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는 2007년에 읽고 리뷰를 올렸던 책이다. 읽었던 책을 다시 읽는 경우가 극히 드문 내가 이 책을 다시 들게 된 것은 순전히 도서관 책 읽기 모임에서 이 책을 읽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 왜 매일매일의 고통이, 우리가 이야기를 하는데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장면으로 거듭해서 꿈으로 번역되는 걸까?'
두 번째 읽는 이 책에서 이 문장이 마음에 걸렸다. '이야기'에 대한 갈망으로 레비는 부나의 화학실험실에서 글을 쓰기 시작한다. 그 '이야기'는 서경식 교수가 낸 책의 제목인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라는 질문으로까지 이어진다. 정말 그게 가능할까?
지금은 '이야기'가 넘쳐난다. 그 많은 이야기들 중에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는 것도 쉽지 않지만 '진짜 이야기'로의 접근을 막는 방해도 공공연하게 진행되곤 한다. 때론 '진짜 이야기'를 감당하기가 너무 어려워 스스로 귀를 막고 고개를 돌려버리기도 한다. 그런 와중에 누군가는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를 묻고 또 누군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기를 갈망하며 매일 고통스러운 꿈을 꾸는지도.
두 번째 책은 서경식 교수가 쓴 <디아스포라 기행>이다. <이것이 인간인가>가 2차세계대전 당시 유대인들의 비극을 다뤘다면 이 책은 근대 제국주의의 결과로 생겨난 현대 디아스포라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저자 자신이 재일조선인이라는 디아스포라의 삶을 살아가고 있어서인지 세상 곳곳에서 디아스포라의 흔적을 발견하고 그들의 지난한 삶을 통찰한다.
고통의 공감을 통해서만 연결되고 이해할 수 있는 세계가 있는 것 같다. 외부적인 충격-내가 계획하거나 의도한 바 없는-에 의해 내 삶이 전복될 정도로 일그러진 경험이 없는 나로서는 디아스포라들의 삶이 안타깝고 가슴 아프긴 하지만 그것에 전적인 공감이 이루어지진 않는다. 역사의 커다란 굴곡이 없지 않았지만 그 소용돌이의 중심부에 내가 있지 않았고, 그래서 부끄럽게도 내 삶을 평온하게 지켜왔던 것 같다. '운이 좋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 책에 등장하는 광주의 풍경 앞에서 '운이 좋았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비겁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이다.
프리모 레비를 비롯해 자살로 생을 마감하거나 죽임을 당한 사람들- 누스바움, 장 아메리, 파울 첼란 등- 에게 집요하고 악랄하게 강요된 고립과 고통이 자기 삶을 짓눌러 파괴시키는 것을 견뎌내기란 상상이 불가능할 만큼 힘들었을 것이다. 그들의 아픈 삶과 죽음이 한동안 마음 속에 끈적하게 남아 있었다.
그러다가 하루하루 아주 조금씩 읽어가고 있는 <개념-뿌리들>에서 이런 글을 발견했다.
'인간은 목적이라는 것을 떠나서 이해하기는 힘듭니다. 인간은 미래를 향해 살아가는 존재이고 인간의 존재 방식은 과거에서 그를 떠미는 원인들 못지 않게 미래에서 그를 끌어당기는 목적들에 의해 좌우되기 때문이죠.
....... 중략 .........
시간을 앞당겨서 미래를 본다는 것이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특징이에요. 자기 뒤에서 떠미는 기계적인 인과의 결과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시간을 앞당겨서 미래를 기대한다는 것, 그리고 그 미래에 대한 기대가 현재의 행동을 이끌어간다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특징이죠. 그것이야말로 인간을 살아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볼 수 있는 미래가 없었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기대할 수 있는 미래도 없었던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나를 움직이고 있는 것이 단순한 삶의 관성이라고 습관처럼 지껄이며 일상을 지루하다고 여길 수 있을지 몰라도, 그들에게는 과거와 미래 뿐 아니라 현재의 일상까지도 모두 참혹했을 것이다. 뒤에서 떠미는 기계적인 인과의 고리가 현재를 절망스럽게 만들고, 미래조차도 절망스러운 현재를 개선해주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면 죽음이 삶보다 가볍다고 느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이 인간인가>에서 프리모 레비가 우리가 들어주기를 갈망했던 이야기들이 <디아스포라 기행> 속에도 있었다. 서경식 교수의 책들 중에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 <나의 서양미술 순례>, <소년의 눈물>, <디아스포라 기행>을 읽었는데, 그의 책을 다 읽은 건 아니지만 내가 읽은 책들만 놓고 본다면 그의 시선은 음울하고 어둡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건 우리가 들어두어야 할 '이야기'들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제대로 잘 듣는 일'은 또 얼마나 어려운지...
