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난 10여 년 동안 <수사연구>의 취재기자와 편집장으로 일하면서 한 달에 최소 두 번 살인사건, 사기사건, 최근에는 사이버범죄 취재를 위해 전국을 돌아다녔다. 그렇기에 이제는 어떤 사건이든 크게 충격을 받지는 않는 편이다. 그럼에도 살인사건이건 폭력사건이건, 사기사건이건, 최근의 사이버범죄들이건 공통적으로 느끼는 소회가 있다. 바로 사건이 늘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에 있다는 점이다. - '프롤로그' 중에서



책의 저자 박진규 소설가는 국내 유일의 수사 전문지 <수사연구>의 편집장이자 취재기자 신분으로 2017년부터 형사들을 만나 수사 과정을 취재해왔다. 이 책은 형사와 마주 앉아 사건을 돌아본 순간과 미처 기사 내용에 담지 못했던 이야기를 담은 강력사건 취재 에세이다.

매경출판의 가제본 서평단에 선정되어 제공받은 가제본을 읽고서 서평 작업에 임하고 있다. 정식 출간된 도서는 11개 장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제공받은 가제본은 1~3장의 내용만을 포함하고 있음을 먼저 밝히며, 3개 장에 수록된 내용을 토대로 리뷰글을 작성하고 있다.


파란 우산, 노란 모자, 미니스커트

실종된 남편의 통장에서 현금을 인출하는 낯선 여자가 있다. 형사들은 남편의 여성관계를 조사하지만 이 여성을 아무도 알지 못한다. 파란 우산, 노란 모자, 미니스커트 등으로 변신해 자신의 존재를 위장했기 때문인 듯하다. 이 여성은 CCTV의 사각지대에 위치한 고시텔 건물 4층에 올랐다 내려오면 전혀 다른 여성으로 변모했다.

한편, 실종된 남편은 아내에게 숨긴 비밀이 하나 있었다. 그 비밀은 오직 CCTV 속 이 여성만 알고 있다. 그러나 이 비밀을 들은 그녀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살인에 이르고 만다. 도대체 어떤 비밀이며 하필 이 여성에게만 털어놓았을까? 정말 어처구니 없게도 그 비밀은 두 사람이 동시에 한 여자를 사랑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영화 ⟨범죄도시⟩의 흥행 이후 형사들 사이에 재미있는 유행어가 퍼졌다는 말이 돌았다. 바로 ‘내가 마동석이지!’라고 술자리에서 말하는 강력반 형사들이 은근히 많아졌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마동석 콘테스트’는 없었지만 강력반 형사들 중 덩치나 인상 면에서 영화 ⟨범죄도시⟩의 마석도 형사와 흡사한 인물들이 많다. 이중에서 한 사람을 꼽자면 1998년 당시 서울 중랑경찰서 강력계장이었던 김 형사라고 저자는 말한다.

2026년 현재 서울경찰청 중요미제ㆍ장기실종사건수사팀에서 근무하는 김 형사는 대한민국의 유명한 베테랑 강력반 형사 중 한 명이다. 키는 그리 크지 않지만 넓은 어깨와 특유의 자신감, 그리고 넘치는 기백이 딱 강력반에 어울린다. 얼핏 보면 양아치 처럼 보이는 스타일이지만 앞치마를 두른 학교 앞 분식집 아저씨나 세탁소 아저씨 같은 인상을 풍긴다.

이야기가 옆길로 살짝 비켜갔는데 다시 이 사건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당시 서울 중랑경찰서 강력계장은 돈을 인출하는 CCTV 영상에서 얼굴은 불명확해도 단발머리에 안경을 쓴 모습은 알 수 있었다. 파란 우산이나 챙 넓은 모자로 얼굴을 가리고 있지만 미니스커트를 입고 있음도 확인할 수 있었다. 피해자의 내연 여성인가? 처음엔 다들 이렇게 짐작했다. 사실 이 사건은 처음 실종사건으로 신고 접수되었다고 한다.

2018년 6월 7일 저녁 7시 50대 후반의 남성 A씨의 아내(50대 중반) B씨는 남편의 전화를 받았다. 친한 동생과 한잔하고 있어서 저녁에 좀 늦게 들어간다는 말이었다. 이 부부의 관계는 좀 특별했다. 마음이 맞지 않아 4년이나 별거하다가 2018년 봄에 다시 합치기로 했다. 이후 부부는 함께 등산을 다니는 등 좋은 관계를 이어갔다.

6월 8일 새벽 4시 30분에 눈을 뜬 B씨는 남편이 귀가하지 않은 상태임을 발견하고 곧바로 전화를 했다. 전화를 받은 남편은 아는 동생 집에 와 있다며 술자리에서 지갑을 분실, 이를 찾는다고 늦어버렸다고 말했는데, 이 전화가 부부의 마지막 통화이자 대화였던 셈이다. 이후에 아내의 전화를 받지 않더니 뜬금없이 이날 저녁 7시 30분 경 부산에 갈 일이 있어서 통화가 불가하다는 카톡 메시지를 보내왔다. 이 메시지를 끝으로 남편의 휴대폰 전원은 아예 꺼졌다.

이에 아내는 남편이 일하던 봉제 공장을 찾아갔다. 이곳엔 남편의 숙소가 있어서다. 남편은 없었다. 남편 주변인들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6월 7일 이후 남편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6월 11일 오후 중랑경찰서 여성청소년과에 실종 신고가 접수됐다. 실종수사팀은 즉각 추적수사를 시작했다. 남편의 휴대폰이 꺼져있던 위치는 면목동이었다.

수사가 급진전될 수 있는 중요한 정보가 아내로부터 전해졌다. 6월 12일 남편의 통장을 정리하던 아내가 남편 계좌의 출금 거래를 발견하고 이를 수사팀에 제보한 것이다. 모 은행의 군자역 지점에서 6월 9일 100만 원씩 3회, 90만 원 1회 총 390만원의 인출이 있었던 거다. 이를 연락받은 경찰은 곧바로 해당 은행으로 출동해 CCTV 영상을 입수했다. 삼사십대로 보이는 여성이 ATM에서 돈을 인출하는 장면이 포착되었다. 

비도 오지 않는 밤에 우산까지 쓰고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미니스커트에 하이힐을 신고 있어서 여성임을 식별할 수 있었다. 다만, 지나치게 여성스러운 게 꺼림칙했다. 가발을 쓴 듯한 모습에 얼굴 노출을 적극 꺼려한 점이 여장 남성일 수도 있다는 의문도 갖고 접근했다. 현금을 인출한 용의자는 바로 아내와의 통화에서 밝힌 '아는 동생'이었다. 범행 동기는 아는 동생이 4년이나 내연 관계를 유지하는 여성을 자꾸만 양보하라는 통에 화가 나서 저지른 범행이었던 것이다.

