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이 나오기 전 주머니에 쏙 들어가는 노트북을 사용한 적이 있었다. 내가 얼리어답터 그런 건 아닌데 주위에서는 주머니에 들어가는 노트북을 사용하는 사람이 없어서 신기하게 보곤 했다. 노트북으로 이것저것 하려는 건 아니고 그저 워드 때문이었다. 글을 쓰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전에는 수첩을 들고 다니며 생각이 나면 무조건 메모를 했다. 길을 걷다가 요즘처럼 폰으로 메모를 하는 게 아니라 벽에 대고 수첩에 메모했다. 대출 회사에서 주는 메모지도 모아서 거기에 메모를 빽빽하게 했었다. 정말 활자 중독이었다. 글을 적는 사람은 알겠지만, 활자가 주는 편안함, 충만감 그런 게 있다. 글을 적고 있으면 행복한 거지. 그렇게 나를 거쳐 간 수첩이 수십 권이었다. 

그러다가 주머니에 들어가는 노트북을 사용했는데, 들고 다니면서 꺼내서 사용하는 데 문제는 없었지만 불편했다. 컴퓨터라 로그인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터치는 아닌데 옆의 검은 부분을 엄지로 이렇게 움직이면 마우스가 움직였다. 그러다가 스마트폰이 나왔다. 신세계였다. 무엇보다 메모장이라는, 나에게는 아주 마음에 드는 어플이 있었다. 스마트폰은 바로 켜졌다. 카페에서, 거리에서, 벤치에서 어디서든 메모를 할 수 있었다. 걷다가, 누워서, 영화를 보다가도 메모를 할 수 있다는 건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이전에는 책상과 불빛이 있어야만 글을 쓰는 게 가능했었는데 이제 그 무엇도 필요 없다. 

나에게는 블랙베리도 있었는데 오직 글 때문에 구입했었다. 블랙베리는 자판이 있어서 손에 익으면 폰을 쳐다보지 않아도 메모를 할 수 있었다. 영화를 보면서도 떠오르는 글이 있다면 밑으로 내려서 화면을 보지 않고 자판을 꾹꾹 눌러서 글을 쓸 수 있었다. 정말 지치지 않고 매일 일정량의 글을 적었다. 지금도 지치지 않고 매일 메모를 하고, 소설을 쓰고, 글을 적고 있다. 지치지 않는다. 이 매력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그런데 석 달 동안 매일 글을 적는 게 힘들다. 윤석열이 때문에, 검사들 때문에, 지금은 헌제 때문에 힘들다. 어제는 검사들이 또 기각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제 좀 편안하게 글을 쓰고 싶다. 모든 신경이 헌제에 쏠려 있어서 이야기를 적다가도 나도 모르게 헌제 이 새끼들이, 같은 글을 적고 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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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반부로 갈수록 미래인도 나오고 초능력자도 등장한다. 하지만 그 능력이라는 게 대단한데 대단하지 않다. 무엇보다 이 세계에 인간이 가질 수 없는 능력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오직 자신뿐이어야 하는데 이상능력인들이 나타나자 꿍하다.

따지고 보면 세 능력자 중에 외계인의 피를 이어받은 타카하시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 배경에는 자신이 외계인이라고 발표했을 때에는 그다지 놀라지 않던 세 명의 소꿉친구들이 자신보다 낮은 레벨의 능력자들에게는 스고이 같은 반응이라 약간 삐진다.

미래인도 50년 후의 이 동네에 살던 무라카미가 한 터널을 통과해 보니 이곳으로 오게 된 것이고, 초능력인은 손을 대면 컴퓨터 데이터를 삭제되거나 전기를 끊는 정도다. 그러면서 호텔이 사라진다는 사실을 알고 지키기 위해 점점 많은 사람들이 어쩔 씨구리 타카하시의 비밀을 알아간다.

그 과정을 보는 게 재미있다. 능력자들의 능력보다는 모든 캐릭터들의 대화와 표정을 보는 게 너무 재미있다. 바카리즘의 드라마에 나오는 대부분의 배우들이 등장해서 더 재미있다. 일본의 잘 나가는 20대 초반의 배우들이 나오지 않는 게 신의 한 수라고 생각한다.

전부 중견배우들로 연기에 푹 빠질 수 있다. 이런저런 과정을 거쳐 계약서를 훔치기 위해 밤에 전부 모여 건물로 간다. 타카하시는 사람들의 응원 속에 건물 속으로 홀로 들어가고 그 모습을 본 후 사람들은 차 안에서 사 온 과자를 뜯으며 즐겁게 나눠 먹는다. 웃기고 너무 재미있다.

