둑과 나


길은 바닥에 달라붙어야 몸이 열립니다
나는 바닥에서 몸을 세워야 앞이 열립니다
강둑의 길도 둑의 바닥에 달라붙어 들찔레 밑을 지나 메꽃을 등에 붙이고
엉겅퀴 옆을 돌아 몸 하나를 열고 있습니다
땅에 아예 뿌리를 박고 서 있는 미루나무는 단단합니다
뿌리가 없는 나는 몸을 미루나무에 기대고
뿌리가 없어 위험하고 비틀거리는 길을 열고 있습니다 엉겅퀴로 가서
엉겅퀴로 서 있다가 흔들리다가
기어야 길이 열리는 메꽃 곁에 누워 기지 않고 메꽃에서 깨꽃으로 가는
나비가 되어 허덕허덕 허공을 덮칩니다
허공에는 가로수는 없지만 길은 많습니다 그 길 하나를
혼자 따라가다 나는 새의 그림자에 밀려 산등성이에 가서 떨어집니다
산등성이 한쪽에 평지가 다 된 봉분까지 찾아온 망초 곁에 퍼질러 앉아
여기까지 온 길을 망초에게 묻습니다
그렇게 묻는 나와 망초 사이로 메뚜기가 뛰고
어느새 둑의 나는 미루나무의 그늘이 되어 어둑어둑합니다

 

오규원 시집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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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소소설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선희 옮김 / 바움 / 2007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난 일본문학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다.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작가에 대해서도 문외한이다.  그런데 최근에 일본 단편 소설들을 몇 권 읽으며 비슷한 분위기를 느끼게 되었는데, 하나는 다소 엉뚱하고 황당하다 싶은 설정이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대부분 ‘아하~’하는 가벼운 탄성을 지를 정도의 반전이 준비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분위기가 자꾸 겹쳐지다 보니 자극에 둔감해진다고나 할까?  아니면 책을 덮고 나서 ‘재미있다, 기발하다’ 하는 정도의 느낌 외엔 남는 게 없다는 허무함에 질린다고나 할까?  일본 작가 특유의 묵직함이 덜한, 약간 간드러지는 듯한 문체의 글을 계속 읽다보면 좀 느끼해져서, 기름진 중국요리나 햄버거를 먹다가 김치 생각이 나듯, 우리 작가들의 글이 그리워지기도 했었다. 

나의 일본 단편 소설에 대한 별로 좋지도 않은 그런 편견들은 이 책을 앞에 두고 자꾸 읽기를 미루게 만들었는데, 책꽂이에서 그야말로 썩소를 흘리며 비웃는 듯한 표지 속 여자의 얼굴이 자꾸 눈에 거슬렸다.  에이, 빨리 읽고 책꽂이 제일 높은 칸으로 이사시켜야지, 하는 마음으로 집어 읽었다.

예상은 비슷하게 맞아 떨어졌다.  그런데 이 작가, 여지껏 내가 읽었던 일본 단편 소설들과 비슷한 냄새를 풍기면서도 어딘가 달랐다.  좀 더 현실적인 감각이 살아있다고나 할까? 표지의 여자가 흘리던 썩소처럼 현실을 뒤틀고 비꼬는 이 꽤 생생하게 전해져 왔다. 