박카스와 썩은 바나나

노부부와 딸이 사는 평범한 가정집에 강도가 들어 남편을 살해한 사건이 발생한다. 강도는 안주인을 옆방에 가두고, 뒤늦게 나타난 딸을 결박, 딸의 아버지에게 원한이 많다는 말을 남긴다. 빼앗은 일가족의 휴대폰들은 집 안에 숨겨둔 채 떠난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었다.

현장 상황을 이상하게 여긴 수사팀은 옷장에 묻은 혈흔을 통해 이 사건 속에 숨어 있는 거짓 진술을 밝혀낸다. 또 탐문 수사 끝에 중년의 남자를 살인범으로 긴급 체포한다. 이 남자는 원한이 있는 게 아니라 사랑 때문에 이 기정집의 가장을 살해했다고 자백한다. 사랑한 대상은 바로 사망한 피해자의 아내였다. 살인사건을 함께 공모했던 관계였다.

빈방에 놓여 있던 박카스 한 병과 썩은 바나나 2개를 찍은 현장 사진의 모습은 바로 범인에게 주어진 최후의 만찬이었다. 미처 먹지 못한 박카스와 현장 검증 때까지 일부가 검게 변색한 바나나는 빈방에 그대로 남겨져 있었다. 저자가 이 사건을 취재할 때는 뜨거운 8월의 휴가 시즌이었다. 해운대경찰서였다.

내연 관계였던 범행 공모자의 진술이 달랐다. 아내는 내연남에게 강요당해 범행이 시작됐다고 말했으나 내연남은 그녀를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아무튼 범행을 공모했던 둘 중 한 사람은 사망한 피해자에게 깊은 원한이 있었음이 분명해 보였다.

2018년 7월 2일 부산 해운대구 재송동의 3층집에서 살인 사건이 발생했었다. 강도가 침입해 70대 초반의 남편은 사망했고, 40대 초반인 딸은 성추행을 당했다. 사건이 발생한 날 밤에 112에 신고 전화를 한 사람은 딸의 친척이었다. 휴대폰을 모두 빼앗긴 상태라 딸이 근처에 사는 친척 집까지 달려가 신고 전화를 부탁했던 것이다.

사체死體를 덮은 이불은 피가 흥건하게 베어 있었지만 사방으로 붉은 혈흔이 튀지 않아 현장 사진은 비교적 얌전한 편이었다. 보통의 경우 살인 현장의 사체는 피범벅이고 현장 곳곳도 피로 칠갑되어 있어서 사진을 자세히 보기 전부터 인상이 찌푸려진다. 이곳 사건 현장은 그 정도는 아니었다.

'현장과 어긋난 진술을 하는 인물은 반드시 의심하라. 
그 인물이 범인일 가능성이 높다'

60대 아내의 진술로는 오후 5시 넘어 남편은 안방에서 자고 있고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데, 갑자기 범인이 넥타이 끈으로 자신의 손을 묶어 옆방에 가두었다고 진술했지만 이 점이 현장 상황과 맞지 않았던 거다. 즉 옷장에 묻은 혈흔은 이미 남편이 사망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인데, 아내는 범인이 갑자기 침입해 자신의 손을 묶어 옆방에 가두었다고 진술했으니 말이다. 더구나 이후 진술에선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발뺌을 했다. 40대의 내연남은 돈을 받고 청부살인을 했음이 밝혀졌다. 정말 사랑을 하기는 했을까?    

돈을 세는 남자

2명의 노숙자가 장기 투숙한 제주도의 한 모텔, 오랜 지병을 앓던 한 남자가 속옷 차림으로 모텔 침대에 누운 채 사망했다. 다른 노숙자는 옷걸이에 걸린 바지 주머니에서 사망자의 지갑을 꺼내 돈을 빼 간다. 방 밖으로 나가 복도에 쭈그려 앉아 돈을 센다.

변사變死 현장에 도착한 형사는 돈을 세고 있는 이 남자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그런데, 사망자는 심한 알코올 중독에 중증 당뇨 환자였다. 언제 죽어도 더 이상 이상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형사는 증거를 잡고자 노숙인 쉼터를 찾아 다닌다. 한 노숙인의 증언이다.

"그렇게 함부로 남에게 돈을 맡길 사람이 아닌데?"

이번에 소개하는 사건은 제주 서귀포경찰서 형사팀에서 해결한 살인사건이다. 어떤 면에선 굉장히 씁쓸한 사건이다. 한 베테랑 노형사의 눈썰미가 돋보이는 사건이기도 하다. 만일 그의 눈썰미가 없었다면 사건은 단순한 변사사건으로 종결됐을 가능성이 크다.

2018년 6월 22일부터 2명의 노숙자가 제주 서귀포시의 한 모텔에 묵기 시작했다. 50대 중반의 A씨와 50대 후반의 B씨는 일주일 넘게 이 모텔에 투숙했다. 모텔 주인장에 따르면, A씨는 당뇨병에 알코올 중독 환자였는데 목돈 500여 만 원을 손에 쥐었기에 이곳에 방을 얻어 지내고 있다고 했다. 그 돈은 보행자 교통 사고 보험금이었다. 신고자도 모텔 주인이었다.

수사팀은 모텔 CCTV 영상에서 이상한 장면을 포착했다. 6월 28일 오전 10시경 B씨는 혼자 외출했다가 소주가 든 것으로 추정되는 검은 색 비닐 봉지를 들고 돌아왔다. 그는 방에 들어가기 전 들고 있던 돈의 일부를 주머니에 넣은 후 다시 돈을 세고 방으로 들어갔다. 이는 몰래 돈을 빼돌리는 것으로 보였다. 사건의 결말은 B씨가 돈을 훔친 사실이 들키자 A씨를 질식사시킨 것이었다.     

#사건이보이는것보다가까이있습니다 #박진규 #매경출판 #범죄실화 #수사연구



댓글(1)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카스피 2026-09-03 1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현실속 범죄는 범죄소설보다 더 그로테스크한것이 더 많은것 같아요.
 
나의 화두 여행 - 이야기로 묻고 철학으로 답하다
박병기.강수정 지음 / 사유정원 / 2026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고등학교에서 25년간 윤리를 가르치면서 도덕교육학 박사 학위를 받은 저자 강수정이 이 책의 초고를 완성했다. 그의 지도교수이기도 한 공저자 박병기는 초고를 검토하면서 고등학생 정도면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쉬운 말로 바꾸도록 권하고 대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시민이라면 누구나 철학함이 가능해야 한다고 믿는 우리 두 저자는 이 책을 읽은 시민들이 철학함의 즐거움과 함께, 철학함이 어렵지 않음을 느낄 수 있으면 참 좋겠다는 바람을 갖고 있다. - '머리말' 중에서



총 7일간의 강의 형식으로 구성된 책은 행복을 찾다(1일차), 진실을 마주하다(2일차), 자유를 묻다(3일차), 쾌락을 추구하다(4일차), 도덕성을 지키다(5일차), 실존을 선택하다(6일차), 공존의 길을 찾다(7일차)에 걸친 일곱 개 화두에 관해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데카르트, 스토아 철학자, 스피노자, 에피쿠로스, 벤담, 밀, 홉스, 흄, 칸트, 니체, 사르트르, 싱어, 롤스, 하버마스 등의 주요 철학자들의 답을 만난다.


