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의 나침반 - 숭산 대선사의 가르침
숭산 지음, 현각 엮음, 허문명 옮김 / 김영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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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달라이라마, 팃낫한 등과 함께 4대생불로 추앙받았다는데 익숙치 않다. 내가 과문한 탓도 있지만 ‘또 우리만 몰랐네’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숭산스님이 해외에서 한 법문을 다시 번역한 책이다. 대중을 상대로 한 법문이니까 당연히 쉽고 재미있지만, 한 문장 한 문장이 쉽게 볼 게 아니다. 한 문장 뒤에 많은 배경지식과 수행경험이 깔려 있을 것이다. 소승불교, 대승불교, 선불교를 차례로 개관해서 입문서로 적당하다. 소승불교는 12연기를 근본으로 하기 때문에 시간적 개념이고 서구의 인식론이나 현상학을 떠올리게 한다. 나무가 존재하기 때문에 내가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보기 때문에 나무가 존재하는 것이다. 대승불교가 왜 나왔는지 대충 느낌이 온다. 소승불교는 출가자들을 위한 수행론 같은 성격이라 저변을 확대하려면 열반과 속세의 구분조차 ‘공’하다는 것을 강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바가와드 기타의 ‘행위의 요가’같은 느낌이랄까. 저자는 ‘공’이라는 공간적 개념으로 대승불교를 설명한다. 수행조차 분별심이 될 수 있으니 소승불교보다 더 근본적인 차원을 말하는 것 같기는 하다. 제일 눈에 띄는 부분은 선불교 부분이다. 제일 안드로메다같은 느낌인데, 모든 것에 불성이 있다는 언설이 있긴 하지만 만물이 일체라는 식의 주장은 우파니샤드의 범아일여를 떠올리게 한다. 불립문자를 강조하는 부분은 라캉의 실재계, 상징계, 외디푸스같은 정신분석 이론을 연상시키도 한다. 무문관 같은 공안은 상징계 안의 실재계를 드러내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름과 모양이란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놓은 것에 불과하다. ‘하늘‘도 만들고 ‘푸르다‘도 만들고 ‘나무‘도 만들고 ‘초록색‘도 만들고 ‘개‘도 만든다. 우리는 "하늘이 푸르다"고 하지만 미국 사람들은 "The sky is blue"라고 한다. 일본 사람들은 "소라와 아오이데스"라고 한다. 모두 다른 소리를 낸다.

그러므로 이름과 모양은 진리가 아니다. 실제로 없는, 가짜 생각이다. 당신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찾고 싶으면 원점으로 돌아와야 한다. 원점으로 돌아온다는 것은 만물이 우주처럼 맑은 지점을 의미한다. 마음이 우주처럼 맑으면 우주는 완벽히 하나가 된다. 분리도, 생각도, 주체도, 객체도 없다. 눈이 천천히 열리고, 귀가 천천히 열리고, 코가 열리고, 혀가 열리고, 몸이 열리고, 마음이 열린다. 맑게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지고, 생각할 수 있다.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맑다. 그러면 하늘과 하나가 된다. ‘하늘은 푸르다‘ 나무와 하나가 된다. ‘나무는 초록색이다‘ 개와 하나가 된다. ‘멍멍‘ 설탕과 하나가 된다. ‘달다‘ 그것을 표현하는 이름이 바로 진리이다.아주 단순하다. 진리란 모든 것이 너의 것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했다. 우리의 수행은 진실로 우리의 본성을 깨닫는 것을 의미하며, 우리의 옳은 방향,진리, 바른 삶을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우리 자신의 본래 생각이다. 그것은 바로 지금 우리 마음 안에 있다.

                                                                  (409P)

 


스님이 줄창 강조하는게 “나는 무엇인가”, “오직 모를 뿐”을 참구하라는 것이다. 아마 분별심을 없애라는 얘기 같은데 느낌이 잘 안 온다. 이런 게 수행의 차이일 것이다. 스님이 또 하나 강조하는 것은 ’실용‘이다. 깨달았으면 중생을 구제해야 한다. 쉽고 재밌어서 스님이 말하는 경지가 언어적으로는 이해하지만 가슴으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한 번 읽고 말 책은 아니다.

