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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육에 양배추김치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할지도 모르지만, 어때 뭐 맛있으면 그만이지. 사실 양배추 김치를 우리는 잘해 먹지 않아서 이상하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양배추로 김치를 하면 나름대로 맛있다. 배추김치에 길들여져서 그렇지 양배추로 담근 김치도 수육에 꽤나 잘 어울린다.


짜장면을 상추에 싸서 먹는다면 뭐야 그게?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또 그렇게 먹으면 맛있다. 게다가 기름진 짜장면을 상추의 상큼함이 완화시켜 준다. 어릴 때 나는 우유에 밥을 왕왕 말아먹었는데, 그때에도 그런 소리를 듣곤 했다. 우유에 밥을 말아서 무슨 맛으로 먹어? 하지만 우유에 밥을 말아서 먹으면 어울릴 것 같지 않지만 꽤나 맛있다.


솔직히 지금의 로제떡볶이의 모습을 예전에 상상이나 했을까. 떡볶이는 무조건 붉은색이어야 했는데 지금은 그 틀이 완전히 다 무너졌다. 맛있는 것에 있어서 편견은 정말 무섭다. 떡볶이는 예전부터 5일장이 열리는 전통시장에서 간장떡볶이를 팔았다. 오래되었다. 떡볶이에 밥을 비벼 먹을 거라고 누구도 이전에는 상상도 못 했다. 이런 걸 우리는 크로스오버라고 한다.


노래에도 둘이 만나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데 둘이 만나서 어울리는 노래가 있다. 정지용 시인의 시에 김희갑 선생이 곡을 붙인 곡 ‘향수’가 바로 그것이다. 향수를 부른 테너 박인수 교수가 2월 28일에 하늘의 별이 되었다. 같이 부른 가수 이동원은 21년에 친구인 개그맨 전유성이 보는 앞에서 별이 되었다. 정지용 시인의 시에 음을 붙은 곡이라 가사를 보면 너무나 아름답다. 나는 향수를 들을 때마다 이 가사에 매료되어, 거짓말 좀 보태서 미칠 것만 같다. 이런 표현, 이런 문장이 마치 나를 그 광경으로 데리고 가는 것만 같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러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전설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정말 너무 시가 좋다. 특히 '전설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라는 부분은 나의 온 마음을 다 빼앗겨 버릴 것만 같다.


향수는 89년에 느닷없이 이동원이 박인수 테너를 찾아간다. 그때까지도 박인수 테너는 이동원이라는 가수도 몰랐고, 정지용 시인의 시도 알지 못했다. 난생처음 보는 이동원이라는 가수가 찾아와 정지용 시인의 아름다운 시가 있는데 이 시에 곡을 붙여 같이 부르시겠습니까. 너무 아름다운 곡이 될 겁니다.라고 한다. 박인수는 뭐지? 하며 시를 읽었는데 대번에 같이 노래를 부르기로 했다.


그런 박인수 교수도 이제 고인이 되었다. 클래식과 가요를 접목하는 크로스오버의 문을 연 고인은 생전에 국민테너로 불리며 큰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정작 국립오페라단에서는 쫓겨나야만 했다. 그 이유가 대중가수와 노래를 불렀다는 너무나 말도 안 되는 이유였다.


장르에 따른 고귀함, 높낮이는 있을 수 없다”라고 한 고인의 말처럼 크로스오버는 이제 흔한 장르가 되었다. 하지만 풍성해진 음악과 달리 여전히 우리와는 다르다는 이유로 이곳저곳, 여기저기에서는 선을 긋고 서로를 구분하고 멸시하고 있다. 이런 차별이 우리 주위에 너무나 많다. 차이를 인정하기보다 차별하는 것이 예전보다 더 만연하고 있다.  


박인수 교수가 보여줬던 크로스오버의 용기가 우리 사회 곳곳 더 넓게 퍼져나가서 향수를 많은 사람들이 들었으면, 정지용 시인의 향수를 마음 깊이 한 번 읽었으면 하는 마음이 가득하다. 노래를 마음으로 하는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랐던 고 박인수 교수와 대중가수 이동원의 명복을 빌며.



향수 https://youtu.be/h8V3bm8ioG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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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든이 재선을 하기 위해서 동맹국인 우리나라에 악행을 저지르고 있다.라고 생각 한다. 바이든 이 노친네가 글쎄 한국이 하도 미국에 투자를 하고 싶어 해서 어쩔 수 없이 받아준다는 식으로 연설을 해서 미국인들에게 박수를 받고 난리다. 바이든이 이제 반도체를 건드리려고 한다. 다들 소식 들어서 알겠지만 우리가(미국) 한국의 반도체 공장에 들어가서 모든 생산과정을 다 보게 된다면 너희들이 원하는 대로 해주겠다, 보조금 그거 해 줄게,라고 하고 있다.