먼저 현대인들의 최대 관심사인 행복이란 화두를 살펴본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작은 키에 뭉퉁한 코를 지닌 못생긴 사람이었다. 그의 직업은 石工이었는데, 워낙 젊은 사람들과 대화 나누기를 즐겨 했다. 스스로 무지無知하다고 판단했기에 델리 신전에 적혀 있던 경구警句인 '너 자신을 알라'를 차용해서 만나는 사람에게 이를 마치 화두話頭처럼 던졌다고 한다. 어쩌면 대화 그 자체가 그에겐 '행복'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단순히 길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을 붙들고 '너 자신을 알라'를 외치는 이상한 사람으로 그를 바라보면 곤란하다. 비록 가진 게 적어서 젊은 아내에게 구박을 받는 게 일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라를 위한 로열티만은 확실해서 나이 마흔 살까지 세 차례나 步兵으로 전투에 참가했을 정도였다. 참고로 그 당시의 전투에선 보병의 사망률이 가장 높았다. 이에 반해 전쟁터도 아니고 군에 입대조차 않으려고 온갖 꼼수를 쓰는 청년은 겁쟁이여서 그럴까?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란 자전적 소설의 주인공은 한스 기벤라트이다. 그는 마을에서 촉망받는 학생이었고 아버지, 교장, 목사의 기대를 받으며 경쟁률이 치열했던 신학교에 당당히 입학했다. 모범생이었던 그는 몽상가 친구를 사귀면서 공부에 대한 열의를 잃어갔다. 친구가 퇴교당한 후 우울증과 신경쇠약이 심해져 결국 귀향하고 만다.


신학교를 졸업한 뒤 수도원을 거쳐서 목사가 되려던 한스는 이제 길을 잃고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기계공의 견습 사원이 된다. 손에 물집이 잡힐 정도로 힘들었지만 차츰 적응해나가던 어느 일요일 오후, 그는 동료들과 술을 마시고 귀가하는 길에서 실종된 후 다음날 차가운 물 속에서 발견된다.



소크라테스의 말 '너 자신을 알라'는 의미를 다시금 떠올려보자. 자신을 안다는 것은 스스로의 생각과 행위를 끊임없이 반성하며, 자신의 내면 영혼을 돌보는 일임을 가르킨다. 즉 삶의 의미는 외부에서 주어지는 게 아니라 스스로 성찰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모르는 것을 아는 것'이야말로 소크테스가 말하는 지혜의 출발점이다. 무지無知의 자각을 출발점으로 삼아, 그는 아테네의 명망 있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대화를 나누었다. 이 과정에서 어떤 이는 감화되었고, 다른 어떤 이는 불쾌감을 갖고 반감을 가졌다. 사실 자신이 모른다는 걸 드러내는 질문은 환영받기 어렵다. 


결국 반감을 가진 사람들은 소크라테스를 음해陰害하기 시작했다. "젊은이를 타락시키고 자신만의 신을 믿는다"는 구실로 그를 고소했다. 재판에 넘겨진 그는 사형 언도를 받는다. 이같은 앎은 도덕적 차원의 앎이다. 알면서도 나쁜 행위를 벌이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말이다. 그렇다. 그가 말하는 지혜란 단순히 안다는 것을 넘어 스스로의 욕망을 조절할 수 있는 '참된 앎'의 상태를 가르킨다. 


한 나라의 대통령에 당선된 범죄 혐의자는 지금도 정적을 무자비하게 음해하면서 자신의 무지無知를 드러내지 않으려고 진면목을 철저하게 숨긴다. 소크라테스는 재판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지만, 이 사람은 재판만은 피하려고 온갖 꼼수를 다 동원하고 있다. 예상 밖의 재판 결과에 대해 여러 추종자들이 제안한 탈옥을 거절한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다'라며 당당하게 독배를 들이켰다. 행복한 철학자였다.



그리스인들은 '행복을 잘 살고 잘 행위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마다 의견이 다를 수 있다는 점을 인정, 아래와 같이 3가지로 구분했지만, 그는 외부 대상에서 의존하는 것은 자족적自足的이 아니므로 관조적 삶을 추구했다.


행복을 쾌락으로 생각하는 사람들

행복을 정치적 명예나 사회적 성공에서 찾는 사람들

행복을 관조적觀照的 삶에서 찾는 사람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이란 탁월성에 따른 영혼의 활동'이라고 했다. 비이성적인 부분은 욕구적慾求的 측면과 영양 섭취를 통한 성장의 원인이 되는 식물적食物的 측면으로 구분했다. 탁월성은 무엇일까? 탁월하다는 것은 '고유의 가능'을 잘 수행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탁월성이란 "그것에 의해 좋은 인간이 되며, 자신의 기능을 잘 수행하게 만드는 품성의 상태"라고 말했다.



즉, 좋은 인간이 된다는 것은 자신의 욕망과 감정을 무작정 따르는 존재가 아니라, 무엇이 옳고 좋은 삶인지를 숙고하며 살아가는 존재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자신의 기능을 잘 수행한다는 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고유한 능력인 이성을 바탕으로 삶을 조화롭고 균형 있게 이끌어가는 것이다. 이를 위해 인간은 두 가지 탁월성을 배양해야 한다. 바로 지적 탁월성과 성격적 탁월성이다.


지적 탁월성~ 지성의 덕德(교육 과정을 통해 길러짐)

성격적 탁월성~ 품성의 덕德(반복적 습관과 훈련 속에서 길러짐)


성격적 탁월성(품성의 덕)은 맹목적인 습관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인간은 상황마다 무엇이 지나치고 무엇이 부족한지를 판단해야 하기 때문에 품성적 덕은 지성적 덕중의 하나인 '실천적 지혜phronesis'의 영향을 받는다.


그것은 단순히 많은 지식을 아는 능력이 아니라, 인간의 삶에서 무엇이 진정으로 좋은 것인지를 판단하고 선택하는 지혜에 가깝다. 실제 삶에서 마주하는 많은 선택지 중 가장 바람직한 길을 헤아리고, 이를 현실 속에서 적절하게 실현해 내는 능력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실천적 지혜란 현실 속에서 인간다운 방식으로 살아가기 위해 무엇을 선택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판단케 하는 삶의 지혜인 셈이다.