불교는 무신론인가? ‘불교무신론자’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불교는 회의주의와도 완벽히 결합할 수 있다고 본다. 설법 중에 자주는 아니지만 ‘단전’, ‘우주의 에너지’같은 단어들이 등장해서 ‘스켑틱’한 사람들의 입맛에는 거슬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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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괴로움과 깨달음 - 미처 몰랐던 불교, 알고 싶었던 붓다 ㅣ 종교문해력 총서 2
강성용 지음 / 불광출판사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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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 대해서 완전히 초짜라면 약간의 허들이 있고 ‘들은 풍월’이 있다면 재밌게 읽을 수 있다. ‘들은 풍월’의 정확한 의미를 짚어주기 때문이다. 사문유관이 구라라는 것은 전부터 알고 있었고 고타마 싯다르타가 왕자가 아니고 귀족 정도라는 것(지금이면 당대표 아들 정도 될까?), 고타마가 이름이 아니라 성이고 싯다르타도 후에 덧붙여 졌다는 것 등 어렴풋이 알던 것을 이 책을 읽으며 확실히 했다. 새로 알게된 것은 붓다를 출산한 어머니의 이름을 영원히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마야 부인'의 마야는 이름이 아니라 일종의 보통명사이다. 즉 '마야부인'은 '부인 부인'이라는 뜻에 가깝다. 아마 이 책에 나오는 방법론이 문헌학일 것이다. 산스크리트어의 어미 변화와 철자를 따져가며 문헌을 비교해서 붓다의 최초 육성을 더듬어 가는 작업인데 슬쩍 보기만 해도 갑갑하다. 맨 땅에 헤딩해가며 삽질해가는 작업이라는게 문외한인 내가 봐도 기겁할 거 같다. 정말 고맙게도 이 책은 그런 답답한 과정은 생략하고 학자들의 노고를 거친 결과물만 소개하고 있다. 책은 주로 초전법륜이나 중도 같은 붓다 최초의 가르침과 붓다 성도시 상황을 다루고 있다. 불교와 자이나교를 주로 언급하는데 마치 약간의 유전자 차이가 인간과 원숭이를 나누는 것처럼 약간이 차이가 불교와 자이나교를 구분하게 한다고 한다. 나는 전부터 팔정도가 의아했는데(‘바른 생계’에서 ‘바르다’는 게 대체 무슨 의미인가?) 팔정도가 최초에는 출가자들을 위한 계율이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바른 생계는 걸식을 의미하는 것이다. ‘바른 판단’은 ‘삶은 고해’라는 판단을 의미하며 출가자가 걸식하며 수행해서 결국 선정에 이르는 과정을 요약한 것이 팔정도인 것이다 .팔정도가 일반 재가자들로 확대된 것은 후기의 일이라고 한다. 12연기도 후대에 정립된 것이고 최초에는 3연기 내지는 8연기였다고 한다. 붓다가 과연 윤회를 말했을까? 스티븐 배철러같은 불교무신론자는 붓다가 윤회나 업을 비유적 의미에서 썼다는 쪽이지만(<어느 불교무신론자의 고백>) 이 책에 의하면 붓다는 의식의 미세입자가 윤회한다고 했다. 나는 빨리어 경전을 원시불교의 최초의 모습으로 신뢰했는데 이 책을 보면 그것도 약간 아닌 것 같다. 붓다가 쓴 언어는 인도 동북부의 마가디 방언인데 팔리어는 인도 서북권의 언어이고 경전이 쓰여진 것도 붓다 사후 100년 후라고 한다. 즉 팔리어 경전도 한 번 ‘필터링’된 경전인 것이다. 과연 붓다의 최초 육성에 다가갈 수 있을까? 저자는 그것은 불가능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부분은 캐치해낼 수 있다는 쪽이다. ‘정혜쌍수’라는 단어로 불교의 두가지 흐름을 짚어내는 부분도 인상적이다. 약간의 집중력은 필요하지만 읽고 나면 왠지 똑똑해진 것 같은 느낌을 주는 , 지적인 포만감을 가득 안겨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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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많음)



