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텍스트나 장면들, 순간들, 타인이 발신한 기호들을 완벽히 이해하는 것이 만만하지 않은 것 같다. 내가 지금까지 본 책들과 영화들, 나는 그것들을 정말로 제대로 본 것일까? 처음에 무심히 지나갔던 문장들, 장면들이 어떤 경험을 한 후에야 그 안에 얼마나 많은 의미가 꾹꾹 눌러 담겨있는지 알아차리게 되는 경우가 있다. 어떤 글을 읽을 때에는 거의 빙의 수준이 되어야 그 글을 이해할 수 있는 걸까. <바보의 벽>은 실제로 존재한다.
지금까지 <중경삼림>을 한 다섯 번쯤 봤는데 세 번째 봤을 때 겨우 이해한 장면이 있다. 깨발랄한 왕페이가 몰래 들어간 양조위의 집에서 걸려온 자동응답기를 조작하는 장면이다. 난 그 짧은 장면을 매번 아무 생각 없이 지나쳤었는데 세 번 봤을 때에야 그 장면이 왕페이가 양조위의 전애인이 보내온 재결합요구메시지를 삭제하는 장면이라는 알고 충격을 먹었다. <중경삼림>은 지극히 무해하고 상큼발랄한 영화가 아니라 스토킹 영화였던 것이다. 왕페이는 양조위의 인생에 애교정도로 봐 줄 수 있는 수준으로 잡입한 게 아니라 아예 양조위의 인생항로를 바꿔버렸다. 만약 남녀 주인공의 설정이 반대였다면 <캘리포니아 드리밍>에 마냥 흥겨워할 수 있을까?
갑자기 <중경삼림>이 생각난 이유는 어제 네 번째로 본 <밀레니엄 맘보> 때문이다. 이 영화가 4K리마스터링 된 후 개봉한 것을 계엄 덕분에 놓쳤다가 상영관을 겨우 찾았다. 청춘을 추념하는 기분으로 에무시네마에서 연거푸 두 번을 관람했다. 그런데 , 영화사의 명장면이라는 오프닝 신을 부릅뜨고 본 후 서기와 하오하오가 처음 등장하는 장면에서 또 ‘아~’하는 경험을 했다. 생일파티에서 신나게 놀고 들어온 서기가 하오하오의 아파트에 들어서자 하오하오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서기의 윗도리를 벗기고 ‘사랑의 동작’을 한다. 그리고 서기에게 “다리 벌려”라고 말한 다음 서기의 하반신으로 향하는데 물론 예술영화 답게 그 앞은 탁자가 가리고 있다. 그런데, 이번에 보면서 깨달은 것은 이게 ‘사랑의 동작’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오하오는 서기의 윗도리를 벗기고 서기의 몸과 머리에 코를 갖다대는데 에로틱하게 보이지만 실은 이게 냄새를 맡는 행동이라는 것을 처음 알아차렸다. 탁자가 가린 하반신에서도 하오하오의 상체는 ‘그 짓’을 연상하기에는 너무 상체가 아래로 내려가 있다. 하오하오는 놀고 들어온 서기가 바람피우지 않았는지 딴 남자 냄새를 추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왜 서기가 짜증을 내는지도 이해가 간다. 사실 하오하오가 귀가한 서기의 냄새를 맡는 장면은 영화 중간에도 나오는데 갑자기 서기의 브래지어가 노출되어서인지(수십년전 내가 dvd로 볼 때 누나가 한말.“너 서기 브래지어 볼려구 그러는 거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다 알았다고 생각했는데 알지 못했던 것이 또 하나 드러난다. 두 번 봤을 때 알아차린 것도 있는데 잭 카오와 도즈가 처음 클럽신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제 네 번째로 보면서 마지막 홋카이도 신의 타임라인도 추측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서기가 입고 있는 코트를 통해서다.
알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점점 적어진다. 결국 더 섬세해 지고 집중할 수 밖에 없다. 문장 하나하나에, 장면 하나하나에 삶의 순간들 하나하나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