이밖에도 책은 진실, 자유, 쾌락, 도덕성, 실존, 공존 등의 화두 여행을 이어간다. 영화 '매트릭스'의 주인공 네오는 기계가 만들어낸 가상의 세계를 진짜 현실로 믿으며 살아가는데 모피어스는 2개의 선택지를 내민다. 하나는 빨간 약으로 이를 먹으면 환상에서 깨어나 자신이 믿어온 세계의 진짜 모습을 목격하게 된다. 빨간 약을 먹고 깨어난 이들은 플라톤이 말한 이데아의 세계처럼 아름답고 완전한 것이 아니라  더 거칠고, 더 불완전하며, 더 고단한 현실이 펼쳐져 있다. 그래서 차라리 매트릭스 안의 삶이 더 달콤하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멋진 신세계(출생하자마자 계급이 정해짐)~ 스피노자가 답하다

비밀의 숲(황시목 검사의 도덕성)~ 칸트가 답하다

설국열차(쾌락의 계산)~ 벤담이 답하다

달과 6펜스(내 삶의 선택)~ 사르트르가 답하다

홍길동전(공정한 사회)~ 롤스가 답하다


나를 찾아가는 7일간의 여행


책은 영화와 드라마, 문학작품, 철학 등이 만나는 화두 여행을 제시한다. 영화(드라마)로는 매트릭스, 인셉션, 인터스텔라, 설국열차, 인사이드 아웃, 비밀의 숲, 옥자 등이 소개되고, 문학작품으론 수레바퀴 아래서, 꽃들에게 희망을, 멋진 신세계,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어린 왕자, 파리대왕, 황야의 이리, 달과 6펜스, 홍길동전, 변신 등의 작품이 등장한다. 철학으론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데카르트, 스토아 철학자, 스피노자, 에피쿠로스, 벤담, 밀, 홉스, 흄, 칸트, 니체, 사르트르, 싱어, 롤스, 하버마스 등의 철학자 이론들이 소개되면서 각박하고 불안한 삶 속에서 화두 여행을 통해 나를 찾도록 돕는다. 철학을 어렵게만 느끼는 모든 분들에게 책의 일독을 권한다.



#책추천 #교양철학 #나의화두여행 #박병기 #강수정 #사유정원 #인문 #인문교양 #인문에세이 #교양철학추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굿 센스 - 컬리, ‘좋은 것’에 대한 기준이 전략이 되는 사람들
(주)컬리 지음 / 세미콜론 / 2026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유통업에서 '좋은 것'이란 주로 싸고, 빠르고, 양이 많은 상품과 동일시돼왔다. 누구에게나 단번에 이해되는 기준이다. 그러나 컬리는 묻는다. "가장 저렴한 것이 항상 고객에게도 가장 좋은 것인가?" 그리고 답한다. "결코 그럴 리 없다" 컬리가 추구하는 '좋음'이 직관적이기보다 다소 추상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이 직관적이지 않음이야말로 자연스럽다. 정말 중요한 가치들은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렵지 않은가. - '프롤로그' 중에서



책의 저자 컬리는 식재료를 중심으로 뷰티와 리빙 상품까지 아우르는 온라인 커머스 기업이다. 창업자 김슬아는 2016년 '마켓컬리'를 설립해 국내 최초로 새벽 배송 시대를 열었다. 채소와 과일 등 신선 식품을 밤 11시까지 주문하면 다음 날 아침 7시 전에 배송하는 '샛별배송'을 도입했고, 상품 입고부터 배송까지 전 과정을 일정 온도로 유지하는 풀 콜드 체인 시스템을 구축했다.


'좋은 것'의 재정의


세상에 나온 지 10년이 경과한 컬리는 회사의 정체성을 "우리는 좋은 것을 추구하는 조직"이라고 공언해 왔다. 하지만 '좋은 것'이란 말은 다소 추상적으로 들리는 건 사실이다. 이에 컬리는 좋은 것에 대한 고집을 조직의 DNA로 삼아 지속 가능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창업가든, 회사 구성원이든, 일을 가장 행복하게 지속하는 방법은 결국 '자기 자신'의 문제를 푸는 거예요. 나에게 절실한 문라면, 해결될 때까지 멈출 수 없으니까요." - 김슬아


2015년 5월, 컬리는 온라인 새벽 배송 서비스를 개시, 서울 지역의 워킹맘을 중심으로 입소문을 탔다. 전날 밤 주문한 식재료를 다음 날 이른 새벽에 배송받는 아런 서비스 경험은 처음이었던 것이다. 가입한 회원은 1년 만에 10만 명을 돌파했다. 겉보기엔 성장 궤도에 올라선 것 같았다. 그런데, 회사 내부에선 곧 망할 거란 분위기가 모락모락 피어났다. 문제는 현금 흐름의 악화였다. 식재료 매입 대금을 선지급하고 나중에 판매 대금으로 회수하는 방식이라 자금 회전이 잠시만 막혀도 기업 운영이 어려운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좋은 것을 하려면 먼저 망하지 않아야 했다. 김슬아 대표는 당장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했다. 그렇다. 자금 유치였다. 한국벤처캐피털협회에 등록된 회사를 접촉했다. 절반 이상이 만나주지 않아도 컨택을 멈추지 않았다. 무작정 회사 빌딩 로비를 찾아가 '얼굴만이라도 볼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메시지를 남기고 기다렸다. 이렇게 매일 투자사와 미팅을 잡기 위해 애썼다. 역삼에서 삼성까지 테헤란로를 따라 정처없이 걷던 날까지 있었다. 과거 인베스트먼트업계에서 활동했던 내 기억을 떠올려 볼 때 김슬아 대표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된다.


결혼을 했는지, 출산 계획은 있는지 등 심사역들의 질문 속엔 한국 사회에서의 성공에 몇 가지 조건이 있음을 경험할 수 있었다. 출신 지역, 학력, 회사 등의 인맥이었다. 심지어 같은 고향 출신의 같은 학교와 같은 회사 출신인 남성 창업가에게도 투자 여부를 고민하는 판에 왜 조건도 하나 없는 여성에게 투자해야 하느냐고 거꾸로 묻기까지 했다. 절박한 심정으로 매달린 투자 유치에 한줄기 빛이 들었다.

트랜스링크인베스트먼트(박희덕 대표)가 41억 원 규모의 투자를 결정했다. 이후 김슬아의 약속을 지키는 성실한 보고 태도를 신뢰, 2016년 12월에 170억 원 규모의 투자를 마무리했다.


컬리에는 ‘은퇴위원회’라는 제도도 있다. 상품위원회가 ‘무엇을 팔 것인가?’를 결정하는 자리라면, 은퇴위원회는 ‘무엇을 더 이상 팔지 않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자리다. 이는 컬리의 큐레이션을 더 좋게 만들려는 시스템이다. 상품위원회가 고기와 생선을 굽는 소리, 도마 위에서 과일이나 해산물을 손질하는 소리로 시끌벅적하다면, 은퇴위원회는 상대적으로 조용하고 무겁지만 핵심은 '왜 팔리지 않는지?', '더 해볼 수 있는지?' 등을 물으며 답을 찾는 과정이다.


