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란 무엇이 아닌가 - 불교를 둘러싼 23가지 오해와 답변 ㅣ 불교사상 시리즈 4
베르나르 포르 지음, 김수정 옮김 / 그린비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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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이라마로 상징되는 서구의 불교 붐 안에 있는 또 다른 오리엔탈리즘 비판이 이 책의 주제다. ‘붓다는 철학이지 종교가 아니다?’ , ‘불교는 자아의 존재를 부정한다?’ 등 서구인들이 가질법한 편견들을 비교적 짧은 호흡의 소주제로 차례차례 논파하는 형식으로, 불교에 관한 ‘알쓸신잡’을 늘리는데 도움이 되는 책이다. 책의 소주제를 통해 저자가 주로 비판하는 것은 불교를 마치 순수하고 이성적인, 정신적인 추구로만 보는 서구의 시각이다. 불교는 시대,장소,전파된 문화권에 따라 영향을 받으며 끊임없이 변화해 왔다.(p23) 토착문화와 결합한 불교는 ‘자비로운 해방’이라는 이름으로 폭력을 행사하기도 하고, 해탈 이전에 세속의 이익을 ‘방편’이라는 명목으로 추구하기도 했다. 불교는 철학적, 영적, 주술적 요소를 모두 가지고 있는데 서구는 주술적 요소를 삭제하고 붓다를 기독교와 대비되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자유사상가 정도로만 묘사한다, 하지만, 이런 접근은 불교가 가진 풍부한 생명력을 음미하지 못하게 하고 동시에 불교가 가진 여러 문제점을 가린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저자는 ‘주술적’이라는 단어를 폄하적 의미로 쓰지 않는다.) 불교가 이성적, 과학적 측면은 분명 있지만 그것은 수행론적 틀안에서라고 지적한다.(이게 아마 <불교무신론자의 고백>에서 스티븐 배철러가 결국 티벳 라마승에서 환속한 이유일 것이다.) 또 다른 서구의 편견은 불교를 ‘역사비평’적 방법으로 접근한다는 것이다. 역사비평은 종교를 창시한 개조를 실제 역사적 실재로 보고 실증하는 방법인데 기독교 관련해서는 바트 어만의 저작이 있다. (종교학자인 바트 어만은 결국 유신론자에서 불가지론자로 전향했다.) 이런 접근은 역사적 붓다에 근거한 상좌부불교만은 정통으로 올리고 다른 붓다들이 등장하는 대승불교는 판타지 정도로 취급하게 했다. 하지만, 이런 구분은 전통적인 불교도들에게는 무의미하다. 처음부터 불교는 서로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는 전통조차 상호보완하고 포용하는 방향으로 발전해 나갔다. 이런 의미에서 불교는 하나의 통일된 종교라기보다 여러 가지 별들이 모여있는 성운같은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런 경향은 불교가 유일신 전통이 아니고 불교 내에 하나의 중심적 권위가 없다는 것, 근기에 따라 다른 방법이 적용될 수 있다는 논리 등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불교에 대승과 소승,밀교 등 여러 전통이 있고 전부 위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간과하는 것이 이 책에 등장하는 주요 편견들의 원인같다. 소승의 붓다는 세상을 벗어나기 위한 고행으로 깡마른 모습이지만 대승의 포대화상은 세상에 대한 낙관으로 두툼한 베둘레햄을 자랑하는 것이다. 저자가 종교학자라 그런지 불교의 관점에 함몰되지 않는다는 게 장점이다. 저자의 박학다식 덕분에 가벼운 마음으로 대승,소승, 밀교 등 불교 전체를 개관할 수 있는 책이다. ‘서구의 독자들을 대상으로 했는데 한국독자들에게 어떻게 다가갈지 궁금하다’는게 한국어판 서문인데 읽고 나면 왠지 잘 알던 친구가 어느날 갑자기 정색을 하는 느낌이다. ‘우리 것’이라고 생각하는 불교를 우리는 얼마나 잘 알고 있을까? ‘전통적 불교’ 문화권에서 사는 독자로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도 있다. 저자가 불교를 후대에 형성된 것으로, 서구와의 접촉에서 근대화에 대한 반응으로, 심지어는 개신교의 영향을 받으며 성립되었다고 말하는 부분이다. 그럼 조선의 ‘숭유억불’정책은 뭡니까? 그건 불교가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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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불교는 어떠했을까
나카무라 하지메 지음, 원영 옮김 / 문예출판사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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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한 마음으로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 들은 풍월 늘리기에 적합하다. 주로 불교의 니힐리즘 측면이 부각된다. 한 가지 의문은 초기불교가 아트만을 인정했다고 서술하는 부분이다. 아트만의 유무는 지금도 힌두와 불교의 주요 대립항으로 알고 있다. 참고로 <붓다의 가르침과 팔정도>(월폴라 라훌라 지음, 전재성 옮김) 의 한 부분이다. 363) 주석에 등장하는 나카무라 하지메가 이 책의 저자다.

