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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인문학 - 현장의 인문학, 생활 속의 인문학 캠페인
구효서 외 지음 / 경향미디어 / 2011년 4월
평점 :
품절
기미상궁이 된 기분이었다. 잘 차려진 수라상에 오른 음식들을 충분히 음미하며 천천히 씹어 삼키지 못하고 음식에 독이 들어있지는 않은지, 혹시 상한 음식이 오르진 않았는지를 알기 위해 살짝 살짝 먹어만 보는 기미상궁. 이 책에 실린 12편의 글들은 12첩 반상이라는 수라상 못지 않게 탐식하고 싶은 글들이다. 사람의 자취를 담은 퇴계와 남명 조식, 추사 김정희, 다산 정약용과 김이재, 허균과 허난설헌, 그리고 역사의 흔적을 담은 서울 성곽, 강화도, 남한산성, 대관령과 강릉, 금강, 양동마을과 향단.... 하나하나 깊이 되집고 음미하고 싶은 사람들과 장소들이다.
하긴 이 책에서 자취와 흔적을 기록한 인물과 장소들이 그 삶과 역사의 의미가 크고도 깊으니, 이 짤막한 열두편의 글로 꼼꼼히 설명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갈증이 나고, 감질난다. 제대로 맛보고 싶은 마음이 연기처럼 솟는다.
편의상 사람의 자취를 담은 글과 역사의 흔적을 담은 글로 나누었지만 사람과 그 사람이 살아간 터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으랴. 정약용에 대한 글에서는 강진의 다산초당과 백운동계곡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남명 조식에 대한 글에서는 지리산을 그냥 넘어갈 수 없고 퇴계 이황은 그 유명한 도산서원을 빼놓고는 말하기 어려울 테니 말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반가웠던 글은 허균에 대한 글이었다. 2008년 겨울에 강릉에 들러 허균 허난설헌 생가를 찾은 적이 있었다. 녹은 눈 때문에 질퍽했던 흙마당과 지키는 사람 하나 없고 유난히 쓸쓸해 보이는 풍경들에 마음이 시려왔었다. 오죽헌이나 선교장에 비해 얼마나 볼품이 없었던가. 그런 기억 때문에 '남존여비 사회의 세 여성과 불우한 사람들의 벗, 허균'이란 제목의 글은 더더욱 마음에 와 닿았다.
허균 허난설헌 생가
'길 위의 인문학'이라는 제목처럼 어쩌면 그 '길'을 어느 정도 알고 있어야 감을 잡기 좋은 책이 아닌가 싶다. 내가 가 본적이 있는 허균, 허난설헌 생가, 다산초당, 강화도, 대관령, 지리산, 서울성곽에 대한 글은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는데 비해서 남한산성(여긴 멀지도 않은데 왜 지금까지 가볼 생각을 안했을까), 금강, 양동마을에 관한 글은 좀 감정이입이 힘들었다. 자료사진이 많이 실렸다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컸다.
사람의 무늬를 탐구하는 학문이 인문학이라고 들었다. 그런 의미라면 이 책은 사람의 무늬를 이해하기 쉽도록 잘 보여주는 것 같다. 이 책 서문에 인문학은 '재미와 유익', '감동과 느낌', '여유와 관조'가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 점에 대해서도 비교적 성공적이라고 평하고 싶다. 하지만 처음 이야기했듯이 기미상궁처럼 스을쩍 맛만 보고 지나간 것 같은 이 미진한 기분을 어떻게 해소해야 하나.
다산초당, 백운동계곡, 소쇄원, 지리산과 섬진강... 그 곳에 갈 수 있다면 미진한 기분 따위 훨훨 씻어낼 수 있을 것도 같은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