은퇴위원회는 분기에 한번 열리는데, 론칭한 지 6개월 경과했고 월평균 매출이 100만 원 미만인 상품이 안건에 올라온다. 이를 통해 모인 구성원들은 컬리의 기준을 체감하고, 감각을 맞추고, 이견異見을 조율하는 자리이며, 함께 더 좋은 것을 찾고 발전시키자는 컬리의 핵심 프로세스인 셈이다.


컬리다움의 확장


'좋은 것을 추구한다'는 마음만으론 브랜드가 되지 않는다. 그 진심이 고객에게 발견되고, 공감받아, 결국 선택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브랜드로서 생명력을 얻는다. 더 많은 고객들에게 신뢰와 사랑을 받아 '선택받는 브랜드'가 되기 위해 컬리는 지난 10년 동안 단순한 외형 성장을 넘어 전략적 차별화에 힘써 왔다.


컬리는 어떻게 시장의 판도를 바꾸었는지를 책은 상품 기획, 광고오 마케팅, 운영과 물류, 고객 경험 등 4가지에서 찾아본다. 컬리는 기존 리테일의 공식을 흔들며 새로운 기준을 만들어왔다. 그 힘은 어디에서 비롯됐을까? 이는 디테일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태도에서 나온다.

수요자 중심 서비스는 ‘아보카도 한 개’를 전달하는 방식에서도 드러난다. 보통 아보카도는 한 망에 대여섯 개를 넣어 판매하는데, 컬리는 한 알씩도 판매한다. 아보카도는 먹고 싶은데 한 망을 구매하자니 너무 많아 구매하지 않거나 사더라도 다 먹지 못하고 버리곤 하는 1~2인 가구의 불편을 해결하기 위한 기획이다. 물류 효율만 고려하는 기존 유통과 달리, 컬리는 고객의 실제 필요를 기준으로 제품 판매 단위를 바꾼 것이다.

나 또한 이런 경험을 했다. 컬리에서 구매한 계란 한판은 20개 들이였다. 편의점에서 판매하는 상품은 15개라 아쉽다고 느껴지고 마트에서 파는 한판 30개는 혼자 사는 나에겐 좀 부담스러웠다. 2025년 6월 도입된 대파 박스도 같은 맥락에서 나온 선택이다. 길쭉한 대파 한 단을 담기 위해 길이는 길고, 높이는 낮은 대파 전용 박스를 새로 설계했다. 작은 불편을 지나치지 않는 선택, 물류업 경력 25년 차 FC운영본부장 김지훈이 말하는 ‘컬리다운’ 지점은 바로 이런 부분이다. 비용보다는 고객 경험을 우선시한다는 것이다.

컬리다움의 미래

컬리는 시장에서 고객의 선택을 받으며, 좋은 것을 향한 고심이 비즈니스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몸소 증명했다. 지난 10년의 성공과 실패 속에 쌓인 방대한 경험치를 자양분 삼아 이제 또 한 번의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컬리의 내일은 어떤 모습일까? 비즈니스 모델의 확장, 해외시장 개척, 신사업 실험, AI 네이티브 기업으로의 전환 등 지속 성장을 위한 스스로의 질문을 살펴본다. 비식품 판매를 본격적으로 확장한 계기는 고객의 행동 데이터에서 비롯됐다. 컬리의 주 고객은 30~50대 여성으로, 먹는 것에 유독 기준이 높은 집단이다. 좋은 식재료와 함께 조리 도구, 그릇, 생활용품을 장바구니에 담는 패턴이 반복적으로 관측됐다. 바쁜 일상에서 수많은 제품들을 일일이 비교하고 선택할 여유가 없는 고객들이 먼저 “치약이나 세제도 컬리가 골라주면 좋겠다.”는 요청을 보내오기도 했다. ‘잘 먹는 것’에 대한 태도는 자연스럽게 ‘잘 사는 것’에 대한 기준으로 이어졌다.

처음 '뷰티컬리'를 론칭했을 때 시장에선 컬리의 화장품 판매에 대해 회의적인 반응이 많았다. 하지만 내부 분위기는 달랐다. 이를 자연스런 확장으로 수용했다. 그 배경엔 한우 등심과 주물 팬, 치약과 달걀 등을 함께 담는 고객의 장바구니 데이터를 보며 컬리는 고객이 원하는 바가 단순 식품 구매가 아닌 잘 먹고 잘 사는 삶, 즉 웰빙에 대한 큐레이션임을 깨달았던 것이다. 기존 쇼핑의 패러다임을 바꿔야 구매자들의 체류시간이 길어진다. 예를 들어 올리브 오일 구매자가 검색창에 “오일 파스타에 어울리는 올리브 오일을 추천해줘.” 하고 요청하면 AI가 컬리의 방대한 상품 데이터와 큐레이션을 학습해 최적의 상품을 제안할 수 있는 기술력을 확보하는 것이다. 기획본부장 고규환은 일방적인 검색보다는 대화에 가까운 경험의 구현을 꿈꾼다. 그 결과, 고객은 입이 심심할 때 냉장고 문을 열어보듯, 딱히 살 것이 없어도 컬리 앱을 켜게 될 미래를 그리고 있다.

컬리다움의 정수

어떤 조직의 구성원이 동일한 가치와 신념을 바탕으로 일할 때, 우린 이를 '기업(조직)문화'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 문화를 형성하는 일이 참으로 어렵다. 말 그대로 '오늘부터 우리의 조직 문화는 무엇입니다'라고 결정하는 대로 행해지는 것이 결코 아니기에 그렇다. 문화가 형성되기 위해선 시간이 필요하다.

컬리의 집념 문화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곳은 물류센터다. 매일 10만~20만 개의 상품을 출고하는 이곳에선 0.1% 개선이 모여서 큰 변화로 이어진다. 수많은 상품, 일용직 노동자, 계속 늘어나는 배송지 등 이 복잡성을 관리하려면 많은 장치들이 필요하다. 컬리에서 판매 중인 바나나는 11종이 넘는다. 냉장 구역에 나란히 놓인 11종 이상의 바나나 중 고객이 주문한 바나나를 찾아 담는 과정에서 실수가 자주 발생했다. 하지만 한 직원이 가장 많이 헷갈리는 B 바나나와 C 바나나 옆에 “다시 한번 확인하세요.”라고 적어 붙여둔 후에 실수가 크게 줄었다.
상품이 잘못 출고되면 원인을 확인하고, 오출고 가능성이 높은 상품과 상황을 매일 점검한다. 그렇게 매일매일 필요한 장치를 하나씩 보완해나간다. 이런 작은 개선들이 모여 오배송률을 압도적으로 낮췄다. 고객들은 이런 작은 개선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컬리는 그저 고객들이 자연스럽게 느끼도록 할 뿐이다. ‘컬리는 배송이 참 정확하네.’라고 말이다.

