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난 10여 년 동안 <수사연구>의 취재기자와 편집장으로 일하면서 한 달에 최소 두 번 살인사건, 사기사건, 최근에는 사이버범죄 취재를 위해 전국을 돌아다녔다. 그렇기에 이제는 어떤 사건이든 크게 충격을 받지는 않는 편이다. 그럼에도 살인사건이건 폭력사건이건, 사기사건이건, 최근의 사이버범죄들이건 공통적으로 느끼는 소회가 있다. 바로 사건이 늘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에 있다는 점이다. - '프롤로그' 중에서



책의 저자 박진규 소설가는 국내 유일의 수사 전문지 <수사연구>의 편집장이자 취재기자 신분으로 2017년부터 형사들을 만나 수사 과정을 취재해왔다. 이 책은 형사와 마주 앉아 사건을 돌아본 순간과 미처 기사 내용에 담지 못했던 이야기를 담은 강력사건 취재 에세이다.

매경출판의 가제본 서평단에 선정되어 제공받은 가제본을 읽고서 서평 작업에 임하고 있다. 정식 출간된 도서는 11개 장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제공받은 가제본은 1~3장의 내용만을 포함하고 있음을 먼저 밝히며, 3개 장에 수록된 내용을 토대로 리뷰글을 작성하고 있다.


파란 우산, 노란 모자, 미니스커트

실종된 남편의 통장에서 현금을 인출하는 낯선 여자가 있다. 형사들은 남편의 여성관계를 조사하지만 이 여성을 아무도 알지 못한다. 파란 우산, 노란 모자, 미니스커트 등으로 변신해 자신의 존재를 위장했기 때문인 듯하다. 이 여성은 CCTV의 사각지대에 위치한 고시텔 건물 4층에 올랐다 내려오면 전혀 다른 여성으로 변모했다.

한편, 실종된 남편은 아내에게 숨긴 비밀이 하나 있었다. 그 비밀은 오직 CCTV 속 이 여성만 알고 있다. 그러나 이 비밀을 들은 그녀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살인에 이르고 만다. 도대체 어떤 비밀이며 하필 이 여성에게만 털어놓았을까? 정말 어처구니 없게도 그 비밀은 두 사람이 동시에 한 여자를 사랑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영화 ⟨범죄도시⟩의 흥행 이후 형사들 사이에 재미있는 유행어가 퍼졌다는 말이 돌았다. 바로 ‘내가 마동석이지!’라고 술자리에서 말하는 강력반 형사들이 은근히 많아졌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마동석 콘테스트’는 없었지만 강력반 형사들 중 덩치나 인상 면에서 영화 ⟨범죄도시⟩의 마석도 형사와 흡사한 인물들이 많다. 이중에서 한 사람을 꼽자면 1998년 당시 서울 중랑경찰서 강력계장이었던 김 형사라고 저자는 말한다.

2026년 현재 서울경찰청 중요미제ㆍ장기실종사건수사팀에서 근무하는 김 형사는 대한민국의 유명한 베테랑 강력반 형사 중 한 명이다. 키는 그리 크지 않지만 넓은 어깨와 특유의 자신감, 그리고 넘치는 기백이 딱 강력반에 어울린다. 얼핏 보면 양아치 처럼 보이는 스타일이지만 앞치마를 두른 학교 앞 분식집 아저씨나 세탁소 아저씨 같은 인상을 풍긴다.

이야기가 옆길로 살짝 비켜갔는데 다시 이 사건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당시 서울 중랑경찰서 강력계장은 돈을 인출하는 CCTV 영상에서 얼굴은 불명확해도 단발머리에 안경을 쓴 모습은 알 수 있었다. 파란 우산이나 챙 넓은 모자로 얼굴을 가리고 있지만 미니스커트를 입고 있음도 확인할 수 있었다. 피해자의 내연 여성인가? 처음엔 다들 이렇게 짐작했다. 사실 이 사건은 처음 실종사건으로 신고 접수되었다고 한다.

2018년 6월 7일 저녁 7시 50대 후반의 남성 A씨의 아내(50대 중반) B씨는 남편의 전화를 받았다. 친한 동생과 한잔하고 있어서 저녁에 좀 늦게 들어간다는 말이었다. 이 부부의 관계는 좀 특별했다. 마음이 맞지 않아 4년이나 별거하다가 2018년 봄에 다시 합치기로 했다. 이후 부부는 함께 등산을 다니는 등 좋은 관계를 이어갔다.