반도체는 공정이 중요한 산업이기에 특허 같은 건 내지 못한다. 콜라가 특허를 내지 않는 이유와 비슷하다. 이를 타파하려면 세계의 반도체 산업을 좌지우지하는 3국 - 한국, 대만, 일본이 합심단결해서 미국 너희들과는 이제 거래 안 해! 흥!라고 하면 되는데 대만은 미국 없이 안 되는 시점에 있고, 일본은 말해 뭐 해, 이다.


200년 역사의 미국 대통령 중에서 재선에 성공하지 못한 지질한 대통령이 역대 6명이 있다. 어쩌면 바이든도 그 자리에 끼게 될까 봐 너무너무 두렵고 싫어서 초강수를 두는 지도 모르는데, 이 초강수가 트럼프보다 더 악질인 것이다. 이하 이야기는 거침없는 썬킴의 이야기를 참조했다.


미국에서는 지미카터도 재선을 하지 못한 미국인들이 아주 싫어하는 대통령 중 한 사람이다. 지금 지미 카터는 98세로 모든 치료를 중단하고 연명치료를 하고 있다고 한다. 곧 죽을 날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말이다. 지미 카터는 우리나라 박정희 대통령과 원수지간이었다. 그래서 한 간에는 1026 사건의 배경에 지미 카터가 있다는 이야기도 있다.


지미 카터는 원래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될 사람이었다고 한다. 정말 지질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그런 사람이었다. 미국 국내에서도 평가가 그렇다. 미국은 역대 대통령들을 위대한 대통령이라고 하지만 지미 카터에게만은 왜 대통령이 되었지? 가 따라붙는다.


지미 카터는 1976년에 대통령이 되었다. 이때 미국의 분위기가 어땠냐면 1975년에 미국은 베트남전에서 패하여 폭망 한 분위기였다. 세계 최강의 미국이 아시아의 뭐? 작은 뭐? 베트남이라는 나라의 호찌민이라는 할아버지에게 전쟁을 졌다니, 라며 충격의 도가니, 침울한 분위기였다. 그래서 더 이상 아시아의 문제에 미국은 신경 쓰지 않겠다 했다.


그러는 와중에 다음 해인 1976년에 지미 카터라는 듣보잡이 나오게 된다. 지미 카터는 당시 정치경력이라고는 조지아주 주지사 4년밖에 한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 상의의원이나 하의의원 경력도 없는 사람이었다. 지미 카터가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공약 때문이었다. 공약이 뭐였냐면 당시 대한민국에 주둔한 미군철수였다. 주! 한! 미! 군! 철! 수! 였다.


바로 지난해 – 1975년에 베트남전에서 폭망 했기 때문에 지미 카터는 단상에 서서 저를 대통령으로 뽑아 주시면 한국에 주둔한 3만 명의 젊은 미군을 다 철수시키겠습니다!라고 하면서 미국 내에서 인기를 얻는다. 3만 명의 군인 가족들은 내내 마음 조리고 있었는데 얼마나 기쁜 일인가. 이게 먹힌 것이다. 듣보잡이지만 미국인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당시 경쟁상대가 제럴드 포드 현직 대통령이었는데 이기고 만다. 듣보잡인 지미카터가. 지미 카터는 취임하자마자 약속한 대로 한국에 있는 3만 명의 군인들을 다 빼오겠습니다,라고 박정희에게 바로 통보를 했다. 박정희가 듣고 이런 미친놈을 봤나? 야! 지미카터! 그러면 북한 애들이 바로 쳐들어 내려온다고! 그랬더니 지미 카터는 우리가 알 바 아니다.


지미 카터는 정치 능력이 정말 1도 없는 대통령이었다. 외교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다. 미국 국내 여론만 신경 쓰는 무식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두둥, 77년 즉위한 그 해에 주한미군 헬기 한 대가 한반도의 비무장지대를 살짝 넘어가는 일이 발생한다. 그때 북한 애들이 로켓을 쏴서 격추시킨다.


거기서 미군 세 명이 즉사하고 만다. 이런 일이 만약 요즘 같은 시대에 일어났다면?? 미군 헬기를 북한이 로켓을 쏜 것이다. 그런데 그때 지미 카터가 바로 김일성에게 사과를 한다. 미안하다, 우리가 먼저 너네 영토를 건너갔다. 이 말에 김일성도 바로 공격을 하려고 하다가 미국 대통령이 사과를 먼저 하니까 뻘쭘한 것이다. 그래서 사과를 받아준다.