연작 단편이라는 말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 책 안에는 ‘문학상’이라는 소재로 이어지는 네 편의 소설(‘최종심사’, ‘불꽃놀이’, ‘과거의 사람’, ‘심사위원’)이 있다.  문학상을 주최하는 규에이샤라는 출판사와 작가들 간의 속물스러운 심리와 냉정하고 차가운 사회의 일면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네 편의 각 작품 속에 등장하는 같은 인물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신데렐라 백야행’은 청순가련형 이미지의 신데렐라를, 야망을 위해 치밀하게 계산하고 야무지게 움직이는, 현실적인 섬뜩한 인물로 그려놓았는데 동화 신데렐라에서 왜 자기 딸이 모진 구박을 받는데도 신데렐라의 아버지가 새 부인에게 말 한 마디 못하고 등신처럼 굴었는지, 애가 둘 딸린 거야 새 가정을 이루는 데 결격요소가 되어선 안 된다 치더라도 성격상 치명적 결함이 있는 그 심술궂은 여자와 재혼을 할 정도로 그렇게 여자 보는 눈이 형편없었는지가 설명되는 걸 읽으며 즐겁기도 했다.  청순가련형의 이미지를 벗고 야멸친 이미지로 갈아입은, 지배당하지 않고 오히려 지배하는 신데렐라도 꽤 매력적이고 신선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임계가족’의 이야기는 아이를 키우는 부모의 입장에서 깊이 공감하며 기꺼이 맞장구를 쳐줄 내용이었는데, 인기 애니메이션과 연관된 캐릭터 상품들 때문에 골치 아팠던 기억이 떠올라 그야말로 내 얼굴에 썩소가 피어났을 터...
남성의 성적 욕망이 위협당하는 ‘임포그라’, 여성 신체에 대한 남성의 과도한 망상을 담은 ‘거대유방증후군’, 반대로 여성들이 갖고 있는 주목받고, 관심 받고 싶은 욕망을 그린 ‘스토커 입문’ 등 현대 사회의 일그러진 모습과 불합리한 인간 심리를 암팡지게 꼬집는 실력이 보통이 아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이 작가는 원래는 슬픈 이야기를 주로 쓰는 ‘눈물의 대가’란다.  그러니 나는 예외적 작품으로 이 작가를 처음 만나게 된 것인데, 그나마 제목이 낯익은 작품은 <붉은 손가락>이 전부다.  다음엔 이 작가의 주류(?)작품으로 다시 만날 기회를 갖고 싶다.  기왕이면 장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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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깊은 바다 속에 잠들어 있던 고래였다
수산나 타마로 지음, 이현경 옮김 / 인디북(인디아이) / 2007년 7월
평점 :
절판


 “누가 슈퍼맨인데?”
그때 내가 물었다.
“나.”
그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그리고 너, 다른 사람들은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바로 우리들이지.”  (p.79)

가슴 속에 부모와 세상에 대한 증오와 경멸, 분노의 불을 갖고 있던 발테르와 안드레아는 자신을 슈퍼맨이라고 인식한다. 난 이 책을 읽으며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눈, 그 시선의 변화를 돌아보았다.  발테르와 안드레아의 시선과 의식세계를 좇아가다보면 예전 나의 모습과 겹쳐지는 부분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작가는 그렇게 심도있고 날카롭게 한 인간이 자신의 내부와 외부 세계를 탐색하고 성장해가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었고 그것이 이 소설이 가진 힘이 아니었나 싶다.

내게도 치기어린 시절이 있었고, 세상의 부당함에 대해, 부모의 꽉 막힌 사고방식과 고집스런 삶의 태도에 대해 분노하던 때가 있었다. 그 때는 나도 나 자신을 예민한 감각으로 세상을 직관하는 능력을 가진 슈퍼맨쯤으로 여겼던 것 같다. 그 시절  세상은 싸워야 할 상대였고, 나는 세상에 대해 엄정한 심판을 내려야 했다. 세상은 이해 불가능한 혼돈이었으나 웃기지 않게도 나는 그 혼돈의 수수께끼를 풀고 승리를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지금 생각하면 플라스틱 장난감 칼 하나 들고서 세계대전을 막아보겠다는 무모함과 다를 게 없었다.

“분명 우리를 위한 가까운 길도 있을 거야.”
페데리코가 결론을 내렸다.
“그렇지 않다면 평등이란 게 얼마나 거지같은 거겠어? 하지만 여긴 흐르는 모래들로 이루어진 미묘한 구역이야.  냄새를 맡고 철저히 검사할 필요가 있어. (중략) 그 안에서는 이 모든 것이 불안정한 균형을 이루고 있어.  어느 날이든 그 균형은 깨질 수 있어.  (중략) 그 안에 들어가고 싶으면 네 자신의 꽃다발을 만들어야만 해. ” (p.185)