6월 8일 새벽 4시 30분에 눈을 뜬 B씨는 남편이 귀가하지 않은 상태임을 발견하고 곧바로 전화를 했다. 전화를 받은 남편은 아는 동생 집에 와 있다며 술자리에서 지갑을 분실, 이를 찾는다고 늦어버렸다고 말했는데, 이 전화가 부부의 마지막 통화이자 대화였던 셈이다. 이후에 아내의 전화를 받지 않더니 뜬금없이 이날 저녁 7시 30분 경 부산에 갈 일이 있어서 통화가 불가하다는 카톡 메시지를 보내왔다. 이 메시지를 끝으로 남편의 휴대폰 전원은 아예 꺼졌다.

이에 아내는 남편이 일하던 봉제 공장을 찾아갔다. 이곳엔 남편의 숙소가 있어서다. 남편은 없었다. 남편 주변인들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6월 7일 이후 남편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6월 11일 오후 중랑경찰서 여성청소년과에 실종 신고가 접수됐다. 실종수사팀은 즉각 추적수사를 시작했다. 남편의 휴대폰이 꺼져있던 위치는 면목동이었다.

수사가 급진전될 수 있는 중요한 정보가 아내로부터 전해졌다. 6월 12일 남편의 통장을 정리하던 아내가 남편 계좌의 출금 거래를 발견하고 이를 수사팀에 제보한 것이다. 모 은행의 군자역 지점에서 6월 9일 100만 원씩 3회, 90만 원 1회 총 390만원의 인출이 있었던 거다. 이를 연락받은 경찰은 곧바로 해당 은행으로 출동해 CCTV 영상을 입수했다. 삼사십대로 보이는 여성이 ATM에서 돈을 인출하는 장면이 포착되었다. 

비도 오지 않는 밤에 우산까지 쓰고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미니스커트에 하이힐을 신고 있어서 여성임을 식별할 수 있었다. 다만, 지나치게 여성스러운 게 꺼림칙했다. 가발을 쓴 듯한 모습에 얼굴 노출을 적극 꺼려한 점이 여장 남성일 수도 있다는 의문도 갖고 접근했다. 현금을 인출한 용의자는 바로 아내와의 통화에서 밝힌 '아는 동생'이었다. 범행 동기는 아는 동생이 4년이나 내연 관계를 유지하는 여성을 자꾸만 양보하라는 통에 화가 나서 저지른 범행이었던 것이다.

박카스와 썩은 바나나

노부부와 딸이 사는 평범한 가정집에 강도가 들어 남편을 살해한 사건이 발생한다. 강도는 안주인을 옆방에 가두고, 뒤늦게 나타난 딸을 결박, 딸의 아버지에게 원한이 많다는 말을 남긴다. 빼앗은 일가족의 휴대폰들은 집 안에 숨겨둔 채 떠난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었다.

현장 상황을 이상하게 여긴 수사팀은 옷장에 묻은 혈흔을 통해 이 사건 속에 숨어 있는 거짓 진술을 밝혀낸다. 또 탐문 수사 끝에 중년의 남자를 살인범으로 긴급 체포한다. 이 남자는 원한이 있는 게 아니라 사랑 때문에 이 기정집의 가장을 살해했다고 자백한다. 사랑한 대상은 바로 사망한 피해자의 아내였다. 살인사건을 함께 공모했던 관계였다.

빈방에 놓여 있던 박카스 한 병과 썩은 바나나 2개를 찍은 현장 사진의 모습은 바로 범인에게 주어진 최후의 만찬이었다. 미처 먹지 못한 박카스와 현장 검증 때까지 일부가 검게 변색한 바나나는 빈방에 그대로 남겨져 있었다. 저자가 이 사건을 취재할 때는 뜨거운 8월의 휴가 시즌이었다. 해운대경찰서였다.

내연 관계였던 범행 공모자의 진술이 달랐다. 아내는 내연남에게 강요당해 범행이 시작됐다고 말했으나 내연남은 그녀를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아무튼 범행을 공모했던 둘 중 한 사람은 사망한 피해자에게 깊은 원한이 있었음이 분명해 보였다.

