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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테이프 - 관계의 무게
문재웅 지음 / 부크크(bookk) / 2026년 6월
평점 :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이라는 소개글에 읽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푸른 테이프는 보통 마트 쇼핑 물건, 이삿짐이나 중고 판매용 도서를 박스에 포장할 때 무언가를 단단하게 고정시키는 역할을 하는데 사용되므로 왠지 '구속'을 상징하는 단어로 느껴져서다. 아무튼 이런 나의 선입견이 맞아 떨어지는지는 읽으면서 확인해 볼 참이다.

작가 문재웅을 소개하는 글에 따르면, 그는 13년간 LG CNS, 4년간 SK C&C에서 근무, 조직 안에서 살아온 시간과 실제 삶의 기억들을 바탕으로 인간과 관계의 균열을 소설로 써왔는 데, 총 18편의 이야기들로 구성된 '푸른 테이프'(부제, 관계의 무게)는 그의 첫 장편소설이다.
스토리 중 인상적이거나 나의 경험을 소환시키는 그런 내용을 소개함으로써 서평에 갈음하려 한다. 먼저 제목만 보고 책을 펼쳐 읽는 부분은 '무너지는 집'이다. 나는 국민학교 5학년 겨울방학 때 온 집안에 빨간 차압 딱지가 더덕더덕 붙은 있는 광경을 목격했고, 이후 난 친척 집으로 보내져 그곳에서 국민학교를 졸업해야만 했다. 그런 옛 슬픈 경험이 소환되는 듯해서 읽고 있다.
"니가 누구야?"
소설의 주인공 재웅은 은행원이다. 1994년 여의도역 2번 출구 근처로 첫 출근했던 그는 현재 56세의 머리가 희끗희끗한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현재 치매를 앓고 있는 어머니 기억은 나이 스물여섯에 정장 입고 첫 출근한 까만 머리카락의 아들에 머물러 있었다.
새벽 늦게 만취 상태로 퇴근한 아버지가 회사 대표에게 전화했다는 사실을 아들 성현이 말해주었다. 재웅은 방 안 충전기에 꽂혀 있던 휴대폰을 확인했다. 새벽 1시 15분에 발신, 통화시간 20분 33초였다.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들에게 물었다. 뭘 들었는지. 이에 아들은 '대명기업이란 회사에 절대 대출을 승인하면 안 된다'고 몇 번이나 말했다고 했다.
몸이 불편해 회사에 출근할 수 없다고 팀장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오후 5시 뜨거운 물에 샤워를 마치고 깨끗한 옷으로 환복했다. 어머니한테서 전화가 왔다. '옆집 몸이 또 가스를 틀어 괴롭히고 있다'는 호소였다. 의사는 이를 알츠하이머에 동반된 행동심리증상인 망상이라고 했다. '지금 집에 안오면 죽는다'는 말에 곧바로 어머니 집으로 향했다. 어머니는 1980년대 초 동네에서 제일 잘나가던 미용실 '숙녀의 집' 원장이었다.
집 안에서 선풍기 3대가 돌아가고 있었다. 방향은 제각각이었다. 천장을 보았다. 전체가 푸른색이었다. 처음엔 벽지를 교체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테이프였다. 천장 모서리에서 시작하여 사방으로 뻗어나가 중앙에서 만나는 형상이었다. X자와 십자와 평행선과 사선이 교차하고 중첩되어 있었다. 일주일 전만 해도 이렇지 않았는데.

