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삶을 정리하고(85.8%), 신체적·정신적 고통 없이(85.4%), 가족이나 지인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84.7%), 가족과 함께하는 것(76.8%)이다. 이 소망을 간단히 표현한 말인 ‘9988234’가 있다. 99세까지 팔팔(88)하게 살다, 2~3일만 앓고, 4일째 편안히 죽는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우리는 자신의 힘이 아니라 기계에 기대어 연명하고, 가족 곁이나 집이 아니라 병실에서 생을 마감한다. - '프롤로그' 중에서

책의 저자 양성관은 가정의학과 전문의로 2008년부터 20년 가까이 환자 20만 명을 진찰하고 10권의 책을 썼다. 쉽고 재미있게 풀어낸 저자의 이야기 속엔 아프고 소외된 이들을 보듬는 따듯한 시선과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울림이 있다.
이 책은 생의 마지막을 둘러싼 현실과 제도, 법과 의학을 이야기한다. 중환자실과 응급실, 호스피스와 요양원의 경계에서 벌어지는 선택들을 다룬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이별을 맞는다. 문제는 단 하나다. “어디서, 그리고 어떻게 마지막을 맞이할 것인가?”
총 여섯 편의 이야기를 담은 책은 병원에서 죽는 시대(1편), 살리는 마음, 남겨진 시간(2편), 법정에 선 죽음(3편), 그가 스위스로 간 까닭(4편), 마지막보다 긴 시간(5편), 용기와 죽음(6편) 등을 통해 생의 마지막, 즉 죽음을 둘러싼 사회의 현실과 제도, 그리고 법과 의학을 이야기한다. 우리 모두는 결국 한 가지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나는 어떤 마지막을 원하는가?"
병원에서 죽는 시대
급성 감염병으로 인한 사망이 줄자 감염병에 유독 취약했던 영우아 사망률도 급격히 덜어졌다. 인류 역사상 감염병 예방과 치료만큼 인간의 수명을 극적으로 바꿔놓은 사건은 없었다. “위대한 사망률 전환”이었다. 단 100년 만에 기대수명은 2배 이상 늘어, 2023년 인류의 기대수명은 73.2세에 이르렀다. 우리는 오래 살게 되면 당연히 더 행복해질 거라고 믿었다.
삶이 길어진 만큼 생과 죽음 사이에서 늙고 병드는 시간도 함께 늘어났다. 의학의 발달은 비록 생명을 구했지만, 그 생명을 언제까지 이어갈 것인가 하는 새로운 숙제를 남겼다. 갑작스러운 죽음이 아닌, 서서히 찾아오는 노화와 죽음을 준비해야 하는 시대, 연명延命 사회가 시작되었다. 그 결과 연명의료, 호스피스, 안락사, 간병과 같은 낯설지만 피할 수 없는 질문이 생겨 났다. 또한 새로운 시대는 죽음의 ‘시간’뿐 아니라, 죽음의 ‘장소’까지 바꿔놓았다.
잡에서 임종을 맞은 사람은 6멍 중 1명에 불과하고, 4명 중 3명이 병원에서 생을 마감한다. 여러 해 전의 일이지만 내 아버지도 노환으로 병원에 입원한 후 그곳에서 타계했다. 이러한 흐름을 사회적·제도적 논의의 중심으로 끌어올린 계기가 있었다. 한 사건, 그리고 그에 대한 법원의 판결이었다. 1997년 12월 4일 술에 취해 화장실에 가다 넘어져 머리를 다친 남성을 부인이 퇴원시킨 사건에 대해 대법원 판결은 해당 의사를 살인방조죄로 처벌했던 ‘보라매병원 사건’은 ‘임종의 장소’에 관한 문제를 넘어, ‘연명의료’를 어디까지 허용하고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이후 의사는 환자를 집으로 보내고 싶어도 법적 책임을 떠올렸고, 보호자는 집으로 모시고 싶어도 혹시 자신이 가족을 포기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닌지 두려워했다. 그 사이에서 환자의 뜻은 자주 뒤로 밀려났다. 병원은 생명을 지키는 공간이었지만, 동시에 죽음을 내보내지 못하는 공간이 되어갔다. 과연 이런 현실이 진정한 사회복지일까?