호텔이 없어져도 다른 사람들은 호텔 사장이 가지고 있는 리조트에 재취업으로 아무렇지 않은데 타카하시는 목욕을 하지 않으면 능력 사용 후 몸의 회생불가 때문에 모두가 계약서를 훔치는 것에 동참한다.

암튼 재미있다. 와하하 하는 웃음은 아닌데 큭큭하며 웃음이 피식피식 나오는 그런 시리즈다. 요즘은 드라마가 다들 재미있네. 협상의 기술도 그렇고, 리처도 그렇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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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여행을 떠나고자 하는 이유는 다시 집으로 돌아오기 위함일지도 모른다. 집이라는 건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장소이기에 나만의 방법으로, 나만이 쉴 수 있는 공간이다. 그러나 집에 머물러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 집에서 벗어나고 싶은 게 또 인간이다. 인간이란 그래서 참 알 수 없다. 집에 십일만 있으라고 하면 지겹고 심심하기만 하다. 좀이 쑤셔 미칠 것만 같다. 아무리 집이 좋아도 이건 정말 아니다 싶다.


집이란 악착같이 들어가고 싶은 곳인 동시에 어떻게든 떠나고 싶은 곳이기도 한, 세상에서 가장 아이러니한 장소다. 어떤 사람들은 그래서 어딘가 여행을 갈 때는 집으로 간다. 여기서 말하는 집이란 도착지의 숙소가 자신이 지내는 집에 가까운 형태를 띤 장소를 말한다. 호텔이나 모텔 같은 박스형 숙소에서 벗어난 곳을 찾아서 간다. 내가 지내는 집처럼 생긴 구조물에서 숙박하려고 애를 쓴다. 여행하다 보면 집이 또 그리워지고 집으로 들어오는 그 순간의 느낌과 기분을 우리는 알고 있다. 집이란 그런 곳이다.


집은 이 세상에서 가장 기묘한 장소라 사람의 손때가 타고 들숨과 날숨이 오고 가야 깨끗하게 유지가 된다. 며칠 비워두고 여행을 다녀오면 먼지가 쌓이고, 한 달 이상 비워두면 퀴퀴한 냄새가 나고 곰팡이가 피기도 한다. 형태를 가진 어떤 물품이든 가만두면 더 오래가고 깨끗한데 집은 그 반대다.


집이란 무엇일까. 집은 우리에게 너무 힘들면 요만큼 기운을 내봐,라고 한다. 절대 이만큼 힘내라고 하지 않는다. 그리고 들어오면 수고했다며 편하게 잠들라고 한다. 나에게 집은 그런 의미다. 집은 내 아버지의 등이자 엄마의 품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이가 되면 비록 떠나야 하지만 돌아오면 좋은 느낌이 집이다.

멍하게 있는 걸 좋아하는 난 (오래된 집 의) 벽 뷰 또한 좋아한다. 눈앞에 벽이 있으면 앞이 꽉 막혀 답답하다고 하는데 나는 벽을 쳐다보고 있는 게 좋다. 불멍, 바다멍보다 벽멍이다. 벽은 갑갑할지 모르나 벽이 없다면 나 같은 소심한 자는 불안하다. 벽이 있어 얼마나 든든한지 모른다. 벽이 있어야 할 자리에 벽이 없으면 기댈 수도 없어서 더더욱 불안하다. 사람들은 벽은 썩 유쾌하지 못한 것이라 생각하지만 벽이 없다면 세상은 끔찍할 것이다. 그런 안전한 벽, 우리의 벽, 민주주의 벽을 주말에는 더 크고 단단하게 세워야 한다. 살면서 이토록 간절하게 기다려 본 적이 있었는가. 극우들이 겁을 잔뜩 집어먹을 수 있는 우리의 거대한 벽을 세워 헌제에게 보여줘야 한다. 의식의 벽에 한 송이 꽃이 피어날 수 있게. 이젠 집으로 가고 싶다. 