이 상황에서 박정희가 빡챈것이다. 이 미국새끼가 정말 군대를 빼려고 하려나 보다. 지미 카터가 주한미군들이 하루빨리 미국으로 철수하라. 명령을 내리게 된다. 그런데 미군 장성들이 거세게 반대를 한다. 싱글러브 장군이 카터에게 연락을 해서 미쳤냐고 주한미군을 철수하면 북한이 바로 쳐들어 오기 때문에 안 된다고 했다. 그랬더니 카터는 바로 싱글러브 장군을 강제 전역을 시켜버린다.


그런데 주한미군을 철수시키지 못했다. 왜냐하면 미국의회에서 반대를 했기 때문이다. 미국의회에서는 아니 무슨 듣보잡을 대통령으로 뽑아 놨더니 외교에 1도 모르는 무식이네. 그래서 외교가 카터를 제동 걸어 버렸다.


그 사이에 박정희가 우리도 미사일 만들고 핵개발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언제 미군을 뺄지 모르니까. 


여기서 소문은 이휘소 박사가 우리나라로 들어와서 핵개발을 도와줬다 같은 말들이 나돌았다. 그리고 김진명의 소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에도 그런 이야기가 나온다. 하지만 이휘소는 반 박정희였던 박사였다. 당시에 무시무시한 박정희가 초대를 했는데도 거절을 할 정도로 박정희 대통령의 독재정권을 무시했다. 77년도에 미국에서 교통사고로 이휘소 박사가 사망한다. 그때 나이 42세.


그러다가 1979년에 카터가 방한을 한다. 직접 딜을 하자, 그래서 박정희는 카터가 온다고 하니까 정말 대접을 엄청나게 잘해주자. 저 듣보잡이 대통령이 되었으니 미칠듯한 환영으로 카터의 마음을 잡아보자. 하게 되었다. 그래서 김포공항부터 카퍼레이드를 펼쳤다. 여의도에서 군사 퍼레이드까지 다 해준다. 그때 당시 영상을 보면 카터가 내렸을 때 박정희가 악수를 하고 박근혜가 뒷모습을 보이며 서 있다.

이때가 79년 6월. 그런데 카터가 방한했을 때 조건이 하나 있었다. 정상회담을 할 때 박정희가 절대로 주한미군철수를 못하게 하는 이야기를 꺼내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다. 박정희가 오케이, 그래 그 이야기는 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니 카터 오라고 해라.


대한뉴스 제1245호-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 내한 https://youtu.be/SgmxwEIXiQY 


정상회담을 둘이 하게 된다. 카터는 사전 협의가 있으니까 당연히 주한미군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겠거니 편안하게 앉아 있었다. 박정희가 웰컴 투 코리아 하며 일어나자마자 45분 동안 주한민군철수 반대 성명을 읽고 만다. 그때 카터의 얼굴은 불게 타오르며 똥 씹은 표정을 지었다고 되어 있다. 카터는 그때 그냥 가자고 하며 그 자리를 나오게 된다. 카터는 청와대를 빠져나오자마자 차를 세우게 하고 미국 국무장관을 소리치며 욕을 한다.


그런데 그로부터 4개월 후에 1026이 터지고 만다. 그래서 배후에 카터가 있다는 음모론이 있게 된다. 하지만 미국무성 자료에 이런 것이 있다. 1026이 터졌을 때 주한미대사가 미국 정부에 보낸 비밀문서가 있는데 여기에는 ‘김재규가 법정에서 미국이 내 뒤에 있다고 이야기를 한 건데 그걸 반드시 막아야 한다, 이 모든 것은 김재규가 주도를 했고 김재규가 자기의 입맛에 맞는 사람을 다음 후계자로 앉힐 것이다, 미국은 이걸 대처해야 된다’라고 되어 있다.


1026이 터지고 난 후에 미국대사가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 실제로 김재규가 보안사에 대고 내 뒤에 누가 있는 줄 알아? 미국이 있어.라고 말했다. 그 대사가 논문을 하나 쓴 게 있고, 그 논문이 최근에 기밀해제가 되었는데 거기에는 ‘당시 박정희는 자기 목숨이 날아가는 큰 위험한 일을 하고 있다. 핵개발과 미사일 개발 그리고 주한미군철수 반대’라고 되어 있다.



79년 박정희가 죽고 전두환이 실권자가 된다. 지미 카터가 광주민주화항쟁운동이 일어나고 있을 당시 재선 캠페인을 하고 있었다. 그때 마침 호메니이옹의 이란 혁명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래서 원래 있던 친미성향 국왕이 미국으로 달아나고 만다. 이란 대학생들이 미국으로 도망간 팔레비 국왕을 돌려달라고 시위를 하기 시작한다.