2018년 7월 2일 부산 해운대구 재송동의 3층집에서 살인 사건이 발생했었다. 강도가 침입해 70대 초반의 남편은 사망했고, 40대 초반인 딸은 성추행을 당했다. 사건이 발생한 날 밤에 112에 신고 전화를 한 사람은 딸의 친척이었다. 휴대폰을 모두 빼앗긴 상태라 딸이 근처에 사는 친척 집까지 달려가 신고 전화를 부탁했던 것이다.

사체死體를 덮은 이불은 피가 흥건하게 베어 있었지만 사방으로 붉은 혈흔이 튀지 않아 현장 사진은 비교적 얌전한 편이었다. 보통의 경우 살인 현장의 사체는 피범벅이고 현장 곳곳도 피로 칠갑되어 있어서 사진을 자세히 보기 전부터 인상이 찌푸려진다. 이곳 사건 현장은 그 정도는 아니었다.

'현장과 어긋난 진술을 하는 인물은 반드시 의심하라. 
그 인물이 범인일 가능성이 높다'

60대 아내의 진술로는 오후 5시 넘어 남편은 안방에서 자고 있고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데, 갑자기 범인이 넥타이 끈으로 자신의 손을 묶어 옆방에 가두었다고 진술했지만 이 점이 현장 상황과 맞지 않았던 거다. 즉 옷장에 묻은 혈흔은 이미 남편이 사망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인데, 아내는 범인이 갑자기 침입해 자신의 손을 묶어 옆방에 가두었다고 진술했으니 말이다. 더구나 이후 진술에선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발뺌을 했다. 40대의 내연남은 돈을 받고 청부살인을 했음이 밝혀졌다. 정말 사랑을 하기는 했을까?    

돈을 세는 남자

2명의 노숙자가 장기 투숙한 제주도의 한 모텔, 오랜 지병을 앓던 한 남자가 속옷 차림으로 모텔 침대에 누운 채 사망했다. 다른 노숙자는 옷걸이에 걸린 바지 주머니에서 사망자의 지갑을 꺼내 돈을 빼 간다. 방 밖으로 나가 복도에 쭈그려 앉아 돈을 센다.

변사變死 현장에 도착한 형사는 돈을 세고 있는 이 남자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그런데, 사망자는 심한 알코올 중독에 중증 당뇨 환자였다. 언제 죽어도 더 이상 이상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형사는 증거를 잡고자 노숙인 쉼터를 찾아 다닌다. 한 노숙인의 증언이다.

"그렇게 함부로 남에게 돈을 맡길 사람이 아닌데?"

이번에 소개하는 사건은 제주 서귀포경찰서 형사팀에서 해결한 살인사건이다. 어떤 면에선 굉장히 씁쓸한 사건이다. 한 베테랑 노형사의 눈썰미가 돋보이는 사건이기도 하다. 만일 그의 눈썰미가 없었다면 사건은 단순한 변사사건으로 종결됐을 가능성이 크다.

2018년 6월 22일부터 2명의 노숙자가 제주 서귀포시의 한 모텔에 묵기 시작했다. 50대 중반의 A씨와 50대 후반의 B씨는 일주일 넘게 이 모텔에 투숙했다. 모텔 주인장에 따르면, A씨는 당뇨병에 알코올 중독 환자였는데 목돈 500여 만 원을 손에 쥐었기에 이곳에 방을 얻어 지내고 있다고 했다. 그 돈은 보행자 교통 사고 보험금이었다. 신고자도 모텔 주인이었다.

수사팀은 모텔 CCTV 영상에서 이상한 장면을 포착했다. 6월 28일 오전 10시경 B씨는 혼자 외출했다가 소주가 든 것으로 추정되는 검은 색 비닐 봉지를 들고 돌아왔다. 그는 방에 들어가기 전 들고 있던 돈의 일부를 주머니에 넣은 후 다시 돈을 세고 방으로 들어갔다. 이는 몰래 돈을 빼돌리는 것으로 보였다. 사건의 결말은 B씨가 돈을 훔친 사실이 들키자 A씨를 질식사시킨 것이었다.     

#사건이보이는것보다가까이있습니다 #박진규 #매경출판 #범죄실화 #수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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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6-09-03 1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현실속 범죄는 범죄소설보다 더 그로테스크한것이 더 많은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