의식의 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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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이 지옥 같은 현실을 잊기 위해 당신에게 편지를 씁니다. 오늘도 날이 어제와 비슷합니다. 3월인데 추위가 봄이 오는 게 싫어 해를 먹어 버리고 날을 흐리고 스산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럼에도 온도의 경계가 있고, 계절의 냄새가 가득합니다. 더불어 뿌연 먼지 역시 가득합니다. 불안한 오늘은 견뎌내고 덜 불안한 내일을 바라지만 눈을 뜨고 나면 내일이 아니라 오늘입니다. 나는 그런 오래된 세계에서 나날이 변하는 바다의 날씨를 느끼며 날짜변경선 위에 올라서서 위태롭게 당신에게 편지를 씁니다. 여기서 보면 날씨라는 건 사람의 마음과 너무나 비슷합니다. 같은 날이 없고 변덕도 심합니다. 이거다 싶으면 어느새 모습을 바꿔버리고 심술을 부리고 전혀 그렇지 않을 것 같은데 울어버리고 예상치 못하게 상대방에게 상처를 줍니다. 그래도 변덕 심한 날씨 덕분에 바다에 나오면 매일 달라지는 사색을 할 수 있어서 나쁘지는 않습니다. 가끔 신발을 벗고 맨발로 바닷가를 걸을 때가 있습니다. 비가 오고 난 다음, 화가 났던 모래가 기운이 빠졌을 때 모래 알갱이들이 발가락 사이를 파고들었다가 감싸는 느낌이 좋거든요.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면 이불에 비빌 때와는 또 다른 느낌입니다. 바닷가에서는 신발을 들고 맨발로 걸어도 아무도 이상하게 보지 않습니다. 당신에게 두고 온 기억하나를 떠올리기 위해 맨발로 바다를 거닐다 보면 어느새 개와 늑대의 시간으로, 임계점의 선을 넘어가면 밤은 눈처럼 내립니다. 의식의 뒤편으로 달의 어두운 부분처럼 밤은 그렇게 눈처럼 내려와서 고독이라는 이불이 되어 몸을 덮어 줍니다. 얼굴만 빼고 이불을 덮고 있으면 너무 따뜻해서 외로움이 식은땀처럼 흘러내립니다. 옆에 있는 이와 포개짐으로도 그 외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고 시간의 그리움도 달래지 못해 이렇게 초조함을 덧입힙니다. 이번 주는 이 불안한 오늘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 편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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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찬 일요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옷을 주워 입고 운동 겸 슈바빙으로 달려갔다. 날은 차가웠지만 겨울 햇살이 맑았고 청아했다. 하늘이 높아 보였고 유난히 아오이 빛깔을 지니고 있었다. 숨을 들이쉬면 차갑고 맑은 공기가 폐 속으로 가득 들어왔다. 언제까지나 이렇게 맑은 공기를 마실 수 있을까.

슈바빙에는 조 카커가 부르는 영화 탑건의 주제곡이 흐르고 있었다. 늘 일찍 와 있던 종규는 보이지 않고 어쩐 일인지 아침잠이 많은 득재가 테이블에 앉아서 책을 보고 있었다. 오늘도 효상이는 고물상 일을 도와준다고 슈바빙에 올진 모르겠다고 했다.

슈바빙 주인 누나는 구운 쿠키와 코코아에 뜨거운 우유와 위스키를 조금 넣어서 주었다. 이렇게 맛있고 몸이 풀리는 메뉴를 다른 곳에서는 왜 팔지 않는지 모르겠고, 이렇게 맛있고 좋은 음료를 팔고 있는데 사람들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 어쩐지 이상했다.

한국인에게 맞지 않는 음료일까. 그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좋아하고 잘 마셨기 때문이다. 이상하지만 주인 누나가 만들어주는 음료를 마시고 24시간 정도가 지나면 어김없이 그 음료가 생각났다.

득재는 내가 와도 책을 읽는데 몰두했다. 기철이와 똑같이 책을 좋아했지만 기철이와는 다른 기질과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득재의 어깨를 툭 쳤다. “오늘도 효상이는 못 온대. 우리 언제 한 번 고물상에 가서 일을 도와줄까?”라고 내가 말하니, 득재가 손가락으로 오케이 마크를 만들었다.

테이블에서 보니 득재가 읽고 있는 책은 이성복 시인의 시집이었다.

“시인들은 정말 홍어처럼 온몸을 내던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라고 득재가 말했다. 나는 가만히 득재의 얼굴을 보았다. 녀석은 2월의 우리 집 앞마당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코코아를 한 잔 마셨다.