이란 대학생들이 시위를 하지만 카터가 보내주지 않는다. 여기서 카터에게 비난이 날아든다. 당신은 인권 대통령이라고 칭하면서 박정희만 괴롭히고 이란 대통령은 왜 가만 놔두는 것이냐. 하지만 카터는 다 필요 없다, 팔레비 국왕은 나의 친구이기 때문에 절대 이란에 보내줄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이란 대학생들이 격분을 한다. 그래서 테헤란에 있는 미대사관을 점령한다.

그래서 미대사관에서 50명의 인질을 둔다. 카터가 이란정부와 협상을 해야 하는데 재선 캠페인 중이니까, 이란으로 델타포스를 투입시켜 미대사관의 50명을 구해내는 빅픽쳐를 그린다. 그렇게 되면 지미 카터 자신은 재선에 성공을 한다는 확신이 섰다.


그래서 지미 카터가 일명 독수리 발톱 작전이라는 것을 한다. 델타포스를 이란으로 보낸다. 이란으로 간 델타포스가 거기서 정말 기가 막힌 쇼를 벌이는데, 이란으로 침투한 델타포스가 밤에만 이동을 하는데 일반 시민들이 탄 버스가 다가오는 것이다. 근데 그 버스 안에 탄 사람들이 델타포스를 보게 된다. 그때 델타포스가 버스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를 봤어, 재네들이 우리를 봤으니까 경찰이 신고를 할 테니까 전부 없애자. 그래서 전부 학살을 한다. 밤에.


델타포스는 밤에 테헤란 쪽으로 계속 진격을 한다. 가는데 큰 트럭 한 대가 다가온다. 델타포스가 멈춰!라고 신호를 보냈지만 멈추지 않고 계속 다가오는 것이다. 이에 델타포스가 얘들아 저거 박살 내자. 그래서 바추카포를 쏘게 된다. 근데 포를 맞은 탱크가 어마무시하게 큰 소리를 내며 폭발하게 된다. 델타포스가 밤에 포를 쏜 트럭이 유조차였던 것이다. 엄청난 화마가 주위를 집어삼키고 근처 마을이나 도시에서 다 보였다. 군부대 신고가 나고 난리가 났다. 델타포스가 들어왔다고.


그 때문에 델타포스가 테헤란까지 가지 못한다. 못 가게 된다. 그래서 델타포스가 무전을 친다. 우리 실패했으니까 우리 데리러 와! 헬기를 보내줘! 그때 헬기가 8대가 와야 델타포스 전부를 실어 갈 수 있는데 6대만 오게 된다. 아니 왜 6대야? 8대가 와야 우리를 다 데리고 가지! 8대가 오다가 모래폭풍에 휘말려 2대가 전복이 된 것이다.

그래도 6대의 헬기에 어찌어찌 델타포스를 실어서 가는 도중에 같이 날아오던 미국수송기와 충돌을 해서 6대의 헬기도 전부 폭발하게 된다. 카터의 최강부대 델타포스가 미국 대사관 근처도 가지 못하고 전부 자멸을 한 것이다. 이게 그다음 날 미국 신문에 전부 나버린 것이다. 개망신을 당한 지미 카터. 이때가 1980년 4월이었다.



한 달 후에 518 광주민주화항쟁이 일어났다. 그때 카터는 전두환이 공수부대를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다 알았다. 그때 카터가 광주민주화운동은 폭동이다고 해버린다. 제2의 이란을 만들 수 없다. 신군부 전두환 편을 들어주자. 라며 카터는 폭동으로 규정을 해버렸던 것이다. 신군부 편을 들어줘라, 공수부대를 움직이는 전두환을 놔둬라.


이때 김대중이 사형선고를 받는데, 카터는 어차피 자신은 재선을 물 건너갔으니 자신은 인권 대통령으로라도 남아야겠다고 생각해서 전두환에게 연락을 해서, 내가 518은 그냥저냥 넘어갔는데 김대중은 사형시키지 마라. 그런데 전두환이 카터에게 당신의 말은 듣지 않겠다, 나는 법대로 하겠다. 두둥.


사형은 판사가 내린 거야, 본인은 법대로 할 끄야. 카터 이 등신아. 본인이 니 말을 왜 들어. 본인은 김대중은 못 풀어줘.


전두환은 알고 있었다. 카터가 재선이 안 된다는 걸. 그래서 하고 싶은 대로 말을 했다. 지미 카터는 이제 큰일이 난 것이다. 결국에 재선 실패를 한다. 그리고 미국은 강경파인 로널드 레이건이 대통령이 된다. 전두환은 머리가 좋아서 카터는 물 건너 간 인간이니까 다음 대통령 레이건과 딜을 하려고 한다.