살리는 마음, 남겨진 시간
병원에서 사망하기 전까지 내 아버지는 아무런 의식조차 없이 산소호흡기에 의지한 채 병상에 누워만 있었다. 이는 삶의 연장이 아니라 단지 죽음을 연기한 것에 가깝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제 자신이 바라는 방식으로 죽음을 맞기 어려워졌다. 그 배경에는 의료 제도의 변화, 법적 책임, 가족의 기대, 그리고 죽음을 실패로 여기는 사회적 분위기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
췌장암이 발병하여 병원에서 수술받앗으나 3년 만에 재발한 69세의 이광수 씨는 나라 전체가 가난했던 1950년대에 출생해 작은 기업을 일군 인물이었다. 진통제를 맞으며 온갖 통증을 견뎌내던 그는 “선생님, 이번 설을… 집에서 보내고 싶습니다.”라고 요청했다.
말기 암 환자가 외박을 하는 건 쉽지 않다. 그는 진통제와 수액을 링거로 공급받고 있었는데, 퇴원하려면 이를 모두 중단해야 했다. 또한 말기 암 환자는 언제든지 갑자기 상태가 나빠질 수 있다. 생존 예후 점수로 봐도, 한 달도 어려웠다. 분명해 보이는 사실은 이번 설이 그의 마지막 명절이 될 듯했다. 그는 저자의 가운을 붙잡고 마지막 소원을 간곡하게 부탁했다.
이에 저자는 수액과 진통제를 조정하고 몇 가지 당부를 한 뒤 집에 다녀올 수 있도록 조치했다. 죽음을 앞둔 환자가 익숙한 집의 냄새를 맡고, 자식들의 얼굴을 마주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배려했다. 이런 것들은 병원에서 절대로 해줄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 의료가 마지막까지 해야 할 일이 반드시 더 많은 치료를 더 오래 이어가는 데 있는 것은 아니다. 남은 시간을 다시 삶의 자리로 돌려보내는 데 있다.
죽음을 막을 수 없다면, 적어도 죽음이 오기 전까지의 시간은 환자의 것으로 남겨두어야 한다. 이광수 씨는 저자에게 치료의 의미를 다시 가르쳐 주었다. 치료는 병을 낫게 하고 생명을 연장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고통을 덜고 남은 시간을 환자의 삶으로 지켜주는 데까지 이어진다.
법정에 선 죽음
보라매 병원 사건이 발생한 지 11년 후, 또 한 번 한국에서 죽음의 방식을 바꾸는 사건이 벌어졌다. 2008년 2월 16일, 76세의 김 할머니가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해서 기관지 내시경 검사 도중 예기치 않은 출혈로 인해 기도가 막히고 심정지가 왔다. 심폐소생술로 심장은 다시 작동했지만 이미 뇌는 심각한 손상을 입었기에 이후 식물인간 상태가 되고 말았다. 회복이 되지 않자 보호자인 딸과 사위는 연명치료 중단을 병원에 요청했다. 평소 김 할머니는 이런 치료를 원치 않는다고 평소 자주 말해왔던 것이다. 그렇지만 병원은 이를 동의하지 않았다. 결국 법정 공방에 들어갔다. 의사는 '생명권'을, 가족은 '자기결정권'을 내세웠다. 대법원 판결로 한 달 후인 6월 23일에 김 할머니의 인공호흡기는 제거되었다. 이런 사건은 미국 등 여러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다.
의료 윤리에 반한다는 인식 때문에 의료 현장에선 여전히 무의미한 연명치료가 반복되고, 환자와 가족의 고통이 사회적 문제로 부각되면서 의학계의 인식도 점차 변화하기 시작했다. 병원마다 윤리위원회가 설치되었고, 연명의료 중단 기준에 대한 가이드라인이 마련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연명의료는 단순한 의학적 처치를 넘어 윤리와 법, 가족의 선택, 환자의 가치관이 함께 고려되어야 할 문제로 다뤄지기 시작했고, 한국도 ‘세브란스 김 할머니 사건’을 계기로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제도를 도입했다. 하지만 이는 끝이 아니라 시작에 불과했고,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불확실한 죽음, 확실한 순간
얼마 전에 읽은 한 소설에선 한 가정의 엄마이자 아내이며 말기 암 환자인 여주인공이 연명치료를 거부하고 한국에선 불가능한 안락사安樂死를 위해 스위스 행 비행기를 타고 가서 현지 의료센터에서 제공하는 약을 먹고 가족들을 뒤로 한 채 마침내 죽음에 이르는 내용이었다.
