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고 또 누가 이 밥그릇에 누웠을까
김선우 지음 / 새움 / 2007년 8월
평점 :
품절


  날카롭게 후벼 파는 듯 했다.  상처 난 자리가 절절하게 아파 글썽이면서도 통증에 대한 묘한 애정을 느꼈다.  후벼 파는 듯한 작가의 글이 절망이나 냉소에 닿아 있지 않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약자에 대한 연민, 생명에 대한 사랑, 인간의 선한 가치에 대한 희망,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다시 일어나는 용기에 대한 믿음.. 그런 것들에 따스하게 닿아 있기 때문에 작가가 아무리 후벼 파더라도 그것이 ‘살아가기’를 위한 애정의 표현임을 의심치 않았다.

시인의 산문이라 하기에, 그럴 듯한 표현들로 삶은 아름답다는 식의 최면을 걸어주겠구나, 했다.  그래, 가끔은 최면에 걸리는 것도 나쁘지 않지, 싶었다.

그런데 이 시인은 최면은커녕 거의 반수면 상태에 빠져 있던 내 정신을 깨우는 데 거침이 없다.  굵직하게는 한미 FTA, 이라크 파병, 새만금 간척 사업 등등에 대한 비판의 날을 세우는데 난 그저 ‘맞아, 바로 그거야.’하면서 맞장구만 치고 있었다.  마치 가슴 속에 일어나는 생각들을 정리 못하고 어수선히 맥을 놓고 있는데 누군가가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고 하면서 일사천리로 정리하고 표현해 줄 때 느끼는 쾌감이랄까..  현직 대통령에 대한 마땅치 않은 심기를 드러내고, 미당 서정주에 대한 시인으로서의 자질을 거론하고, 노동자와 위안부 할머니, 지율스님과 농민들을 끌어안는 모든 글들이 시인의 명징한 언어와 표현으로 살아나 울고 웃고 애태우고 안타까워하는 듯 했다.

일상의 흐름을 타고 살다보면 어느 새 나도 모르게 동그란 조약돌이 되고 만다.  그걸 삶의 지혜라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다른 쪽에서 보면 냉철한 의식 없이, 내가 타고 있는 삶의 물결의 수질 오염조차 확인할 생각도 못하고 그저 둥글게 둥글게, 물 섞은 맥주 같은 인생이 되었다는 뜻일 수도 있다.  그러다가 점점 작아지고 마침내 모래처럼 부서져 버리면, 저항의 힘을 아예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 아닐까. 

이 책을 읽으며 다시 조금은 모난 돌이 되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예민한 촉수를 뻗어 내가 살아가는 강물의 오염을 느끼면 즉시 경고음이라도 한 번 삑~ 울릴 수 있는. 그 정도의 감각은 늘 갈고 닦아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이 아름다운 지구별에서 살다 가는 한 목숨으로서의 최소한의 값어치라도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산 인디고 서원의 아이들과 함께 꿈과 시에 대해 토론하는 글에서도 따스한 파동이 느껴진다.  그 파동의 마루와 골 사이를 오가다 보면 늘 가슴에 묵직하게 얹혀있던 죄책감 하나가 더욱 그 무게를 더한다. 아이들에게서 꿈을 빼앗고 경쟁을 심어준 죄, 아이들을 오로지 ‘학생’이라는 틀로만 바라보고 그들 안에서 좀 더 다양한 가능성을 찾아주지 못한 죄, 아이들의 눈에서 빛을 사멸시킨 죄, 아이들의 정신을 노예화시킨 죄...  더 넓은 품을 갖지 못한, 세심하고 여린 아이들의 마음결을 어루만져 줄 더 부드럽고 따뜻한 손을 갖고 있지 못한 이 어른들의 잘못이라고 부끄러워하며 고해소라도 찾아들고 싶은 심정이 되곤 했다.  

시인은 ‘살면서 얻어지는 작품들이 역시 저처럼 무언가에 목마른 사람들과 새로운 공감을 형성할 때, 내 작품이 누군가와 공명하면서 일상의 상처랄지 틈이랄지 하는 것들에 스미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될 때, 행복하죠.’(p.29)라고 했다. 
그렇다면, 시인은 지금 이 순간 충분히 행복하시기를.  공명의 울림이 아직도 이 가을을 흔들고 있으니.

 * 덧붙임 (2008.2.12)
시인의 <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이라는 시집을 읽다가 이 책과 같은 제목의 시를 찾아서 덧붙인다.

우리말고 또 누가 이 밥그릇에 누웠을까

이 집 한채는
쥐들의 밥그릇
바퀴벌레들의 밥그릇
이 방을 관 삼아 누운
오래 전 죽은 자의 밥그릇
추억의, 욕창을 앓는 세월의 밥그릇
맴고 짠 눈물 찐득찐득 흘려대던
병든 복숭아나무의 밥그릇
멍든 구름의 밥그릇
상처들의,
이 집 한그릇

밥그릇 텅텅 비면 배고플까봐
그대와 나 밥그릇 속에 눕네
그대에게서 아아 세상에서 제일 좋은
눈물 많은 밥냄새 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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