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비 종교에 대한 태국 영화를 한 편 봤다. 집을 세 주면서 세 들어 사는 사람들이 사이비 종교를 믿는 신도들로 공포영화다. 사이비 종교는 시대를 막론하고, 어느 나라든지 사이비 종교는 있고 그것을 다룬 방송이나 영화가 쏟아진다. 우리나라에서 사이비종교의 대표로 JMS의 정명석이 구속 기소되었고, 넷플릭스에서 [나는 신이다]를 제작해서 방송했다. 엄청났다.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 방송 관계자들이 공격을 받았다는 소식도 들은 것 같은데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나도 사이비 종교에 관한 단편 소설을 한 편 썼다. 그 단편을 쓰기 위해 그 안에까지 들어가는 과정을 알아야 해서 직접 그들의 모임에 몇 개월 동안 참석을 한 적이 있었다. 몇 개월 잘 다니다가 그곳을 나올 때 소모임의 리더 같은 사람이 나를 엄청 붙잡았다. 그 속에서 만나고 이야기했던 사람들, 즉 신도들은 너무나 착하고 좋은 사람들이었다. 누구에게 해코지를 하거나 심지어 나와는 다르게 욕 한 마디 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사이비종교라는 걸 어떻게 명확하게 지정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해봤다. 인터넷에서도 신천지를 검색하면 그들이 하는 봉사활동의 소식이 밑으로 주욱 나온다. 실제로 신천지가 사람들을 향해 공격을 하거나 돌을 던지는 행위를 하지는 않는다. 신도들은 다른 종교처럼 선교활동을 하고 말씀을 전하는 행위를 할 뿐이다. 사이비 종교라는 걸 명확하게 어떻게 나눌 수 있을까.


코로나 초기 때 내가 있는 곳에 신천지 신도가 와서 최초 전파자가 되었다. 대대적으로 뉴스가 났고 그들이 들어갔던 가게나 음식점은 확진자가 다녀간 집이라고 펜스를 치고 2주 동안 영업정지였다. 그때 [확진자]라는 사건의 중심보다 [신천지]라는 변두리에 사람들의 관심은 대단했다. 결국 이 근방에 시에서 신천지 전수조사를 나왔다는 소문이 돌았고 아케이드가 쳐 있는 400미터 안에 신천지 건물 5곳이 나왔다. 그 건물들의 이름이 하나씩 인터넷에 올라오면서 사람들은 신천지에 대한 불신과 불안 그리고 공격적인 성향을 가지게 되었다. 여기서 가만히 생각해 보면 신천지라는 건물을 몰랐을 때는 고요하게 지금까지 잘 지냈다. 그 사실(400미터 안에 신천지 건물이 5군데가 있다는)을 알았을 때와 몰랐을 때가 다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신천지는 사이비종교라서 사람들은 대단히 불안해했다.


사이비종교는 하느님을 믿지 않을 것 같고, 신도들은 영화 속처럼 기괴하거나 괴이한 행동을 하고 언어를 사용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오히려 타인에게 방해 주지 않으려 조심하며 밖으로 나오지 않고 지내는 경우가 더 많다.


그렇다면 사이비종교가 아닌 종교, 여러 종교 중에 개신교는 좀 어떨까. 흔히 말하는 교회에 나가고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 말씀을 전하고. 대한예수교, 침례교 등 사이비종교가 아니라고 하는 종교가 있는데, 정통 개신교를 믿는 자들이 신을 부정하는 듯한 발언을 하며 욕설을 하고 일반인들보다 더 욕심에 눈이 멀어 나쁜 짓을 많이 하기도 한다.


가장 최근의 예로, 박수홍 형은 정말 절실한 개신교 신자라고 한다. 법정에서도 검사와 변호사의 주장이 오고 갈 때마다 [하느님아버지]라고 계속 조그맣게 내뱉는다. 사실 이런 소리 정말 듣기 싫다. 이 박수홍 형의 웃긴 점은 그렇게 하느님 말씀을 듣는데 박수홍의 아내를 조사하기 위해 점을 보러 가서 거기서 부적인가, 그런 내용도 법정에 나왔다고 한다.