그때 사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던 김대중 선생은 굉장히 기도를 많이 했다. 제발 카터 재선 하게 해 달라고. 카터가 재선이 되어야 내가 살 수 있으니까. 전두환이 집권을 하는데 레이건이 대통령이 되면 사형이 집행되는 것은 기정사실이니까. 그런데 카터가 재선 실패를 한 사실을 듣고 김대중 선생은 옥중일기에 펑펑 울었다고 썼다. 이제 희망은 없다, 나는 죽는구나.


전두환이 레이건에게 전화를 한다. 대통령이 된 걸 축하한다.

혹시 나를 워싱턴 디시에 초대할 의향은 없나?

그때 레이건은 내가 전두환 널 워싱턴에 초대를 하면 너는 나를 위해 뭘 해줄 건데?

그러자 전두환이 레이건에게 뭐라고 했냐면,

미국에서 나 전두환 정부를 인정해 주면

1 내가 김대중 선생을 석방시켜 주고,

2 미사일을 포기하겠다,

3 마지막으로 핵무기도 포기하겠다. 어때? 레이건?


레이건이 1981년 1월 21일에 새로운 대통령으로 처음 백악관에 입성을 하는데 들어가자마자 한 첫마디가 한국의 전두환을 워싱턴 디시에 초대하겠다, 였다. 그 당시 미국의 분위기는 이란의 시위는 미국이 개입을 하면서 왜 광주민주화항쟁은 미국이 개입을 하지 않느냐 사람이 몇 명이나 죽었는데,라는 미국의 분위기가 있었다.


또 지미카터 하면 94년에 김일성을 만난 일화가 유명하다. 이 일을 지미 카터 자신이 자신의 업적이라고 여러 곳을 다니며 말을 했다. 근데 이거 전부 개뻥이다. 이 비하인드에 누구 있었냐? 바로 대우의 김우중 회장이 있었다.  

그리고 정주영 회장이 있었다. 내가 소 천 마리를 끌고 가서 한반도 평화에 기여를 했다고.


여기서 정주영 회장은 언론이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걸 좋아했는데 김우중 회장은 관심을 받는 걸 싫어했다. 그래서 조용하게, 몰래 전두환 정권부터 노태우, 김영상 정권까지 북한으로 가서 밀사의 역할을 했다.


91년도 남북기본합의서라고 있는데, 이는 남한과 북한의 채재를 서로 인정해 주는 합의서인데 이를 김우중 회장이 한 것이다. 김우중의 회고록을 보면 90년도에 북한으로 들어가서 김일성을 만나서 노태우 정부의 비밀 메시지를 전달한다. 서로의 채재를 10년 동안 인정해 주자, 그다음에 우리 서로 통일을 논의하자.


그때 그 말을 듣던 당시 어렸던 김정일이 벌떡 일어나서, 너희 남조선이 체재를 인정해 주면 우리가 살아남고, 체재를 인정해주지 않으면 우리가 죽는기야? 응? 어디서 건방지게! 라며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그때 옆의 당간부들이 좆됐다며 영혼이 털려서 이제 김우중 회장이 북한을 빠져나가지 못할지도 모른다며 멘붕상태가 된다. 가만히 앉아 있던 김일성이 처음으로 김우중 회장에게 나이를 물어본다.

김 회장은 나이가 몇인가?

제 나이가 쉰다섯입니다.

그 말을 듣고 김일성이 쟤(김정일)가 올해 마흔아홉인데 김 회장이 여섯 살 형이니까 아량 있게 좀 봐주기오.


김우중 회장은 김일성에게 그러면 김정일과 단 둘이 만나게 해달라고 한다. 그리고 두 사람의 만남이 이루어진다. 그때 김우중이 김정일을 설득한다. 이렇게 저렇게 십 년 동안 남북채제가 보장이 되어야지 북한도 좋고 대한민국도 좋다. 그렇게 막후 협상이 이루어지는데 그 모든 걸 김우중 회장이 한다.


그래서 지미 카터가 김일성을 만나게 한 것도 김우중 회장이 만든 그림이다. 지미 카터를 북한으로 초정을 해서 뱃놀이를 하면 북한도 명분이 생기고 미국도 명분이 생긴다. 그래서 김일성을 설득해서 김우중 회장이 지미 카터를 북한으로 불러서 두 사람을 만나게 한다.