좋은 것이란?

사업자등록을 마치고도 한동안 김슬아 창업자에겐 이렇다 할 사무실 하나 없었다. 초기엔 스타벅스에 모여서 노트북을 펴놓고 일했다. 망한 조명가게를 3개월 임시 계약하고 쌓인 먼지로 인해 기침과 재채기로 일상을 보내기도 했다. 비록 작고 초라한 공간일지라도 창업자는 좋은 것을 더 많은 사람에게 제대로 전하고 싶다는 의지가 있었고 이것이 바로 구성원들에게 작동한 원동력이었다. 컬리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등 모든 것이 궁금한 분들에게 책의 일독을 권한다. 특히 창업을 했거나 창업을 꿈꾸는 분들에겐 필독을 권한다.


#경제경영 #경영전략 #경영이야기 #컬리 #마켓컬리 #김슬아 #굿센스 #세미콜론 #굿센스리뷰단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보이는 리더십 - 심리적 안전감을 넘어 책임 안전감을 만드는 ‘AI 시대 리더’의 조건
김유리 지음 / 나비의활주로 / 2026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AI는 판단을 빠르게 한다. 데이터는 점점 정확해진다. 추천 알고리즘은 인간보다 더 많은 선택지를 제시한다. 회의실에서 "AI가 이렇게 분석했습니다."라는 문장은 이제 낯설지 않다. 보고서는 더 정교해졌고, 예측은 더 빨라졌다. 리더의 책상 위에는 더 많은 정보가 쌓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리더들은 더 불안해졌다. - '서문' 중에서



책의 저자 김유리는 기업교육연구소 '해피투게더컨설팅' 대표로 대한민국 인적자원개발 명강사 대상을 수상한 기업교육 전문가다. 중앙대학교 글로벌인적자원개발대학원에서 인적자원개발학을 전공했으며, 리더십과 성취 목표 지향성을 연구했다. 다수의 저서가 있으며, 현재 활발한 강의와 컨설팅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총 다섯 개 파트로 구성된 책은 AI 시대, 리더십의 본질을 다시 묻다(파트1), 책임 안전감 - AI 시대 리더가 서야 할 자리(파트2), 책임 안전감을 설계하다 - 존재 자체가 기준이 된다(파트3), 판단/책임/습관 - 리더십을 단단하게 만드는 반복(파트4), 남는 리더십(파트5)에 걸쳐 보이는 리더십을 제시한다.


AI 시대의 리더십은 AI(인공지능)라는 보조 도구로 인해 리더들의 입장에선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리더가 마치 '판단하는 기계'처럼 느껴짐에 따라 오히려 불안감이 가중되고 있다. 그러나 AI 시대에 리더가 해야 할 역할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욱 뚜렷해진다. AI의 빠른 판단 이후의 단계에 당당하게 서 있는 사람은 바로 리더인 것이다.


"AI가 추천한 대로 했는데 결과가 좋지 않으면 누구 책임인가?"

"데이터는 그렇게 말했는데 팀원은 불안해한다."

"객관적으로 맞는 결정인데 왜 조직 분위기는 차가워지는가?"


AI 시대의 리더들은 지금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역할이 바뀌어서 흔들리고 있다. 예전의 리더들은 결정을 내리는 사람이었다. 지금은? AI가 제시한 결정을 조직 구성원들이 수용할 수 있도록 전달해야 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요즘 리더들의 고민은 '내 말에 잘 반응할까?'이다. 그렇다. 속도의 시대에 리더십의 가장 큰 적은 '공감 결핍'이다. 한 글로벌 기업의 중간 관리자는 이런 고백을 했다.


"회의 때마다 '좋은 의견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팀원들은 여전히 긴장합니다.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비록 이 리더는 긍정적인 말을 하지만, 시선은 차갑고 표정은 굳어 있다. 팀원들은 말보다는 먼저 그 신호를 읽는다. 그렇다. 문제는 언어 자체가 아니다. 리더의 긍정적 말과 리더가 취하는 표정, 시선, 태도 등이 불일치함에 있다. 이를 비언어적 불일치라고 한다.


AI는 빠르다. 그러나 빠름은 언제나 차갑다. 리더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은 '속도를 늦추는 것'이다. 해석을 추가하는 것이다. AI 시대 리더십의 위기는 기술의 문제가 아니다. 해석의 공백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그 공백을 채우는 것은 데이터가 아니라 존재다. 리더는 숫자를 발표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감정을 붙들어 주는 사람이어야 한다.


하이브리드 시대, 리더에게 주어진 과제



AI 시대 조직은 데이터 기반 의사결정을 강조한다. 그러나 데이터는 만능이 아니다. 비록 과거의 패턴을 분석하지만 인간의 감정, 맥락, 관계를 담지 못한다. 기술이 발전하면 문제들이 쉽게 해결될 것으로 믿기 쉽다. 조직도 마찬가지다. 더 많은 데이터와 더 빠른 자동화가 성과와 효율이 향상되리라 기대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경영학에선 '더 좋은 쥐덫의 함정'이란 사례가 있다. 1920년대 미국에서 기존의 나무 쥐덫보다 훨씬 진보한 플라스틱 소재의 제품이 개발되었다. 이는 기존 제품보다 훨씬 위생적이고 성능이 뛰어났다. 또한 세척해서 이를 재활용할 수도 있었다. 기술만 놓고 보면 '더 좋은 쥐덫'임에 분명하다.


처음엔 시장의 관심도 높았으나, 판매의 호응도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왜냐하면 소비자들은 세척해서 재활용하는 것을 불쾌하게 느꼈기 때문이다. 그렇다. 소비자의 니즈는 위생적인 쥐덫이 아니라 쥐를 잡은 뒤 이를 바로 버릴 수 있는 덫을 원했던 거다. 다시 예전의 목재 쥐덫으로 돌아갔다.


위 사례의 핵심은 무엇인가? 사람의 감정과 경험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조직에서도 이같은 일이 반복된다. 데이터는 많아지고, 시스템은 더 정교해진다. AI는 최적의 선택지를 제시하고, 대시보드는 실시간으로 성과를 보여준다. 그러나 팀원들의 얼굴은 갈수록 굳어진다. 마음이 결코 편하지 않기에. 나아가 기술 만능주의는 리더들을 착각에 빠뜨린다.



과거 난 금융기관에서 여러 해 근무했었다. 금융기관은 수시로 '실적 유치 캠페인'을 벌인다. 이 캠페인은 금전적 보상과 인사 고과에도 반영된다. 성격상 다함께 실적을 올려 조직에 기여하자는 취지이지만 실적을 채우지 못하면 상대적으로 피해를 당하므로 이를 싫어하는 구성원들도 있다. 심지어 실적 유치한다고 오후 시간엔 자리를 비우고 계속 회사 밖에서 영업만 하다가 퇴근한다. 이또한 실적 만능주의의 폐해다.