바깥세상의 혼돈은 생각보다 훨씬 더 심했다. 어떤 방법을 쓰든 패배가 자명해 보였다. 난 내가 들고 있는 것이 겨우 플라스틱 장난감 칼이었다는 것을 알아챘고 저 페데리코 같은 인물들이 오히려 더 큰 가능성을 가질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내 손에 쥔 것이 플라스틱 장난감이었다는 걸 확인한 순간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었을까?  무릎 꿇기? 패배 인정?  아니었다.  내게 플라스틱 장난감 칼밖에 쥐어주지 않은 누군가에 대한 원망이었다. 나는 속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장난감 칼을 놓지 않았다. 우습게도 그건 내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꽃다발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난 가끔 아버지가 말했던 ‘미안하다.’라는 말과 안드레아가 되풀이 했던 말을 되새겨 보았다.
“무엇 때문에 죽는 순간에 두 사람 모두 똑같은 말을 했을까요?”
수녀님이 대답했다.

“여정의 끝에 서 있을 때에서야 뒤에 있던 게 분명히 보이는 경우가 있지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생겨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빛으로 자신의 행동을 비춰 볼 수 있게 해 줍니다.  갑자기 자신이 잘못했다는 것을 깨닫지만 과거의 일들을 돌이키기에는 너무 늦어 버린 거예요.  그래서 미안하다고 하는 거지요.  아마 나 역시 그럴 겁니다.”  (p.340)

그래, ‘미안하다.’는 게 어떤 마음의 결을 타고 흘러나오는지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는 지점에 왔다.  언젠가는 꼭 ‘미안하다.’는 말을 해주고 싶은 사람도 몇 있다.  난 이레네 수녀님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레네 수녀님은 안드레아를 파멸로 몰고 간 것은 그의 지적 능력이었으며 안드레아가 자신을 현미경 같은 존재라고 믿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안드레아는) 날카로운 사고를 통해 자신이 전능하다고 느끼게 되었고 그 위에 숨겨져 있는 것들을 볼 수 있다고 확신했어요.  아마 부분적으로는 그랬을 거예요.  하지만 그 도구 위에 딱 달라붙어 있는 눈 때문에 자기 앞에 열린 건 아주 작은 조각의 현실뿐이라는 걸 깨닫지 못했죠. 망원경들은 사물을 가깝게 볼 수 있게 해주고 제한된 모퉁이를 확대시켜 주지요.  안드레아는 망원경으로 20도 각도의 현실을 보았는데 그 주위에는 340도가 있었지요.  결국 안드레아는 망원경에서 눈을 뗐을 때 그 총체적인 광경을 지탱해 낼 수 없었어요. 그는 참을 수가 없었지요.” (p.342)

이제 화해할 시간이 되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난 이제 나의 부모님보다 인생을 더 훌륭하게 살았다고 자신할 수 없게 되었다. 그 분들이 이루어 놓은 것보다 난 훨씬 더 적은 것을 이루었고, 그 분들보다 더 치열하게 삶을 살지도 않았다.  세상은 거칠었지만 장난감 칼을 내려놓은 나에게 세상살이에  필요한 것은 활활 타오르는 불도 차가운 얼음도 아니었다.  그저 따스한 온기, 너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온기였다. 어린 아기를 안았을 때 느낄 수 있는 그 순수의 온기, 연민, 애정 같은 것들... 

발테르는 허름한 수녀원에서 고백한다.
‘성장한다는 것은 그 상태를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되찾는 것이다.  우리들 본래의 눈빛을 되찾는 것이다.’(p.354)라고.  그리고 ‘나는 숨을 쉬고 성장을 하는 우주였다.’(p.355)고.  세상은 내 건너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내가, 우주와 내가, 모든 생명과 내가 함께 하는 그 어떤 것이라는 걸 알게 된 것일 터이다. 발테르의 방황과 고민은 세상에 대한 이해의 깊이를 더하고 숨겨진 의미를 찾기 위해 누구나 겪는 통과의례의 과정이었으리라.  그리고 안드레아가 사막에서 여우를 만나고, 살육의 현장에서 어린아이의 눈빛을 마주하고 괴로워했던 것은 지성만으로 살아지지 않는 세계를 발견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의 차가운 지적 판단 체계에 틈을 내고 올라온 연민과 동정의 싹 때문에 그는 그가 여지까지 확신했던 가치체계가 무너지는 혼란을 겪고 당황했던 것은 아닐까. 