 

 

그러나 최근에 불교의 정신과는 아주 모순되게, 붓다의 가르침속으로 자아의 관념을 끌어들이려는 몇몇 학자들의 헛된 시도가 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363) 이들 학자들은 붓다의 가르침을 존중하고 찬양하고 숭앙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불교를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그들은 가장 명철하고 심오한 사상가라고 생각한 붓다가 그들이 바라마지 않았던 아트만, 곧 ‘자아‘의 존재를 부정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는 것이다.

 

 

363) 영국에는 Mrs. Rhys Davids와 같은 학자가 있다. 그녀의 Gotama the Man, Sakya orBuddhist Origins, A Manual of Buddhism, What was the Original Buddhism을 보라. 독일에서는 간트와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받았던 Georg Grimm과 같은 학자가 있다. 그의 Die Lehre des Buddha, die Religion des Vermunft, 1915를 보라. 일본에는 나까무라 하지메(中村元)와 같은 학자가 있다.

 

<붓다의 가르침과 팔정도>(월폴라 라훌라 지음, 전재성 옮김) 161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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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다가 웃었다

"부인이 요구하는 것은 남성이며,
마음을 쏟는 것은 장식품과 화장품이다.
부인이 의지하는 것은 자식이며,
집착하는 것은 남편을 독점하는 일이다.
궁극적 목표는 지배권이다" (《앙굿따라니까야> Ⅲ, p. 163). - P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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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불교는 어떠했을까
나카무라 하지메 지음, 원영 옮김 / 문예출판사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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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부처님과 악마의 대화 형식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악마가 말하기를) 인간의 수명은 길다. 훌륭한 사람은 그것을 괴로워하지 않는다. 젖을 먹고 배가 부른 아기처럼 행동하라. 지금은 죽음이 찾아오지 않는다.
(부처님이 말하기를) 인간의 수명은 짧다. 훌륭한 사람은 그것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머리카락에 불붙은 듯이 행동하라. 죽음이 오지않는 일은 없다"[《쌍윳따니까야》 IV, 1, 9(vol. I, p. 108)].

"(악마가 말하기를) 낮과 밤이 지나가는 일은 없다. 생명도 다하는 일이 없다. 수레바퀴가 굴대를 도는 것과 같이 인간의 수명도 돌고 돌아 - P96