지미 카터가 대한민국에 공이 있는 1도 없다. 특히 지미 카터가 꼴베기 싫은 건 광주항쟁사태가 일어났을 때 대한민국 국군은 미군의 허락을 받아야 움직일 수 있었다. 평시 작전 통제권이 없기 때문에. 전두환이 공수부대를 움직였다는 건 미군이 그걸 눈감아줬다는 말이다. 제2의 이란 사태가 있을 수 있으니까 광주민주화항쟁을 폭동으로 간주하고 전두환 정권아래 공수부대를 마음대로 움직이게 해 준 것이다. 이건 정말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이번, 바이든이 우리나라에게 보조금을 받으려면 반도체 내부를 우리가 다 봐야 하겠다고 하는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을 또 하려고 한다. 재선이 걸려있기 때문이다. 재선 하지 못하면 미국의 불명예 7번째 대통령이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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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즈와 식빵과 과일로 도시락을 싸와서 오늘은 좀 먹었다. 도시락인지 군것질인지 분간은 안 가지만 어떻든 도시락으로 싸와서 먹었다. 도시락이라는 건 한 번은 싸와서, 아니 몇 번은 싸와서 먹을 수 있지만 매일 도시락 싸기는 힘들다.


나는 일 년 동안 내가 먹을 도시락을 싸왔는데 그저 냉장고에 있는 밑반찬을 넣어서 가져올 뿐인데 너어어어어어무 귀찮다. 도시락은 아무리 없어 보이게 싸줘도 도시락을 싸준 사람의 마음이 손가락을 통해 전달되니까 도시락이라는 건 인간 사회에 남은 마지막 인간의 정이 아닐까 싶다. 아무리 AI가 발달을 해도 로봇이나 안드로이드가 도시락을 먹지는 못할 테니까.


3월 2일은 전국 엄마들의 자유가 이뤄지는 날이다. 아이들이 개학을 해서 학교에서 급식을 먹기 때문이다. 여름 방학이 올 때까지 이제 자유의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고 라디오에서 내내 사연이 나오고 있다. 우리나라는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급식이 나오기 때문에 도시락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어제 일본영화 ‘오늘도 괴롭히는 도시락’을 봤다. 도시락으로 인간관계를 회복하는, 일본영화에서 자주 언급하는 내용의 이야기다. 일본은 도시락, 벤또 이야기가 끊이질 않는다. 아마도 아직 아이들에게 도시락을 싸주는 일본 가정이 많아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영화는 도시락을 통해 삶을 이어가려는 두 집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도쿄지만 도쿄가 아닌 곳, 히치죠지마라고 하는 인구가 7500명 정도 사는 작은 섬마을이 배경이다. 주인공 시노하라 료코가 이 마을로 오게 된 이유는 남편을 잃고 어린 두 딸을 키우다 보니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어린 두 딸을 늘 집에 두고 일을 나가던 어느 날 큰 딸이 울면서 엄마가 없어지면 작은 딸이 엄마가 보고 싶어서 계속 운다는 말에 가난하게 살더라도 같이 있고 싶어서 작은 섬마을로 오게 되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작은 딸이 여고생이 되었는데 어릴 때 엄마와 결혼을 하겠다던 어린 딸이 초반항기를 겪으면서 엄마와 말도 하지 않으려고 한다. 엄마에게 할 말은 거실에서 문자로 해버린다. 그런 딸이 미워서 캐릭터 도시락으로 괴롭히려는 엄마. 도시락 뚜껑을 여는 순간 반 아이들이 몰려 들어서 이런저런 의견을 내놓는다. 그러기를 3년 동안이나 한다.


또 한 집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건 패스. 이 영화의 필름 같은 색감이 너무 마음에 든다. 도시락에 들어간 캐릭터가 살아 움직이는 그래픽도 귀엽고 재미있다. 영화 중간에 영화가 끝난 줄 알고 화면에 이름이 줄줄 올라가는데 시노하라 료코가 아직 안 끝났어! 라며 소리를 치니까 이름들이 슬슬 내려가는 것도 재미있는 포인트다.


소소하고 평화롭고 반항하는 십 대와 전쟁 같은 하루하루를 보내다가 그만 일이 터지고 만다. 잔잔한 이야기에 시노하라 료코와 요시네 쿄코의 연기를 보는 것도 재미있다. 도시락을 매일 싸는 건 미치는 일이다. 그런데 도시락을 매일 싸면서 도시락을 먹을 그 사람을 생각하며 행복하다면 도시락을 싸주는 이를 얼마나 사랑하는 것일까. 그런 마음이 도시락을 통해 먹는 사람에게 전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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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누가 백세주를 한 병 주기에 백만 년 만에 마셨는데 오 백세주가 이렇게 맛있었다니. 백세주 맛이 좋다는 건 뭔지 알지. 나 예전에 피시방에서 아르바이트할 때였다. 나는 야간알바라 밤 10시부터 오전 10시까지 일을 했다. 대학교 근처라 방학이면 사람이 없어서 밤새기에는 편했다. 대학교 근처애서 집까지는 극과 극이라 버스를 타고 한 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가야 했다. 그래서 오전에 일을 마치고 집으로 올 때 버스를 타면 어김없이 졸았다. 버스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내려서 집으로 와서 씻고 누우면 바로 잠이 오지 않는다.


