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막내 개똥이는 친구와 어울려 뛰어놀기를 좋아하지만 학년이 올라갈수록 어울려 뛰어놀 친구들이 줄어들고, 그만큼 밖에서 노는 시간도 줄어든다. (아이들은 다 어디에 있는 걸까? 특히 여자 아이들은...?)
뜨거운 여름, 바싹바싹 다가오는 방학!! 집에서 혼자 놀기가 고역인 우리 막내 개똥이가 걱정이라 고심 끝에 몇 가지를 마련했다.
맨처음 장만한 것은 보드게임. 집에는 젠가를 비롯해 도둑잡기, 할리갈리, 다빈치코드, 카르카손, 인생게임.. 등이 있지만 새로운 흥미를 끌어내기 위해 루미큐브와 젬블로를 구입했다. 지금까지 구입했던 보드게임 중에 가장 성공한 것 같다. 큰애들도 재미있어 하고 심지어, 남편까지 가담해서 서너판의 게임을 이어가기도 했으니까.
개똥이는 젬블로보다 루미큐브를 더 부담없이 즐기는 것 같다. 게임규칙이 좀 복잡하지만 일단 숙지하고 게임을 시작하면 운이 많이 작용하는 게임이라 특별히 집중해서 머리를 써야 하는 건 아니라서 그런 것 같다. 하지만 젬블로는 게임규칙은 간단하지만 요리조리 머리를 굴려야 하는데, 큰애들과 남편은 젬블로를 더 재미있어한다. 나도 젬블로가 조금 더 재미있다.
장마가 시작되거나 아니면 폭염으로 나가 놀기 어려울 때에는 개똥이랑 내가 같이 즐기기 좋을 것 같다.
지난 페이퍼에서 소개한 적 있는 햇빛공방 덕분에 개똥이는 7살 무렵부터 바늘을 잡았다. 그렇다고 바느질을 해서 뭘 만들었다는 건 아니고 그냥 자투리 천에 자기 맘대로 홈질을 해대는 수준이었다. 큰애들 어렸을 때에는 바늘을 잡으면 큰일이 나는 줄 알고 식겁해 못하게 말렸었는데, 셋째에 이르고 보니 바늘을 잡고 뭘 하겠다고 해도 그냥 '그래, 해봐라~'하게 된다.
저 책은 얼마 전에 알라딘에서 반값할인이벤트를 하는 걸 보고 9,900원에 얼른 구입했다. 배송된 책을 살펴보니 열살 개똥이가 하기에 무리가 없어 보여 마음에 들었다. 책이 배송된 날 학교에서 돌아와 마침 놀 친구가 없어 심심해하는 개똥이에게 이 책을 꺼내주니 반색을 했다. 플라스틱 안전바늘이랑 실, 단추, 펠트천을 비롯한 약간의 천 등등이 착한 부록으로 들어있어서 당장 바느질을 시작하고싶은 의욕을 부채질하니 성격 급한 우리 개똥이는 참지 못하고 뭘 만들까 고민 시작.
우선 플라스틱 안전바늘로 홈질, 감침질, 박음질을 연습한 다음 (책 안에 구멍 뽕뽕 뜷린 바느질 연습용 페이지가 있다), 개똥이는 '다용도 주머니' 만들기에 도전했다. 마침 집에 예전에 가방 만들고 남은 천이 있어서 꺼내주고 책 뒤에 있는 도안을 오려주었더니, 개똥이는 서둘러 실 골라 오고 바늘이며 시침핀을 챙겨 꺼내왔다. 몇 번 실이 엉키고 마주 댄 양면이 어긋나 애써 박음질한 것을 뜯어내고 다시 하기도 했지만 우리 딸의 번듯한 첫 바느질 작품이 탄생했다.
작품완성으로 자신감이 붙은 개똥이는 방학 동안 책에 나와 있는 공룡인형과 부엉이 인형을 22개 만들어서 반친구들 전체에게 선물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우고 이번 주말에 당장 펠트천을 사러가잔다. 음. 어쩐지 이 손바느질 책 한 권만으로도 여름방학을 잘 보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좋은 예감이 든다.
