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혼불>을 읽다가 이런 문장을 만났다.
부엌이 어찌 단순히 밥을 짓고, 반찬을 만들며, 먹은 그릇 설거지만 하는 곳인가. 이곳은 성소였다. 한 집안의 생,사, 화, 복의 근원이 부엌이었다. 인간이 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그 입으로 들어가는 밥이 아니면 무엇으로 목숨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조왕신은 온 가족의 수명을 지켜 주고 다치거나 병들지 않게 살펴 주는 신이며, 불은 곧 재물을 뜻하는 것이라. 조왕님의 조화 여하에 따라 집안의 재운이 움직인다고 하였다.
이 부엌의 아궁이에 때마다 끼니마다 붉은 불길 가득하고 솥전에는 더운 김 뿜어나는 것이나, 불 꺼진 재 써늘히 쌓여 빈 솥단지가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것이 다 조왕신의 바른 뜻에 달린 것이었다.
효원은 정화수를 올리고 나서 아궁이 앞에 단정히 앉았다.
이때는 키녜나 돔바리나, 콩심이, 안서방네, 집안에 일하는 다른 사람 누구도 함부로 부엌을 기욱거려 들여다볼 수 없었다.
주변이 정결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효원은, 강모가 이 집을 떠나 만주로 갔다는 그 말을 들은 날로부터 하루도 빠뜨리지 않고 이 조왕에 정화수를 올린 다음에는, 갓 지어 푼 밥을 강모의 밥그릇에 담아, 조왕단의 정화수 앞에 놓았었다.
그 밥이 곧 강모였던 것이다.
먼 곳에 가서도 부디 배 곯지 말고, 무사히 돌아와 따뜻한 이 밥을 식기 전에 먹기 바라는, 마음 지극한 정성이 오붓하게 담긴 밥그릇. (5권 24쪽)
강모는 매안의 이씨 가문의 종손. 유약하고 섬세한 성품을 가진 그는 종가집 종손으로서의 책임과 의무가 너무 버겁다. 어린 나이에 효원과 혼인을 했지만 이미 마음에 둔 강실이에 대한 연민을 어쩌지 못하고, 넘어서는 안될 선을 넘어버리고 만다. 그리곤 강모는 도망치듯 만주로 떠나버렸다.
효원은 종가집 며느리로 시집왔지만 한번도 남편 강모의 다정한 눈빛을 받아본 적이 없고, 오히려 사람들로부터 강모가 저리 된 게 그녀 탓이라는 오해를 받는다. 분노와 원망을 감추고 의연히 그 자리를 지키며 묵묵하게 버티는 그녀는 메말라 보였다. 노심초사하거나 애달파하는 기미가 없어 참 단단하고 강한 사람이구나, 했는데 이 장면.
그저 지어미로서의 도리를 다하고자 하는 메마른 의무감이 아니라 갓 지은 따뜻한 밥 한 그릇을 앞에 두고 빌며, 남편의 둘 데 없는 마음에서 휘몰아치는 황량한 바람을 잠재우고, 그 빈 마음을 이 따끈한 밥 한 그릇의 정성으로 채우려는 효원의 모습이 아름답게 다가왔다.
저 문장을 읽고 다시 읽고.. 몇 번을 되풀이 읽었다. 자꾸만 마음에 와서 부딪치는 글. 왜 저 문장들에 마음이 끌릴까 곰곰 생각했다.
부엌이라는 공간에 대해 내가 너무 무심했더래서, 기도하는 성소의 자리로 승화된 부엌이 내게 약간의 충격과 신선함을 느끼게 한 걸까. 그 앞에서 난 반성의 의례가 필요했던 걸까. 깔끔하게 정리되지 못한 나의 주방을, 가족들 앞에 내놓는 밥상의 무례함을 돌아보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반성을 위해 저 문장들을 되풀이해 읽었던 건 아니다.
저 문장들은 상처받고 떠난 사람들을 부르고 있는 것 같았다. 떠난 사람들에 대해 정성을 다하지 못하는 우리 사회를 조용히 타이르는 것 같기도 했다. 우리는 떠난 사람들에 대한 정성어린 예를 다 한걸까. 우리는 무엇을 앞에 두고 '이것이 곧 그들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먼 곳에 가서도 부디 배 곯지 말고, 무사히 돌아와 따뜻한 이 밥을 식기 전에 먹기 바라는 마음, 마음 지긋한 정성이 오붓하게 담긴 밥그릇.'이라는 문장에서 억울하게 주인을 잃고 차갑게 비어있을 밥그릇들이 떠오른다. 돌아올 수 없다고 해서 그 사람 있던 자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닐 텐데. 밥 한 그릇만큼의 정성이 모자라 떠난 사람의 자리를 지켜주지 못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하긴 그 정성이 있었다면 그렇게 어이없는 일들은 아예 일어나지도 않았을 거다.
갓 지어 푼 밥을 오붓하게 담은, 따뜻한 밥 그릇 하나씩만 마음 속에 갖고 있었다면.
갑자기 '착한' 밥상을 잘 만들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정성껏 차린 따뜻하고 착한 밥상으로 우리 아이들 마음 속에 따뜻한 밥 그릇 하나씩 만들어주고 싶어졌다.
요리를 배우러 다녀야하는 걸까.
<혼불>을 천천히 천천히 읽고 있다. 어쩌면 여름이 지나도 다 못 읽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