버스에서 내리면 바로 백화점이다. 하루는 버스에서 내렸는데 소주 판촉을 백화점 앞 광장에서 하고 있었다. 햇빛 때문에 밀사의 눈초리로 뜨고 그 앞을 지나가니 내레이터 모델 사이에서 누군가 나를 불렀다. 나는 더욱 밀사의 눈초리를 해서 보니 친구였다. 소주 회사에서 일을 하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만나게 되다니. 친구는 어린 시절 나의 응응 친구로 어릴 때는 무척이나 붙어 다녔다. 그러다가 중학교가 갈리고 고등학교도 다른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주말에나 보거나 친구가 이성에 눈을 떠버린 이후로는 그 마저도 어려워졌다.


서로서로 휘뚜루마뚜루 지내다가 그렇게 만나게 되었다. 친구는 소주회사에서 일을 하는 만큼 술을 잘 마셨다. 꼭 소주회사에서 일을 해서 술을 잘 마시는 건 아니겠지만 친구는 말술이었다. 같이 술을 마셔서 친구가 술에 취한 모습을 본 적이 없다. 항상 내가 먼저 뻗었다. 밤을 새우고 버스에서 졸다가 대역죄인 같은 몰골로 버스에서 내려서 집으로 오다가 친구와 마주쳤다. 친구는 이제 곧 점심시간이니까 같이 밥이나 먹자고 했다. 밥 먹고 집으로 들어가서 푹 자라고 했다.


나는 알겠다고 하며 점심시간이 오기까지 그 옆에 앉아서 기다렸다. 햇빛을 받아서 노곤해진 몸과 눈꺼풀에는 성냥개비 삼만 개를 올려놓은 듯 자꾸 내려왔다. 옆에서 내레이션 모델들이 마구 판촉을 하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지만 땅밑으로 꺼져내려가는 듯 몸은 축축 늘어졌다. 그때 친구는 점심시간이 되어서 나를 데리고 근처 삼겹살 집으로 갔다. 우리는 삼겹살을 구웠다.


친구는 술 한잔 할래?라고 하더니 소주는 너무 해비 하니까 백세주를 먹자고 했다. 나는 알겠다고, 그래서 백세주를 주문해서 마신 게 15병을 마셨다. 아무튼 내가 친구에 비해 3분의 1 정도 마셨다. 나중에는 고기 맛이 뭔지도 몰랐다. 백세주는 달달하니 맛있어서 이게 술인지 음료인지 모르게 넘어가는데 어느 기점을 넘어서면, 여느 술과 마찬가지로 뇌를 잠식하고 몸을 문어화 시킨다. 나는 집으로 어떻게 왔는지도 모르겠고 도대체 우리 둘이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도 기억이 없었다.


친구는 그렇게 마시고도 벌떡 일어나서 또다시 일을 하러 갔다. 삼겹살 집 사장님이 신나서 백세주를 막 갖다 주던 게 생각이 난다. 이제 소주도 술집에서 육천 원의 시대가 올 거라는데 백세주는 술집에서 얼마에 팔까. 어제 마신 백세주를 보니 병도 예전에 비해서 작아진 것 같고, 한 병을 마셨지만 뭐랄까 전혀 술이 오르지 않았다. 이제 시대는 알코올 도수는 점점 줄어들고 병은 작아지고 가격은 올라간다. 그 말은 예전에 비해 비싸진 소주나 술을 한두병 마셔서는 전혀 술기운이 오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삼겹살에 소주 한잔 없다면  이것마저 없다면라고 한 안도현 시인의 퇴근길에서처럼 삼겹살에 소주 한잔은 이제 없어질지도 모른다. 건강을 위해서 도수를 줄인 소주가 쏙쏙 나오지만 도수가 약해서 사람들은 몇 병을 마신다. 도수가 강한 술을 파는 외국 같은 경우를 보면 술이 독하니 한두 잔에 술기운이 올라서 좋은 면도 있다. 사람들은 전부 제각각이라 약한 도수에 비싸진 술을 반기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욕을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 병을 마시고 전혀 술기운이 오르지 않는다면 한창때인 대학생들은 술을 얼마나 마셔야 할까. 어찌 되었던 너무나 오랜만에 마신 백세주는 맛이 좋았다.


친구는 타이어 회사로 이직했는데 소주회사를 다니니 술을 너무 마시게 된다는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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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집을 나오니 아 날이 좋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늘에 있으면 몹시 쌀쌀한데 해가 비치는 양지바른 곳은 따뜻했다. 어린 시절에는 겨울과 봄의 길목에서 아버지와 목욕탕에 가는 게 참 좋았다. 아버지와는 주말 저녁에 대중목욕탕에 갔다. 여름에는 가지 않았고 날이 쌀쌀해지면 아버지와 함께 주말 저녁에 대중목욕탕에 가서 목욕을 했다. 차디찬 겨울에 아버지와 대중목욕탕에 가는 것도 좋았지만 기묘한 기분이 드는 겨울과 봄의 길목에 대중목욕탕에서 목욕을 하는 게 좋았다.


