕망하는 순간 상징계의 체계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된다.

 

내가 이해한 라캉의 주체는 존재하지 않는 파랑새를 찾아 영원히 떠도는 이미지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소소한 쾌락은 가지지만 영원히 결핍에 시달리는 존재, 물론 억지로 갖다 대기지만 부처의 삶은 둑카다.”라는 말이 떠오르지 않는가. 추가적인 질문은 충동”(drive)는 주체와 어떤 관계인 걸까. 상징계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주체의 논리를 세우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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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욕망이라는 하나의 기표를 아버지의 이름이라는 다른 기표로 치환하는 과정을 수반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초기의 치환행위를 통하여 의미작용의 과정이 시작되고 아이는 결여의 주체로서 상징계에 작업한다. 또한 이 때문에 라캉은 상징화 과정자체를 팔루스적이라고 묘사한다. 팔루스는 아버지의 이름을 통하여 무의식을 조직· 편성하는 중심적 기표로서 실행된다. 누구도 애초에 그것을 소유한 적이 없다는 전제 하에 팔루스는 근원적 상실 대상으로 간주된다.(p89)

 

내가 상실했다고 상상하는 것.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잃어버렸다고 상상하기 때문에 그것은 절대 채워질 수 없는 결핍이 된다. 그것을 받아들이면서(그것에 복종하면서) 나는 주체가 된다.

 선생님의 말: 라캉의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에서 남자는 아버지에게 복종하면서 쾌락을 얻는 대신에 자신의 일부를 희생한다. 반면 이런 과정이 없는 여자는 진정한 혁명이 가능하다.(아마도 남자는 시스템에 굴복하는 대신에 주체가 되고 쾌락을 얻는 반면에 여자는 아예 시스템 바깥에 있다는 뜻)

 

동시에 아버지는 법을 상징하지만, 자신은 법 바깥에 있기도 하다. 즉 아버지에 복종한다는 것은 법을 위반하는 욕망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법과 법을 위반하고자 하는 욕망은 죄의식을 불러일으키고 주체는 이것을 피할 수 없다. 법에 복종할 수록 죄의식은 더 증가하는 것이다. 



팔루스는 구체적으로 언어를 말하는 것일까?   
















ps "연애나 결혼관계는 단순히 당사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친구,친척 그리고 제도를 포함하는 전체 사회조직에 관계된다. 즉 개인적인 관계들이 남녀를 사회적인 의미들로 구성된 상징회로 안에 위치시키는 것이다." (p84)  


어째 이 문장이 쏠린다. 연애관계란 개인적 관계가 아니라 '기표'의 의무를 수행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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