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마당] 아줌마들의 책읽기/신동호 시인   

2호선 왕십리역에 내리면 소월공원이 자그마하게 있습니다. 소월이 이 부근에서 서울 생활을 하며 사랑의 변주를 울렸기에 기념이 될 만한 공간이 되었습니다. 여기, 왕십리역 9번 출구로 나와 한양대 쪽으로 조금 걷다 보면 큰길 가에 소월공원만큼 조그만 도서관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크레파스로 그려놓은 조각그림들 위편으로 간판이 걸렸네요. 가끔 커다란 플라타너스 그늘에 가려 보이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만 자세히 보면 ‘책읽는 엄마 책읽는 아이’라 적혀 있습니다.  

어떤 인연이 닿아 여기, 아이들이 올망졸망 앉아 소란을 피웠을 조그만 의자에 쪼그려 두달 동안 아줌마들과 책을 읽었습니다. 소녀 같고 때론 수다스럽기도 한 아줌마들과 어울리면서 자주 얼굴을 보았는데, 이상하게도 이름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어느 날엔 목욕가방을 들고 와서 ‘목욕탕 엄마’, 생물학과를 나왔다고 해서 ‘생물과 엄마’ 하는 식으로 마구 이름을 붙여 불렀습니다.  왠지 그 소박한 영혼들이 새로운 세상과 만나는 걸 방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의 자신과 거리를 두어 보는 것이 독서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다른 세계로 함께 여행하고픈 욕심도 들었습니다.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로 시작한 책읽기는 ‘닫힌 우물’의 은유로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고향집 우물은 어머니의 싱싱한 자궁이 아니었을까. 그것이 막혔다는 건 곧 남성중심 사회의 폭력성을 보여주는 건 아닐까.  

그저 평범한 일상과 씨름하던 아줌마들은 영화 ‘카모메 식당’에 가서는 일탈에 대한 대리만족을 발견한 모양이었습니다. 의무감과 관계의 짐을 벗고픈 우리시대의 아줌마들. 그러나 아줌마들은 주인공 ‘사치에’의 반복되는 수련 장면을 통해 진리를 발견합니다. ‘지독한 일상을 견디며 지키는 사람에게 비로소 일탈은 의미 있다.’  

설거지와 빨래, 이 지루한 반복을 견뎌내는 아줌마들의 힘이 변화의 원동력임을 옆에서 가만히 배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날 아줌마들이 코치하더군요. “‘오늘 저녁 먹고 들어와?’라는 통화가 무슨 뜻인지 아세요?” “맛있는 거 해놓겠으니 빨리 오라는 뜻?” 그게 아니랍니다. 일찍 들어오지 말라는 뜻이랍니다. 일상을 지키면서 동시에 일상을 살짝 벗어나는 아줌마들의 대화법인 게지요. 
 

며칠 전 여전히 책읽기를 이어가는 아줌마들의 독서 후기를 보게 되었습니다. ‘이제 책의 겉모양뿐 아니라 책 속까지 좋아지기 시작했다.’네요. 셰퍼와 배로스의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이 그리 만만한 책이 아님에도 ‘좀 시시하다.’는 반응도 있었습니다. 교과서적 지식을 벗어나 2차 세계대전에 대한 배경지식의 욕구를 표현한 아줌마도, 더더욱 놀라운 건 ‘세계에 대한 자기 인식과 해석을 목표로 삼았다.’는 그럴싸한 말을 한 아줌마도 있었습니다.  

여기까지 오기에 어려운 몇 고비를 넘었습니다. 마이클 폴란의 ‘욕망하는 식물’이 처음의 난관었습니다만, 자연세계만의 질서를 읽으며 막막한 시간의 연결선상에 놓인 자신을 발견한 건 놀라운 깨달음이었습니다. 코엘류의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는 조금 쉬어가려는 책이었지만 아줌마들은 거기에서 ‘똑같아지지 않으려는 노력’ 즉, 남들과 같은 건 편리하겠지만 결국 ‘나’를 잃는 것이라는 무거운 진리에 다가섰습니다.  

압권은 다 읽은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이었습니다. 괴테가 너무 잘난 체한다는 농담으로 시작된 이야기. 그러나 자기가 느끼는 대로, 자신 있게 떠들기가 괴테의 잘난 척 비법이라는 인문학의 요체로 성큼 다가섰습니다. 

 이불 위에 배를 깔고 책읽기 좋은 계절입니다. 밤도 깊고요. 많이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의 눈으로 세상을 보기 위해 ‘책읽는 엄마’가 돼 보세요. 세상의 모든 책들이 자신을 제 마음대로 읽어주길 바라고 있습니다. 용기를 가지시고요. 소월의 시를, 읽는 사람의 숫자만큼 다르게 해석하는 시대. 그날 ‘가도 가도 왕십리’ 내리던 비도 그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2010-12-23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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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1-01-05 2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독서 모임을 멋지게 소개했네요!
왕십리에 소월공원도 있군요~^^

섬사이 2011-01-07 12:16   좋아요 0 | URL
소월공원은 '소월아트홀'이라고 불리는 공연,문화강좌 등이 열리는 건물의 앞마당 같은 분위기에요.
근처 노인분들이 모여 바둑,장기를 두시거나 어린아이들이 뛰어놀거나
비둘기들이 무리지어 날아다니는 그런 곳이지요..
글쎄요, 소월의 작은 흉상과 시비 하나가 있긴 하지만
'소월'은 각자의 마음 속에서 느껴야 하죠. ^^

세실 2011-01-05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정감가는 글이예요. 아줌마들이 나아가야 할 바람직한 방향이죠^*^
참으로 멋져요!!!

섬사이 2011-01-07 12:18   좋아요 0 | URL
아줌마들이 나아가야 할 바람직한 방향, 그렇죠? ^^
이런 모임들을 통해서 아줌마들이 '행복한 엄마'들, '외롭지 않은 엄마'들로 변화할 수 있다면 참 좋을 것 같아요.
그래야 아이들과 남편도 덩달아 행복해지지 않을까 싶어요.

꿈꾸는섬 2011-01-11 2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섬사이님이 참여하고 계신 독서모임이군요.^^
너무 멋져요. 아줌마들이 책읽고 이야기 나눌 수 있는 공간이 얼마나 될까 싶어요. 많이 부러워요.^^

섬사이 2011-01-13 13:09   좋아요 0 | URL
처음 해보는 책읽기 모임인데,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좋은 점이 많아요.
올해에는 모임이 조금 더 그 영역을 확장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기대하고 있어요. 신동호 선생님이 신경을 많이 써주시는 것도 책읽기 모임에 큰 힘이 되고 있구요.
애들 학교나 지역 도서관에서 엄마들을 위한 책읽기 모임 같은 걸 만들어서 활성화될 수 있게 지원해준다면 참 좋을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