충분히 방황하고 부족함 없이 고민하는 것이 세상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자 유일한 방법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 과정에서 이레네 수녀 같은 현자를 만나는 행운을 얻는다면 금상첨화겠지만!  이 서평의 글이 책에 대한 평가라기 보다 책을 통해 만난 나의 모습을 고백한 게 돼버린 것 같아 어쩐지 불편하다. 그러나 끝나지 않은 나의 삶에서도 방황과 고민 앞에 놓여있는 다른 이들의 삶에서도 그 마지막엔 ‘미안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겸손함과 ‘본래의 눈빛을 되찾는’ 지혜와 세상에 대한 연민과 타인의 대한 사랑, 구름 속에 가려진 어두운 허공이 아니라 작은 씨앗 속에도 가득차 있는 완전한 세계를 만나게 되기를 빌어본다. 

사족 ; 책 표지에 어둡고 흐릿한 색으로 그려진 물고기 떼에서 슬쩍 벗어난 물고기의 반짝이는 몸통 반쪽이 보인다.   물결을 타고 흘러가는 어둡고 흐릿한 물고기 떼 속에서 가끔은 슬쩍 빠져나와 빛나고 싶다는 생각이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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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고 또 누가 이 밥그릇에 누웠을까
김선우 지음 / 새움 / 2007년 8월
평점 :
품절


  날카롭게 후벼 파는 듯 했다.  상처 난 자리가 절절하게 아파 글썽이면서도 통증에 대한 묘한 애정을 느꼈다.  후벼 파는 듯한 작가의 글이 절망이나 냉소에 닿아 있지 않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약자에 대한 연민, 생명에 대한 사랑, 인간의 선한 가치에 대한 희망,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다시 일어나는 용기에 대한 믿음.. 그런 것들에 따스하게 닿아 있기 때문에 작가가 아무리 후벼 파더라도 그것이 ‘살아가기’를 위한 애정의 표현임을 의심치 않았다.

시인의 산문이라 하기에, 그럴 듯한 표현들로 삶은 아름답다는 식의 최면을 걸어주겠구나, 했다.  그래, 가끔은 최면에 걸리는 것도 나쁘지 않지, 싶었다.

그런데 이 시인은 최면은커녕 거의 반수면 상태에 빠져 있던 내 정신을 깨우는 데 거침이 없다.  굵직하게는 한미 FTA, 이라크 파병, 새만금 간척 사업 등등에 대한 비판의 날을 세우는데 난 그저 ‘맞아, 바로 그거야.’하면서 맞장구만 치고 있었다.  마치 가슴 속에 일어나는 생각들을 정리 못하고 어수선히 맥을 놓고 있는데 누군가가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고 하면서 일사천리로 정리하고 표현해 줄 때 느끼는 쾌감이랄까..  현직 대통령에 대한 마땅치 않은 심기를 드러내고, 미당 서정주에 대한 시인으로서의 자질을 거론하고, 노동자와 위안부 할머니, 지율스님과 농민들을 끌어안는 모든 글들이 시인의 명징한 언어와 표현으로 살아나 울고 웃고 애태우고 안타까워하는 듯 했다.

일상의 흐름을 타고 살다보면 어느 새 나도 모르게 동그란 조약돌이 되고 만다.  그걸 삶의 지혜라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다른 쪽에서 보면 냉철한 의식 없이, 내가 타고 있는 삶의 물결의 수질 오염조차 확인할 생각도 못하고 그저 둥글게 둥글게, 물 섞은 맥주 같은 인생이 되었다는 뜻일 수도 있다.  그러다가 점점 작아지고 마침내 모래처럼 부서져 버리면, 저항의 힘을 아예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 아닐까. 