경제, 경영, 투자, 재테크... 그런 것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 난 많이 둔하다. 국방부에서 이 책을 대대적으로 홍보해 줬을 때, 내가 이 책을 덜컥 사 버린 데는 읽고 싶다기 보다 이 책에 대한 응원(?)의 의도가 컸다. 게다가 '부자되기'를 위한 안내서가 아니니까, 세상을 '경제'라는 축으로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는 선한 의도의 책이라고 알고 있으니까.... 그러나 이 책은 내내 책꽂이에 꽂혀있었는데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를 또 덜컥 구입하면서, '순서'에 대한 쓸데없는 강박(?)에 밀려 펼치게 된 것이다. 어쩐지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를 먼저 읽어버리면 <나쁜 사마리아인들>을 영영 읽지 않을 것 같아서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며 '제국주의 식민 정책이 정말 끝난 것일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정치적 지배력은 사라졌다고 해도 경제적인 억압과 착취는 자본주의라는 명목아래 진행되고 있는 것 아닌가? 우리 귀에 들리는 이야기는 어디까지가 진짜고 어디까지가 거짓일까. 무엇이 우리 눈을 흐리게 하는 걸까.
도서관 책 읽기 모임 때문에 읽게 된 이 책에서는 세계사 속에서 커피가 어떻게 그 자리를 차지하며 어떤 단면들을 보여주는 지를 설명한다. 그 날 책 읽기 모임을 열면서 도무지 그냥 커피를 마시면 안될 것 같아서 모임 전날 나가 공정무역 커피를 샀다. 그런데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 이런 글이 나온다.
'하지만 커피에는 차나 술과는 다른 점이 있다. '내가 지금 한 잔의 커피를 마실 수 있다면, 세상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면서 혼자서 조용히 커피를 마시기 위해서는, 저 먼 중남미나 아프리카 어딘가의 세상에서 커피를 생산해야 하고(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것이 아닌) 그 커피콩을 무사히 우리에게 보내주는 일련의 산업구조(수출업자,중개인,선박회사,창고회사,가공업자,소매점,커피점 등등)가 트럭 한 대, 사람 한 명에 이르기까지 성실하게 기능하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따라서 커피를 마시는 행위는 차나 술을 마시는 것과는 달리 지극히 '부자연스러운' 일이며, 인공적이고 문명적인 행위이다. 그것은 유럽열강의 식민지 지배라는 오랜 과거와 원활한 세계교역의 존재를 전제로 할 때 비로소 가능한 행위이다.'
나는 위선적인 얼굴을 하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신자유주의무역과 제국주의 쪽에 서 있었던 건 아닐까, 하는 섬뜩한 생각이 들었다. 그 '부자연스러운' 커피를 잊지 못해 난 오늘도 커피 한 잔을 마신다. 언젠가는 끊고 말거야, 라고 중얼거리면서.
며칠 전 선물받은 이 책도 읽었다. 작고 두껍지 않은 책인데 글이 주는 중량감은 꽤 묵직했다. 맨처음의 폭력은 어디서, 누구에게서 시작된 걸까, 하는 생각의 꼬리가 길게 남았다. 어린 바르트와 거친 베트예만은 어쩐지 서로 닮았다. 둘 다 너무 외롭고, 지독히도 운이 없고, 미숙하고, 어둡고, 슬프고, 춥다. 행복한 결말을 빌어주고 싶지만 차갑게 굳어버린 감정은 그렇게 쉽게 따뜻하게 데워지거나 풀어지는 게 아니라는 걸 안다. 용서와 상처는 그렇게 쉽게 덮어지거나 지워지거나 말끔히 없었던 듯이 아물지는 않는다. 그런데 그 위로 터지는 폭죽이라니... 아마도 그들은 계속 슬프고 외로울 것만 같다. 1월 0일은 계속 될 것이고 그들은 계속 맨손일 것이다. 무력한 사람들이 기를 쓰고 악을 품고 주먹을 휘두르는 모습은 또 얼마나 안쓰럽고 슬픈가.
1월에 내가 본 영화 다섯 편이다. 한 달 동안 이렇게 영화를 많이 보기는 아마 처음이 아닐까 싶은데... 한 번 보기 시작하니까 줄줄이 연이어 보고싶은 영화들이 마구 이어지는 신기한 경험을 하고 있는 중이라 한동안은 영화를 많이 보게 될 것 같다.
<새미의 어드벤처>는 꼬맹이딸과 함께 가서 봤다. 3D로 예매해서 봤는데 3D영화가 어린아이들에게는 사시가 될 위험이 있다며 남편이 질색을 했다. 이번 딱 한 번만 3D로 보겠다고 하고서 본 영화다. 그런데 꼬맹이딸이 보고 싶어하는 <라푼첼>이 또 3D다. 이건 어쩐담???
<조선명탐정>은 동네 엄마들이 보러가자고 해서 아침 일찍 씨네시티에서 봤다. 진지한 무게감을 덜고 코믹의 가벼움을 더한 김명민이 낯설면서도 "역시 김명민"이라며 고개를 끄덕이게 하고 김명민의 콤비인 오달수 보는 것 또한 즐겁다. 영화는 큰 웃음이나 큰 의미를 기대하지 않는다면 나쁘지 않은 영화였다. 식상한 웃음코드와 코믹을 의식해서인지 지나치게 과장했다 싶은 설정들도 종종 눈에 띈다. 코믹물이니까 가벼운 마음으로 봐줘야 했다. 김명민과 오달수, 퓨전사극의 독특한 소품과 장치들을 가볍게 즐겨주면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