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이들을 보내놓고 한가득 쌓인 설거지거리를 보다가 언젠가는, 그래 언젠가는 조용한 아침이 올거야, 하는 생각을 했다.  내가 마신 커피 잔 하나, 내가 먹은 빵 접시 하나, 커피를 저었던 예쁜 티스푼 하나, 그것만 설거지해도 되는, 그런 조용한 아침.  아이들이 벗어 놓고 간 옷가지들을 주워담으며 언젠가는 일주일동안 빨래를 하지 않아도 빨래통이 다 차지 않는 그런 날도 올거야, 했다.  

너무 조용해서 오히려 쓸쓸한 아침. 그 때에는 아침에 한 청소가 다음 날 아침에도 유효할 거다. 나는 지금보다 훨씬 늙어 있겠지만 어쩐지 그런 아침이 기다려진다.   

어제부터 다시 요가를 시작했다. 근처 초등학교에서 한달에 만원만 받고 일주일에 두 번씩 요가 수업이 있다. 춥고 귀찮다고 겨우내 푹 쉬다가 오랜만에 운동이랍시고 했더니 어깨, 팔, 옆구리, 다리 뒤쪽이 땡기고 뻐근하다. 묵묵히 숨어 일하던 근육들이 난데없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나서는 것 같다. 근육이 그려진 인체의 그림을 앞에 놓는다면 내가 움직일 때마다 어느 근육이 움직였는지 다 짚어낼 수 있을 것 같다.  이렇게 해서라도 살이 조금이라도 빠진다면 이 고통이야 얼마든지 참아줄 수 있다. 그런데 오랜만에 뵌 요가 선생님은 나와는 대조적으로 겨우내 더 말랐다. 사람이 그럴 수도 있구나, 겨울은 당연히 살이 찌는 계절이라고 생각했는데, 저렇게 마를 수 있다는 게 신기하다.  

요가를 마치고 아파트 친구랑 같이 한살림에 들러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올봄 첫 민들레를 만났다. 보통 3월 15일 전후로 해서 그 해 첫 민들레를 만나는데,(작년엔 3월 17일, 재작년엔 3월 14일에 만났다) 올해는 정말 늦게 만난 셈이다. 그것도 보도블럭 틈새에서 푸른 이파리 하나 제대로 펼치지도 못하고서는 땅바닥에 납작 엎드린 채로 노란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그제 길상사 다녀오는 길에서도 그렇게 두리번대며 찾았는데도 보이지 않더니.  그래, 민들레 너는 그냥 일상의 늘 다니던 길에서 문득 만나야 더 반갑지.  

아파트 단지 앞산에는 개나리도 만개했다. 해마다 개나리 축제가 벌어지는 산인데, 이상하게도 한 번도 개나리 축제 때는 정작 산을 올라가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올해만큼은 꼭! 개나리 만개한 산에 아이 손 붙잡고 오르리라고 겨울부터 작심을 했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쌀알처럼 붙어 있던 매화꽃눈들도 하나씩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다. 이제 열그루 매화길을 지날 때마다 코를 들고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매화향을 흡입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계절이다.  

그런데 오늘, 며칠 전 부터 예고했던 비가 내린다. 일찍 집을 나서는 큰애들에게 우산을 챙겨주면서 절대로 비맞지 않게 조심하라고 이르고, 어린이집에 가는 막내에게 비옷을 입히고 우산을 씌우고 마스크까지 해줬다.  

꽃은 여기저기서 피고 볕은 따스한데, 자꾸만 이 봄이 불길하다.  

봄날의 조용하고 평화로운 아침을 바랐는데, 문득 불길하지만 않아도 좋겠다는 마음이 드는 거,
좀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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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11-04-07 1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해마다 민들레와 함께 맞닥뜨리는 봄이라니, 참으로 근사해요.
이 불길함이 안심으로 어서 바뀌어야 될 텐데요.

섬사이 2011-04-08 12:49   좋아요 0 | URL
봄이다, 싶으며 민들레가 기다려져요.
민들레를 봐야 정말 봄이 온 것 같구요.
그런데 올해 봄은 정말 심난하고 불길해서 속상해요.

세실 2011-04-07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딸내미가 벗어 놓은 옷가지, 어제 신던 스타킹 날리는거 보면서 우울하더라구요.
책상도 엉망이고요. 왜그리 정리를 못하고 사는지...원.
도서관 주변에 어느새 노오란 개나리가 활짝 피었어요!!


섬사이 2011-04-08 12:50   좋아요 0 | URL
우리애들도 그래요.
정말 정리정돈과는 담을 쌓았나봐요.
그런데요,
저도 그땐 그랬던 것 같아요.
뭐, 지금도 깔끔하게 사는 편은 아니예요.

순오기 2011-04-08 0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봄이건만.... 잔인한 봄이 되고 있어요.
아침에 노인복지관으로 한문공부하러 갔더니,
비 때문인지 지렁이들이 떼죽음을 이루고 있더라는 말을 듣고 불길하고 불안했어요.ㅜㅜ

섬사이 2011-04-08 12:51   좋아요 0 | URL
아, 지렁이들이..
정말 무서워요.
정부에서는 엑스레이 한 번, CT 한 번 찍는 정도의 방사능도 안된다고
안심하라는데, 지렁이는 엑스레이 찍으면 100% 죽는 건지 궁금해지네요. -.-;

꿈꾸는섬 2011-04-08 15: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섬사이님 요가 다시 시작하신 건 정말 잘 하신 것 같아요. 저도 요가 하고 싶었는데 시간이 안 맞아 못했거든요. 그래도 몸을 움직여주니 정말 좋더라구요.^^

섬사이 2011-04-08 16:29   좋아요 0 | URL
제가 생각해도 잘 한 것 같아요. ^^
아마 더 나이가 들면 하고 싶어도 못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해요.
가기 싫다가도 막상 다녀오면 잘 갔다왔다, 하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