도대체 사이비종교라는 건 무엇을 근거로 결론을 내야 할까. [사이비종교인]라는 단어가 더 확실한 것 같은데 [아니야, 나 땡땡교회 다녀]라고 하면 사이비종교가 아닌 것처럼 되어 버린다. 교회 내의 이득경쟁도 치열하고 서열이나 다툼도 정치인들 못지않다. 나라에서 인정한다고 해서 그 종교를 사이비라 부르지 않는 것일까.


종교와 신도들에게 사이비라는 호칭을 붙이는 건 누가 정하는 것일까. 법으로 나와 있는 것일까.


많은 나라에서 사이비 종교 때문에 사람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 얼마 전에 케냐에서 사이비 종교에 속아서 굶어서 떼죽음 당한 사람들의 뉴스도 있었다. 일부 시신에서는 장기도 적출했다. 불과 일 년도 안 된 사건이다. 미국에서 70년대 짐 존스라는 희대의 사기꾼이 인민사원 교주를 하면서 900명을 집단자살하게 만든 일이 있었다. 이 엄청난 이야기는 영화로도 만들어졌고 디카프리오가 짐 존스로 분해서 다시 영화를 만든다는 이야기가 2021년도부터 나오고 있다.


정신이 나갈 것 같았던 영화, 어두운 밤보다 환한 대낮의 공포가 얼마나 더 무서운지 잘 보여줬던 영화 [미드 소마] 역시 사이비종교에 관한 이야기다. 여기는 배경이 스웨덴이다. 사이비종교는 분명 존재한다. 사이비 종교는 신도들의 약한 마음에 투침하여 조금씩 시간을 들여 마음을 갉아먹는다. 마음을 다 갉아먹은 자리에 악마를 심어 놓는다.


사이비종교라는 건 순진하고 착한 신도들의 뒤에 숨어서, 마음에 숨어서 본체가 드러나지 않는다. 드러나도 결국 사이비종교야 같은 말을 들을 뿐 사이비종교를 결정짓는 어떤 선도 없어서 오늘이 지나면 다시 사이비종교는 활개를 펼칠 동력을 마련한다. 종교에 믿음이 빠지고 우리 아니면 전부 나쁜 거야,라는 분위기가 강하면 그게 사이비종교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집단생활의 여러 특징 중 눈에 띄는 하나는 아이 때부터 집단생활을 하면 성인이 되어서도 말을 잘 듣는다는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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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아닌 봄 같은 날 때문에 그런지 친구가 사고로 죽은 후 죽음에 대해서 자주 생각한다. 한 번 죽으면 더 이상 죽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자꾸 맴맴 돌면서 죽고 난 그 후의 아무것도 없음에 대해서 생각을 한다. 생각을 한다고 해서 답이 있는 건 아니지만 생각이 나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머릿속으로 밀려 들어온다. 그 생각이 강하게 들 때는 매일 다니는 집으로 가는 길이 너무 힘들고 슬프게 느껴진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데 죽음이 너무 먼 이야기라고 생각하지만 친구가 죽고 난 후에 그 부재가 기묘한 형태로 존재를 알리니까 이상하고 또 이상하기만 하다.


감기기운이다. 물약을 찾아 먹었다. 나는 아프기 전에 미리미리 약을 챙겨 먹는다. 남들은 아프면 약을 먹지만 나는 아픈 게 너무 싫어서 아프게 전에, 감기기운이 오면 미리 약을 먹는다. 작년에는 한 번도 아프지 않았다. 나는 아직 코로나도 한 번 걸린 적이 없다. 아프면 그 핑계로 푹 쉬고, 그러면 괜찮지 않으냐고 하는데 나는 괜찮지 않다. 아파서 오는 고통에 몸이 잠식되어 가는 그 느낌이 너무 싫다. 그래서 매일 조깅을 하고, 샤워를 하고, 적당히 먹고, 팬티를 매일 갈아입는다. 그럼에도 감기기운이 왔다는 건 참 짜증 나는 일이다. 미리미리 약을 챙겨 먹자. 손이 닿을 수 있는 곳에 약을 챙겨 두자.