이 영화의 단점은 이미 주요장면이 유튜브 쇼츠로 펴져서 막상 본편을 봤을 때 감흥이 덜하다는 점이다. 아마 사전정보 없이 봤다면 충격은 훨씬 컸을 것이다. 거의없다와 이동진 리뷰를 봤는데 무난하고 정석적인 해석이었지만, 고양이를 언급하지 않는 것이 의아했다. 니키가 베어에게 죽은 고양이를 계속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니키가 주문에 빠진 뒤 첫마디가 “고양이가 죽었어”이다. 그리고, 베어 집에 들어온 후 처음 한 이상한 짓이 고양이 장례를 치른 것이다. 이후에도 고양이는 계속 등장하는데 한 밤의 침대장면에서 니키가 음산한 동작으로 꽃병을 들고 온 후 “샌디(고양이)거야”라고 말한다. 유튜브 쇼츠에 의하면 한 밤의 침대장면에서 니키의 움직임이 고양이의 움직임을 흉내 낸 거라고 한다. 그리고, 니키가 베어에게 이것봐, 하면서 과장된 미소를 짓는 장면이 있다. 눈을 일자로 가늘게 뜨고 입꼬리를 한껏 위로 올리며 웃는데 이 표정은 어째 웃는 고양이를 연상시킨다. 그렇게 보면 곧바로 니키가 바닥에 실례를 하는 장면은 키우던 반려동물이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는 것처럼 보여지고, 영화 초반 베어가 고양이가 죽은 바닥을 열나게 닦는 장면과 대응된다. 결정적으로 니키는 베어의 샌드위치에 죽은 고양이 다리를 끼워 놓는다. 그리고, 결말에서 베어가 고양이가 죽은 것과 같은 방법으로 죽는 것이다. 왜 자꾸 영화 초반 죽은 베어의 고양이가 등장할까? 단순히 충격적인 장면을 만들어내기 위한 소재가 부족했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지만 머리를 굴린 후 내린 결론은 혹시 베어가 고양이를 일부러 죽인 것 아닐까?... 하는 것이다. 영화 초반 베어의 고양이는 실수로 베어의 약을 먹고 죽은 것처럼 보인다. 이후 베어는 약뚜껑을 닫아서 벽장에 넣는다. 하지만, 고양이가 돌려서 닫는 약뚜껑을 스스로 열고 약을 먹을 확률이 얼마나 될까? 베어는 침대에 앉아 통곡하지만, 혹시 이건 일종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처분'아닐까? 이런 생각이 드는 이유는 영화에서 베어의 성격이 모순적, 내지는 기만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니키는 은연중에 이걸 알고 있지 않았을까. 베어는 니키가 프리키하게 변한 이후 니키를 걱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고객센터에 전화해 소원을 취소하려고 하고, 열렬한 사랑을 고백하는 니키에게 “지금 행복한 거 맞지?”하고 물으며 사랑의 진정성과 상대방의 안위를 걱정하는 것 같다.(베어가 니키를 진짜 사랑하는지에 대한 지표다.) 하지만, 비몽사몽간에 정신이 돌아온 니키가 “죽여달라”고 애원할 때 –고객센터에서 소름끼치는 니키의 비명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베어의 대답은 “내가 그렇게 싫어?”이다. 이 때 베어는 평범하고 소심한 찌질남이 아니고 잔인하다. 핑크핑크한 고백연습장면과는 달리 처음부터 베어가 니키를 진짜 사랑한게 아니었다는 게 드러나는 것이, 이동진이 지적한 것처럼 베어가 사랑을 고백하려는 상대에 대해 너무 모른다는 것이다. (사랑에 빠지면 그 사람의 손짓 하나, 한숨 하나에도 귀가 쫑긋해지는 법이다.) 초반에 알콩달콩하던 니키의 사랑이 광기로 변하는 것은 베어가 실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챘기 때문 아닐까. 오히려 베어는 글을 쓰려는 니키보다 음악을 하겠다는 새라와 쌓아온 과거와 공감대가 더 눈에 띈다. (베어는 니키와 기타를 치면서 논다. 베어가 광분하는 것은 새라가 죽은 다음이다.) 마지막에 베어는 자살하지만 니키를 위한 것이라기보다 아수라장에서 도피하는 것에 가깝다. 니키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스스로를 속인 것처럼 베어가 실은 고양이를 죽여놓고 잔인한 자신을 기만한 것 아닐까. 영화 초반 이언은 베어에게 고백연습을 시키며 타박을 놓는다. 하지만, 잔머리 굴리지 말고 그냥 그대로 밀어붙였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진짜 사랑으로 발전했거나 인생의 경험이 됐을 텐데....

사랑받는게 짜릿한 이유는 상대방이 나를 싫어할 자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랑하기 때문일 것이다. '상대방이 나를 싫어할 자유'를 거세한 베어의 소원은 과녁을 빗나간 일종의 마스터베이션이다. 리뷰도 그렇고 대체로 여론은 베어에게 비난의 화살이 쏠리는 것 같다. 베어를 위해 한 가지 변명을 하자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디 나바레티같은 여자에게) 사랑받고 싶다는 욕망은 뿌리깊은 것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이 영화의 흥행은 그런 판타지도 동시에 만족시켜주기 때문 아닐까. 뭐 나만 그런건가. <헤어질 결심> 보고는 탕웨이 같은 여자한테서 저 정도로 사랑받으면 기분이 어떨까 하고 생각했으니. 마지막으로 베어에게 주는 충고.