리더십의 새로운 공식


기준울 보이는 역할로

감정의 온도를 설계하는 역할로

성장 신호를 보내는 역할로

에너지와 리듬을 조율하는 역할로



리더십의 본질은 '신뢰'다. 한번의 좋은 말로 결코 만들어지지 않는다. 반복되는 여러 작은 신호에서 발생된다. 리더의 말이 번번이 바뀌고 표정 또한 수시로 변하면 리더에 대한 믿음이 생기겠는가. 신뢰의 핵심은 '일관성'이다. 팀원들은 지난 번 회의 때 리더의 표정이 어떠했는지를 기억한다. 이처럼 리더의 감정은 빠르게 팀 전체로 퍼진다. 같은 회의, 같은 주제라도 리더의 감정 톤에 따라 팀의 집단 에너지는 완전 달라진다. 리더의 존재감은 감정의 리듬으로 측정된다.


동일한 문장임에도 한 리더의 “결정한다”는 팀을 움직이고 다른 리더의 “결정한다”는 공기를 얼린다. 그 차이는 무엇인가? 그렇다. 그 말이 책임 선언인지 아닌지다. 책임 선언으로서의 결정에는 공통점이 있다. 말이 짧다. 속도가 느리다. 결론을 말할 때 몸이 앞으로 나온다. "리스크도 변수도 있지만 이 방향으로 간다." 그리고 멈춘다. 이 팀은 그 결정을 리더의 것으로 인식한다.

만약 갈등 상황이 발생했다면 리더는 누가 옳은지를 판단하는 게 아니라 감정의 온도를 낮추는 일이 먼저다. 왜냐하면 감정이 격해진 상태에선 논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회의는 몸의 흐름이 만든다. 이때 리더의 손과 몸은 말보다 빠르게 상황을 진정시킨다. 손은 중재자 역할을 한다. '비언어 갈등 중재 5단계 솔루션'은 아래와 같다.

손바닥을 보이며 '무위험'을 먼저 선언한다.
손의 높이로 감정의 강도를 맞춘다.
한 손은 '중재', 한 손은 '경청' 역할을 맡는다.
몸의 방향으로 '편 가르지 않음'을 보여준다.
손으로 '다음 단계'를 시각화한다. 


책임감 있는 리더가 되겠다고 다짐하는 리더는 많다. 하지만 막상 회의가 시작되면 뇌는 익숙한 방식으로 돌아간다. 인간의 뇌는 그렇게 작동한다. 행동과학 연구에서 이는 반복적으로 확인된 사실이다. 사람은 '결심'보다 '상황'에 반응한다. 금주를 결심한 사람이 막상 술자리에 앉으면 그 다짐이 흔들리는 것처럼 말이다.


환경 설계란 무의식적으로 흘러간 장면들에 의도를 심는 것이다. 아침 인사를 먼저 한다고 결심하는 게 아니다. 회의 전 5분을 노트북 대신 팀원 얼굴을 보는 시간으로 고정해둔다. 메신저 답장 한 줄에 마침표 대신 물음표를 하나 더 넣는다. “확인했습니다. 혹시 어려운 점은 없나요?” 보이는 리더십은 반복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구조를 먼저 만든 사람이 완성한다. 이는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다.

이 대목에서 과거 나의 금연 프로젝트를 소개해 본다. 흡연은 습관이므로 습관적인 행동이 무의식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환경을 먼저 제거했다. 환경 설계인 셈이다. 내 주변에 있는 담배를 모두 버리고 더 이상 구매하지 않았다. 새로운 환경이 고착될 때까지 임원실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식사도 준비해 간 도시락으로 해결했다. 함께 식사하면 식사후 흡연 유혹을 받게 되므로. 그리고 술자리도 금했다. 거래처 술접대는 내가 정한 술상무가 대신하게끔 했다. 한약 복용중이라고 둘러댔다. 이렇게 6개월을 보내며 흡연 습관을 없앴다. 칠십대 중반의 나이에 되돌아보면 가장 잘한 일로 기억에 남는다.


AI 시대의 리더

AI 시대의 리더란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감정과 책임을 도망치지 않고 조용히 그 자리에 남아 있는 사람이다. 사람들이 불안해할 때 먼저 중심을 ㄷ잡는 사람이다. 답이 없을 때 함께 생각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사람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다시 시도해볼 용기를 잃지 않게 만드는 사람이다. "지금 이 순간, 나는 어떤 리더로 보이고 있는가", 바로 보이는 리더십이다.

#책추천 #자기계발 #리더십향상 #보이는리더십 #김유리 #나비의활주로 #리더십향상추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푸른 테이프 - 관계의 무게
문재웅 지음 / 부크크(bookk) / 2026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이라는 소개글에 읽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푸른 테이프는 보통 마트 쇼핑 물건, 이삿짐이나 중고 판매용 도서를 박스에 포장할 때 무언가를 단단하게 고정시키는 역할을 하는데 사용되므로 왠지 '구속'을 상징하는 단어로 느껴져서다. 아무튼 이런 나의 선입견이 맞아 떨어지는지는 읽으면서 확인해 볼 참이다.



작가 문재웅을 소개하는 글에 따르면, 그는 13년간 LG CNS, 4년간 SK C&C에서 근무, 조직 안에서 살아온 시간과 실제 삶의 기억들을 바탕으로 인간과 관계의 균열을 소설로 써왔는 데, 총 18편의 이야기들로 구성된 '푸른 테이프'(부제, 관계의 무게)는 그의 첫 장편소설이다.


스토리 중 인상적이거나 나의 경험을 소환시키는 그런 내용을 소개함으로써 서평에 갈음하려 한다. 먼저 제목만 보고 책을 펼쳐 읽는 부분은 '무너지는 집'이다. 나는 국민학교 5학년 겨울방학 때 온 집안에 빨간 차압 딱지가 더덕더덕 붙은 있는 광경을 목격했고, 이후 난  친척 집으로 보내져 그곳에서 국민학교를 졸업해야만 했다. 그런 옛 슬픈 경험이 소환되는 듯해서 읽고 있다.


"니가 누구야?"


소설의 주인공 재웅은 은행원이다. 1994년 여의도역 2번 출구 근처로 첫 출근했던 그는 현재 56세의 머리가 희끗희끗한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현재 치매를 앓고 있는 어머니 기억은 나이 스물여섯에 정장 입고 첫 출근한 까만 머리카락의 아들에 머물러 있었다.