어릴 때는 아버지가 골라준 아이스크림을 먹었는데, 요즘은 아이스크림 하나 고르는데도 선택이 어렵다. 어릴 때 선택의 폭이 좁았을 때 아버지가 골라준 아이스크림은 뭐가 됐든 만족도가 높았다. 요즘 내가 고르고 골라 먹는 아이스크림은 만족도가 그리 높지 않다. 단지 맛 때문은 아닌 것이다. 그 속에는 방대한 자유가 주어져도 결국 그 속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일이 만만찮다. 만만찮은 게 아니라 어렵다. 고르는 건, 선택을 하는 건 이제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에 너무 어렵다.


그러는 와중에 누가 잘 지내냐고 물었다. 나는 잘 지낸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별 탈 없고, 매일 조깅하고, 책 읽고, 글 쓰고. 잠 잘 자고 아침에 무사히 눈 뜨고. 일어나자마자 바로 화장실에 가서 대소변을 해결하고. 밥 잘 먹고. 잘 지낸다.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잘 지내냐고 물으니 내가 못 지내는 것은 아니지만 잘 지내는 게 맞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은데 잘 지내는 건가, 잘 지내는지 어떤 그것조차 알 수가 없다. 어제 이전 까지는 잘 지냅니다,라고 당당하게 말을 했는데 갑자기 잘 지내는 게 어떤 건지 제대로 알 수 없어졌다. 잘 못 지내는 걸 못 알아차리면 잘 지내는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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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에서 냉동 만두를 꺼냈다. 마치 고대 화석 같은 모습으로 하얗고 딱딱한 모습이었다. 무기로 사용해도 될 법한 딱딱함이다. 이 차가움, 이 딱딱함. 냉동만두는 그런 기묘함을 전부 가지고 있다. 기묘하고 딱딱하고 서늘한 냉동만두가 마법을 부릴시간이다.


프라이팬을 불에 달군 후 기름을 붓고 차갑고 딱딱한 냉동만두를 프라이팬에 두른다. 약한 불에 냉동된 만두가 풀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곧 노릇노릇하게 익어간다. 그 냄새가 매혹적이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냄새는 음식이 조리되는 냄새다. 계란 프라이가 익어가는 냄새, 짜파게티의 냄새. 인간을 가장 나약하게 만드는 냄새가 있다면 음식 냄새다.


일주일을 굶은 도망자가 허기질 때 맡는 음식 냄새는 살인을 부축이기도 한다.


미각이라는 건 단지 혀로 느끼는 맛 만으로 충족시킬 수 없다. 시각으로 한 번 입 안을 데운다. 그리고 후각으로 몸에 신호를 보낸다. 이제 만두를 먹을 테니 그 천국의 맛에 대비를 해라라고. 겉이 노릇노릇 익어가는 모습과 냄새에 매료되어 가는 나 자신이 느껴진다. 다 구워진 만두를 접시에 담으면 게임은 끝난 것이다. 만두, 만두~ 만두! 하는 만두송을 들어보면 우리가 만두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 수 있다.


만두가 프라이팬 위에서 익어 간다.

타닥타닥 소리를 내면서 익어 간다.

냄새가 사람을 괴롭게 한다.


모리스 멘델은 아무리 괴로운 시간이라 해도 한 시간은 60분을 넘지 않는다고 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만두 냄새는 사람을 괴롭게 하고, 만두 냄새 때문에 60분 동안 괴로워할 필요는 없다. 그렇게 구운 만두를 한 입 먹으면 언제 딱딱하고 차가운 만두였냐는 듯 뜨거움이 입 안으로 확 들어오면서 만두 속의 맛있는 조합이 혀의 위로 퍼진다.


후 하며 뜨거움을 뱉어낸다. 맛있는 만두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건 맛있는 간장이다. 간장에 살짝 찍어 먹는 군만두는 세상 부러울 것 없게 만든다. 그런 시간을 만두를 먹으며 잠시 가진다. 이런 시간이 모여 인간의 삶이 이루어진다. 곧 혼돈이 오더라도 나는 지금 만두는 먹는다. 군만두를. 군만두는 혼자 먹어도 맛있지만 친구와 같이 먹어도 맛있다. 군만두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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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정이라 불렀던 설날, 이제 구정이라는 말은 사라지고 있다. 일본식 표기이기 때문이다. 양력 설이라 불리는 명절이 다가오면 그 주에는 동네 사람들, 집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예전에는 전부 목욕탕에 갔다. 어머니들이 목욕 바구니를 들고 물에 젖은 머리를 한 채 동네를 다니는 모습을 왕왕 봤다. 마치 검은 푸들이 기분 좋은 얼굴을 한 채 동네를 다니는 모습처럼 보였다. 어머니를 따라 작은 푸들도 목욕 바구니를 들었다. 목욕탕은 동네에서 조금 걸어 나가면 있는 곳으로 우리 동네 사람들이 가는 곳은 두 군데가 있었다. 명절 전에는 모두가 깨끗하게 목욕을 했다. 그것도 대중목욕탕에서.