이 책을 읽으며 다시 조금은 모난 돌이 되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예민한 촉수를 뻗어 내가 살아가는 강물의 오염을 느끼면 즉시 경고음이라도 한 번 삑~ 울릴 수 있는. 그 정도의 감각은 늘 갈고 닦아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이 아름다운 지구별에서 살다 가는 한 목숨으로서의 최소한의 값어치라도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산 인디고 서원의 아이들과 함께 꿈과 시에 대해 토론하는 글에서도 따스한 파동이 느껴진다.  그 파동의 마루와 골 사이를 오가다 보면 늘 가슴에 묵직하게 얹혀있던 죄책감 하나가 더욱 그 무게를 더한다. 아이들에게서 꿈을 빼앗고 경쟁을 심어준 죄, 아이들을 오로지 ‘학생’이라는 틀로만 바라보고 그들 안에서 좀 더 다양한 가능성을 찾아주지 못한 죄, 아이들의 눈에서 빛을 사멸시킨 죄, 아이들의 정신을 노예화시킨 죄...  더 넓은 품을 갖지 못한, 세심하고 여린 아이들의 마음결을 어루만져 줄 더 부드럽고 따뜻한 손을 갖고 있지 못한 이 어른들의 잘못이라고 부끄러워하며 고해소라도 찾아들고 싶은 심정이 되곤 했다.  

시인은 ‘살면서 얻어지는 작품들이 역시 저처럼 무언가에 목마른 사람들과 새로운 공감을 형성할 때, 내 작품이 누군가와 공명하면서 일상의 상처랄지 틈이랄지 하는 것들에 스미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될 때, 행복하죠.’(p.29)라고 했다. 
그렇다면, 시인은 지금 이 순간 충분히 행복하시기를.  공명의 울림이 아직도 이 가을을 흔들고 있으니.

 * 덧붙임 (2008.2.12)
시인의 <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이라는 시집을 읽다가 이 책과 같은 제목의 시를 찾아서 덧붙인다.

우리말고 또 누가 이 밥그릇에 누웠을까

이 집 한채는
쥐들의 밥그릇
바퀴벌레들의 밥그릇
이 방을 관 삼아 누운
오래 전 죽은 자의 밥그릇
추억의, 욕창을 앓는 세월의 밥그릇
맴고 짠 눈물 찐득찐득 흘려대던
병든 복숭아나무의 밥그릇
멍든 구름의 밥그릇
상처들의,
이 집 한그릇

밥그릇 텅텅 비면 배고플까봐
그대와 나 밥그릇 속에 눕네
그대에게서 아아 세상에서 제일 좋은
눈물 많은 밥냄새 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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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를 만들어 놓고는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아무 말 하지 말라는 건
예의가 아닌 줄 알지만 부디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지난 번에 덧글을 닫았다가 덧글 쓰기가 안 된다며 방명록에 자취를 남겨 주시던 님들 생각이 납니다.  익명의 공간에서 서평이랍시고 잘 쓰지도 못하는 글들을 끄적여대는 내가 덧글 기능을 없앤다고 누가 상관이나 하랴, 싶어 짧은 양해의 글 하나 올리지 않고 덧글을 닫았다가 알라딘 서재 기능에 오류가 생긴 것 아니냐는 오해까지 불러들인 적이 있습니다.  그 님들에게 죄송한 마음이 들어 다시 덧글을 열었더랬죠.

그런데 염치 불구하고 다시 닫습니다.
말하는 것보다 조용히 듣고 있는 것을 더 좋아하는 제 성격 탓이기도 하고 점점 낮잠이 없어지고 요구사항이 늘어가는 비니 때문이기도 합니다만 결정적으로 제 게으름때문이겠죠.  저보다 더 바쁜 나날을 보내고 계신 님들이 많을 텐데 저 혼자 엄살을 떠는 것 같아 면목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꾸벅~~

화단에 있는 단풍나무 끝이 빨개졌습니다.  놀이터 감나무에 매달린 감들이 점점 주황빛으로 물들어 갑니다.  싸늘한 바람에 으스스 어깨를 떨다가도 정신이 번뜩 깨어나는 느낌이 드는 가을입니다.  제 서재를 찾아주시는 고마운 님들께 이 가을의 아름다움이 낱낱이 찾아들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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