 

 

자신의 삶을 돌아볼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살고 싶다는 의지가 어디서 오는지 보는 것이다. 달리 말해, 왜 죽지 않고 고통의 세계에 몸을 더 맡기려 하는지 물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아니다.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내가 아끼고 돌볼 것이, 내가 없으면 삶이 더 힘들 무언가가, 한마디로 눈에 밟히는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사람이 아니어도 좋다. 먹이를 주어야 할 금붕어와 반려견이 눈에 밟혀야 한다.

혹은 햇볕의 방향에 따라 자리를 옮겨줘야 하는 화초가 마음에 들어와야 한다.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하는 것이 우리 삶의 의지에 있어 결정적이다. 배우자를 먼저 떠나보낸 할머니가 화초를 키우고, 텃밭을 일구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아낀다는 것은 무척 수고스러운 일이지만, 놀랍게도 바로 그것이 우리 삶을 묵직하게 만들어 우리로 하여금 옥상 난간 너머로 몸을 던지지 않게 만든다. 아껴야 할 것이 있고 사랑하는 것이 있다는 것은 이렇게 놀라운 힘을 발휘하는 법이다.


                          <한 공기의 사랑, 아낌의 인문학> 중 (강신주,EBS BOOKS)

 

 

 

서둘러 말하자면 이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은, 사랑받는 것은 감정이나 경험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랑하지 않고 사랑받는 것은 기껏해야 칭찬이나 편리함일 뿐이고, 종종 원치 않는 의무이며, 최악의 경우 부담이자 저주이다. 중요한 것은 사랑하는 것이고, 그 다음으로 사랑받는 것이 중요하다.


   < 사랑을 배울 수 있다면 - 사랑을 이해하는 철학적 가이드북>(로버트 솔로몬,이명호 옮김, 로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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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관계를 명료하게 구분하고, 사랑은 경험이고 관계는 (마음과 함께) 사랑이 발견하는 매개라고 주장하는 것은 중요하다.

사랑은 감정적 과정이다. 이 과정은 불확실한 사랑의 초창기의 특징을 이루는 광란과 절망으로 가득 찬 단계일 수도 있고, 함께 보낸 지 몇 년이 흐른 뒤 찾아오는 고요한 위안일 수도 있다. 관계는 객관적인 사실이다. 관계는 삶의 일상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삶(또는 삶의 일부)의 이점을 함께 누리는 사회적 배치이다.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사랑을 찾는다고 주장하는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는 관계를 찾고 있으며, 사랑과 함께 나타나는 감정적 트라우마로 인해 매우 불행하다. 나는 이런 사람들을 비하하기 위해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사랑할 능력이 없거나“ 기꺼이 "사랑하려고 하지 않는다"라고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진정으로 편안하고 유익한 관계를 원하며, 사랑을 미처 경험하지 못했으면서도 종종 꽤 만족하고 흥분을 즐기면서도 욕망에서 가정으로 곧장 옮겨간다. 이들은 사랑이 요구하는 자기 변형과 트라우마를 원하지 않으며, 간혹 연애에 필요한 자기성찰적 고민에도 관심이 없다. .......연애보다 극적인 측면은 부족하더라도 괜찮은 결혼생활이 연애보다 열등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연애 없는 섹스와 결혼은 생각하지도 말라고 배웠으며, 실제로 "의미 있는 관계"는 "사랑에 기초한 관계"를 가리킨다. 그러나 존중, 상호 존중, 즐거움, 동료애, 훌륭하고 멋진 섹스와 대화, 신뢰, 정직, 친밀감으로 가득 차 있지만 반드시 사랑에 기초한 관계가 아닐 수 있는 관계를 통해서도 우리는 완벽하게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다.

 

<사랑을 배울 수 있다면- 사랑을 이해하는 철학적 가이드북>(로버트 c. 솔로몬, 이명호 옮김, 오도스) P120~

 


멜은 얘기를 중단하고 술을 마셨다.