어머니, 아버지들은 감기 기운이 있으면 대중목욕탕에 데리고 갔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나오면 감기가 낫는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겨울에 대중목욕탕에 갔다가 오면 기침을 더 하고 감기를 앓곤 했다. 사람들이 몰리는 곳에 가서는 안 되는 건데 그걸 모르고 있었던 거지. 감기 기운이 있는 사람들이 전부 목욕탕에 와서 침과 타액을 뱉어놓고 갔는데 무지했다.


그래도 대중목욕탕에 가면 대중목욕탕만의 재미가 가득했다. 목욕을 하고 나오면 아버지가 수건을 말아서 탁탁 털어 주었다. 아이들은 고개를 숙이고 어정쩡하게 서 있고 아버지는 맞은편에서 열심히 머리카락이 빠지듯 수건으로 털었다. 아버지들만의 방식으로 사랑을 표현해 주었다. 사랑한다 아들아,라고는 한 번도 하지 못했지만 아버지들은 그런 멋이 있었지.


어릴 때는 아버지와 함께 목욕을 하고 나올 때 맥콜을 마시는 기분이 좋았다. 맥콜은 참 희한한 음료였다. 콜라도 아닌 것이, 콜라처럼 팍 터지면서 보리맛이 나는데 목욕하고 마시면 또 맛있었다. 명절 전의 목욕탕에는 평소보다 많은 아저씨들이 목욕을 했다. 목욕탕에서 사람들의 모습을 일일이 관찰할 수 없지만 역시 표정들이 좋았다. 그렇다고 생각한다. 명절 전이니까.


요즘은 모르겠지만 남탕에는 공용 손톱깎이가 있어서 목욕을 하고 나온 아버님들이 물에 불어서 물렁해진 손톱을 열심히 깎았다. 왜 손톱깎이를 다 같이 돌아가면서 사용할까 하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러면 안 되는 거였다. 역시 무지했던 거지. 목욕탕에는 기묘한 아저씨들이 많았다. 변태기가 있다고 해야 할까. 목욕을 앉아서 하는데 샴푸를 내어서 중간다리 근처에 난 털에 샴푸를 발라서 빗으로 거기를 계속 빗는 아저씨가 있었다. 요즘에야 왁싱 같은 걸 하지만 예전에는 거기의 털은 그대로 두었다. 아버지들은 더 그랬지. 거기에 샴푸를 하고 열심히 빗으로 15분씩 빗는 모습은 뭔가 어떤 고상한 의식처럼 보였다.


드라이기로 사타구니를 말리는 아버님은 기마자세다. 그렇게 자세를 잡고 드라이기를 열심히 휘잉휘잉 흔든다. 목욕하고 잠을 자는 방에서는 대부분 하나만 입고 자는데 그 하나가 양말인 아버님도 있다. 한증막에서 유난히 소리를 내는 아저씨도 있고 별에 별 아저씨들이 다 있었다.


명절이 되기 전 극장에 영화를 보러 가는 것도 즐거운 일 중에 하나였다. 멀티플렉스가 들어서기 전 극장의 흔적을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찾을 수 있었다. 명절 전에 상영하는 영화 예정작은 티브이 광고를 했다. 그리고 벽보와 전단지로 어떤 영화가 걸리는지 종류를 알 수 있었다. 명절 전 영화를 보는 재미가 좋았다. 영화 시작 전에 예고편을 보는 재미가 있었고, 들어가기 전 매점에서 음료와 쥐포를 사 먹는 재미도 있었다.


