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건전지를 많이 사용하는 나는 예비 건전지를 구비해 놓아야 한다. 집의 벽시계와 탁상용 시계에 건전지가 들어간다.
또 무선 키보드에 건전지가 들어가고 아직 카세트 플레이어를 듣기 때문에 건전지를 구비해 놓아야 한다.
예비 건전지를 구비해놓지 않으면 건전지는 겉으로 음, 하는 그런 무표정으로 일관해버리니까 건전지의 외모를 보고 수명이 다 되었는지 어떤지 알 수 없다.
그러다 일축해 버리듯이 어느 날 수명이 뚝 끊어진다. 외모의 변화가 전혀 없이 수명이 끊어지는 물품은 인간 생활 전반에 건전지 이외에 또 몇이나 있을까.
마치 내 옆에서 언제나 같이 있을 것만 같은 강아지가 어느 날 늙어서 아프더니 죽어버리는 것처럼 건전지의 겉모습으로는 수명을 알 수 없다.
건전지가 필요 없는 물품이 많아지는 현대사회에서 건전지가 얼마나 더 버티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건전지를 필요로 하는 물품이 있는 한 열심히 갖춰두려고 한다.
그래서 건전지는 나에게 조금 특별한 물품일지도 모른다. 일상에서 보이지 않는 먼지 같은 건전지가 조촐한 감정의 변화를 안겨준 적이 있다.
중학교 때 하나뿐인 친구가 이사하게 되었다. 둘 다 먼지 같은 존재로 둘 다 공부도 못했고, 음악을 나눠 듣고, 대의에 끼지 못하며 하굣길을 같이 걸었다.
그렇게 2년을 붙어 다니다가 그 녀석이 이사했다. 허전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5개월 만에 연락이 와서 라디오에 사연을 보냈는데 언제 나올지 모르니 계속 들어보라고 했다.
수업 시간에도 창가에 앉아서 선생님 몰래 이어폰 한쪽만 귀에 꽂고 라디오를 들었는데 그때 건전지가 수명이 다한 것이다.
예비 건전지도 사놓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였다. 수업 시간이라 밖으로 나갈 수도 없고. 가방을 뒤져보니 다 쓰고 버려야 했던 건전지가 뒹굴고 있어서 그걸 잡아서 끼워 넣었더니 라디오가 나왔다.
그 녀석이 바다 건너 먼 곳에서 보낸 사연이 흘러나왔다. 사연은 벌 거 없었다.
잘 지내고 있고, 오늘 하루는 뭘 했고 무엇을 먹었는데 입맛에 맞지 않고, 인종이 다르지만 괜찮은 하루를 보내고 있다는, 그런 평범한 이야기를 듣는데 잘 알 수 없는 감정이 올라왔다.
디제이가 덤덤하게 읽어가는 도중에 “너는 어때?”라고 하는데 코끝이 갑자기 시큰거렸다. 그런 지극히 당연한 것들이 소중하다는 것을 느끼지 못했는데 이제야 그런 당연하고 평범한 생활이 소중하다는 걸 알았다.
얼마 전에 넷플의 ‘클라우스’를 봤다. 주인공 마르구가 선물을 풀어서 썰매를 타며 환한 얼굴이 되는데, 모든 아이가 하는 평범한 놀이가 마르구에게 아주 특별한 것이었다.
마르구가 딱 한 번 눈물을 흘리는데 제스퍼가 떠날 때 운다. 선물도 집어 던지고 운다. 둘이 서로 다른 언어로 대화하는 장면은 아직 아이로 남아있으려는 마음속 어떤 부분을 건드렸다.
그건 아마 중학교 때 코끝이 시큰해졌던 그 행복한 마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