이맘때가 되면 기시감이 늘 드는데 기시감이 드는 꿈도 부쩍 자주 꾼다. 하지만 꿈은 늘 호러블하다. 꿈속에서 현실이 아니라는 걸 알지만 꿈 속이니까 꿈속에서도 꿈속만의 리얼리티를 느끼니까 현실은 아니라서 안도감이 드는 동시에 리얼하니까 불안한 것이다. 그리고 목욕탕에 가는 꿈을 꾼다. 옷을 입은 채로 대중목욕탕에서 목욕을 한다. 그러나 발가벗고 목욕을 하는 사람들과 이질감이 없다. 역시 이상하다는 걸 알지만 이상하지 않다.


옷을 입은 채 대중목욕탕에서 목욕을 하는 상상을 어릴 때 왕왕했었다. 그러다가 진짜 기회가 한 번 왔었다. 고등학교 때 같은 반 친구 중에 목욕탕 집 아들내미가 있었다. 그 녀석과는 썩 친하게 지내지 않았는데 그 녀석이 팝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더니 내가 듣던 앨범을 빌려가면서 자연스럽게 친하게 되었다. 나는 그 녀석에게 음악감상실이라는 세계에 눈 뜨게 해 주었다.


목욕탕 옥상에 그 녀석의 집이 따로 있었다. 와 정말 부러웠다. 그 녀석은 실천력이 좋은지 방에 좋은 오디오와 스피커를 사들여 놓았다. 빵빵한 사운드로 듣는 마이클잭슨은 정말 너무나 멋졌다.  그리고 그날은 그 녀석의 집에서 밤을 보냈다. 목욕탕 옥상에 따로 마련된 그 녀석의 작은 집은 정말 좋았다. 영화에서나 볼 법한 아담하고 멋진 방이었다.


소파와 침대가 있고 기타 그리고 오디오, 여러 대의 스피커. 컴퓨터도 두 대나 있었다. 창문을 열면 밤하늘의 별이 바로 보였다. 그렇게 밤을 보내고 이른 아침에 녀석을 나를 깨우더니 목욕탕에서 씻자고 했다. 아직 손님이 오지 않은 대중목욕탕은 울림이 있었다. 나는 그때 옷을 입은 채 목욕을 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샤워기를 들고 옷을 입은 채 물을 몸에 뿌리고 싶었다.


살다 보니 간단하게 하면 되는데 간단하지만은 않은 경우가 있다. 옷을 입고 목욕을 하는 것, 옷을 입은 채 영화처럼 샤워를 하는 것도 그렇다. 옷을 입고 샤워를 한다고 해서 뭔가 큰일이 나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에게 질타를 받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쉽게 하게 되지 않는다. 영화에서처럼 속이 상한 일이 있을 때 샤워기의 물을 맞으며 옷을 입은 채 크게 울고 싶어도 잘 안 된다.


너무 쉬워서 언제라도 하면 되지 하는 것들이 있다면 지금 해야지 언젠가 하려고 하면 잘하게 되지 못하거나 마음이 꺾이거나 누군가와 함께 하려고 했는데 그 누군가가 없어지고 마는 경우가 있다.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히잡도 그렇다. 저쪽 나라의 히잡 그거 그냥 벗어버리면 되지만 그게 쉽게 되지 않는다. 히잡 벗었다가 몸이 난도질 당해 죽음을 당하게 되기도 하다. 그놈의 히잡 그게 뭐라고, 쉽게 그냥 벗어버리면 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하는 엄격하고 오래된 잘못된 관습이 그걸 막고 있다.


귀화해서 한국인이 된 알파고시나씨는 한국 방송에서 튀르키예 지진이 일어난 것에 대해서 그 나라 정부의 잘못된 대처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고 한국의 여러 방송, 국영방송이 아닌 민영, 개인 방송에까지 제재가 들어왔다. 알파고가 속해 있는 기획사 대표에게 대사관에서 제제가 들어왔다고 한다. 알파고가 거짓된 가짜뉴스를 말한다면 제재를 가해도 되지만 있는 사실을 이야기한다고 해서, 그것도 귀화해서 한국인이 된 알파고의 한국방송 출연 재재를 가한다. 게다가 튀르키예 한국 전문가들도 알파고와 함께 방송에 나오는 것을 꺼려하고 있다. 간단하지만 간단하지 않게 흘러가는 건 여러 곳곳에 존재한다. 그것이 설령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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