분위기가 지금과는 좀 달랐다. 명절 연휴가 길면 길수록 즐거웠지만 지금은 그렇지만은 않다. 고향으로 내려와서 동네 친구들과 오랜만에 회포를 풀기도 했고 며칠 있다가 귀성길에 올랐지만 요즘은 당일치기가 많아졌다.


명절의 풍경이 많이 바뀌긴 바뀌었다. 현재 2, 30대 은둔형 외톨이가 일본을 넘어섰다고 한다. 일본이 은둔형 외톨이를 극복할 수 있었던 건 통계를 꾸준하게 잡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작년에 첫 통계를 냈다. 지금은 그렇게 은둔형 외톨이로 집에서 나오지 않는 청년이 56만 명이라고 한다. 그러니 당연히 명절의 분위기는 바뀐다. 이번 명절에는 세뱃돈은 몇 살까지 얼마를 줘야 하나를 여론조사까지 했더라고. 이 조사를 하면서 사람들 중에는 오만권은 왜 만들어가지고 하는 소리까지 나왔다.


귤이 하나에 천 원이던데. 물가가 오르는 게 당연한 거라고 해도 너무한 건 너무하다. 귤오천원에 한 봉다리 가득 담아서 마음껏 귤 까먹던 때가 너무 멀게 느껴진다. 설날이 끝남으로 해서 추석 전까지는 떠들썩한 분위기는 없어서 좋다. 추석이니, 크리스마스니, 연말이니 같은 분위기는 추석전까지 없다. 떠들썩할수록 고립되는 사람들은 많아지는 현실이다. 명절에는 떠들썩하지 않고 평범하게 보내는 게 좋다. 물론 그 평범함 속에는 몇 퍼센트의 가설과 몇 퍼센트의 거짓이 존재하고 있다.


매일 집으로 가는 길이 오늘따라 유난히 쓸쓸하고 힘들 때가 있다. 그럴 때 중식이 노래를 들으면 아,,, 하는 생각이 든다.



중식이 - 그래서 창문에 선팅을 하나 봐 https://youtu.be/4AK_uJg7H8U?si=B7GBZasupp_8OWI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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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02-15 1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평생 남탕에 들어갈 일이 없는 저로선 그저 놀라고 신기할 밖에요. ㅋㅋㅋ
교관님은 맥콜을 드셨군요. 저는 야쿠르트 아니면 바나나 우유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점점 명절 분위기가 좀 그렇죠? 명절은 역시 아이들에게나 좋은가 봅니다.^^

교관 2024-02-16 11:51   좋아요 1 | URL
ㅋㅋㅋ 저도 대중 목욕탕에 안 간지 십 년 정도 되어서 요즘 분위기는 모르겠지만 동네 목욕탕 남탕의 모습은 뭐 비슷비슷하지 않을까 싶어요 ㅎㅎ 맥콜 마시고 싶네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읽었던 미국소설 떠 올랐다. 특수부대 출신의 거구의 주인공이 좋아하고 믿는 사람들을 쳐다보는 눈빛이 우수에 찬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나 우수에 찬 눈빛 이후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를 긴장감이 도는 장면이 말이다. 왜 그런 장면이 떠올랐을까. 꿈을 꿨는데, 꿈은 어이없지만 강아지와 노는 꿈을 꾸었다. 나의 품에 자꾸 안기려는 강아지가 무거워서 잠시 내려놓았는데 느닷없이 강아지 배가 벌어지고 그 안에서 사람들이 춤을 추며 나왔다. 꿈은 항상 그런 식이야. 그런 비현실적 꿈속에서 나는 언제나 쫓기거나 그 안에서 벌벌 떨다가 일어난다. 말도 안 되는 꿈. 말이 되면 그게 꿈이야?라고 누가 그러겠지.


존윅을 보면

목표를 위해 사는 자. 목표를 위해 죽는 자. 목표를 위해 죽이는 자.라는 대사가 나온다. 나는 어디에 속할까. 그 이전에 나에게 목표라는 것이 있을까. 목표라는 거 정해 놓으면 목표는 달아나거나 도망가고 만다.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목표가 목적과 비슷한 거라면 신해철이 그랬다. 목적에 도달하려 너무 애쓰지 마라, 태어난 게 목적이라고. 이렇게 멋진 말을 하는 사람은 늘 일찍 죽는다.