다함이 없다.
(부처님이 말하기를) 낮과 밤은 지나가고, 생명도 다하고 만다. 작은냇물이 말라붙듯이 인간의 수명도 없어지고 만다" [쌍윳따니까야》Ⅳ.
1. 10(vol. I, p. 109)]. - P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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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의 나침반 - 숭산 대선사의 가르침
숭산 지음, 현각 엮음, 허문명 옮김 / 김영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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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달라이라마, 팃낫한 등과 함께 4대생불로 추앙받았다는데 익숙치 않다. 내가 과문한 탓도 있지만 ‘또 우리만 몰랐네’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숭산스님이 해외에서 한 법문을 다시 번역한 책이다. 대중을 상대로 한 법문이니까 당연히 쉽고 재미있지만, 한 문장 한 문장이 쉽게 볼 게 아니다. 한 문장 뒤에 많은 배경지식과 수행경험이 깔려 있을 것이다. 소승불교, 대승불교, 선불교를 차례로 개관해서 입문서로 적당하다. 소승불교는 12연기를 근본으로 하기 때문에 시간적 개념이고 서구의 인식론이나 현상학을 떠올리게 한다. 나무가 존재하기 때문에 내가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보기 때문에 나무가 존재하는 것이다. 대승불교가 왜 나왔는지 대충 느낌이 온다. 소승불교는 출가자들을 위한 수행론 같은 성격이라 저변을 확대하려면 열반과 속세의 구분조차 ‘공’하다는 것을 강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바가와드 기타의 ‘행위의 요가’같은 느낌이랄까. 저자는 ‘공’이라는 공간적 개념으로 대승불교를 설명한다. 수행조차 분별심이 될 수 있으니 소승불교보다 더 근본적인 차원을 말하는 것 같기는 하다. 제일 눈에 띄는 부분은 선불교 부분이다. 제일 안드로메다같은 느낌인데, 모든 것에 불성이 있다는 언설이 있긴 하지만 만물이 일체라는 식의 주장은 우파니샤드의 범아일여를 떠올리게 한다. 불립문자를 강조하는 부분은 라캉의 실재계, 상징계, 외디푸스같은 정신분석 이론을 연상시키도 한다. 무문관 같은 공안은 상징계 안의 실재계를 드러내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름과 모양이란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놓은 것에 불과하다. ‘하늘‘도 만들고 ‘푸르다‘도 만들고 ‘나무‘도 만들고 ‘초록색‘도 만들고 ‘개‘도 만든다. 우리는 "하늘이 푸르다"고 하지만 미국 사람들은 "The sky is blue"라고 한다. 일본 사람들은 "소라와 아오이데스"라고 한다. 모두 다른 소리를 낸다.

그러므로 이름과 모양은 진리가 아니다. 실제로 없는, 가짜 생각이다. 당신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찾고 싶으면 원점으로 돌아와야 한다. 원점으로 돌아온다는 것은 만물이 우주처럼 맑은 지점을 의미한다. 마음이 우주처럼 맑으면 우주는 완벽히 하나가 된다. 분리도, 생각도, 주체도, 객체도 없다. 눈이 천천히 열리고, 귀가 천천히 열리고, 코가 열리고, 혀가 열리고, 몸이 열리고, 마음이 열린다. 맑게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지고, 생각할 수 있다.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맑다. 그러면 하늘과 하나가 된다. ‘하늘은 푸르다‘ 나무와 하나가 된다. ‘나무는 초록색이다‘ 개와 하나가 된다. ‘멍멍‘ 설탕과 하나가 된다. ‘달다‘ 그것을 표현하는 이름이 바로 진리이다.아주 단순하다. 진리란 모든 것이 너의 것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했다. 우리의 수행은 진실로 우리의 본성을 깨닫는 것을 의미하며, 우리의 옳은 방향,진리, 바른 삶을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우리 자신의 본래 생각이다. 그것은 바로 지금 우리 마음 안에 있다.

                                                                  (409P)

 


스님이 줄창 강조하는게 “나는 무엇인가”, “오직 모를 뿐”을 참구하라는 것이다. 아마 분별심을 없애라는 얘기 같은데 느낌이 잘 안 온다. 이런 게 수행의 차이일 것이다. 스님이 또 하나 강조하는 것은 ’실용‘이다. 깨달았으면 중생을 구제해야 한다. 쉽고 재밌어서 스님이 말하는 경지가 언어적으로는 이해하지만 가슴으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한 번 읽고 말 책은 아니다.

불교는 무신론인가? ‘불교무신론자’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불교는 회의주의와도 완벽히 결합할 수 있다고 본다. 설법 중에 자주는 아니지만 ‘단전’, ‘우주의 에너지’같은 단어들이 등장해서 ‘스켑틱’한 사람들의 입맛에는 거슬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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