"당신들은 열여덟 달을 함께했고 서로 사랑하고 있지. 얼굴에 씌어 있어요. 사랑으로 광채가 나니까. 하지만 당신들은 서로 만나기 전에 각자 다른 사람을 사랑했어. 당신들은 우리처럼 전에 결혼을 한 적이 있지. 그리고 그전에도 다른 누군가를 사랑했을 수 있어. 테리와 나는 함께한 지 오 년이 되었고, 결혼한 지 사 년이 되었지. 그런데 끔찍한 건, 정말 끔찍한 건, 한편으로는 좋기도 한 건데, 우리를 구원할 어떤 은총이라고도 할 수 있는 건, 만약 우리 중 누군가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이런 말을 해서 미안해요-바로 내일 우리 중 누군가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 상대, 그러니까 다른 한쪽은 한동안 슬퍼하다가도 다시 기운을 차리고 곧 다른 누군가를 만나 다시 사랑을 하게 될 거라는 거야. 그러면 이 모든 게,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이 모든 사랑이 그냥 추억이 되겠지. 어쩌면 추억조차 되지 않을 수도 있어. 내 말이 틀렸나? 근거가 없나? 내 말이 틀렸다면 바로잡아봐. 난 알고 싶어. 내 말은, 난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거야. 그리고 나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먼저 인정하는 바일세."

"멜, 맙소사."

테리가 말했다. 그녀는 손을 뻗어 그의 손목을 잡았다.

"취해요. 여보? 취했어요?”

  

"나는 그의 입 구멍에 귀를 대곤 했어. 그는 사고 때문이 아니라 그녀를 눈 구멍을 통해 볼 수 없다는 사실때문에 절망했어. 그게 자기를 상심하게 한다고 했지. 상상할 수 있어? 그는 머리를 돌려 자기 마누라를 볼 수 없어서 마음이 아팠던 거야."

멜은 테이블 주위를 둘러보며 자신이 말하려는 것 때문에 고개를 내저었다.

"내 말은, 그 늙은이가 망할 놈의 마누라를 볼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죽어가고 있었다는 거야."

우리는 모두 멜을 바라보았다.

"내가 하는 말이 뭔지 알겠어?"

그가 말했다.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레이먼드 카버, 정영문 옮김.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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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예찬 ㅣ 프런티어21 14
알랭 바디우 지음, 조재룡 옮김 / 길(도서출판)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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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랑말랑한 제목과 달리 어렵다. 저자가 알랭 바디우라니 예상했어야 했나. 데이트앱 미틱에 대한 비판에서 시작하는 걸 보면 저자가 ‘구름위의 철학자’는 아닌 것 같다. 사랑에 대한 두 가지 시각을 말하는 부분도 상식적이다. 하나는 사랑이 성이라는 생리적 현상과 관련한 환상이라는 시각이고 다른 하나는 사랑을 종교적 차원으로 격상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대담 형식인 책의 내용이 쉬이 이해되지 않는다. 번역도 약간 어색한데 그것보다 원문 자체가 너무 고상해서 그런가. 저자는 사랑을 ‘둘이 되는 경험’이라고 한다. 아마 ‘정체성의 공유’같은 느낌일까. 둘이 융화되어 하나가 되는 게 아니다. 서로가 서로를 마주보며 벌이는 끝없이 운동같은 느낌이다.저자는 사랑은 재발명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 주장의 뉘앙스가 느껴질 거 같으면서도 책의 문장으로 정확히 이해할 수는 없다. 반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이렇게 고상하게 말하는게 꼭 철학인건지. 아마 저자의 기존의 철학개념에서 이 사랑관이 도출되어 나왔기 때문에 배경지식이 필요한 것 같다. 이 책에서 ‘안전한 사랑’을 말하는 데이트앱을 저자가 비판하는 이유는 사랑은 모험이자 시련이고 고통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데이트앱이 사랑을 제한된 쾌락으로 격하시켰다고 비판한다. ‘사랑에 관한 인문학적 성찰’에 관한 책을 몇권 읽어보니 공통점이 하나 있는데 사랑에서 떠올리는 행복 이미지와 달리 사랑은 고통이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사랑은 자신(약간 기름진 단어로 ‘에고’)을 변형시키고, 자신의 삶을 익숙하지 않게 바꾸기 때문이다. 이런 사랑관은 흡사 종교적인 해탈의 느낌이 든다. 그럼 왜 사랑을 해야 할까? 강신주라면 그것이 삶의 의미라고 말할테지만. 저자는 성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 같다. 성이 공허하기 때문에 우리는 젊을 때 그것을 반복한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으로 끝낸다. 그것으로 마무리하기에 성이란 에너지는 훨씬 더 강력하고 조명을 받아야 하는 것 아닐까. 뭐 한 번 도전해 본다는 생각으로 읽는다면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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