잠을 잘 때에는 팬티를 입지 않는다. 팬티를 입지 않을 뿐이지 발가벗고 잔다는 말은 아니다. 아침에 옷을 입다가 팬티가 몇 장인지 보니 15벌이었다. 15벌이나 필요 있을까 싶은데 뜯지 않은 새 팬티도 몇 벌이나 있었다. 팬티와 양말은 하루에 한 번씩 갈아입고 신는다. 팬티도 이틀입을 수 있는데 이상하지만 하루에 한 번 갈아입는다. 누군가 정한 것도 아닌데 팬티는 이틀씩 입지 않는다. 물론 부득이하게 이틀입을 경우도 있다. 이런저런 이유로 외박을 하게 되면 어쩔 수 없이 팬티를 이틀 입어야 한다. 매일 갈아입어야 하는 시스템이 머리에 박혀 있음에도 이틀 입어야 할 때는 그것대로 그냥 받아들인다. 그러고 보면 인간은 단순하게 적응을 잘한다.


명절이라 오랜만에 바다에 나왔다. 저 바다 위에는 침묵과 같은 부표가 떠 있었고 선명한 햇살이 대기에 박혀 있는 먼지를 보여주었다. 사람들이 여기에서 저기로 조금씩 움직이고 있어서 시간이 움직인다는 걸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빛과 그림자가 확실한 대조를 보여주는 날이었다. 그림자는 색채가 없지만 빛은 색깔을 알 수 없다. 바다는 빛과 그림자 때문에 푸르게 보였다. 사람도 빛과 그림자 덕분에 고유한 색을 지닌다.


창밖으로 보이는 세계는 진정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평온하고 평범하다. 이 세계는 정말 이토록 평범한 것일까. 애초에 평범하게 탄생했을까. 아마도 그건 아닐 것이다. 세계는 혼돈이었다고 한다. 카오스 그 자체였다고 하지. 그런데 그런 이 세계에 인류가 등장하면서 조금씩 평범해지기 시작했다고. 후에 카를 마르크스가 프롤레타리아를 설정함으로 그 평범함을 고정했다고 해. 그리하여 스탈린주의는 마르크시즘에 직결된다고 한다. 누군가 그랬는데, 마르크스는 원초의 혼돈을 기억하고 있는 천재 중의 한 사람이라고. 그는 흔치 않은 사람 중 한 사람이라고.


고요한 호수 같은 바다를 멍하게 바라보고 있으면 쓸데없는 생각을 하게 된다. 왜냐하면 집 앞에 나와서 보는 이 바다는 10년 전에도 이런 모습이었다. 60년 전에도, 100년 전에도 이런 모습이었고 200년 전에도 이런 모습이었다. 그리고 50년 후에도 이런 모습일 것이다. 이 바다를 보는 사람들만 달라진다. 인간은 필멸하는 존재로 유한하니까. 그러나 바다는 불멸이며 무한이다. 이 세계가 끝이 나면 모를까. 아니 끝이 난다고 해도 아마 바다는 어떤 형태로든지 살아남아 있을 것이다. 에반게리온에서 처럼 온 세상의 바다가 붉은색으로 변했을지라도 바다는 바다라는 이름을 지닌 채 무한하게 살아남을 것이다.


그리하여 존재라고 하는 건 개체로서 있는 것이 아니라 혼돈으로서 있다고 그 누군가가 말했다. 그 누군가는 누구일까. 그 누군가는 모든 걸 다 아는 것처럼 말을 한다. 정말 모든 것을 다 아는 사람이 존재할까. 역시 존재하는 건 혼돈이구나. 눈으로 보이는 평온과 평범을 그대로 믿으면 안 된다. 평범은 대립의 일체화의 또 다른 말이기 때문이다. 평범 그 뒤에는 무질서와 혼란스러운 관념이 서로 이를 드러내고 대립하고 있다. 그 현실의 정합과 비현실의 부정합이 기묘하게 사이클을 이어가고 있다. 그러나 지금 현재 내가 고작 해야 할 고민은 이제 곧 끓여 먹어야 할 라면에 떡국 떡을 넣을지 만두를 넣을지 말지를 조카와 함께 선택하는 것이다. 현실의 세계는 그런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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