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눈을 떴을 때 읽었던 미국소설 떠 올랐다. 특수부대 출신의 거구의 주인공이 좋아하고 믿는 사람들을 쳐다보는 눈빛이 우수에 찬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나 우수에 찬 눈빛 이후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를 긴장감이 도는 장면이 말이다. 왜 그런 장면이 떠올랐을까. 꿈을 꿨는데, 꿈은 어이없지만 강아지와 노는 꿈을 꾸었다. 나의 품에 자꾸 안기려는 강아지가 무거워서 잠시 내려놓았는데 느닷없이 강아지 배가 벌어지고 그 안에서 사람들이 춤을 추며 나왔다. 꿈은 항상 그런 식이야. 그런 비현실적 꿈속에서 나는 언제나 쫓기거나 그 안에서 벌벌 떨다가 일어난다. 말도 안 되는 꿈. 말이 되면 그게 꿈이야?라고 누가 그러겠지.


존윅을 보면

목표를 위해 사는 자. 목표를 위해 죽는 자. 목표를 위해 죽이는 자.라는 대사가 나온다. 나는 어디에 속할까. 그 이전에 나에게 목표라는 것이 있을까. 목표라는 거 정해 놓으면 목표는 달아나거나 도망가고 만다.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목표가 목적과 비슷한 거라면 신해철이 그랬다. 목적에 도달하려 너무 애쓰지 마라, 태어난 게 목적이라고. 이렇게 멋진 말을 하는 사람은 늘 일찍 죽는다.


잠을 잘 때에는 팬티를 입지 않는다. 팬티를 입지 않을 뿐이지 발가벗고 잔다는 말은 아니다. 아침에 옷을 입다가 팬티가 몇 장인지 보니 15벌이었다. 15벌이나 필요 있을까 싶은데 뜯지 않은 새 팬티도 몇 벌이나 있었다. 팬티와 양말은 하루에 한 번씩 갈아입고 신는다. 팬티도 이틀입을 수 있는데 이상하지만 하루에 한 번 갈아입는다. 누군가 정한 것도 아닌데 팬티는 이틀씩 입지 않는다. 물론 부득이하게 이틀입을 경우도 있다. 이런저런 이유로 외박을 하게 되면 어쩔 수 없이 팬티를 이틀 입어야 한다. 매일 갈아입어야 하는 시스템이 머리에 박혀 있음에도 이틀 입어야 할 때는 그것대로 그냥 받아들인다. 그러고 보면 인간은 단순하게 적응을 잘한다.


명절이라 오랜만에 바다에 나왔다. 저 바다 위에는 침묵과 같은 부표가 떠 있었고 선명한 햇살이 대기에 박혀 있는 먼지를 보여주었다. 사람들이 여기에서 저기로 조금씩 움직이고 있어서 시간이 움직인다는 걸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빛과 그림자가 확실한 대조를 보여주는 날이었다. 그림자는 색채가 없지만 빛은 색깔을 알 수 없다. 바다는 빛과 그림자 때문에 푸르게 보였다. 사람도 빛과 그림자 덕분에 고유한 색을 지닌다.


창밖으로 보이는 세계는 진정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평온하고 평범하다. 이 세계는 정말 이토록 평범한 것일까. 애초에 평범하게 탄생했을까. 아마도 그건 아닐 것이다. 세계는 혼돈이었다고 한다. 카오스 그 자체였다고 하지. 그런데 그런 이 세계에 인류가 등장하면서 조금씩 평범해지기 시작했다고. 후에 카를 마르크스가 프롤레타리아를 설정함으로 그 평범함을 고정했다고 해. 그리하여 스탈린주의는 마르크시즘에 직결된다고 한다. 누군가 그랬는데, 마르크스는 원초의 혼돈을 기억하고 있는 천재 중의 한 사람이라고. 그는 흔치 않은 사람 중 한 사람이라고.


고요한 호수 같은 바다를 멍하게 바라보고 있으면 쓸데없는 생각을 하게 된다. 왜냐하면 집 앞에 나와서 보는 이 바다는 10년 전에도 이런 모습이었다. 60년 전에도, 100년 전에도 이런 모습이었고 200년 전에도 이런 모습이었다. 그리고 50년 후에도 이런 모습일 것이다. 이 바다를 보는 사람들만 달라진다. 인간은 필멸하는 존재로 유한하니까. 그러나 바다는 불멸이며 무한이다. 이 세계가 끝이 나면 모를까. 아니 끝이 난다고 해도 아마 바다는 어떤 형태로든지 살아남아 있을 것이다. 에반게리온에서 처럼 온 세상의 바다가 붉은색으로 변했을지라도 바다는 바다라는 이름을 지닌 채 무한하게 살아남을 것이다.


그리하여 존재라고 하는 건 개체로서 있는 것이 아니라 혼돈으로서 있다고 그 누군가가 말했다. 그 누군가는 누구일까. 그 누군가는 모든 걸 다 아는 것처럼 말을 한다. 정말 모든 것을 다 아는 사람이 존재할까. 역시 존재하는 건 혼돈이구나. 눈으로 보이는 평온과 평범을 그대로 믿으면 안 된다. 평범은 대립의 일체화의 또 다른 말이기 때문이다. 평범 그 뒤에는 무질서와 혼란스러운 관념이 서로 이를 드러내고 대립하고 있다. 그 현실의 정합과 비현실의 부정합이 기묘하게 사이클을 이어가고 있다. 그러나 지금 현재 내가 고작 해야 할 고민은 이제 곧 끓여 먹어야 할 라면에 떡국 떡을 넣을지 만두를 넣을지 말지를 조카와 함께 선택하는 것이다. 현실의 세계는 그런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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