새벽 늦게 만취 상태로 퇴근한 아버지가 회사 대표에게 전화했다는 사실을 아들 성현이 말해주었다. 재웅은 방 안 충전기에 꽂혀 있던 휴대폰을 확인했다. 새벽 1시 15분에 발신, 통화시간 20분 33초였다.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들에게 물었다. 뭘 들었는지. 이에 아들은 '대명기업이란 회사에 절대 대출을 승인하면 안 된다'고 몇 번이나 말했다고 했다.


몸이 불편해 회사에 출근할 수 없다고 팀장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오후 5시 뜨거운 물에 샤워를 마치고 깨끗한 옷으로 환복했다. 어머니한테서 전화가 왔다. '옆집 몸이 또 가스를 틀어 괴롭히고 있다'는 호소였다. 의사는 이를 알츠하이머에 동반된 행동심리증상인 망상이라고 했다. '지금 집에 안오면 죽는다'는 말에 곧바로 어머니 집으로 향했다. 어머니는 1980년대 초 동네에서 제일 잘나가던 미용실 '숙녀의 집' 원장이었다.


집 안에서 선풍기 3대가 돌아가고 있었다. 방향은 제각각이었다. 천장을 보았다. 전체가 푸른색이었다. 처음엔 벽지를 교체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테이프였다. 천장 모서리에서 시작하여 사방으로 뻗어나가 중앙에서 만나는 형상이었다. X자와 십자와 평행선과 사선이 교차하고 중첩되어 있었다. 일주일 전만 해도 이렇지 않았는데. 



벽도 마찬가지였다. 벽지의 이음새마다 수직과 수평으로 또 대각선으로 테이프가 붙어 있었다. 가스 냄새를 막으려던 시도였음이 분명하다. 창틀도 완전히 봉인되었고, 화장실 문과 벽 사이의 모든 틈이 푸른 테이프로 몇 겹씩 덧발라져 있었다. 84세의 몸으로 이 정도로 했으니 놀랍기만 했다. 방문했던 가스 안전 점검원이 배관이 노후화되어 위험하다는 말을 듣은 이후부터 가스 냄새가 난다는 것이다.


냉장고에 있던 반찬을 꺼내 어머니에게 저녁을 챙겨 주던 아들이 이젠 늙었음을 알고 손으로 아들의 뺨을 쓰다듬고 주름을 더듬었다. '무섭다. 내가 나를 잃어가는 게 무서워, 니 얼굴도 잊어버리는 게 무서워'란 말에 재웅은 어머니를 껴안았다. 작고 마른 몸에 뼈만 남은 것 같았다. 경희가 기다린다며 빨리 귀가하라는 말에 내일 다시 오겠다고 인사하며 어머니 집을 나섰다. 아내 경희는 4년째 암 치료 중이다. 항암제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아들 성현의 도시락을 챙겨놓고 1박 일정으로 친정에 내려가 있다. '내일 오후 7시에 도착하니까 성현이 밥 챙겨줘' 라는 메시지가 와 있었다. 재웅은 집 소파에 앉아 눈을 감았다. 천장이 보였다. 테이프가 없는 천장이었다.


정신건강의학과 대기실, 재웅은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에 갔다. '옆집 놈들이 계속 가스를 틀어요'라는 어머니 말에 50대 중반의 여성 의사는 지난 번 검사 결과로는 알츠하이머가 많이 진행되었고 망상 증상도 점점 심해지고 있다는 설명이었다. 처방전을 받아 약국에 들러 한 달 치 약을 받았다. 아내에게서 걸려온 전화에 하얀 거짓말을 했다. 괜찮다고 크게 달라진 게 없다고 말이다.


그 시각 친정에 가 있던 경희는 휴대폰에서 '디그니타스 스위스 조력 사망 절차'라는 화면을 스크롤하면서 자세한 내용을 메모 앱에 적고 있었다. 오후 2시 정각, 대회의실에서 인사위원회가 열렸다. 조 대표는 재웅의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했다. 대표이사의 업무 판단에 대한 모욕적 표현이 있었음을 징계 사유로 지적하고 명예퇴직 형태의 권고사직을 제안했다. 만약 이를 수용하지 않으면 징계위원회로 회부되고 위로금도 삭감된다는 설명이었다. 이에 재웅은 권고사직을 수용했다. 사실상 이같은 일은 지금도 많은 기업에서 진행되고 있는 상사의 갑질이다. 


악성 대출의 후환이 두려운 상사는 이를 지적하는 여신 부장을 잘라내는 데 총력을 기울인다. 회사생활을 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 아는 진실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고쳐지지 않고 있다. 개인 사물을 챙긴 박스를 들고 오후 3시 술 냄새 풍기는 가게에 들어갔다. 음주 시 복용 금지인 알약 2개를 소주 1잔과 함께 입속에 털어넣었다. 한참 후 젊은 경비원이 깨웠다. 공원이었다. 집 앞에서 비밀번호를 누르는 손가락이 떨렸다. 거실엔 경희와 아들 성현이 있었다.



경희는 혼자서 병원에 갔다. 그냥 검사받으러 간다고만 했다. CT 결과와 혈액 검사 결과가 나왔다. 의사는 담담하게 말했다. 난소암 4기였다. 여러 장기까지 이미 전이된 상태라고 했다. 가능한 한 빨리 치료를 시작해야 한다고 첨언했다. 병원 밖으로 나왔다. 12월의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었다. 한편, 재웅은 금융 경력직 채용 공고를 보고 이력서를 작성했다. 캐피탈 대출심사 계약직이었다. 세 곳이나 지원했다. 평균지원자 347명, 평균 합격률이 0.8%였다.


치료를 시작한 경희는 병원에서 검사 결과를 기다렸다. 담당 의사는 CT 이미지를 살펴보더니 종양의 크기가 전보다 조금 더 커졌다고 말하면서 간으로의 전이 부분도 더 진행됐고 새로 진행된 부위는 없지만 기존 부위는 모두 진행됐음을 알려줬다. 적극적 치료를 하더라도 6개월에서 1년 정도라는 시한부 결정을 내렸다. 항암 치료를 중지하기로 했다. 성현의 눈은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경희는 디그니타스 신청 절차를 다시 읽엇다. 마지막 항목엔 자기 투여 원칙이 적혀 있었다. 즉 약을 본인이 직접 마셔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도 이를 대신해 줄 수 없다는 거다. 그래서 안락사가 아니라 조력사망이라고 기재되어 있었다. 쉽게 말해서 죽음은 본인의 선택임을 강조하는 셈이다. 가족 회의에서 이를 밝혀야 할지 말지 고민되었다. 며칠 후 마침내 학교에서 돌아온 아들 성현에게 '엄마는 환자로 죽고 싶지 않아. 엄마로 죽고 싶어'라고 말하면서 스위스 디그니타스로 갈 계획임을 밝혔다. 성현은 자살이라며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재웅은 경희 편이 되어 주었다.



#책추천 #장편소설 #푸른테이프 #문재웅 #부크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