안락사는 그리스어에서 파생된 합성어로 '좋은 죽음'이란 뜻을 지녔다. 하지만 죽음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기에 단지 ‘나쁜 죽음’과 ‘덜 나쁜 죽음’만 있을 뿐이다. 의료조력사망이나 적극적 안락사라는 선택의 의미는 죽음을 앞당긴다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찾아올지 알 수 없고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는 ‘불확실한 죽음’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확실한 순간’으로 바꾸는 데 있다. 마지막을 둘러싼 결정은 병실의 어느 한순간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간병과 돌봄의 시간 속에서 서서히 형성된다.
마지막보다 긴 시간
74세 박정순 할머니는 체력이 한계에 이르자, 돌보던 남편을 살해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다. 2018년까지 한국 언론에 노출된 기록에 따르면 살해 뒤 동반 사망 등을 포함한 사망자 수는 111명에 달했다. 간병 살인은 단순한 범죄가 아니다. 고립과 빈곤, 절망과 분노가 뒤엉켜, 백척간두의 절벽 끝에서 가족이 가족을 죽이는 비극이다. 긴 병은 효자를 만들지 않는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말이다.
치매는 오래된 전구 같다. 처음에는 이따금 깜빡이다가, 나중에는 아주 드물게 켜진다. 희미해지던 세상이 끝내 사라지고 만다. 치매 약은 있지만 병을 고치지 못한다. 증상 완화나 악화 속도를 조금 늦출 뿐이다. 암과 달리 치매에는 ‘완치’라는 목표가 없다. 치매는 멈추지 않고, 언제 끝날지도 알 수 없다. 치매의 고통은 한 사람의 병으로 시작해 결국 가족 모두의 삶으로 번진다.
용기와 준비
어떤 대화나 의논도 없이 임종을 맞이하는 경우가 많다. 병원 침상에서 하늘 나라로 떠난 내 아버님도 그랬다. 당시 상장기업 대표이사를 맡고 있던 나는 회사 소유주인 회장의 양해를 얻어 임종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버님이 다니시던 성당의 신부님에게도 미리 이를 알려 드렸고, 급격히 악화된 아버지의 상태를 감안해 긴급하게 아내에게 연락해 대구 소재 병원으로 내려오도록 했다. 물론 형제들에게도 연락했다. 제일 먼저 도착한 아내와 작은딸은 나와 함께 임종 장면을 지켜볼 수 있었다.
임종 직전에 자신의 의사를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결국 대부분의 연명의료 결정은 가족이 내린다. 특히 심폐소생술이나 인공호흡기는 한번 시작하면 중단하기 어려워, 사전 결정이 필수다. 실제 연명의료 중단과 유보의 결정도 환자의 뜻을 확인할 수 없는 상태에서 가족 동의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훨씬 많다. 죽음은 혼자 준비할 수 없다. 자신의 뜻을 미리 생각하고 가족과 나누어야 하는 이유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삶의 마지막을 생각해야 할까.
죽음의 선택은 단순한 통계가 아니다. 특히 마지막이 다가올수록 그 간극은 더 커진다. 부모는 나이와 병을 통해 자신의 죽음을 조금씩 받아들이지만, 자식은 아직 부모의 죽음을 상상해 본 적이 없어 그 죽음을 쉽게 인정하지 못한다. 부모의 고통을 지켜보는 일보다, 부모를 포기했다는 죄책감이 더 견디기 어렵다. 그래서 자식은 머리로는 받아들여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마음으로는 끝내 놓지 못한다.
난 아버님의 연명치료가 사망으로 종료된 후 장례식을 끝낸 다음, 그동안 많은 고통과 시간을 함께 해준 가족들과 함께 회식을 가진 후에 아내와 두 딸 앞에서 나의 뜻을 분명하게 전했다. 나는 할아버지처럼 결코 연명치료를 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는 사전에 아내와 미리 상의한 내용이었다.
마지막을 이야기할 시간
의사로서 저자는 많은 마지막을 보았다.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었다. 의사로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죽음을 막는 일이 아니라, 남은 시간을 지켜주는 일이었다. 고통을 덜고 불안을 줄여, 삶의 마무리를 도왔다. 이제 질문이 바뀌어야한다. '나는 어떤 마지막을 원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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