우유와 섞인 코코아는 부드럽게 목으로 넘어갔고 끝 맛에는 위스키가 감돌았다. 묘한 맛이었다. 맥주와는 달랐다. 나는 조금 미간을 찡그렸다. 맥주를 마시고 카 나오는 찡그림과는 달랐다. 아마도 득재는 홍어의 암모니아 냄새를 내가 떠올렸다고 생각했을 모양이었다.

“홍어가 발효되면서 유독 암모니아 향이 지독한 것은 홍어는 소변을 성기로만 내보내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홍어 자신의 몸 전체로 배출하기 때문이래.”

득재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실은 그만큼의 엄청난 일은 나는 잘 받아들이지 못했다. 득재는 나에게 종이 한 장을 꺼내 보여줬다.

“개구리가 적어 준 거야. 라디오에서 듣고 녹음해서 돌려가며 적어 넣은 건데 나에게 주더라.” 종이에는 이성복 시인이 시와 대담에서 그가 했던 말이 적혀있었다.

[어제 동물 다큐멘터리를 보다가 재미있는 것을 발견했어요. 재미있는 것은 나는 모든 것을 시로 연결해 버리는 버릇이 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재미있다는 겁니다. 거북이가 말입니다. 아가릴 쫙 벌리는데 제 혀를 마치 벌레처럼 보이도록 만들더군요. 그러니까 물고기가 그게 벌레인 줄 알고 잡아먹으려다가 도리어 거북이에게 잡아먹히고 말아요. 또 한 가지 더 있습니다. 개미를 잡아먹고 사는 새가 있어요. 그런데 이 녀석은 다른 힘센 새가 자기 알을 훔쳐 먹으려고 나타나면 뱀 흉내를 내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다른 새는 이게 진짜 뱀인 줄 알고 도망을 가는 거예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사람이 진실에 의해 보호받는 것도 또 진실을 가지고 제 삶을 유지하는 것도 저런 식이 아닌가. 진실이라는 것은 본래 가짜입니다. 진실이라는 것은 항상 as if의 형식, 즉 마치~처럼 직유의 형식으로 존재한다고 했었죠. 거북이가 제 혀를 벌레처럼 보이게 만들고 또 새가 뱀의 흉내를 내는 것. 그것은 허구이지요. 마치~처럼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 허구로서의 진실이 우리로 하여금 자신을 보호하고 삶을 기획하게 합니다. 시라는 것도 그런 것이 아닐까요. 삶 자체가 허구라면 허구 속의 허구입니다. 그런데 이 허구 속에 허구를 만들어서 삶이라는 허구를 뒤집거나 무아 시키는 것 그런 것이 시겠지요]

나는 다 읽고 가만히 득재를 보았다. 무슨 말인지 몰랐고, 개구리가 어째서 득재에게 이 종이를 주었는지도 몰랐지만, 득재는 자신의 좋아하는 개구리에게 그 종이를 건네받는 순간 가치전환이 되었을지도 몰랐다. 아마 앞으로도 소중하게 간직할 것이다.

인간의 마음이라는 게 얼마나 깨지기 쉽고 아프기 쉬운지 나는 희미하게나마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열일곱 소녀처럼 위태로운 생활을 하는 것이다. 제니스 이안이 부르는 ‘엣 세븐틴’에서 처럼 모든 십칠 세는 힘든 법이니까. 그 또래는 그런 것이니까.

“소설가는 어떤 의미로 쓰고자 하는 의지가 가득하면 어떻게든 소설을 쓰게 되지만 시는 전혀 그렇지 않은 것 같아. 재능이라든가 의지만으로 시는 써지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 자신의 몸속에, 온몸 구석구석, 몸의 끝까지 퍼져있는 세포와 말초신경 전부가 시를 향해서 돌진하려는 태동이 가득한 사람이 그것을 형태로 표현하지 못했을 때, 학습의 도움으로 시를 적을 수 있는 것 같아. 나 같은 놈이 시를 쓰는 것은 아닌 것 같아. 진실이란 무엇일까.”

하나의 고민을 어렵게 끝내고 나면 두 개의 고민이 기다렸다는 듯이 다가왔다. 그것이 열일곱 살의 삶이고 인생이었다. 득재는 기철이를 따라가지 못하는 자신의 재능에 대해서 그리고 그녀에 대해서, 적고 싶은 시에 대해서 다가가지 못하는 고민을 하고 있었다. 슈바빙에는 제니스 이안의 ‘엣 세븐틴’이 흘러 불안한 열일곱, 그 또래의 우리 주위를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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