벽도 마찬가지였다. 벽지의 이음새마다 수직과 수평으로 또 대각선으로 테이프가 붙어 있었다. 가스 냄새를 막으려던 시도였음이 분명하다. 창틀도 완전히 봉인되었고, 화장실 문과 벽 사이의 모든 틈이 푸른 테이프로 몇 겹씩 덧발라져 있었다. 84세의 몸으로 이 정도로 했으니 놀랍기만 했다. 방문했던 가스 안전 점검원이 배관이 노후화되어 위험하다는 말을 듣은 이후부터 가스 냄새가 난다는 것이다.
냉장고에 있던 반찬을 꺼내 어머니에게 저녁을 챙겨 주던 아들이 이젠 늙었음을 알고 손으로 아들의 뺨을 쓰다듬고 주름을 더듬었다. '무섭다. 내가 나를 잃어가는 게 무서워, 니 얼굴도 잊어버리는 게 무서워'란 말에 재웅은 어머니를 껴안았다. 작고 마른 몸에 뼈만 남은 것 같았다. 경희가 기다린다며 빨리 귀가하라는 말에 내일 다시 오겠다고 인사하며 어머니 집을 나섰다. 아내 경희는 4년째 암 치료 중이다. 항암제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아들 성현의 도시락을 챙겨놓고 1박 일정으로 친정에 내려가 있다. '내일 오후 7시에 도착하니까 성현이 밥 챙겨줘' 라는 메시지가 와 있었다. 재웅은 집 소파에 앉아 눈을 감았다. 천장이 보였다. 테이프가 없는 천장이었다.
정신건강의학과 대기실, 재웅은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에 갔다. '옆집 놈들이 계속 가스를 틀어요'라는 어머니 말에 50대 중반의 여성 의사는 지난 번 검사 결과로는 알츠하이머가 많이 진행되었고 망상 증상도 점점 심해지고 있다는 설명이었다. 처방전을 받아 약국에 들러 한 달 치 약을 받았다. 아내에게서 걸려온 전화에 하얀 거짓말을 했다. 괜찮다고 크게 달라진 게 없다고 말이다.
그 시각 친정에 가 있던 경희는 휴대폰에서 '디그니타스 스위스 조력 사망 절차'라는 화면을 스크롤하면서 자세한 내용을 메모 앱에 적고 있었다. 오후 2시 정각, 대회의실에서 인사위원회가 열렸다. 조 대표는 재웅의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했다. 대표이사의 업무 판단에 대한 모욕적 표현이 있었음을 징계 사유로 지적하고 명예퇴직 형태의 권고사직을 제안했다. 만약 이를 수용하지 않으면 징계위원회로 회부되고 위로금도 삭감된다는 설명이었다. 이에 재웅은 권고사직을 수용했다. 사실상 이같은 일은 지금도 많은 기업에서 진행되고 있는 상사의 갑질이다.
악성 대출의 후환이 두려운 상사는 이를 지적하는 여신 부장을 잘라내는 데 총력을 기울인다. 회사생활을 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 아는 진실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고쳐지지 않고 있다. 개인 사물을 챙긴 박스를 들고 오후 3시 술 냄새 풍기는 가게에 들어갔다. 음주 시 복용 금지인 알약 2개를 소주 1잔과 함께 입속에 털어넣었다. 한참 후 젊은 경비원이 깨웠다. 공원이었다. 집 앞에서 비밀번호를 누르는 손가락이 떨렸다. 거실엔 경희와 아들 성현이 있었다.

경희는 혼자서 병원에 갔다. 그냥 검사받으러 간다고만 했다. CT 결과와 혈액 검사 결과가 나왔다. 의사는 담담하게 말했다. 난소암 4기였다. 여러 장기까지 이미 전이된 상태라고 했다. 가능한 한 빨리 치료를 시작해야 한다고 첨언했다. 병원 밖으로 나왔다. 12월의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었다. 한편, 재웅은 금융 경력직 채용 공고를 보고 이력서를 작성했다. 캐피탈 대출심사 계약직이었다. 세 곳이나 지원했다. 평균지원자 347명, 평균 합격률이 0.8%였다.
치료를 시작한 경희는 병원에서 검사 결과를 기다렸다. 담당 의사는 CT 이미지를 살펴보더니 종양의 크기가 전보다 조금 더 커졌다고 말하면서 간으로의 전이 부분도 더 진행됐고 새로 진행된 부위는 없지만 기존 부위는 모두 진행됐음을 알려줬다. 적극적 치료를 하더라도 6개월에서 1년 정도라는 시한부 결정을 내렸다. 항암 치료를 중지하기로 했다. 성현의 눈은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경희는 디그니타스 신청 절차를 다시 읽엇다. 마지막 항목엔 자기 투여 원칙이 적혀 있었다. 즉 약을 본인이 직접 마셔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도 이를 대신해 줄 수 없다는 거다. 그래서 안락사가 아니라 조력사망이라고 기재되어 있었다. 쉽게 말해서 죽음은 본인의 선택임을 강조하는 셈이다. 가족 회의에서 이를 밝혀야 할지 말지 고민되었다. 며칠 후 마침내 학교에서 돌아온 아들 성현에게 '엄마는 환자로 죽고 싶지 않아. 엄마로 죽고 싶어'라고 말하면서 스위스 디그니타스로 갈 계획임을 밝혔다. 성현은 자살이라며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재웅은 경희 편이 되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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