그래도!! 혹시 몰라 알라딘 반값 이벤트에 부응해서 개똥이를 위해 장만한 또다른 책들이다. 이 책에 대한 개똥이의 반응도 매우 뜨거운 편. 큰딸까지 가세해서 책을 펼쳐놓고 개똥이랑 둘이서 한 쪽씩 맡아 여백을 채우기 바쁘다. 두 책의 내용은 비슷한데 <그림으로 상상력 키우기>는 그리기 활동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반해 <내 멋대로 미술놀이>는 그리기, 오리기, 접기 등등의 활동이 골고루 들어가 있다. 개똥이는 자기는 오리기는 귀찮다며 <그림으로 상상력 키우기>만 갖고 <내 멋대로 미술놀이>는 친구에게 선물했다.
틈틈이 도서관 캠프에 가족휴가, 영어학원캠프, 품앗이모임캠프.. 4번의 캠프와 여행이 끼어 있으니 이 정도면 충분히 이 여름을 무사히 보낼 수 있겠지. 혹여 좀 심심한 날이 있더라도 휴식으로 알고 참아주겠지. 그렇겠지.
나는 <혼불>을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의 초판이 1996년. 둘째가 태어나 정신없이 육아에 전념했을 시기다. 그 때부터 지금까지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면서도 10권의 대하소설을 시작하기가 부담스러웠는데 이제 아이에게 잔손가는 일도 줄었고, 잠시 모임이며 도서관 활동이 뜸한 시기로 접어들면서 용기를 냈다.
1권의 첫 장 <청사초롱>의 두 번째 페이지에서부터 난 이 작품을 쓴 최명희라는 작가가 부럽고 궁금하고 신기하게 여겨지기 시작했다. 마음에 드는 좋은 책을 만날 때마다 항상 드는 마음이지만, 이번에도 나는 왜 이 책을 좀 더 일찍 읽지 않았을까, 하고 나의 태만을 탓했다. 바로 이 문장들 때문이었다.
그저 저희끼리 손을 비비며 놀고 있는 자잘하고 맑은 소리, 강 건너 강골 이씨네가 살고 있는 마을에서 이쪽 대실로 마실 나온 바람이 잠시 머무는 소리, 어디 먼 타지에서 불어와 그대로 지나가는 낯선 소리, 그러다가도 허리가 휘어질 만큼 성이 나서 잎사귀 낱낱의 푸른 날을 번뜩이며 몸을 솟구치는 소리, 그런가 하면 아무 뜻없이 심심하여 제 이파리나 흔들어 보는 소리, 그리고 달도 없는 깊은 밤 제 몸 속의 적막을 퉁소 삼아 불어 내는 한숨 소리, 그 소리에 섞여 별의 무리가 우수수 대밭에 떨어지는 소리까지도 얼마든지 들어 낼 수가 있었다. (1권 8쪽)
이건 대실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대숲에 이는 바람에 귀가 젖어 그것들이 하고 있는 이야기와 몸짓을 다 눈치챌 수 있었다는 문장들 뒤에 나오는 대숲 바람에 대한 묘사들이다. 위의 저 문장들에 앞서,
그런데 이처럼 날씨마저 구름이 잡혀 있는데다가 잔바람이라도 이는 날에는 으레 물결 쏠리는 소리를 쏴아 내면서, 후두둑 비 쏟아지는 시늉을 대숲이 먼저 하는 것이었다. (1권 8쪽)
라는 표현도 나온다. 대숲에 이는 바람 하나 가지고 이처럼 다양한 표현과 문장들을 엮어내다니!! 첫 두 페이지에서 이렇게 감동시키면 앞으로 읽게 될 10권에 거는 독자의 부푼 기대를 어찌 감당하려고, 초반 문장에 이토록 치밀한 정성을 들였을까. 조심조심 문장들을 따라가며 천천히 천천히 공을 들여 읽고 싶어진다.
난 <혼불>로, 막내 개똥이는 바느질로 이 여름을 잊을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