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14일 목요일 10시. 10명의 주부들이 모여 앉았다. 함께 이야기를 나눌 작품은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의 영화 '카모메 식당'
작년에 한 번 본 영화인데, 무척 담백하고 따뜻한 느낌이었다. 핀란드 헬싱키에서 주먹밥을 주메뉴로 하는 '카모메 식당'을 운영하는 사치에가 각자 아프고 답답한 과거를 가진 듯한 미도리, 마사코를 만나면서 일어나는 이야기들이 잔잔한 감동을 준다.
내공만땅의 저 따뜻한 밥상
내가 가장 인상깊게 본 장면은 사치에가 미도리를 집에 초대해서 밥을 차려주는 장면이다. 사치에가 차려준 밥상을 바라보다가 울먹이는 미도리를 보며 나까지 울컥했다. 언젠가 아프고 지치고 외로울 때 누군가 저렇게 따뜻한 밥상을 내 앞에 놓아준다면, 나도 미도리처럼 울먹이지 않을까. 마음 속까지 저 밥의 온기가 밀려들어와 '에이, 까짓거, 다 잊고 다시 살아줄테다!'하고 다시 힘을 내게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말라깽이 엄마와 살찐 고양이
영화는 사치에의 독백으로 시작된다. 어린 시절 이야기를 꺼내면서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 자기는 울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하다가 잘 먹어주는 살찐 고양이가 좋았고, 그 고양이가 죽었을 때 더 많이 울었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엄마는 말라깽이였다고. 아마 사치에의 엄마는 아이의 응석을 받아주거나, 감정을 이해하고 받아주는 넉넉한 마음을 가진 엄마가 아니었나보다. 살찐 고양이와 말라깽이 엄마의 대조되는 이미지는 핀란드 해변의 살찐 갈매기와 카모메 식당을 찾은 말라깽이 두 여자 미도리와 마사코로 연결되는 것 같기도 하다. 심지어, 사치에마저도 말라깽이가 아닌가. 어딘지 까칠할 것만 같은 세 여자가 만들어내는 따뜻한 이야기. 그건 어쩌면 까칠했던 삶과의 악수, 용서, 화해같은 건 아닐까.
마사코의 잃어버린 짐
항공사의 실수로 짐을 잃어버린 마사코는 사치에와 미도리가 "짐에 중요한 것들이 들어 있을 텐데.."하고 걱정하자 "글쎄요.. 가방에 뭐가 들어있을까요?"하며 잃어버린 짐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우리가 중요하다고 여기며 끌어안고 살아가는 것들이 정작 쓸모없는 것들일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 마사코가 찾은 여행가방을 열었을 때 마사코는 그 안에서 핀란드 숲속에서 땄던 황금빛 버섯들을 본다. 아니, 아마도 실제로는 가방을 열자마자 돌아가고 싶지 않은 지나간 삶의 자질구레하고 너저분한 파편들과 마주했을 것이다. 그것이 너무 추레하고 보잘것없어서, 오히려 자기가 선택해야 할 새로운 삶이 황금빛으로 환하고 명확하게 보이지 않았을까. 핀란드의 거대한 숲 속에 들어가 황금빛 버섯을 딴다는 것. 마사코는 지금까지와의 삶에서는 찾을 수 없었던 중요한 것을 발견하고 선택했다는 뜻일게다.
시인선생님과의 현문우답
모두들 미도리, 마사코, 사치에처럼 훌쩍 떠나고 싶다고 했다.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 새롭게 시작하는 영화처럼 말이다. 영화를 보며 '일탈'에 대한 대리만족을 느꼈다고도 했다. 의무감과 관계에 대한 짐에서 벗어나고 싶다고도 했다. 가족이 등장하지 않아서 영화가 더 편안하게 느껴진다고도 했다. 오가는 이야기를 듣고 계시다가 선생님이 물으셨다.
"합기도 수련 장면, 수영장 장면이 왜 자꾸 반복해서 나오는 걸까요?"
"자기를 다져간다는 의미 아닐까요?" "어릴 적 끊지 못한 습관, 일상 같은 거겠죠." "아버지와의 추억이요." "감독이 일본 사람이니까 일본 문화를 보여주는 것 같은데요." "수영장이 카모메 식당을 대변한다고 생각해요. 텅 비었다가 나중엔 사람들로 꽉 차잖아요." 등등의 대답.
선생님은 그 장면에서 "일상을 다 벗어나 버리자는 게 주제가 아니라 지독한 일상을 견디며 지키는 사람만이 일탈과 변화가 의미 있으며, 그래서 지독한 일상 속에서의 변화가 일탈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고 하셨다. (이래서 선생님이 중요한 거다)
"마사코가 핀란드 여자네 집에 가서 그 여자의 하소연을 다 들어주는 장면이 있었죠? 마사코는 핀란드 말을 모르는데도 그 여자의 말을 다 이해한 것 같았어요. 그럼 '말'이란 어떤 걸까요?"
다들 '말'의 덧없음에 대해서, 또는 표현의 중요성에 대해서, 의사소통의 중요한 수단이라는 점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선생님은 '말은 '나'를 표현하는 동시에 '나'를 감출 수 있는 수단'이라고 하시면서 말에서 더 확장하여 'Text는 폭력이다'라는 말을 인용하셨다. 곧이곧대로 믿지 말고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의문을 가지라고. 아마도 책 앞에서든 영화 앞에서든, Text 앞에서 주눅들고 자신없어 하는 우리들에게 용기를 주려는 말씀인 것 같았다.
"이 영화에서 음식이 많이 나오는데, 음식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주부들이라 음식, 요리에 대해서는 할말들이 많다. 광합성을 꿈꾸는 나 같은 사람부터 음식을 만들고 먹는 것을 즐기는 사람까지. 선생님은 "음식을 대상화시키지 말라'고 하시면서 '음식을 먹는 행위는 생명과 생명이 만나는 중요한 행위'라고 하셨다. 생각해보면 밥상을 나누면서 인간관계가 더욱 편안해지곤 했다. 집으로 초대하거나 아니면 초대받아서 '그 집 밥'을 함께 먹었을 때는 더욱 그렇다. 확실히 광합성만으로는 그런 효과를 얻기가 힘들 것 같다. 그런 효과도 다른 생명이 희생된 밥상을 나누면서 일종의 공범자로서의 유대가 생겨나기 때문일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했다. '남이 차려주고 내가 치우지 않아도 되는 밥'이 가장 맛있다는 데 만장일치하던 우리들은 그저 '선생님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하는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일밖에...
모임이 끝나고 나서 시인선생님은 우리에게 점심을 사겠다고 하셨다. '남이 차려주고 내가 치우지 않아도 되는 밥'을 먹여주겠다시며. 카모메 식당으로는 차마 가지 못하고 대신 근처 곱창집에 몰려가서 모듬구이 두 판을 시켜서 냠냠, 맛있게 먹었다.(선생님, 고맙습니다~) 선생님의 훌륭한 가르침과 맛있는 점심에 보답하는 의미로 우리는 여자가 전화해서 "오늘 저녁 먹고 들어와?"하고 물을 때의 속뜻을 가르쳐 드렸다. 절대로 일찍 들어오라는 의미는 아니라고.
다음 모임에선 <새벽 세 시, 바람이 부나요?>를 가지고 이야기를 나눈다. 다른 엄마들, 오랜만에 이런 책을 읽으면서 가슴이 좀 설레지 않았을까.